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89
189
그렇잖아도 태일그룹과 얽히면서 일이 아주 골치 아파진 상황에서 검찰총장의 전화가 왔다니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검장님.”
아무런 말이 없자 책상 앞에 선 여직원이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오귀남 지검장을 불렀다.
고개를 든 오귀남 지검장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화 연결해.”
“예.”
살았다는 듯 여직원이 얼른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앞에 놓인 전화기의 벨이 울렸다.
따르릉.
짧게 한숨을 내쉰 오귀남 지검장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얼굴을 하곤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날세.
묵직한 검찰총장의 목소리에 오귀남 지검장은 불길한 느낌이 맞았다는 걸 직감했다.
“총장님께서 어쩐 일로…….”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내가 자네 때문에 욕을 들어 먹어야 되겠어?
짜증이 가득한 모습에 오귀남 지검장은 어깨를 움츠렸다.
“죄송합니다.”
-지금 인터넷에 난리가 난 거 알지? 지청 앞에선 시위까지 벌어졌다면서?
“……예.”
-태일그룹에서 뭐 받아먹은 거 있어?
“아닙니다.”
은행 개인금고에 이근홍 변호사를 통해서 받은 현금 5억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으나 그걸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사건 처리를 그딴 식으로 해!
“그게…… 주가조작 건은 현재 2심이 진행 중이고, TC인터내셔널에서 고소가 들어온 건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것하고 달리 수사 여부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나름 열심히 변명을 했지만 검찰총장한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야! 내가 그 정도 사리 판단도 못 하는 핫바지로 보여?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 것 중에 외화 밀반출 건만 적용해도 최소 징역 2년은 충분히 때릴 수 있는데, 어물쩍거리는 건 봐주기 수사를 하고 있다는 거잖아!
“아직 수사를 보강해야 될 부분도 있고…….”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잔뜩 화가 난 검찰총장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누굴 물먹이려고 작정했어!
“그게 아니라…….”
-됐으니까 괜히 엉뚱한 짓거리하지 말고 이번 사건은 원칙대로 처리하도록 해. 알아들었나!
“총장님.”
다급히 마음을 돌려 보려고 했지만 돌아오는 건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총선을 앞두고 조만간 개각이 있을 거라는 건 알 거야. 거기서 만약 이번 일로 내가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 뒷일은 자네도 알아서 생각하도록 해.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다만 들리는 것이라곤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뿐.
오귀남 지검장은 지독한 허탈감에 휩싸인 채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무저갱이 발밑에서 크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기분이다.
그는 이미 몇 번이나 깨물어 너덜너덜해진 입술을 꾹 짓씹었다.
비릿한 쇠 맛이 입안에서 퍼지며 구역질을 불러일으켰으나 지금 그는 그마저도 느끼지 못했다.
애써 정신을 차리고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될지 생각했다.
태일그룹에서 한 제안이 몹시 달콤하기는 했지만 총장의 지시를 어긴다면 당장 그 뒷감당을 하기는 어려웠다.
유력한 차기 법무부 장관 후보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론이 악화돼 낙마하게 된다면, 자신한테 그 분풀이를 고스란히 다 퍼부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오랜 꿈인 정계 진출을 이루기도 전에 시궁창에 처박히게 될지도 몰랐다.
거기다가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평소 때라면 아무리 시끄럽더라도 얼굴에 철판을 깔고 두 귀를 막아 버리겠지만, 지금은 총선을 앞둔 시점이었다.
정부뿐만 아니라 정치인들 역시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 자칫 태일그룹의 부탁을 들어주려다가 자신이 마녀사냥의 재물이 될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한 오귀남 지검장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문 검사, 나야.”
-말씀하십시오, 지검장님.
“그 사건 말이야. 아직 보류 중이지?”
-예.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원칙대로 처리하도록 해.”
뜻밖의 지시에 문훈철 검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문훈철 검사 역시, 일이 흘러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알고 있는지 별다른 이야기 없이 순순히 대답했다.
전화를 끊은 오귀남 지검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뒤로 몸을 기댔다.
강남에 위치한 한 주상복합 건물.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강남에서도 가장 노른자위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내장재로 전부 유럽산 수입품을 사용해 최고급 호텔과 견줄 정도여서 부유층이 선호하는 거주지였다.
보안도 철저해서 수십 대의 CCTV가 24시간 돌아가며 젊고 건장한 경비원들이 출입자들을 철저히 통제했다.
그 덕분에 사생활 침해를 받을 일이 없었다.
이곳 로얄 층에 김인철이 머물고 있었다.
이근홍 변호사가 굳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가운데 김인철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분명히 기소유예로 빠져나오게 해 준다고 했잖습니까!”
“상황이 그렇게 됐습니다.”
침중하게 내뱉는 이근홍 변호사에게 김인철이 비명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일단 재판으로 시간을 끌면서 세간의 관심이 식기를 기다리시지요. 어차피 한 달만 지나면 지금같이 시끄럽진 않을 겁니다.”
지금 당장은 죽일 것같이 들썩거려도 대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정치인의 비리가 터질 때마다 유명 연예인의 스캔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면을 장식하는 것은 나름 다 그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아직까지는 냉정하게 사태를 관망할 여유가 있는 이근홍 변호사와는 달리 김인철은 그 말을 듣고서도 초조한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여태껏 당신 말 듣고 잘된 일이 있었어? 그러다가 실형이라도 덜컥 떨어지면 그땐 어쩔 건데!”
노골적인 힐난에 이근홍 변호사는 은테 안경을 슥 밀어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으니 최악의 경우도 고려해 보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뭐?”
김인철은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입을 딱 벌리더니 이내 크게 일그러진 얼굴로 패악을 부렸다.
“으아악!”
괴성을 지르면서 테이블의 꽃병을 밀어뜨린 김인철은 액자건 가구건 할 것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모조리 발로 차고 부숴 버렸다.
이근홍 변호사는 날카롭게 튀는 도자기 파편에 인상을 찡그리면서 몸을 살짝 뒤로 물리고 김인철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경호원이나 비서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었다면 그를 어르고 달래서 진정시키려 했겠으나, 어차피 둘 사이엔 그런 의리도 의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제 풀에 지칠 때까지 가만히 놔뒀다.
이근홍 변호사의 예상대로 더 이상 때려 부술 것이 없자 어깨를 씨근덕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쉰 김인철이 핏발이 선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소파에서 일어난 이근홍 변호사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 끝나셨습니까?”
“생각 같아서는 겁대가리 없이 고소장을 낸 것들을 찾아가 이 꽃병처럼 머리를 다 부숴 놓고 싶어.”
“지금도 수습이 쉽지 않은데 최소한 이번 사건이 다 마무리될 때까지만이라도 더 골치 아픈 일은 만들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길!”
분을 참지 못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욕설을 내뱉는 김인철을 바라보면서 이근홍 변호사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장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
“그나마 남은 몫이라도 챙기고 싶으면 더 이상 태일그룹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하!”
김인철은 뭐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허탈한 듯 목을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마치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연신 허파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이리저리 휘청거리던 그는 갑자기 양손에 얼굴을 묻고 손가락 사이로 매서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방금 그 말, 진짜야?”
“예.”
“그래. 결국 나를 버리겠단 말이지. 아버지란 사람이!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데!”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악을 써 대는 김인철을 무감각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근홍 변호사는 후,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곤 가방과 겉옷을 찾아 일어섰다.
“어딜 가는 거야!”
“여기 있어 봤자 더 이상 제가 할 일이 없잖습니까. 이래 봬도 꽤 바쁜 몸이라서요.”
“돈은 있는 대로 처먹고 이제 와서 날 이렇게 내팽개치고 가겠다고?”
이근홍 변호사는 이제 귀찮다는 속내를 가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성의 없이 대답했다.
“엄밀히 말해 전 도련님의 개인 의뢰를 받은 것이 아니라 태일그룹의 법무 팀에 속해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뭐야!”
그러니 네 말을 들어 줄 의무는 없다.
그렇게 대꾸하는 듯한 표정으로 김인철을 아래위로 훑어본 이근홍 변호사는, 잘 있으라는 말도 없이 저벅저벅 거실을 가로질러 나갔다.
문을 등 뒤로 닫은 순간, 쿵 하는 충격과 함께 무언가가 사정없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마 악에 받힌 김인철이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진 것일 테지만 그래 봤자 이제 그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
“쯧쯧.”
‘회장님도 자식 농사는 실패하셨군.’
물론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니 별로 타격은 없으시겠지만.
이근홍은 쌀 한 톨 정도의 동정심도 남아 있지 않은 차가운 표정으로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저희가 고소한 건에 대한 수사가 곧 시작될 것 같습니다.”
알려 줄 이야기가 있다며 급히 강남 사무실로 찾아온 지석영 변호사의 말에 혁권은 눈을 반짝였다.
“김인철도 조사 대상에 포함됐습니까?”
“물론입니다. 김인철은 물론이고 이동철과 전 TC인터내셔널 경영진 모두가 명단에 올라간 걸 확인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된 것에 그는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검찰의 봐주기 수사를 비난하는 여론을 형성한 것이 정확하게 들어맞았습니다. 아, 물론 사장님께서는 관련이 없는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지석영 변호사의 말에 혁권은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뚝 떼면서 이야기를 했다.
“여론에 밀려 수사에 착수했지만 대충 보여 주기식으로 끝낼 수도 있으니까, 지 변호사님이 민사에서 확실히 피해 보상을 받아 낼 수 있도록 힘써 주십시오.”
“염려 마십시오. 이미 피해액보다 많은 재산에 압류를 걸어 놨으니까 돈을 몰래 빼돌리지도 못할 겁니다. 이렇게 증거가 확실한 재판을 못 이긴다면 사무실 문을 닫아야지요. 아주 영혼까지 털어 버릴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자신만만한 지석영 변호사의 태도에 그는 흡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 다 끝났다고 안심하다가 한순간에 지옥으로 굴러떨어진 김인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