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64
864
잠시 뒤, 손종구 지사장이 탄 고급 세단은 수많은 고층 빌딩들 가운데서도 우뚝 솟아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IFC 빌딩 앞에 멈추어 섰다.
Two IFC라고도 불리는 제2국제 금융센터는 2008년에 완공된 높이 420미터 총 88층의 초고층 건물로 홍콩 금융업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일행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71층에 내리자 왼편 복도 대리석 벽에 오로라 펀드라고 영문으로 적힌 회사 팻말이 보였다.
협상을 위해 벌써 여러 번 방문을 했었기에 발걸음이 익숙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데스크에 앉아 있던 미모의 여직원이 곧바로 일행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온통 하얀색 벽으로 이루어진 가운데 유일하게 전면을 향해 나 있는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쭉쭉 솟아 있는 홍콩의 빌딩 숲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길쭉한 원형 모양을 그리고 있는 테이블에 다른 사람들과 둘러앉아 있던 스텐저가 안내를 받아 들어오는 일행을 알아차리고는 일어서서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손.”
“오늘은 서로 만족할 만한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저도 그랬으면 합니다.”
약간 긴장한 듯한 손종구 지사장과 달리 고급 수제 양복을 입고 손목에 롤렉스시계를 찬 스텐저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다.
태일건설을 비롯해 주요 계열사에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오로라 펀드에 대해 자세히 조사를 한 태일그룹은, 이들이 홍콩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VIP 자산운용사인 L&S코퍼레이션 산하의 헤지펀드라고 판단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길 원하는 혁권이 의도한 대로였는데 스텐저가 전면에 나서 협상을 하는 이유도 상대의 오판을 유도하기 위한 거였다.
다른 사람들도 서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회의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여직원 두 명이 들어와서 따끈한 차를 내려놓고 나가자 스텐저가 의자에 앉은 채 양손을 살짝 비비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 그럼 어떤 제안을 가지고 왔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그러자 손종구 지사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지시받은 대로 조건에서 협상을 위해 액수를 살짝 낮춰 제시했다.
“7,200억까지 수용토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주사인 태일산업 이사직을 내주는 건 여러 가지로 곤란하니 대신 정유에 자리를 만들어 드리도록 하지요.”
어느새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스텐저는 앞에 있는 손종구 지사장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딱딱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태일산업 이사직이지 정유는 관심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요구하는 지분 매각 액수는 8천억이라고 분명히 이야기를 했을 텐데요.”
“아무리 프리미엄을 붙였다고 해도 솔직히 8천억 원은 너무 과도하지 않습니까? 이사직 요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일산업은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지주사인데 거기에 외부 인사를 이사로 앉히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입니다.”
“태일산업 지분 6%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왜 외부인입니까?”
“그래서 더욱 안 된다는 겁니다. 혹시 오로라 펀드에서 그룹 경영에 개입을 하려는 것입니까?”
의심에 찬 시선에 스텐저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분명하게 대답했다.
“태일그룹 경영권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고 이미 여러 차례 밝혔을 텐데요.”
“그렇다면 굳이 태일산업 이사회에 욕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날카로운 지적에 당황할 만도 했지만 스텐저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여유롭게 말을 받아넘겼다.
“고객이 예탁한 자금을 운용하는 입장에서 거액을 투자한 회사가 제대로 경영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건 당연히 해야 될 의무입니다.”
“그걸 꼭 이사회에 참여해서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손종구 지사장이 말을 계속 이었다.
“가령 매 분기나 필요할 때마다 경영 보고서를 받아 보는 걸로도 충분할 겁니다.”
“물론 그룹 경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런 방법을 쓸 수도 있겠지요.”
손종구 지사장이 살짝 얼굴을 굳히고는 스텐저를 쳐다봤다.
“그 말씀은 우리 그룹이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불쾌해하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나 스텐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다만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딱 까놓고 이야기를 해서 오너 집안의 형제간에 경영권 분쟁 중인 태일그룹이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죠. 그것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손종구 지사장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이사회에 자리도 내줄 수 없고 지분 매각 액수도 요구한 것보다 훨씬 못 미치니, 이거 정말 실망스럽군요.”
협상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는 듯한 뉘앙스의 말에 손종구 지사장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것 같았다.
여기서 협상이 무산된다면 지금까지 했던 노력들이 전부 허사가 되어 버리는 데다가 자칫 잘못했다가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뒤집어쓰게 될지도 몰랐다.
“우리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귀측에서도 기존 입장만 반복하지 말고 계약을 성사시킬 마음이 있다면 조금 더 성의를 보일 수 있을 텐데요.”
태연한 듯 대꾸했으나 속으로는 초조한 기색이 물씬 느껴졌다.
그걸 보고 내심 짙은 미소를 지으면서 스텐저는 시종일관 여유롭고 느긋한 태도로 흔들리는 손종구 지사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지분 매입을 먼저 원한 건 우리가 아니라 태일그룹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
한마디로 절대 요구 조건을 낮출 의사가 없다는 뜻이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스텐저가 태일그룹 측 사람들을 둘러보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 이야기를 나눌 것이 없으니 오늘 대화는 여기서 끝내기로 합시다. 다음에는 이번보다 마음에 드는 제안을 가지고 오길 바랍니다.”
“아니, 스텐저 씨!”
손종구 지사장이 당황한 얼굴로 따라 일어섰지만 스텐저는 부하 직원들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스텐저는 뒤에 붙어 따라오는 후배 변호사인 코미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만하면 시간을 끌 만큼 끈 것 같은데, 자네가 보기에는 어때?”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럼 계획대로 김성균 사장한테 연락을 취하도록 해.”
“미스터 손한테는 협상 결렬을 통보하겠습니다.”
“아니, 그건 그냥 놔둬.”
“방금 협상을 그만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서류철을 손에 든 자세 그대로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코미에게 스탠저가 말을 이었다.
“굳이 친절하게 우리 입으로 말해 줄 필요는 없잖나.”
“그렇군요.”
스탠저의 짓궂은 속내를 파악한 코미가 알겠다며 씩 웃었다.
늦은 오후.
통째로 빌린 호텔 수영장에서 혁권이 팔을 힘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쏴아아.
물살 가르는 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사방으로 물방울이 튕겨 나갔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폐가 조이는 느낌이 들 때까지 연속해서 레인을 왕복했다.
그러다 거의 한계에 다다랐을 즈음 수영을 겨우 멈춘 혁권은 수영장 가장자리에 양팔을 턱하니 올리고 가쁜 호흡을 골랐다.
온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위로 올라오자 바로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킴이 커다란 수건을 갖다주었다.
머리카락을 탈탈 털면서 그대로 선베드로 직행한 혁권은 부족한 수분을 보충하려는 듯 작은 생수병을 반 이상 단숨에 비워 버리고 나서야 겨우 입을 뗐다.
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었지만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한바탕 수영을 했더니 스트레스가 싹 풀린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며 쉬고 있을 때 백성균이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앞으로 다가왔다.
“보스, 스텐저 씨 전화입니다.”
“그래? 이리 줘.”
옆에 수건을 내려둔 혁권은 백성균이 내민 스마트폰을 건네받아 귀에 가져다 댔다.
“무슨 일이오?”
-이제 슬슬 뜸을 그만 들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될 것 같아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눈에서 이채를 띠며 그가 말했다.
“조금 더 시간을 끄는 것이 좋지 않겠소?”
-그래도 되겠지만 너무 길게 가면 상대가 이상한 낌새를 차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수긍하듯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하긴 뭐든 지나쳐서 좋을 것이 없는 법이지. 그럼 김성균 사장 쪽하고 직접 접촉을 할 거요?”
-예. 아무래도 큰 거래이니 제가 나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스텐저가 나선다면 혁권은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었다.
“그런데 김성균 사장이 우리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소?”
-쉽지는 않겠지만 그룹 경영권을 되찾아올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니 결국은 우리 뜻대로 움직일 겁니다.
“싸움을 오래 끌수록 누가 승자가 됐든 상처가 깊이 남을 테니 어떻게든 빨리 경영권 다툼을 끝내고 싶겠지.”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자금은 얼마나 필요할 것 같소?”
-도움을 받기 위해 지분을 매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딱히 프리미엄을 붙이지는 않겠지만 물량이 많은 데다가 나중에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면 너무 싸게 매입해서도 안 되니 10억 달러 정도는 추가로 더 있어야 될 걸로 보입니다.
엄청난 액수였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재력을 생각하면 마련하지 못할 돈은 아니었다.
마침 조금 있으면 코발트 선매도권 판매 대금 가운데 혁권의 몫으로 4억 달러가량이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 더욱 자금 운용에 여유가 있었다.
결정을 내린 혁권은 손에 든 스마트폰을 고쳐 쥐면서 말했다.
“버진 아일랜드 계좌로 자금을 입금시킬 테니까 계획대로 일을 진행토록 하시오. 그 대신 내가 이야기한 조건은 꼭 받아 내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럼 서울에 도착하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스마트폰을 백성균한테 다시 넘겨준 혁권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계획대로 된다면 눈엣가시 같은 김인철에게 치명타를 가하고 손에 꽉 움켜쥐고 있는 태일그룹 경영권까지 빼앗아 버릴 수 있을 터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혁권은 몸을 씻기 위해 샤워실로 걸음을 옮겼다.
며칠 뒤.
강남에 위치한 최고급 일식당 ‘고엔’의 귀빈실에 김성균 사장이 측근 두 명과 함께 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떨떠름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문 김성균 사장은 왼편에 있는 구민재 재무이사를 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 주주총회에서 도움을 줬다고 날 아주 아래로 보는 모양이군.”
그러자 구민재 재무이사가 눈치를 보면서 얼른 그를 달랬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뭔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걸 테지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그건······.”
말문이 막힌 구민재 재무이사가 우물쭈물하자 김성균 사장이 마뜩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곤 짧게 혀를 찼다.
“쯧. 그나저나 국민연금 기금운용 본부장하고 접촉을 하는 건 어떻게 됐어?”
“비판적인 여론 때문에 국민연금 쪽에서도 김 부회장을 지지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정부 여당에서도 총선을 의식해 별다른 개입을 하지 않고 있는 눈치인 것 같고요.”
“그렇다면 지난번처럼 인철이 놈을 지지해 주지 않을 수도 있겠군.”
“아마도 기권을 할 가능성이 클 겁니다.”
김성균 사장이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기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기회에 아예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겠어.”
“복지부 장관이 김 부회장하고 밀착되어 있어서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어서 그런지 김성균 사장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렵다고 그냥 손을 놓고 있을 거야! 그런 일을 하라고 자네한테 비싼 월급을 주는 거 아냐.”
“죄, 죄송합니다.”
“여자든 돈이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갖다주고 국민 연금 표를 어떻게든 받아 오도록 해! 내 말 알겠나?”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