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527
527
빈자의 핵무기라고도 불리는 더티 밤은 방사성물질을 채워서 만든 무기로 강력한 폭발력은 없지만, 사용하는 순간 온갖 방사성물질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와 주위를 오염시키는, 말 그대로 더러운 폭탄이었다.
핵무기는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가는 충격과 공포를 안겨 줄 치명적인 무기였다.
“그게 어떻게 쿠르드 자치 정부 손에 있는 거요!”
상체를 바로 한 혁권이 다급히 묻자 샌더슨은 하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IS 격퇴 전에 쿠르드족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거요.”
IS가 이슬람 국가를 선포하면서 영역을 급속하게 확장시켜 나갈 때 이라크 정규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도시와 중요 거점은 물론이고, 가지고 있던 무기마저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런 이라크 정규군과 달리 쿠르드 자치 정부에서 운영하던 군사 조직인 페시메르가Peshmerga는 열악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IS와 싸워 자치 지역을 지켜 냈다.
그러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오합지졸인 이라크 정규군 대신 용맹한 페시메르가를 더 신뢰하면서 막대한 군수물자를 지원해 주고 군사교육까지 시켜 줬다.
충분한 지원이 이루어지자 페시메르가는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면서 지상군 투입을 꺼려 하는 미국 대신 IS를 무너뜨리는 데 선봉에 서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모슬이 IS에 점령당했을 때 국립대학교 연구소와 의료 기관에서 더티 밤의 핵심 원료인 코발트-60을 비롯한 여러 방사성물질들이 탈취된 일이 있었소. 그 이후에 모슬 대학교 실험실에서 모종의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돼 우리를 비롯한 여러 정보기관들이 상황을 주시했지만 별다른 정보를 확보할 수가 없었소.”
전 세계를 상대로 위협을 벌이면서 온갖 테러를 벌이고 있는 IS기에, 만약 더티 밤을 손에 쥐고 실제로 사용하기라도 한다면 그건 엄청난 재앙이었다.
그러니 테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서방 국가들이 긴장을 하며 바짝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 연합군이 모슬을 탈환하고 IS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도 더 이상 더티 밤에 대한 정보나 이야기가 나오지 않자 상부에서는 저들이 제조에 실패했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었소.”
이야기를 듣던 혁권은 수긍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아무리 큰 기술이 들어가지 않는 더티 밤이라고 해도 위험한 방사성물질을 다뤄야 되는 만큼 숙련된 전문가가 아주 정밀하게 작업을 해야만 제조할 수가 있었다.
자칫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는데 섣불리 손을 댔다가 방사성물질이 폭발하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 있고, 외부로부터 지금보다 더 큰 압박을 받게 될 터였다.
“그렇게 잊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놀랍게도 이미 오래전에 더티 밤 제조에 성공해서 감춰 두고 있다가, 모슬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도시 밖으로 은밀히 빼내려는 걸 페시메르가가 발각해 확보해 둔 모양이오.”
대충 상황이 파악된 혁권은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만들면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샌더슨을 봤다.
“그 사실을 쿠르드 자치 정부와 페시메르가가 지금까지 감춰 오다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협상 카드로 꺼내 든 거군.”
이미 핵심적인 내용을 다 털어 놨기에 샌더슨은 감추지 않고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소.”
“제길. 어쩐지 찝찝하더라니.”
아무리 최근 급격하게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이란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해도, 자칫했다가는 이라크는 물론이고 쿠르드족이 다수 거주하는 터키와도 관계가 악화될지 모르는 행동을 하는 것이 조금 이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그 모든 것들이 명확하게 이해가 됐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혁권의 얼굴을 보면서 샌더슨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알겠소.”
더티 밤이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손을 떼기에는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렸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혁권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그냥 모르는 편이 더 나을 뻔했군.”
“그래서 내가 경고를 했지 않소.”
어깨를 으쓱인 샌더슨이 느긋한 태도를 보이자 짜증이 치밀어 오른 혁권은 반쯤 태운 담배를 종이컵에 비벼서 끄고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빚 갚는 셈 치려고 했더니 들고 나온 용건이 너무 크군.”
“그럼?”
“이번엔 반대로 그쪽이 나한테 빚을 진 거요.”
“후후후. 알겠소.”
낮게 웃는 샌더슨을 보며 그는 눈가를 찌푸린 채 짧게 혀를 찼다.
얼마 뒤, 혁권이 탄 AN-26수송기는 C-130 두 대와 함께 어둠을 뚫고 조명이 환하게 밝혀진 활주로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덜컹거리는 진동에 몸을 맡기고 있던 혁권은 이내 움직임이 잦아들고 기체가 안정되는 것과 함께 위에 달려 있던 램프가 붉은색에서 파란색으로 변하는 걸 보곤 안전벨트를 풀었다.
“아르빌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했지?”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하킴이 얼른 대답했다.
“넉넉하게 잡아서 4시간이면 도착할 거라고 했습니다.”
혁권은 소매를 걷어 시간을 확인해 보고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해가 뜨기 전에 다시 착륙할 수 있겠군.”
“아마도 그럴 겁니다.”
아르빌 공항이 쿠르드 자치 정부의 통제하에 있다고 해도 수송기들의 도착 장면이 남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수송기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험비Humvee 고기동 차량 한 대와 FGM-148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이 든 나무 상자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긴 사거리와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은 쿠르드 자치 정부를 압박하는 이라크 정부군 기갑 차량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였다.
성능이 우수한 무기인 만큼 가격 역시 비쌌는데 CLU(Command Launch Unit)라고 불리는 조준기를 빼고 미사일만 무려 8만 달러에 달했다.
화물 파렛트에 놓여 있는 미사일 상자가 40개니까 여기 실린 것만 족히 320만 달러어치가 넘었다.
다른 수송기에도 재블린 미사일을 비롯한 여러 무기들이 실려 있었기에 그걸 다 합치면 적지 않은 가격이 나왔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건 제일 안쪽에 놔둔 상자 두 개였다.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양쪽에서 잡고 힘을 써야지 겨우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상자 안에는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달러 뭉치가 가득 들어 있었다.
2천만 달러, 한화로 230억 원이 훌쩍 넘는 거액으로 모두 투르크 자치 정부에 전달될 돈이었다.
사실 아무리 재블린 대전차미사일 같은 고가의 무기를 실었다고 해도 수송기 3대로 가져갈 수 있는 물량은 한계가 있었다.
더티 밤처럼 좋은 패를 가지고 고작 이 정도 대가를 받고 바꾼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였는데, 진짜는 바로 이 현금이었다.
아무리 독립을 향한 열망과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페시메르가라고 해도 충분한 군자금이 없다면 제 힘을 다 발휘하기 어려웠다.
당장 이라크 정부군과의 전투에 대비한 무기 구입부터 정부 운영비와 병사들의 월급까지 다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터키가 쿠르드족의 분리 독립을 막기 위해서 이라크 정부와 손을 잡고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인 국경을 봉쇄하고 자국을 통과하는 송유관을 잠그겠다고 위협하자 쿠르드 자치 정부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고심 끝에 꺼내 든 것이 바로 더티 밤을 미국에 넘겨주는 대신 터키 하부르 검문소를 거쳐 남부 제이한 항구까지 이어지는 송유관을 통해 하루 2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하는 걸 보장받는 거였다.
미국이 어떻게 터키 정부를 설득했는지는 몰라도 물량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기는 했지만 쿠르드 자치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송유관을 통해 계속 외부로 반출되고 있었다.
혁권이 가져온 달러는 터키 정부가 수출 금지 조치를 취하는 바람에 한동안 제이한 항구 저장탱크에 묶여 있던 원유를 처분한 판매 대금이었다.
급하게 2천만 달러나 되는 현금을 준비하느라 조금 애를 먹었지만 유조선에 선적을 끝낸 원유를 DK정유에 넘기면 500만 달러의 차익을 올릴 수 있었다.
혁권은 각자 편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부하들을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화물을 넘겨주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
“이런 일을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다들 잘 해낼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킴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은 표정을 좀처럼 풀지 못했다.
“나도 알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긴장을 풀고 있지 말란 거야.”
“……예. 알겠습니다.”
평소와 달리 신경이 더 곤두서 있는 듯한 모습에 하킴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스, 뭔가 걸리시는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왜, 그래 보여?”
“오늘따라 조금 예민해 보이십니다.”
더티 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줄 수 없었던 그는 시선을 피하면서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냥 느낌이 안 좋아서 그래. 미리 대비를 해 놔서 나쁠 건 없잖아.”
“맞는 말씀입니다.”
뭔가 개운치가 않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하킴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수송기는 빠른 속도로 어두운 밤하늘을 날아갔다.
덜컹.
수송기 바퀴가 활주로에 부딪치는 강한 충격과 함께 동체가 한번 심하게 흔들거리더니 이내 속도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얼마 있지 않아 수송기가 완전히 멈춰 서고 조종석에서 일체형 승무원복을 입은 알란이 나와 도착을 알리자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철컥.
손에 익은 글록 권총을 꺼낸 혁권은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슬라이드를 뒤로 당겨 총알을 장전하고는 윗도리를 걷어 다시 허리 뒤춤에 꽂아 넣었다.
가능하면 이걸 꺼내 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항상 대비를 해 둬야 했다.
하킴과 다른 부하들도 차분히 각자 무기를 점검하며 준비를 끝냈다.
그러자 후방 램프 옆에 서 있던 알란이 러시아 억양이 강하게 섞인 영어로 소리를 쳤다.
“이제 문을 열겠습니다!”
그가 머리를 작게 끄덕이자 알란이 엄지손가락으로 개폐 스위치를 꾹 눌렀다.
위이이잉.
거친 기계음이 울리면서 육중한 후방 램프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지자 환한 조명 불빛과 함께 싸늘한 공기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사막에서 한기寒氣라니 이상했지만 물이 별로 없고 습도가 낮은 사막 지역은 쉽게 뜨거워지는 만큼 해가 지면 온도가 빨리 내려가 보통 일교차가 20~30도씩 났다.
수송기에서 내리자 권총을 허리에 찬 30대 후반의 장교가 일단의 병사들과 함께 가까이 다가왔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에 강인한 인상의 장교가 혁권과 일행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상당히 유창한 영어로 먼저 말을 걸었다.
“존슨 씨가 누구십니까?”
그러자 혁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했다.
“나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본 장교는 억센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페시메르가 소속 사림 대령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소이다.”
굵은 마디와 커다란 손바닥에서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혁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손에 힘을 주며 상대와 마주 잡자 잠시 서로를 파악하듯이 짧은 눈빛이 오갔다.
“아르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은연중에 행해진 탐색전을 끝나고 사림 대령이 시원한 입매를 길게 찢으며 씩 하고 웃었다.
“고맙소.”
“화물은 다 가져왔겠지요?”
“물론이오.”
“그럼 우선 화물부터 확인토록 하지요.”
“좋소.”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대기하고 있던 페시메르가 병사들이 소총을 등 뒤로 맨 채 주기장에 세워진 수송기 안으로 들어가 화물을 꺼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