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92
392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빛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했다.
불에 달군 것처럼 따끈하게 익은 모래밭을 맨발로 잘도 걸어 다니는 서퍼들을 보면서 혁권은 삐뚜름하게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마티니 한 잔.”
손가락을 들어 주문하자 까무잡잡하게 탄 피부에 유독 하얗게 보이는 치아를 드러내면서 바텐더가 달러를 집어 갔다.
바텐더가 진에 베르무트를 섞어 리드미컬한 손놀림으로 휘젓는 사이, 혁권은 다시금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과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파티를 즐기러 온 관광객들이 커다란 음악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고, 잠시 쉬러 나온 서퍼들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수건으로 털면서 파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혹은 몇 번이나 뒤집어질 뻔했지만 그때마다 요령 좋게 넘겼다는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지껄여 댔다.
그리고 몇몇은 고급 숍에서 관리를 받는 대신 자연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듯 태닝 크림을 바르고 누워 매끈한 등을 내놓고 있기도 했다.
등에 남을 자국 때문에 고작해야 손바닥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비키니 끈을 다 풀고 엎드려 있으니 짓눌린 가슴이 힘겨워 보였다.
혁권은 팁으로 1달러 지폐를 건넨 후 입을 살짝 가져다 대 맛을 보았다.
깔끔하면서도 약간 씁쓸하다.
“별로 맛은 없군.”
제임스 본드 흉내라도 내 볼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결과가 영 좋지 못했다.
“보스.”
대신 올리브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사이 하킴이 다가와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더운데 바로 옆자리에 덩치 좋은 사내가 붙어 있으니 불쾌지수가 더욱 상승했다.
혁권은 조금 떨어지라는 듯 손을 흔들고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빙글 돌려 다시 바다 쪽으로 눈을 고정시키면서 등을 기댔다.
“알아보라는 건 어떻게 됐어?”
불현듯 불어오는 뜨끈한 바람에 널빤지를 어설프게 달아 놓은 노천 바의 간판이 삐걱 소리를 내면서 흔들렸다.
“벌써 이틀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기사가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싱가포르 정부에서 언론을 통제한 채 비공개로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거 의외군.”
“대낮에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호텔에서 타국 외교관이 습격을 받았으니 싱가포르 정부로서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마약 대금이 관련되어 있으니 북한 대사관에서 비밀로 해 달라고 요청했을 가능성도 있고요.”
“하긴 북한 입장에서 여기저기 떠벌려 봤자 좋을 것이 없겠지.”
“그렇습니다.”
비키니를 입은 외국 관광객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지나가자 잠시 말을 멈췄던 혁권은 마티니를 입으로 가져가 살짝 마시고는 다시 이야기를 했다.
“여권은?”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과 함께 하킴이 반으로 접힌 서류 봉투를 하나 탁자에 올려놨다.
안을 열어 보자 어두운색 여권이 한 뭉치 들어 있었다.
고무줄로 묶여 있는 것들 중 제 것을 빼서 펼쳐 본 혁권은 필립 조라고 적혀 있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을 보곤 흠, 하고 눈썹을 까딱였다.
“필립이라. 썩 마음에 드는 이름은 아닌데.”
“그나마 발음하기 쉬운 걸로 골라 달라고 했습니다.”
설정상 필립 조라는 사람은 파리 근교에 있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 한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를 가진 혼혈로, 오랫동안 미국 유학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걸로 억양이 조금 어색해도 대부분은 납득해 줄 터였다.
혁권은 은테 안경을 끼고 앞머리를 내려서 평소보다 훨씬 어리게 보이는 제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꽤 잘 만들었군.”
프랑스 정부의 직인도 정확히 찍혀 있고, 이만하면 전문가가 감정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가짜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특히나 인도네시아로 들어온 입국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어 출국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자 마주 보며 앉아 있던 하킴이 말을 받았다.
“진짜 프랑스 관광객이 가지고 있던 여권에 사진과 인적 사항만 살짝 바꾼 거라고 합니다. 그러니 공항 세관에서도 걸릴 염려가 없을 겁니다.”
“어쩐지 홀로그램까지 완벽하게 위조를 했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
비쌌지만 이 정도면 여권 하나당 2천 달러를 주고 만든 값어치를 충분히 했다.
“새 여권도 준비됐으니 이제 슬슬 여길 뜨면 되겠군.”
“항공편을 예약할까요?”
“혹시라도 꼬리가 잡힐지 모르니까 몇 군데 돌아서 움직이는 걸로 해.”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혁권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대고는 한쪽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음악을 들으면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달려드는 파도를 바라봤다.
39호실 부부장인 황정일은 수행원의 보고에 이를 악문 채 부르르 몸을 떨었다.
중국 기업 관계자와 올해 석탄 수출 물량을 조율하고 느긋하게 평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에 싱가포르에서 엉뚱한 일이 터져 버린 것이다.
김영철이야 죽든 말든 얼마든지 다른 놈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동안 자신의 손발 노릇을 하면서 남한테 알려져서는 안 될 치부恥部를 너무 많이 알고 있었기에, 차라리 그냥 죽어 주는 것이 그에게 이득이었다.
하지만 금괴를 처분해서 챙긴 비자금과, 39호실 금고에 집어넣어야 될 충성의 자금은 절대 잃어 버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특히나 충성의 자금은 관리를 하는 데 있어서 실수가 용납되지 않았다.
만약 무려 500만 달러나 되는 돈을 탈취당했다는 사실이 평양에 알려진다면 황정일은 자리를 보존하기가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직위를 박탈당하고 혁명화를 가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자칫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도자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면 그대로 총살형에 처해질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자 황정일은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멍청한 자식!”
중상을 입고 싱가포르 병원에 누워 있는 김영철한테 욕설을 내뱉었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당장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객실을 한참 동안 서성이던 황정일은 이내 임화룡 싱가포르 주재 북한 대사한테 전화를 걸었다.
원칙대로라면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서 따로 비화장치가 되어 있는 전화를 사용해야 됐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몇 번 신호가 울린 뒤 대사관에 있는 교환수를 통해 임화룡 대사와 전화가 연결됐다.
-전화 바꿨습니다.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는데, 가능한가?”
-네. 말씀하십시오.
자신의 관할 국가에서 39호실 인원들이 피습을 당한 것 때문에 전화를 받는 임화룡 대사의 목소리가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사건 수습은 어떻게 되고 있나?”
-싱가포르 정부와 호텔 측에 부탁해서 일체 이번 사건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은 채 수사가 진행 중입니다.
언론 보도가 나오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었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실 싱가포르 정부나 호텔 입장에서도 외국 외교관이 괴한의 습격을 받아 피살됐다는 것이 알려져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서로 입을 다물기로 한 거였다.
내심 안도한 표정을 지으면서 황정일이 말을 이었다.
“범인의 정체는 알아냈나?”
-그게…….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겨우 이야기를 했다.
-현지 경찰은 물론이고 정보부까지 나서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별다른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벌써 사건이 벌어진지 이틀이 지났는데 아무런 진척도 없다고 하자 황정일은 얼굴을 구겼다.
성격 같아서는 당장 한바탕 욕설이 튀어나갔을 테지만, 지금은 상대를 잘 구슬려서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기에 애써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쯤하면 됐으니까 사건을 여기서 그만 덮도록 하게.”
-범인을 잡는 걸 그만두라는 말씀이십니까?
뜻밖의 이야기에 임화룡 대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그래.”
-하지만 우리 쪽 인원이 3명이나 죽거나 다쳤고 무엇보다 평양으로 보낼 물건까지 없어졌는데…….
이야기를 중간에 끊은 황정일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덮자는 거야.”
-…….
“주석궁으로 들어갈 충성의 자금을 탈취당했다고 하면 자네가 무사할 것 같나? 아마 모르긴 해도 당장 평양으로 소환되어 처벌을 받게 될 거야.”
안 그래도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던 부분을 건드리자 임화룡 대사는 수화기를 든 채 그대로 굳었다.
“사건이 보고되면 제일 먼저 누구한테 책임을 추궁할 것 같나?”
-그게 저라는 겁니까?
“일이 벌어진 장소가 싱가포르이고 거긴 동지의 관할이니 당연한 거 아니겠나?”
억울한 일이었지만 지금까지 그가 봐 왔던 북한 정권의 행태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아니, 사건이 벌어진 이후 지금까지 임화룡 대사가 잠을 제대로 못 자면서 안절부절못했던 이유도 바로 이거였다.
막강한 권력을 쥔 39호실에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충성의 자금에 관계된 문제였기에 외무성의 비호를 받는 것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상대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황정일은 은근한 말투로 불안에 떨고 있을 임화룡 대사를 설득했다.
“하지만 내 이야기대로 한다면 동지는 물론이고 나도 살 수가 있어.”
-어떻게 말입니까?
“괴한들이 습격을 하기는 했지만 평양에 보낼 가방을 목숨으로 지켜 낸 걸세. 그럼 책임져야 될 일도 없고 김 소좌와 죽은 39호실 동무들도 영웅이 되어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겠나?”
-그러면 잃어버린 돈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채워 넣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금괴를 판 돈도 같이 빼앗긴 데다 몰래 빼돌려 놨던 비자금 가운데 일부를 헐어서 꺼내 놔야 되는 것에 짜증이 났다.
그러나 괜히 여기에 미련을 두다가 더 큰 걸 잃어버릴 수도 있었기에 황정일은 평양에 보내야 될 500만 달러를 자신이 부담하기로 했다.
39호실 부부장이라는 지위만 놓치지 않고 쥐고 있다면 시간이 좀 걸릴 뿐 그까짓 돈은 얼마든지 다시 끌어모을 수 있었다.
“어때?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나?”
-그랬다가 발각이 되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위기에서 벗어날 구명줄을 내려 주는데도 냉큼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머뭇거리자 황정일은 눈가를 찌푸렸다.
“이봐, 이대로 있으면 어차피 동무는 처벌을 피할 수 없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아닙니다.
버럭 고함을 내지른 황정일은 짧게 혀를 차곤 다시 상대를 구슬렸다.
“이번 일만 잘 넘기면 동무 뒤는 내가 봐주도록 하지.”
-정말이십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대답하는 모습에 황정일은 상대가 이 말이 나오길 노리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괘씸했지만 지금은 사건을 덮는 것이 먼저였기에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갔다.
“나중에 문제가 되는 일이 없도록 뒷수습을 확실히 해야 될 걸세.”
-염려 마십시오.
임화룡 대사도 책임 추궁을 피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뒷수습을 할 테니 황정일은 믿고 맡겼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뒤 전화를 끊은 황정일은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사건을 축소 은폐한다면 위기를 무사히 잘 넘길 수 있을 터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황정일은 아예 이번 사건이 김정은 위원장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몇 군데 더 전화를 걸어 단속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