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56
156
그러면서 이동철은 안주머니에서 인출 카드가 함께 들어가 있는 통장 3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5억씩 들어 있는 대포통장입니다. 비밀번호는 1111이니 필요하실 때 쓰십시오.”
“뭘 이런 걸 다.”
“일이 모두 끝나면 같은 액수를 한 번 더 통장에 넣어 드리겠습니다.”
이어진 이야기에 세 사람은 탐욕에 찬 눈빛을 번들거리면서 통장을 집어 챙겨 넣었다.
술잔을 비워 후끈 달아오른 열기를 조금 식힌 김범진이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이동철을 보면서 물었다.
“사이즈가 큰 게 아무래도 이 전무님이 단독으로 일을 벌이시는 것 같지는 않고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그러자 구경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듣기로는 태일 그룹 셋째 아들이 손을 대는 작업이라고 하던데…….”
그냥 아니라고 딱 잡아뗄까 하던 이동철은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는 분위기인 데다 재벌가 일원인 김인철이 관련됐다고 하면 상대가 더욱 신뢰를 할 것이었기에 살포시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지으면서 말했다.
“물산에 있을 때부터 제가 그분을 모셨지요.”
아주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납득한 세 사람을 두고 이동철은 벨을 눌러 웨이터를 호출해 나갔던 아가씨들을 다시 데리고 오라 했다.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인 웨이터가 나간 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여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 왜 이렇게 분위기가 축 처져 있어요~.”
“역시 우리 없으면 안 되죠?”
제 자리를 찾아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앉은 여자들이 애교를 피우며 몸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술잔이 비었네. 제가 채워 드릴게요.”
나긋한 목소리로 술잔을 뺏어 가는 손짓에 이동철이 옆을 보았다.
긴 생머리에 청순하게 생긴 얼굴이 마치 순진한 여대생처럼 보였으나 착 달라붙는 옷이 육감적인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딱 내 취향이로군.’
이동철이 가까이 와 보라며 팔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기대는 아가씨의 몸에서 은은한 향수 냄새와 함께 살 내음이 훅 끼쳤다.
“못 보던 얼굴인데, 신입이야?”
“아뇨. 다른 가게에서 일하다가 스카우트돼서 왔어요.”
“흐음.”
엄지손가락으로 드러난 살갗을 살짝 쓰다듬으니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감촉이 제법 괜찮았다.
“자, 여기요.”
이동철은 여자가 채워 준 술잔을 들고 단번에 꿀꺽 삼켜 버렸다.
놀란 듯 동그랗게 뜬 눈을 보니 기분이 좋아진 그가 어깨며 허리를 추근거리던 손길을 더욱 대담하게 놀렸다.
어차피 다른 이들도 각자 파트너하고 낄낄거리며 놀기 바빴으므로 두 사람이 진득하게 달라붙든 말든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에 마음이 동한 이동철이 턱을 치켜들게 하고 입술을 가져다 댔다.
“으응.”
달콤하게 흘러나오는 숨결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렇게 잔뜩 입술을 비비던 이동철의 손이 얇은 옷 속으로 파고들어 와 가슴 쪽으로 슬금슬금 올라가려던 찰나, 여자가 숨이 막힌다며 그의 어깨를 밀었다.
“하아. 뭐야?”
이제 막 꼴리던 참인데, 하고 이동철이 눈살을 찌푸렸다.
“성질도 급하시긴. 여기서 끝까지 할 수는 없잖아요.”
하기야 아무리 급해도 다른 사람들도 다 있는 자리에서 거사를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머지는 2차에서…… 네?”
여자가 속삭이는 목소리에 이동철은 금방 기분이 풀어져, 거의 반쯤 쓰러트릴 기세였던 몸을 바로 하고 삐뚜름하게 소파에 기댔다.
“그래.”
언제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여자이니 조급하게 굴 이유가 없었다.
나중에 있을 즐거움을 기대하면서 느긋해진 이동철의 모습에 여자가 생긋 웃고는 슬쩍 엉덩이를 떼었다.
“어디 가?”
“전무님 덕에 화장이 다 지워졌단 말이에요. 잠깐 립스틱만 바르고 금방 올게요.”
그러면서 립스틱이랑 손거울 하나 정도만 넣어도 꽉 찰 것처럼 손바닥보다도 작아 보이는 파우치를 들어 보였다.
“그냥 여기서 해.”
“아이, 맥주를 많이 마셔서 화장실도 가고 싶단 말이에요. 꼭 여자 입으로 부끄러운 말을 꺼내게 하신다니까.”
이동철은 여자의 애교 섞인 말투에 피식 웃으면서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손으로 꽉 쥐었다가 놓았다.
“쯧. 얼른 다녀와.”
“네에~.”
착한 학생처럼 고분고분 대답한 여자는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룸을 빠져나와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녀는 가게 아가씨들이 사용하는 대기실에서 재킷 하나를 들고 나와 어깨에 걸친 채 뒷문 쪽을 향했다.
“어, 어디 가?”
“담배 피우러.”
중간에서 마주친 웨이터에게 가운데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대꾸한 그녀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직원들이 짐을 옮기거나 쓰레기를 버릴 때 사용하는 장소였으므로 가끔씩 그녀처럼 담배를 피우러 오는 사람 말고는 행여나 누군가를 마주칠 일이 없는 곳이었다.
싸늘한 밤공기에 어깨를 움츠리고,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는 길고양이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빨리 돌아가야 하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 어둠 속에서 불쑥 사내가 한 명 나타나 앞으로 다가왔다.
겁이 날 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오히려 발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가며 짜증을 부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자리 오래 비우고 있으면 좋은 소리 못 듣는 단 말이에요.”
“약속한 건 들고 왔나?”
물음에 대꾸도 없이 제 할 말만 하는 사내에게 그녀가 날카로운 눈초리를 날렸다.
“하아, 여기요.”
작은 파우치에서 꺼낸 것은 새끼손가락 마디만 한 은색 녹음기였다.
“잘했어.”
사내는 녹음기를 받아 들곤 이어폰을 꽂아 즉석에서 내용물을 확인한 뒤에야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돈이나 줘요. 어휴, 이런 스파이 같은 짓 두 번은 못해 먹겠네.”
“자.”
사내가 척 보기에도 두툼한 돈 봉투를 건네자, 그녀는 재빨리 속을 훑어보더니 재킷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참, 그리고…… 분위기를 보니 2차까지 가야 할 것 같은데. 당연히 그 보수도 주는 거죠?”
“거기까지 하라고 하진 않았어.”
“그럼 어떡해요. 옆에 착 달라붙어 있으라고 한 건 그쪽이잖아요.”
어차피 이동철에게서 화대를 받긴 할 테지만, 이중으로 돈을 뜯어내겠다는 속내가 그대로 드러났다.
“뭐, 상관없나.”
사내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면서 말했다.
“그 대신…… 입단속 잘해.”
귓가에 와 닿는 사내의 목소리가 서늘하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팔을 문지르며 여자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알고 있다니깐…….”
이런 사내랑 오래 엮여서 좋을 것 하나 없다고, 본능적인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가 구태여 협박하지 않아도 오늘 일은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워 버릴 생각이었다.
“으, 기분 나빠.”
따뜻한 실내로 돌아오니 차갑게 굳어 있던 손발 끝에 온기가 돌아왔다.
돈뭉치를 핸드백에 집어넣고, 사물함의 열쇠까지 단단히 잠근 그녀는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한 기색으로 룸에 들어섰다.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화장실에 줄이 길어서……라며 변명을 주워 삼킨 그녀는 쿵짝거리는 음악 소리와 현란한 조명 빛 아래에서 다시 순진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파트를 나온 혁권은 미끄러지듯 다가와 앞에 선 자동차 차 문을 열고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담배를 줄이려고 먹기 시작한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자 운전대를 잡은 하킴이 힐끗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제저녁에 이동철이 수상한 만남을 가지는 걸 녹음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데…….”
“직접 들어 보시죠.”
콘솔 박스를 연 하킴은 이어폰이 둘둘 말려 있는 MP3 플레이어를 뒤로 내밀었다.
그는 이어폰을 풀어 양쪽 귀에 꽂고는 바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어제 뉴욕 VIP룸에서 이동철과 펀드 매니저들이 나눴던 대화가 고스란히 다 흘러나왔다.
한참동안 가만히 녹음된 내용을 듣고 있던 혁권은 이어폰을 빼내면서 하얀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TC인터내셔널 주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걸 알고 있었으나 자칫 타이밍을 조금만 놓친다면 지금까지 벌인 일들이 다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방갑수를 통해 고용한 이들을 동원해서 김인철과 이동철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큰 것이 걸린 거였다.
“제대로 한 건 올렸군. 이걸 누가 녹음했지?”
“술자리에 동석한 여종업원입니다.”
“그래?”
손가락 끝으로 차문에 붙어 있는 팔걸이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혁권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중에 쓸데가 있을지 모르니까 아무도 몰래 그 여종업원의 신병을 확보해 놓으라고 해.”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으며 그는 MP3 플레이어를 안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출근 시간이 지난 때였기에 막히는 것 없이 고속도로를 내달린 자동차는 곧장 인천 부두에 도착했다.
자동차에서 내린 혁권은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면서 지나가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멀리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으로 연결되는 인천대교가 바다를 가로지르며 우뚝 서 있는 가운데 야적장에 가득 쌓여 있는 컨테이너 박스를 크레인들이 거대한 화물선에 옮겨 싣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위이잉.
쿠웅.
그렇게 얼마쯤 부두 풍경을 구경하며 서 있자 멀리서 양복을 입은 배도환이 전에 봤던 직원과 함께 앞으로 다가왔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제가 마중을 나갔을 텐데…….”
“바쁠 텐데 번거롭게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그것보다 화물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혁권의 물음에 배도환이 몸을 살짝 뒤로 돌려 한쪽에 정박해 있는 대형 컨테이너 운반선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지금 선적 작업 중입니다.”
“화물에 이상은 없겠지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하나 다 확인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하하하.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인 걸요.”
중고차를 매입하면서 인연을 맺은 배도환은 이제 그가 한국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고 운송할 때마다 여러 가지 잡다한 업무를 전적으로 도맡아하고 있었다.
유기백이 있었지만 회사에 묶여 있는 몸이었기에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부탁하기에는 무리였다.
혁권 입장에서도 점점 사업이 커질수록 한국에서 손발이 되어 움직여 줄 사람이 필요했고 배도환도 일을 대행하면서 올리는 수입이 꽤 짭짤했기에 서로 득이 됐다.
“출항이 내일이라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오늘 선적을 다 끝내고 내일 아침 일찍 인천을 떠날 예정입니다. 아테네까지는 일주일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게 약간 떨어진 곳에서 화물을 실은 컨테이너들이 하나씩 배로 옮겨지는 걸 지켜봤다.
이번에 운송을 해 갈 화물은 구급 키트와 할랄Halal 인증을 받은 각종 식료품 그리고 휘발유까지 이십여 개가 넘는 종류에 액수로는 100억 원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