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11
811
반나절이었다.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건 한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다.
10억 달러에 달하는 현물과 원유 선물 옵션을 매입해 한숨을 돌리던 태일정유는 페르시아만 봉쇄가 갑자기 풀리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패닉에 빠졌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어마어마한 손실을 떠안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현물은 어쩔 수 없더라도 손해가 더 커지기 전에 원유 선물 옵션이라도 다 매도하려고 태일정유 구매부 전체가 나서 동분수주해 봤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매일 최고가를 갱신하면서 끝없이 치솟던 국제 유가가 갑자기 하락 반전해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유 선물을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다가 태일정유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앞을 다퉈서 원유 선물을 무더기로 내던져 버리는 바람에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시장이 무너졌다.
가격이 하락하자 매물이 쏟아지고 그걸 받아 주는 곳이 없자 재차 폭락을 하는 악순환이 계속 반복됐다.
결국 이날 하루 동안 국제 유가 10달러나 떨어지면서 태일정유가 선물 옵션을 매입한 원가인 배럴당 82달러 선이 깨졌다.
이런 사실들을 접한 태일정유의 임원진들은 거의 쇼크 상태에 빠졌으며 책임자인 오차돈 사장은 긴급 호출을 받고 그룹 본사로 들어갔다.
“…….”
숨이 막힐 것 같은 무거운 공기에 오차돈 사장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값비싼 수입 가죽 소파에 앉아는 있으나 바늘방석이나 마찬가지였고,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는 김인철 부회장의 시선을 마주 대할 자신이 없어 눈은 바닥을 향했다.
“그래서.”
마침내 김인철 부회장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바로 앞의 탁자에는 그가 방금 전까지 보다가 던져 놓은 보고서들이 흩어져 있었다.
모두 이번 사태와 관련된 서류였기에 오차돈 사장은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까지 입은 손해가 얼마야?”
꿀꺽.
오차돈 사장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1, 1억 달러입니다.”
한화로 1천억 원이 넘어가는 거액이었으나 태일그룹과 정유의 회사 규모를 생각하면 감당해 내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는 아직 원유 선물을 단 한 개도 매도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제 유가 하락세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더군다나 막대한 자금이 현재 계속 진행되고 있는 생산 시설 확장 공사에 투자되고 있었기에 태일정유의 재정 상황은 거의 바닥이었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김인철한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이탈리아제 고급 수제 양복을 입은 김인철이 눈을 가늘게 뜨곤 싸늘한 시선으로 오차돈 사장을 쳐다봤다.
“아직 원유 선물을 하나도 처분 못 했는데 손해가 그것뿐이라는 거야?”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하루 이틀 뒤면 폭락 장세가 어느 정도 진정될 거고 직원들이 모두 달라붙어 매수처를 찾고 있으니 조만간 선물을 모두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김인철은 눈썹을 찡그렸다.
“오 사장.”
“마, 말씀하십시오.”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사형선고를 앞두고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내가 바보처럼 보이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김인철이 손바닥으로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고는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럼 방금 내 앞에서 지껄인 말들은 다 뭐야!”
“…….”
“뭐 폭락이 멈추고 쥐고 있는 선물을 모두 처분할 거라고? 지금 나랑 장난해!”
사나운 질책에 오차돈 사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지금은 큰 충격에 다들 겁을 내고 있지만 금방 이성을 찾고 시장이 안정을 되찾게 될 겁니다.”
이미 손해가 확정된 건 어쩔 수 없더라도 최소한 페르시아만이 봉쇄되기 직전 가격에서 국제 유가가 하락을 멈추는 것은 오차돈 사장의 간절한 바람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고 손해 더 커진다면 어떻게 할 텐가?”
김인철이 차갑게 묻자 오차돈 사장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그건…….”
“손해가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간다면 그때는 거기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될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부 회장님…….”
“왜, 못 하겠어?”
찌르는 듯한 시선에 오차돈 사장이 고개를 떨궜다.
“……아닙니다.”
“그럼 됐군.”
김인철은 바로 상대에게서 눈을 돌려 버리곤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뭘 꾸물거리고 있나. 빨리 나가 봐!”
미련을 못 버리고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던 오차돈 사장은 더 이상 말을 붙이기 힘든 냉랭한 태도에 결국 축 쳐진 어깨로 돌아섰다.
오차돈 사장이 문을 닫고 나가자 한쪽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있던 김인철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을 내뱉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고.”
그러자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차민성이 옆으로 다가와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로 오차돈 사장을 정리하실 생각입니까?”
“회사에 손해를 끼쳤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래도 정유에 계실 때부터 부회장님을 따른 측근이지 않습니까. 서운한 마음에 엉뚱한 짓이라도 한다면 자칫 골치 아파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부회장 자리를 차지하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고, 울산 제2공장 공사 비용을 몰래 부풀려서 거액의 비자금을 만들어 주는 등 드러나면 곤란해질 일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눈치라도 봐야 된다는 거야!”
고개를 들고 사나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차민성이 얼른 머리를 가로저었다.
“제가 그만 실언을 했습니다.”
빠르게 사과했으나 김인철의 불쾌한 듯한 표정은 가시질 않았다.
쯧, 혀를 찬 그는 방금 오차돈이 걸어 나갔던 문을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주제를 모르고 엉뚱한 짓을 하려고 한다면 그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려 줘야지.”
“혹시 모르니 오차돈 사장쪽에 꼬리를 하나 붙여 놓겠습니다.”
“그렇게 해.”
차민성이 대답 대신 머리를 숙이자 몸을 뒤로 기댄 김인철은 생각지도 못한 악재에 얼굴을 구겼다.
국제 유가 폭락이 멈추고 시장의 패닉이 진정될 거라는 오차돈 사장의 바람과 달리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바로 다음 날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미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전격적으로 원유 생산량을 하루 50만 배럴 증산한다는 발표를 하자, 가뜩이나 추락하던 국제 유가는 더욱 낙폭을 키웠다.
다른 산유국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카리니 암살 사건을 묻는 대신 중간 선거 승리를 위해 유가 하락을 원하는 백악관과 사우디아리비아 왕실이 거래를 한 거였다.
그 여파로 국제 유가는 중동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의 가격마저 방어하지 못하고 하락세를 이어 갔다.
아등바등 노력했지만 태일정유는 결국 원유 선물을 대부분 매각하는 데 실패했고, 매입 가격의 절반에 달하는 5천억 원이 넘는 손해를 입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주식 시장에 태일정유가 이번 중동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주식까지 크게 떨어지는 악재가 겹쳐 버렸다.
오차돈 사장은 박창근 재무이사가 건넨 서류를 읽어 보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4/4분기 예상 실적이 나왔는데 그동안 열여섯 분기 연속 이어져 오던 흑자 행진이 깨지고 적자를 기록하고 말았다.
제2공장을 비롯한 각종 시설 보수 공사에 많은 지출이 있은 데다가 비싸게 매입한 원유 현물과 선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발생한 손해가 결정적이었다.
지난 며칠 사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얼굴이 까칠해지고 눈 밑에 다크서클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 오차돈 사장은 서류를 내려놓으면서 힘없이 입을 열었다.
“가뜩이나 주가가 엉망인데 이게 공개되면 한바탕 또 난리가 나겠군.”
그러자 박창근 이사가 위로하듯 말했다.
“아직 연말까지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그사이 국제 유가가 조금이라도 회복된다면 적자 폭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겁니다.”
폭락 사태는 어느 정도 진정됐지만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증산으로 인해 한동안 유가 반등을 기대하긴 어렵다는 건 이쪽에 대해 조금만 지식이 있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기에 오차돈 사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리됐으면 좋겠군.”
책상에 놓인 전화벨이 울리자 오차돈 사장은 한쪽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그만 나가 보게.”
“예.”
오차돈 사장은 지쳐 보이는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차 과장입니다.
수화기를 타고 김인철의 심복인 차민성 과장의 목소리가 들리자 오차돈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는 긴장했다.
“아, 차 과장이 어쩐 일인가?”
-오늘도 태일정유 주가가 많이 빠졌더군요. 부회장님의 실망이 크십니다.
불길한 느낌에 오차돈 사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타격이 있기는 하지만 곧 회복될 거요.”
-간단하게 부회장님의 말씀만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이번 일에 책임을 지고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도록 하십시오.
차민성의 목소리가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사의 말처럼 들렸다.
얼굴이 창백해진 오차돈 사장은 손에 든 수화기를 꽉 움켜쥐면서 다급히 말했다.
“지금 날 버리겠다는 거요!”
-말씀을 가려서 하시죠. 먼저 일을 망친 건 오 사장님이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나한테 이럴 수는 없소!”
-지금까지 태일정유 사장직을 유지하고 계신 것이 누구 덕분인지 잘 아실 텐데요.
“부회장님은 어디 계시오? 내가 직접 가서 해명을 하겠소.”
그러자 차민성이 대놓고 짜증을 냈다.
-아실 만한 분이 자꾸 왜 이렇게 질척거리시는 겁니까? 괜히 찾아오셔 봤자 부회장님 기분만 나빠지실 뿐입니다.
상대의 태도에 오차돈 사장은 이미 김인철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다는 걸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도 부회장님께서 배려를 해 주셔서 태일가스 고문 자리를 마련해 뒀으니 그리로 가시면 될 겁니다.
오차돈 사장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경질되는 거라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표이사까지 역임했는데 정유도 아니고 계열사인 태일가스 고문으로 가라니 자존심을 완전히 구기는 일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오차돈 사장의 귀에 감정이 실리지 않은 차민성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똑똑하신 분이니 부회장님께 누가 되는 행동은 안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얌전히 회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사흘간 시간을 드릴 테니 그 안에 신변 정리를 끝내도록 하십시오.
망연자실한 오차돈 사장에게 마지막 말을 던진 차민성은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뚜뚜뚜.
귀에 거슬리는 기계음이 마치 그의 인생이 끝났음을 알리는 마지막 종소리처럼 들렸다.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오차돈 사장은 온몸을 휘감는 허탈함과 배신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이 실책을 저지른 건 인정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버림을 받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눈동자에 핏발이 선 오차돈 사장은 책상 제일 밑에 잠금장치가 달린 서랍을 열고 만년필 모양의 보이스레코드를 꺼냈다.
손아귀에 그걸 꽉 쥐고선 한참 동안이나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것처럼 입매를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