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675
675
모든 용무를 끝내고 틴타퍼로 돌아온 혁권은 일주일 뒤에 남은 보급 물자를 가득 실은 화물선 두 척이 무사히 부두에 도착해서 하역을 시작하는 걸 보고 나서야 시에라리온을 떠났다.
두바이에서 중간 급유를 받은 비즈니스 제트기는 어두운 밤하늘을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수면등만 살짝 켜져 있는 가운데 다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혁권 역시 좌석을 침대처럼 뒤로 눕힌 채 숙면을 취하고 있었는데, 뒤편에 앉아 있던 하킴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으음.”
낮게 잠긴 목소리에 헛기침을 터트리자 눈치 좋게도 옆에서 바로 작은 생수병이 내밀어졌다.
곧바로 목을 축인 혁권은 아직 잠기운이 가득한 눈가를 꾹꾹 문지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야?”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풀어 뒀던 손목시계를 보고 잠깐 시간을 확인한 혁권은 뒤로 젖혔던 시트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 끄응 소리를 내면서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말해 봐.”
“전투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킴의 말에 혁권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누가 이겼어?”
“움부야 소장이 지휘하는 2군단이 쿠데타군을 물리치고 마시아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큰 피해를 입은 쿠데타군은 전열이 완전히 무너진 채 프리타운으로 무질서하게 패주 중입니다.”
원하던 결과에 혁권의 표정이 밝아졌다.
“잘됐군.”
“전투에서 특히 하인드 공격 헬기의 활약이 아주 컸다고 합니다.”
“그럼 이제 프리타운 탈환은 시간문제겠군.”
“쿠데타군의 주축인 3군단이 치명타를 입었으니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겁니다.”
“그럴 거야.”
리스크가 컸던 만큼 이대로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 버린다면 혁권은 엄청난 이득을 거둘 수 있었다.
“기니공화국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지?”
“여전히 국경 부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지만 생각보다 빨리 정부군의 승리로 쿠데타가 마무리될 기미가 보이자 일단 섣불리 개입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는 모양입니다.”
“지금 국경을 넘는다면 어떤 핑계를 대든지 침략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리 욕심이 나더라도 쉽사리 행동에 나서지 못할 거야.”
“맞습니다.”
“또 다른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리도록 해.”
“그러겠습니다.”
하킴은 고개를 숙이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미 잠이 깨 버린 혁권은 생수로 목을 축이고 후, 한숨을 내쉬면서 등받이에 몸을 나른하니 기댔다.
버릇처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갤러리를 열어 소현의 사진을 보았다.
일전에 하와이 리조트에 갔을 때 함께 찍은 것이었는데, 밝은 햇살 아래 그가 선물해 준 꽃다발을 안고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절로 입꼬리가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했으나 아직 비행기 안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쉬운 마음에 다른 사진들도 쭉 훑어보다가 30분이 훌쩍 넘게 지나서야 슬슬 다시 몰려오는 잠기운에 눈을 감았다.
강남에 있는 맴버쉽 클럽 별실에서 태일증권 사장인 정덕진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김인철이 따라주는 술을 받으면서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한 건가?”
오랫동안 김종원 회장을 보필하면서 그룹에서 일을 해 왔기에 김인철 형제를 어렸을 때부터 봐 온 정덕진 사장은 다른 임원들보다 편하게 말을 놨다.
“그동안 격조하기도 했고 정 사장님께 도움을 구할 일도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새로운 경영 체제를 정하는 문제 때문에 그러는 모양이군.”
김인철이 미소 띤 얼굴로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습니다.”
비상대책 회의에서 박상빈 비서실장이 김종원 회장의 병세를 밝히고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한 이후 상당한 시일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어떤 형태로 그룹 경영을 이끌어 갈 것인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임원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면서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복잡해졌다.
“감추고 할 것도 없으니 바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요. 저와 손을 잡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공동 경영체제를 지지해 달라 이건가?”
정덕진 사장을 똑바로 마주 쳐다보면서 김인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현재의 위기 상황을 이겨 내고 투자자들이 가지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아버지를 옆에서 잘 보필하며 그룹을 이끌어 온 여러 임원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자신을 비롯한 기존 임원진들을 치켜세워 주는 이야기에 정덕진 사장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형 대신 회장님의 뒤를 잇고 싶어하는 자네한테 이득이 되는 일이겠지.”
“······.”
살짝 미간을 찡그린 김인철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동시에 정 사장님한테도 나쁜 일이 아닐 겁니다.”
“겨우 월급 사장일 뿐인데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건 아니고?”
“정 사장님을 누가 새우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빈말인 건 알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군.”
피식 웃는 정덕진 사장을 보면서 김인철이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공동 경영체제가 된다면 큰 틀은 서로 협의를 통해 결정해야 되겠지만, 기본적으로 각 계열사는 별도 경영을 하게 될 겁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을 하자는 건가?”
정덕진 사장의 말에 김인철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각 계열사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이 그룹이 안정될 때까지 맡아서 회사를 꾸려 나가자는 겁니다. 그게 현명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별도 경영이라······.”
흠, 하면서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 상대에게 김인철이 다시금 은근한 목소리로 권했다.
“장 사장님도 이 어려운 시기에 다른 사람이 증권사 경영에 왈가왈부하며 끼어드는 건 탐탁지 않잖습니까.”
그러자 정덕진 사장이 스윽 고개를 들어 물었다.
“지금은 이런 말을 나누고 있지만 나중에 김 이사한테 힘이 생기면 건설에 있는 김 사장하고 똑같이 행동할 것 아닌가?”
날카로운 지적에 김인철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없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가장 껄끄러운 상대는 제가 아니고 김성균 사장일 겁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물끄러미 김인철을 쳐다보던 정덕진 사장은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짓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었다.
“하긴 김 이사 말대로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우리끼리 날을 세울 필요는 없겠지.”
“그럼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그룹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너무 많은 짐을 한 사람한테 지우는 건 큰 부담이 될 테니 자네 말대로 하도록 하지. 주위에 있는 임원들한테도 내가 따로 이야기를 해 놓겠네.”
“감사합니다.”
상대의 입에서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김인철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목구멍으로 술이 넘어가는 감각을 즐기며 그는 속으로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맴버십 클럽을 나온 김인철은 정덕진 사장을 먼저 배웅하고는 차민성이 열어 주는 차 문으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하자 조수석에 앉은 차민성이 고개를 뒤로 돌리면서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강남 오피스텔로 가.”
“예.”
푹신한 가죽시트에 몸을 기댄 김인철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내가 지시한 거 있지?”
“기사에 관한 것 말씀이십니까?”
“그래.”
김인철은 눈을 매섭게 번뜩이면서 말을 이었다.
“이틀 뒤에 기사를 내보내라고 해.”
“말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나중에 골치 아픈 일이 없도록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작게 머리를 까딱인 김인철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차창 밖을 바라봤다.
이틀 뒤, 인터넷 보도 매체에서 ‘태일그룹 김종원 회장 의식 불명 상태’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그동안 감추고 있던 김종원 회장의 상태가 외부에 공개되어 버렸다.
김종원 회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태일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건 알려져 있었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노출되지 않았었는데, 이번 특종 보도로 감추고 있던 병세가 밝혀져 버리고 말았다.
재계 서열 상위권에 들어가는 재벌 그룹 오너에 관계된 일이었기에 기사는 순식간에 실시간 검색어 1위로 올라갔다.
여기에 다른 언론사들까지 후속 기사를 마구 쏟아 내면서 태일그룹이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상황이 일파만파 커져 갔다.
당장 크게 하락했다가 바닥을 찍고 다시 완만한 상승세를 보이던 태일그룹 주식들이 일제히 하한가를 기록했다.
그리고 태일병원과 그룹 본사 앞에는 김종원 회장의 상태를 취재하려는 기자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꽝!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기사가 난 거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김성균 사장이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치면서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급히 모인 측근들이 몸을 움츠리며 눈치를 봤다.
사실 측근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병원 의료진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입단속을 철저하게 시키고 혹시 몰라 각 언론사 데스크까지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생기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왜 말이 없어!”
괜히 불똥이 튈까 봐 다들 입을 꾹 다문 채 머리를 숙이고 있자 한쪽에 앉아 있던 박상빈 비서실장이 어쩔 수 없이 나섰다.
“정보가 새어 나간 곳을 찾아야 되겠지만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지금은 수습이 최우선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화부터 가라앉히십시오.”
“끄으응.”
아무리 김성균 사장이라도 아버지인 김종원 회장의 측근인 데다 그룹 내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박상빈 비서실장을 무시하긴 어려웠기에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보도가 나간 이상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피하기 어렵겠지만 각 언론사 데스크를 통해 기사 내용을 적절한 선에서 조절하기로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완전히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급한 대로 조치를 취했다고 하자 김성균 사장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회장님의 병세가 외부에 다 알려져 버린 상황에서 비상 경영 체계 실시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는 겁니다.”
눈썹 끝을 치켜 올린 김성균 사장을 바라보면서 박상빈 비서실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다.
“사장님을 부회장으로 추대해 그룹 전권을 맡기든 아니면 상대편에서 주장하는 대로 당분간 공동 경영 체계로 가든 더 큰 손실이 생기기 전에 빨리 결정을 내려야 될 겁니다.”
그러자 김성균 사장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공동 경영 체계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요!”
“물론 저도 반대입니다. 그러나 이 상태로 계속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만 해도 모든 그룹 계열사 주식이 하한가를 기록했는데, 향후 그룹 경영에 대해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한다면 상황이 더 곤란해질 수도 있습니다.”
주식 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김성균 사장도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기에 얼굴을 구긴 채 낮게 침음을 흘렸다.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을 이해하기라도 하는 듯 박상빈 비서실장이 말했다.
“더 큰 걸 얻기 위해 잠시 뒤로 물러서는 거라고 생각하십시오. 이런 때일수록 그룹을 위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아······.”
짜증 섞인 깊은 한숨과 함께 혀를 차는 소리가 조용한 실내에 울렸다.
그때 밖에서 비서실 직원이 급하게 노크를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갑작스럽게 상념의 흐름이 끊기자 절로 김성균 사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불쾌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단단히 호통을 치려던 찰나, 비서실 직원이 허리를 깊이 숙이면서 서둘러 변명하듯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하게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뭐?”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것처럼 그가 눈을 부라렸다.
“태일정유 쪽에서 긴급 임원회의 소집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김성균 사장은 인상을 쓰면서 이를 갈았다.
“제길. 기다렸다는 듯이 치고 나오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