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9
29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인 그는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당겼다가 내뱉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세상을 헛산 건 아닌 것 같네.”
다음 날 아침.
어머니가 끊여 주신 해장국을 먹고 막 집을 나설 때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유기백이 버럭 소리를 쳐 댔다.
-야! 너 지금 어디야?
“왜 그래?”
-봉투에 얼마를 넣은 거야?
“난 또 뭐라고.”
심드렁한 혁권의 반응에 유기백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어.
“그거 받았다고 아침부터 전화를 걸다니 배포가 왜 그렇게 작아.”
-5천만 원이 적은 돈이냐!
“하청 업체들한테 수억씩 받아 챙기는 인간도 있는데 뭘 그래.”
이름은 지칭하지 않았지만 그게 누군지 유기백도 알았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네 이름을 불지는 않을 테니까 안심하고 써.”
-야!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잖아?
“그럼 됐네. 뭐.”
-끄으응. 이 자식이 리비아에 가더니 간덩이가 엄청 커져서 왔네.
“큭큭큭. 내가 너 부자 만들어 줄 테니까 기대해.”
-됐거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나 어디 가 봐야 되니까 이만 끊자.”
-후우. 알았다.
유기백의 한숨 소리를 뒤로 하고 혁권은 통화를 끝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그는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중현 세단에 올라탔다.
한국에 있을 때 타고 다니던 승용차였는데 급하게 떠나다 보니 미처 처분을 하지 못하고 그동안 부모님 집에 맡겨 놨었다.
몇 달을 그냥 세워만 뒀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님이 관리를 하셨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키를 돌려 시동을 건 그는 익숙하게 승용차를 몰아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인천에 위치한 한 중고차 매매단지였다.
승용차를 세워 놓고 얼마쯤 기다리자 양복을 입은 사내 한 명이 혁권 앞으로 다가왔다.
“혹시 전화 주신 분이십니까?”
“이당철 씨?”
“예. 맞습니다.”
이당철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잘 오셨습니다. 어떤 차량을 찾으십니까?”
가볍게 악수를 나눈 혁권은 매매단지 주차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중고차들을 보며 말했다.
“일단 SUV 쪽을 보고 싶군요.”
“SUV 좋지요. 실내가 넓어 쉬는 날에 애인이나 가족을 데리고 놀러 가기도 편하고 무엇보다 연료비가 휘발유 차보다 싸서 유지비가 적게 들지요. 거기다가 요즘은 예전하고 다르게 소음도 크게 안 나고요. 특별하게 선호하시는 브랜드나 모델이 있으십니까?”
“없어요.”
“그럼 제가 괜찮은 것들을 몇 개 추천해 드리죠. 절 따라오십시오.”
앞서 가는 이당철을 따라 혁권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인천에서 제일 규모가 큰 곳답게 야외 주차장은 물론이고 5층 건물 내부에도 매물 차량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이당철은 세워져 있는 여러 대의 차량 중에 한 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어떠십니까? 연식도 3년밖에 안 됐고 풀옵션에 선루프까지 달려 있습니다. 물론 무사고이고요.”
추천한 차량은 국내 브랜드의 검은색 SUV였다.
“킬로 수는 얼맙니까?”
“2천 킬로밖에 안 됩니다.”
“3년 된 차가 그것밖에 안 뛰었다고요?”
의아해하자 이당철은 차 문을 열어 계기판 한쪽에 있는 주행 기록 장치를 보여 줬다.
“원래 소유자가 출퇴근 용도로만 써서 그렇습니다. 여기 2천 킬로도 안 되는 거 보이시죠.”
“그렇군요.”
확실히 주행 기록 장치에 찍힌 거리는 2천 킬로가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불법적으로 주행거리를 조작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곳이 바로 중고차 시장이었기에 혁권은 머리를 끄덕이면서도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보닛 좀 열어 볼 수 있을 까요?”
“물론이죠.”
그의 요구에 이당철은 선뜻 보닛을 열어 줬다.
덜컹.
자신 있게 보여 줄 만큼 보닛 안쪽도 아주 깨끗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점이 그의 눈에 거슬렸다.
아무리 차량 관리를 잘한다고 해도 여기까지는 신경을 못 쓰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리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데다 페인트칠까지 새로 되어 있는 걸 볼 때 뭔가 문제를 감추려고 한 것이 분명했다.
이럴 경우에는 사고 차일 가능성이 높았다.
몸을 바로 한 혁권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는 이당철을 봤다.
“무사고 차량이라고 했죠?”
“물론입니다.”
“사고 이력 조회를 해 봐도 됩니까?”
핸드폰을 들어 올리며 묻자 이당철의 표정이 살짝 찡그러졌다.
“뭘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제가 50만 원 빼 드릴 테니 계약하시죠.”
어물쩍 넘기고 빨리 차를 팔아 버리려는 이당철의 모습에 의심이 확신으로 굳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다시 오도록 하지요.”
“손님 그리지 마시고 지금 결정하시죠. 인기가 많은 모델이라 지금 안 잡으면 금방 나가 버릴 겁니다. 오늘 첫 고객이시니까 통 크게 100만 원까지 깎아 드리겠습니다.”
한쪽 팔을 잡으며 이당철이 꼬드겼지만 혁권은 속임수를 쓰려는 사람과 거래를 할 마음이 없었다.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죠.”
“소, 손님!”
매정하게 몸을 돌리자 그때까지 보이던 영업용 미소를 지운 이당철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짜증을 냈다.
“에잇. 튀! 개시부터 재수 없게.”
괜히 상대를 해 봤자 싸움만 날 것이 뻔했기에 그는 모르는 척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기가 그랬던 혁권은 담배를 피워 물고 세워져 있는 차들을 구경했다.
그때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딜러 한 명이 신혼부부로 보이는 손님을 데리고 와서는 근처에 있던 승용차를 보여 줬다.
“이 차입니다.”
그러자 여자가 실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다른 차는 없어요?”
“연식은 좀 됐지만 아주 속이 알 찬 놈입니다. 킬로 수도 2만밖에 안 됐고요. 거기다가 제가 소모품도 싹 다 갈아 놔서 가져가시면 몇 년은 문제없이 타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이건 좀…….”
“저기 있는 외제 차는 어때요?”
여자가 건너편에 있는 BMW 승용차를 보며 묻자 딜러가 조금 꺼리며 대답했다.
“저건 가격도 이것보다 두 배로 비싸고 유지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갈 텐데요.”
나름 걱정해서 해 주는 이야기였지만 신혼부부는 그렇데 듣지 않았다.
“지금 우릴 무시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흥. 됐어요.”
딜러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뺀질하게 생긴 젊은 사내가 툭 끼어들었다.
“손님, 저 BMW를 하신다면 제가 할부 조건을 괜찮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머. 정말요?”
“일단 차부터 보시죠.”
“그래요. 자기야, 뭐 해? 어서 가 보자.”
“알았어.”
힐끗 딜러를 쳐다보던 남편은 이내 팔을 잡아끄는 여자한테 이끌려 외제 차가 세워진 곳으로 갔다.
졸지에 손님을 빼앗긴 딜러는 화가 날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걸 그냥 바라만 봤다.
그러고 있자 다른 딜러가 건들거리며 옆으로 왔다.
“또 허탕이오?”
“뭐. 그렇지.”
“형님도 참 답답하우. 그냥 손님이 원하는 차를 보여 주면 되지 언제 또 볼 거라고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만날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요.”
“그래도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직접 타고 다니는 건데 정직하게 해야지.”
“쳇. 그런다고 누가 알아준답디까? 이번 달에 몇 대나 팔았소.”
“……두 대.”
대답을 들은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가지고 입에 풀칠이나 하겠소. 얼마 전에 들어온 신입도 세 대나 팔았다고 합디다.”
“그, 그래.”
쓰게 웃으며 말하자 남자는 답답한 시선으로 딜러를 봤다.
“그러니까 형님도 적당히 사기도 좀 치고 손님들 비위를 맞추란 말이오.”
“알았어.”
“만날 말만 알았다고 그러지 말고 자꾸 이러면 여기서도 얼마 못 버티우.”
“그게 쉽지가 않네.”
저러다가 또 손님이 오면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을 것이 뻔했기에 남자는 혀를 찼다.
“내려가서 밥이나 시켜 먹읍시다.”
“먼저 가 있어. 난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갈게.”
“그러시우.”
혼자가 된 딜러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한쪽에 서서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걸 다 지켜본 혁권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걸음을 뗐다.
“저, 실례합니다.”
의아한 얼굴로 딜러가 고개를 돌리자 혁권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혹시 자동차 딜러십니까?”
“예. 맞습니다.”
“차를 좀 사려고 하는데 안내를 해 줄 수 있으십니까?”
그러자 딜러는 얼른 담뱃불을 끄며 말했다.
“아! 물론이지요.”
“SUV로 보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리로 오시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혁권을 안내하던 딜러는 앞장서던 도중에 문득 생각났다는 듯 뒤돌아 명함을 건넸다.
“참, 저는 배도환이라고 합니다.”
“아, 예.”
명함만 받아 챙긴 채 자기 이름은 말해 주지 않는 혁권에게 딜러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려 보였지만 단순히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내 관심을 끊었다.
“찾으시는 SUV 차량은 이쪽에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걸을 때마다 탕탕 소리가 나는 철제 계단을 올라가면서 배도환이 싹싹하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예산은 얼마나 생각하고 계신지…….”
“1,500만 원 내외면 괜찮을 것 같군요.”
“흐음.”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겨 보던 배도환은 금세 적당한 물건을 떠올려 냈다.
“마침 예산에 딱 맞는 괜찮은 매물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곤 여러 대의 SUV 중에 국내 브랜드의 은회색 차량을 권했다.
“연식이 3년밖에 안 됐고 킬로 수도 적당합니다. 원래 이 정도면 1,700만 원은 받아야 되지만 가벼운 접촉 사고로 뒤쪽 범퍼를 교체해서 1,400만 원에 나왔습니다.”
앞선 딜러와 달리 사고 이력을 순순히 이야기해 주자 혁권은 눈에 이채를 띄었다.
“그렇군요.”
보닛을 포함해 차량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보자 확실히 괜찮은 물건 같았고 엔진 시동도 부드럽게 걸렸다.
부르르릉.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탄 채 만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시선을 돌려 옆에 서 있는 배도환을 봤다.
“다른 사고는 난 적이 없겠지요?”
“물론입니다. 보험 개발원 사이트에 들어가셔서 사고 이력 조회를 해 보시면 바로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사고 조회를 해 보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 주자 더욱 믿음이 갔다.
시동을 끄고 차 밖으로 나오던 혁권은 마침 앞서 봤던 검은색 SUV를 발견하고는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저 차는 어때요?”
고개를 돌려 그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본 배도환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저건…….”
잠시 머뭇거리던 배도환은 이내 짧게 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권해 드리고 싶지 않군요.”
“왜 그렇지요?”
“큰 사고가 나서 엔진까지 밀린 차량입니다.”
“그래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가 놀란 표정을 짓자 배도환이 검은색 SUV 앞으로 데려가 차근차근 설명을 해 줬다.
“여기 보닛 모서리에 실리콘이 없는 것이 보이시죠. 원래 자동차 공장에서 출고될 때 실리콘이 다 붙어 있는데 그게 없다는 건 새로 교체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부 도색은 물론이고 배터리와 주변 기계 장치들까지 다 새로 재생해서 붙인 겁니다. 그 정도로 큰 사고가 났다는 증거지요.”
“흐음. 듣고 보니 그러네요.”
“수리를 해서 겉은 멀쩡해 보여도 차량 내구성이 약하고 나중에 몰고 다니시면서 이런저런 잔고장이 많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