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7
37
“안녕하십니까?”
약간은 서툰 영어로 입을 연 사내는 단단한 체구에 짙은 색 눈썹을 가진 현지인이었다.
행색은 다소 허름하나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날카롭게 훑는 모습이 척 봐도 민간인은 아니었다.
“지난번에 소개시켜 준다던 군 출신 동료인가 보군.”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소 놀란 얼굴로 사내가 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 군인이오, 하고 써 붙이고 다니는데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군사훈련을 받은 자와 그냥 일반인은 걸음걸이나 허리를 펴고 앉는 자세, 눈짓에서부터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물론 그 차이를 알아보느냐 마느냐는 개인차가 있지만 혁권은 남들보다 특별히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역시 듣던 대로군요.”
사내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혁권은 이에 대꾸하지 않고 대신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말.”
예의상 어울려 주는 것은 여기까지다.
“소개가 늦은 것 같군.”
“죄송합니다. 이쪽은 예전 정부군 수송부대 장교로 있던 함단이라고 합니다.”
“김혁권이오.”
그가 내민 손을 함단이 맞잡으며 악수를 나눴다.
“일단 자리에 앉읍시다.”
세 사람은 객실 한쪽에 있는 소파로 갔다.
좀 더 두고 봐야 되겠지만 첫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혁권은 한쪽 다리를 무릎 위로 올리며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을 해야 되는지 대충 이야기를 들었겠지요.”
“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그래도 되겠소?”
“자말 대위님께서 보스로 모시고 계신 분이니, 그러셔도 됩니다.”
카다피 정권 시절 군에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계급까지는 정확하게 몰랐던 혁권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말을 봤다.
그러자 시선을 느낀 자말이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잠시지만 함께 일을 하려면 위계질서를 잡는 것도 중요하니 그렇게 하십시오.”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상체를 바로 세우며 말을 놨다.
“좋아. 그렇게 하지.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이번 일에 동참하기로 결정한 것 같은데 맞나?”
“부족하지만 필요하시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런저런 사설을 달지 않고 묵직하게 할 말만 하는 모습에 혁권은 믿음이 갔다.
“시간 안에 사람을 다 모을 수 있겠나?”
“가능합니다.”
“도중에 무장 강도나 반군 세력과 싸움을 벌이게 될지도 몰라.”
“어차피 요즘은 하루하루가 전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을 부양할 돈을 벌기 위해 그 정도 위험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혁권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사람을 데려왔군.”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혁권은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봉투를 하나 꺼내 탁자에 올려놨다.
“받아.”
“이게 뭡니까?”
“움직이려면 돈이 들지 않겠어. 활동비로 써.”
잠시 그를 바라보던 함단은 별다른 말없이 봉투를 집어넣었다.
“잘 쓰겠습니다.”
“더 필요하면 자말한테 언제든지 말하도록 해.”
“옛.”
“일주일 뒤에 알렉산드리아로 출발할 거니까 그때까지 자네가 책임지고 운전수들을 준비해 놔.”
뜻밖의 말에 함단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말씀입니까?”
“그래. 왜, 자신 없나?”
“그건 아닙니다만…….”
살짝 말끝을 흐리던 함단은 이내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오늘 처음 보시는 절 믿으시는 겁니까?”
반응을 살피는 듯한 시선에 혁권은 느긋한 표정으로 등을 기댔다.
“그래.”
“이해할 수가 없군요.”
단순히 기뻐하기에는 어쩐지 찝찝하다는 표정이었다.
자말에 비하면 꽤나 솔직한 반응에 혁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분명 자네에 대해선 잘 몰라. 하지만 자말이 데리고 온 사람이니 믿고 받아들이는 거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네가 아니라 자말에 대한 신뢰랄까.”
“그렇군요.”
그제야 궁금증이 풀렸다는 얼굴로 함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혁권과 이야기를 끝낸 함단은 처음보다 더 깍듯해진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 준비가 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수고해.”
인사를 하고 객실을 나간 그를 자말이 엘리베이터까지 데려다줬다.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고 있을 때 함단이 슬쩍 옆에 선 자말을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대위님.”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좋아 보이십니다.”
“뭔 소리야?”
자말이 눈썹을 모으면서 쳐다보자 함단은 턱으로 혁권이 있는 객실을 가리키고는 말을 이었다.
“자신감 넘치시던 예전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새 보스 때문이겠지요.”
“…….”
자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함단이 가볍게 손으로 경례를 붙였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래.”
자말은 붉은 빛을 점멸하며 바뀌는 숫자들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았다.
“내가 변했다라…….”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걸까.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변화였다.
혁권을 만난 이후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후배가 던진 말을 속으로 곰씹던 그는 이내 쓰게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함단이 합류하면서 준비가 탄력을 받았다.
당장 사흘이 지나지 않아 백 명의 운전수를 끌어모았는데 전부 예전 카다피 정권 시절 정부군 수송대 출신으로 함단의 부하들이었다.
몇 명은 운전뿐만 아니라 간단한 정비도 가능했기에 아주 유용한 인력이었다.
괜한 날파리들이 꼬이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모든 준비는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며 진행됐다.
“보통 때라면 해안 도로를 따라 벵가지와 미수라타를 거쳐 트리폴리로 오는 루트를 이용하겠지만 중간에 여러 무장 단체들이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를 들여다보던 혁권은 함단의 이야기에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굳이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 필요는 없지.”
“제가 생각한 안전 루트는 이렇게 동부 유전 지대를 크게 우회해서 사막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겁니다. 직선 코스보다 거리가 두 배가량 늘어나겠지만 그만큼 공격받을 확률은 낮아질 겁니다.”
함단이 붉은색 펜으로 지도에 긴 선을 그리면서 말하자 옆에 있던 자말이 우려를 나타냈다.
“제대로 된 도로 하나 없는 척박한 사막지대를 수백 킬로미터나 이동하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그리고 해안보다는 덜하지만 거기도 여러 무장 단체와 강도 들이 활동하는 곳이잖아.”
확실히 자말의 지적대로 사막을 횡단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습격은 둘째 치더라도 이동 중에 애써 수입해 온 중고 차량이 고장 나거나 퍼져 버리면 딱히 목적지까지 끌고 올 방법이 없었기에 아깝지만 버릴 수밖에 없고 이건 그대로 손해로 이어졌다.
기껏 온갖 고생을 다 해 놓고 별다른 이득을 취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허망한 일도 없을 터였다.
팔짱을 낀 채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는 혁권과 달리 함단은 여유로운 얼굴로 말을 받았다.
“말씀대로 사막을 건너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끊고 혁권과 자말을 둘러본 함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지으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차들이 충분히 제 속도를 내며 달릴 수 있는 도로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도로라니?”
지도에는 그런 표시가 없는데 무슨 말인가 싶어 혁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에 무슨 도로가 있다는 거야?”
자말 역시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함단이 비장의 한 수를 꺼내 들 듯 말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예전에 한국 건설회사에서 대수로 공사를 진행하며 만들어 둔 작업용 도로가 있습니다.”
“……!”
전혀 몰랐던 사실에 혁권은 물론이고 자말도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이야?”
정색을 한 혁권이 재차 확인을 하자 함단은 자신 있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몇 번 이용해 봤기에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깨끗하게 면도를 한 턱을 매만지면서 혁권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푹푹 빠지고 거친 사막을 이동하는 것과 잘 닦인 도로를 달리는 건 천양지차였다.
함단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여러 가지 환경적인 어려움을 감안하고서라도 사막을 선택할 충분한 이유가 됐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혁권의 물음에 자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럼 사막으로 우회를 하는 걸로 하지.”
가장 중요한 이동로를 결정한 혁권은 몸을 뒤로 기대면서 물었다.
“다른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
그러자 자말이 대답했다.
“인원수에 맞춰 소화기를 확보했고 RPG-7과 중기관총도 구해 놨습니다.”
이동 중에 어떤 상황을 맞닥뜨릴지 몰랐기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기는 필수였다.
“요즘 정부의 감시가 심해져서 한꺼번에 많은 무기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수고했어.”
“아닙니다.”
상체를 바로 세운 혁권은 자말과 함단을 차례로 바라보며 말했다.
“출발 전까지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하고 빠뜨린 것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점검을 하도록 해.”
“옛.”
그리고 며칠 뒤.
혁권은 트럭 네 대에 백 명의 운전수들을 태우고 늦은 밤 조용히 트리폴리를 떠나 동쪽으로 향했다.
이집트어로 알이스칸다리야Al-Iskandar?yah라고 부르는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북부 지중해 와 마레오티스 호수 사이에 위치한 오래된 도시이었다.
수도인 카이로에 이어 이집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여러 가지 산업이 발달한 상공업의 중심지였다.
이집트의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하는 이 도시에 한 떼의 차량 행렬이 들어섰다.
뿌연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모양새가 오랫동안 거친 사막을 달려온 것 같았다.
차량 행렬은 부두 근처에 있는 한 허름한 여관 앞에 멈췄다.
선두에 있던 SUV의 차 문이 열리더니 얼굴이 시커멓게 탄 혁권이 선글라스를 낀 채 내렸다.
뒤를 이어 자말과 다른 부하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는데 하나같이 상당히 초췌한 표정이었다.
“이제 도착했군.”
혁권은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활동하기 쉬운 청바지와 워커 슈즈 그리고 흰색 리넨 셔츠 차림의 그는 머리 위로 내리쬐는 태양 빛에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을 살짝 찡그렸다.
등 뒤의 트럭에선 수입해 온 중고차를 운전해 갈 인원들이 휘청거리면서 겨우 바닥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며칠이나 짐칸에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모여앉아 있었으니 아무리 건장한 사내들이라 해도 진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저린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굳은 몸을 푸는 운전수들의 모습에 혁권이 자말을 불러 말했다.
“며칠 있다가 다시 차를 몰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니까 운전수들부터 먼저 푹 쉴 수 있도록 해 줘.”
“예.”
자말은 고개를 숙여 보이곤 함단에게 턱짓을 했다.
“자, 자, 모두 주목!”
함단은 손뼉을 치며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일행을 불러 모은 뒤 숙소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인원이 꽤 많은지라 한 방에 예닐곱 명 정도가 모여 좁은 2층 침대에서 자야 할 테지만, 장시간 이동으로 누적된 피로 덕분에 세상모르게 금방 곯아떨어질 터였다.
“다들 여기 놀러 온 거 아니니까, 괜히 돌아다니지 말고 출발 전까지 얌전히 지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잠시 머무르는 동안 소란이라도 피울까 싶어 주의를 주는 함단의 말에 느릿한 대답이 돌아왔다.
금방이라도 눈꺼풀이 내려앉을 것처럼 깜빡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다들 어지간히도 지쳤는지 베개만 주면 바로 꿈나라로 떠날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