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20
220
샌더슨의 이야기에 혁권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사실이오?”
-전투를 치르려면 대량의 무기와 물자가 필요한데, 반군이 그걸 어디서 보급받고 있겠소. 전부 기니 공화국을 통해서 넘어가고 있는 거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병력도 일부 지원하고 있다는 정황이 있소.
“도대체 왜…….”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다 다이아몬드 때문이잖소. 지원의 대가로 반군 지역에서 캐낸 다이아몬드와 각종 광물들이 기니 공화국으로 흘러가 거기서 세탁을 거친 뒤 아주 비싼 가격으로 유럽과 미국 등지로 팔려 나가고 있는 중이오.
“으음.”
일명 블러드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밀거래 루트를 확인하게 된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니까 미스터 김도 괜히 뒤통수를 맞지 않으려면 미리 조심을 해 둬야 될 거요.
“참고하도록 하죠.”
-그럼 좋은 여행 되시오.
샌더슨과의 통화를 끝낸 혁권이 굳은 얼굴로 스마트폰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자, 옆에 있던 하킴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이야기라도 들으신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한쪽 팔을 내저으며 별거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러자 하킴을 비롯한 수행원들도 입을 다문 채 깊은 생각에 빠진 혁권을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샌더슨이 준 정보가 사실이라면 혁권 입장에서는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탈환해야 될 광산 지역에서 제일 가까운 나라가 바로 기니 공화국이었는데, 그곳이 반군 편이라면 보급 거점으로 활용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남은 방법은 남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라이베리아를 활용하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되면 인접한 기니 공화국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보급로 길이가 두 배 이상 늘어나게 됐다.
당연히 그에 따라 비용이 상승할 뿐만 아니라 유사시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적진 한복판에서 반군에 둘러싸여 전투를 벌여야 되는 상황을 고려할 때 아주 치명적인 요소였다.
그렇다고 반군과 손을 잡고 있는 걸 뻔히 아는데 기니 공화국에 보급 거점을 만들 수도 없으니 혁권으로서는 정말 난감한 노릇이었다.
한참 동안 고심을 거듭하던 혁권은 어느새 탑승 시간이 되자, 생각을 잠시 미루고 수행원들과 함께 안내판에 뜬 출국 게이트로 향했다.
“보스, 가실 시간입니다.”
“그렇군.”
잠시 뒤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힘차게 케이프타운 국제공항 활주로를 날아올랐다.
혁권과 일행이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주위가 칠흑처럼 깜깜한 암흑천지인 것과 달리, 인천 국제공항은 마치 전혀 다른 세상처럼 환하게 불이 밝혀져 오랜 비행에 지친 여행객들을 환영해 줬다.
입국장에는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던 김덕현 전무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직원들과 함께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함께 온 직원들이 수화물 카트를 넘겨받는 사이에 김덕현 전무가 깍듯한 태도로 머리를 숙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장님.”
“일찍 나왔군.”
약간 피곤한 얼굴로 악수를 나눈 혁권은 일행과 함께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오랜 비행에 지치기도 했고 새벽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공항 대합실에서 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모여 시선을 끄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으로 간 일행은 김덕현 전무가 준비해 놓은 차량에 나눠 타고는 곧장 공항 청사를 빠져나왔다.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차가 들어서자 혁권은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살짝 누르면서 옆자리에 앉은 김덕현 전무를 봤다.
“별일 없지?”
“어제 더슨사에서 전투식량 4만 봉지를 추가로 주문하는 오더가 들어왔습니다.”
더슨사는 CIA가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만든 페이퍼 컴퍼니였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샌더슨과 통화를 해서 추가 발주에 대해 미리 알고 있던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대금 결제는?”
“주문서와 함께 회사 계좌로 모두 입금했더군요.”
“물량을 맞추는 데 이상은 없겠지?”
“예. 봉담식품에 바로 확인을 했는데 기한 안에 납품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쪽도 우리가 주문하는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 3교대로 라인을 돌리고 있다더군요.”
“그럴 거야. 물건이 잘 팔리면 서로한테 좋은 일지 않겠어.”
“맞습니다.”
“추가로 오더 물량이 계속 늘어날 수도 있으니까 더슨사 쪽으로 가는 물건은 김 전무가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내가 따로 지시한 건 어떻게 됐어?”
혁권의 물음에 김덕현 전무는 얼굴을 살짝 굳히며 대답했다.
“다행히 전우회가 있어서 인적 사항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연락처입니다.”
김덕현 전무가 내민 종이를 슬쩍 훑어본 그는 이내 반으로 접어 안주머니 안에 챙겨 넣었다.
그러자 김덕현 전무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아틀라스사하고 계약을 맺으신 것 아니었습니까?”
“맞아.”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말끝을 흐리는 김덕현 전무를 보며 그가 말했다.
“뭣 때문에 이중으로 돈을 쓰냐, 이거지.”
“네.”
“일종의 안전핀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예에?”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는 김덕현 전무의 시선을 받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아틀라스사가 소문이 깨끗하다고 해도 결국 우리 쪽 사람이 아닌 이상 완전히 믿지는 못하지 않겠어.”
“그건 그렇지요.”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눈앞에 값비싼 다이아몬드 원석이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걸 보면 인간인 이상 자연히 욕심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겠지.”
욕심은 인간의 당연한 본능 중 하나였기에 김덕현 전무는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틀라스사 용병들 외에 소수지만 별도의 무장 세력이 함께 광산을 지킨다면 설사 안 좋은 마음이 생기더라도 어느 정도 자제를 할 수 있지 않겠나.”
혁권의 이야기에 김덕현 전무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알아들었다며 말했다.
“사장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제일 좋은 건 불미스러운 일이 아예 생기지 않는 것이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다 되는 건 아니잖아.”
“말씀을 들어 보니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무래도 위험한 일인 만큼 돈이 조금 더 들어가더라도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는 것이 좋아.”
“네.”
그 뒤로 두 사람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일행을 태운 차량 행렬은 빠르게 도로를 달려갔다.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동쪽 하늘이 어스름히 밝아진 때였다.
우유 배달 아주머니가 카트를 끌고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작은 놀이터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곁눈으로 바라보며 혁권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집이 있는 층수의 버튼을 눌렀다.
띵-.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익숙한 복도가 나타났다.
왼편에는 팻말에 적힌 숫자만 다를 뿐 똑같이 생긴 각 호수의 문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바깥으로 통해 있는 오른쪽은 원래 뻥 뚫린 시야만이 장점이었으나 그새 들어선 빌라와 새 건물들 때문에 영 우중충한 풍경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매일 뜯어도 다음 날이면 똑같은 자리에 붙어 있는 배달 음식 전단지가 바람에 팔락이며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도 아직은 깊은 단잠에 빠져 있는지 복도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들 중 불이 켜져 있는 집은 몇 개 안 되었다.
캐리어 하나만 끌고 제 집 문 앞에 멈춰 선 혁권이 열쇠를 찾느라 잠시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예고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왔니?”
갑자기 나타난 어머니의 목소리에 혁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저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이런 시간에 발소리 쿵쾅거리면서 우리 집 앞에 서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왔는데 무슨 소리가 난다고 그러세요.”
“새벽이니까 누가 조금만 부스럭거려도 금방 알아차리지. 그러지 말고 얼른 들어오렴.”
어머니가 가방을 들어 주시려는 것을 만류하면서 혁권이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집 냄새가 코끝에 확 풍겼다.
“저 때문에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어요?”
가족들의 평소 기상 시간을 알고 있는 혁권이 밝게 불이 켜진 집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버지는 택시기사라는 직업 때문에 새벽에 가끔 일을 나가시긴 하지만, 어머니는 일찍부터 일어나 부산을 떠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벌써부터 일어나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우리 아들 오는 건 보고 자야지. 낮이랑 초저녁에 잠깐 눈을 붙였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밤에 주무셔야 푹 자죠. 지금이라도 얼른 가서 누우세요.”
“밥은 안 먹어도 되고? 김치찌개라도 끓여 주련?”
“저도 피곤해서 그냥 잠부터 자려고요. 자, 자, 빨리요.”
“정말 괜찮겠어?”
“그렇다니까요.”
“배고프면 언제든지 말해.”
“네, 알았어요.”
혁권은 억지로 등을 떠밀어 어머니를 안방으로 들어가시게 한 후 주무시라며 인사하곤 제 방으로 들어갔다.
가지고 온 캐리어는 벽에 기대 놓고 대충 옷만 갈아입은 뒤 세수도 하지 않고 누우니, 온몸이 찌뿌둥한 게 그제야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했다.
‘조금만 자자.’
한 두세 시간만 자야지 하며 누운 혁권은 스르륵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혁권이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었다.
“아 함.”
오랜만에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푹 잔 그는 양팔을 들어 크게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가 넘었다.
비척거리며 일어나 머리를 긁적거리는데 확실히 몸이 개운한 게 느껴졌다.
‘역시 집이 최고라니까.’
흐암, 다시 크게 하품을 한 혁권은 통통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를 따라 부엌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제 일어났니?”
파를 썰고 계시던 어머니가 혁권을 보고 물었다.
“왜, 좀 더 자지 않고.”
“원래 잠깐 눈만 붙이려고 한 건데요, 뭘. 그리고 잠 온다고 아무 때나 막 누우면 나중에 밤낮이 바뀌어서 힘들기도 하고요.”
“마음대로 하렴. 그럼 지금 밥 먹을 거지? 씻고 나오면 금방 차려 줄게.”
“예. 근데 뭐 만들고 계시는 거예요?”
“오늘은 콩나물국이야. 아침부터 반찬 가짓수가 너무 많은 것도 좀 그럴 것 같아서…….”
사실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점심때가 가까워진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혁권도 잠에서 막 깨어난 참이라 별로 입맛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더 나을 성싶었다.
대신 나중에 저녁에는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자며 어머니가 말했다.
혁권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느릿한 발걸음으로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머리 위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에 세수를 하면서 몸을 씻으니,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던 정신이 점점 또렷하게 돌아왔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고 식탁 앞에 앉았을 때는 완전히 잠을 털어 내고 멀끔해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