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97
897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만수르 회장은 앞에 있는 전시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자네 내 꿈이 뭔지 아나?”
“글쎄요.”
“여기 아부다비를 중동, 아니 세계 최고의 도시로 만드는 걸세.”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허황된 이야기라고 가볍게 치부해 버릴 수 있었지만, 수십조 원의 재산을 가진 갑부에 아부다비의 왕자이자 아랍에미리트 부총리인 만수르 회장이었기에 정말로 실현 가능하게 느껴졌다.
당장 두 사람이 있는 이 미술관만 해도 소장품을 외부에 전시하는 걸 극히 꺼리는 루브르 박물관에 수억 달러나 되는 기부를 약속하고 많은 귀한 작품들을 대여 형식으로 받아 와서 만들어졌다.
그 덕분에 중동 지역 최고의 미술관이라는 명성을 가질 수 있었는데, 말 그대로 아부다비가 가진 부富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회장님이시라면 꿈을 이루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군.”
입가에 미소를 띤 만수르 회장은 뒷짐을 쥔 채 그를 보며 물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뭔가?”
시선을 받은 혁권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은 빈 살만 왕세자의 제안을 아랍에미리트 정부에 전하러 왔는데, 회장님께서 다리를 좀 놔 주셨으면 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보낸 거라고?”
“그렇습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시 지그시 그를 바라본 만수르 회장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공식 외교 사절이 아닌 자넬 은밀하게 보낸 걸 보면 외부에 드러나서는 곤란한 일이라는 건데, 최근 양국 사이에 그런 일이라면 예멘 내전에 관련된 것뿐이군.”
바로 용건을 짐작하자 혁권은 어차피 부탁을 해야 되는 입장이었기에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곧 재개될 후티 반군에 대한 지상군 공격에 아랍에미리트 군도 함께하길 바랍니다.”
만수르 회장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굳이 국왕 전하를 만나지 않아도 되겠군. 우린 지상전에 참가할 생각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는 게 좋을 걸세.”
곧바로 거절의 말이 튀어나왔으나 이 정도로 물러설 거였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제안을 설명드릴 자리라도 주선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국왕을 설득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그저 만나게만 해 달라는 요청에 만수르 회장이 정색하며 말했다.
“어차피 안 될 일인데 왜 그렇게 해 줘야 하나? 헛수고하지 말고 얌전히 포기하고 돌아가도록 하게.”
“새로 가져온 제안이 뭔지 아시면 그렇게 금방 거절하진 못하실 겁니다.”
“흐음······.”
어쩐지 자신 있어 하는 태도를 보고선 조금이나마 흥미가 생긴 듯했다.
“제시할 것이 무엇인지 나한테 먼저 이야기를 해 보게.”
“알무카를 비롯한 예멘 남서부 일부를 장악하고 있는 남부 저항군을 인정하고 내전이 끝난 뒤에 일부 자치를 허용하는 걸 빈 살만 왕세자께서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다고 말하셨습니다.”
“······!”
예상을 못한 이야기였는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노련한 사업가이자 정치인답게 이내 평정심을 회복하곤 혼잣말을 중얼거리듯이 입을 뗐다.
“남부 저항군이라······ 확실히 의외의 조건이긴 하군.”
처음보다 누그러진 태도에 그는 얼른 말을 이었다.
“아랍에미리트 입장에서도 결코 손해가 아닐 겁니다.”
“흐음.”
턱 끝을 쓰다듬던 만수르 회장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국왕전하께 말씀을 드려 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마침내 힘든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는 생각에 혁권이 크게 반색하였다.
하지만 만수르 회장은 괜한 기대심을 품지 말라는 듯 일부러 딱딱한 소리로 혁권에게 주의를 주었다.
“단, 내가 해 주는 일은 딱 거기까지일세. 국왕 전하를 설득하는 건 어디까지나 자네 몫이야.”
“예.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얼마나 수완을 발휘하는지 어디 한번 지켜보겠어.”
그러면서 만수르 회장은 재밌는 일을 앞에 둔 어린아이처럼 까만 눈동자를 빛내었다.
만남을 끝내고 미술관은 나온 혁권은 대기하고 있던 벤츠 방탄 차량 뒷좌석에 올라탔다.
부드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승용차가 출발하자 옆에 탄 함단이 슬쩍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은 잘되셨습니까?”
“자이드 국왕하고 자리를 주선해 주기로 약속했어.”
“일단 한고비를 넘겼군요.”
“이제부터 진짜 어렵다고 봐야지. 기껏 만났는데 자이드 국왕을 설득하지 못하면 다 헛수고잖아.”
“그렇긴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분명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실 겁니다.”
“그래야지.”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곤 화제를 바꿨다.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나?”
“말씀하신 대로 올해 말에 선출되는 유엔 비상임이사국 선거에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가 후보로 나서려고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국제 연합의 주요 기구 중에 하나인 안전보장 이사회는 실질적인 최고 의결기구라고 할 수 있었는데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다섯 개의 상임이사국과 2년 임기의 열 개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됐다.
비상임이사국은 공헌도와 형평성, 지리적 안배에 따라 후보가 결정된 뒤 유엔 회원국 전체의 투표를 통해 선출되는데, 올해는 아시아, 아프리카 몫으로 배정된 자리 가운데 하나를 중동 국가에서 뽑을 차례였다.
월드컵을 유치하면서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는 데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카타르가 제일 먼저 출사표를 던졌고, 지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던 아랍에미리트 역시 입후보를 적극적으로 저울질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던 혁권은 아랍에미리트를 설득할 두 번째 희든 카드로 이걸 활용할 생각을 했다.
“어느 나라가 유리한 상황이야?”
“먼저 출마를 선언한 데다가 이란을 비롯한 시아파 국가들하고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카타르가 아랍에미리트보다 많이 앞서 나가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차이가 많이 나는 모양이지.”
“지금으로써는 카타르가 거의 확정적이라고 봐야 될 겁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상당히 오랫동안 비상임이사국을 노리기는 힘들겠지.”
“다음 선거에도 아시아, 아프리카 오더가 있지만 호주하고 일본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데다가, 이미 중동국가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아랍에미리트한테까지 차례가 돌아오긴 어려울 겁니다.”
“그렇겠지.”
가죽으로 마감이 된 도어트림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툭툭 두드리면서 잠시 생각을 한 혁권은 눈을 반짝였다.
“이걸 잘만 이용하면 자이드 국왕을 움직일 수 있겠군.”
왕족인 만수르 회장이 나서준 덕분인지 혁권은 다음 날 바로 자이드 국왕을 알현할 기회를 얻었다.
석유 부국富國답게 온통 값비싼 대리석으로 치장했을 만큼 왕궁이 아주 크고 화려했는데, 사막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야자수와 푸른 수목이 잘 어우러져 넓게 펼쳐진 정원에서 자이드 국왕을 만났다.
만수르 회장을 따라 정원 한쪽에 넓게 쳐져 있는 그늘막 아래로 들어가자, 아랍 전통 복장을 한 자이드 국왕이 측근들과 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형님.”
“오. 어서 와라.”
사적으로 같은 피를 나눈 형제 사이인 자이드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만수르 회장의 어깨를 당겨 안고는 친근하게 양쪽 볼을 비비면서 반겼다.
“이쪽은 제가 말씀드렸던 존슨입니다.”
만수르 회장이 소개를 하자 혁권은 정중하게 예를 갖추며 인사를 했다.
“존슨이라고 합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아래위로 살펴본 자이드 국왕은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꽤 유능한 사업가라지.”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나름 그쪽 바닥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거물이던데, 욕심이 많은 사람인가 보구먼.”
“······.”
폐부 깊은 곳 까지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지적에 혁권이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으니 이내 주름진 눈매가 가볍게 휘어졌다.
“자, 그럼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말은 들어 봐야겠지. 같이 앉아서 차나 한 잔 마시세.”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는 인물이었다.
하긴 이 정도쯤은 하지 못하면 쟁쟁한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국왕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터였다.
금박이 입혀져 있는 고급스러운 수제 의자에 앉자 시종이 옆으로 다가와 향이 진한 홍차를 따라 주고는 뒤로 가서 대기했다.
그늘막 안에는 바삼 아랍에미리트 국방장관과 아심 정보국 국장이 자리를 하고 있었는데, 둘 다 자이드 국왕의 최측근이자 권력 실세들이었다.
느긋하게 홍차를 한 모금 마신 자이드 국왕은 찻잔을 앞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듣자 하니 남부 저항군을 인정하고 자치권도 주겠다고 했다던데, 맞나?”
“예. 그렇습니다.”
대답을 한 혁권은 차분한 목소리로 상대를 설득했다.
“빈 살만 왕세자님께서 직접 약속을 하신 겁니다. 자체적으로 세금도 거두고 지금 보유한 군사조직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으니 정말 크게 양보하셨다는 걸 전하께서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대하고 달리 자이드 국왕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겁 없이 설쳐 대는 빈 살만이 자존심을 많이 굽힌 건 인정하지. 그런데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결국은 속 빈 강정이지 않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주 크게 양보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내민 조건들은 이미 남부 저항군이 다 행하고 있는 거지 않나.”
실제로 남부 저항군은 하디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군에서 완전히 벗어나 알무카를 비롯한 점령지에서 세금을 거두고 자체적인 행정조직을 갖추며 독자노선을 걷고 있었다.
“지금도 충분한데 왜 사우디아라비아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거지. 그것도 천금 같은 우리 병사들의 피를 사막 모래에 흘려 가면서 말이야.”
“하지만 단순한 무장 세력으로 남아 영토를 불법 점거하고 있는 것과 정부군의 일원으로 당당히 지분을 얻어 내는 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자 몸을 뒤로 기댄 자이드 국왕은 그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애초에 남부 저항군의 목표가 예멘 남부의 독립이야. 통일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거지. 그 말인즉 정부군하고는 태생부터가 공존을 할 수 없다는 걸세.”
날카로운 지적에 혁권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제안이라는 거야.”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자이드 국왕의 말이 이어졌다.
“만수르가 만남을 주선해 주기도 했거니와, 자네가 우리나라를 위해 몇 번 도와준 적이 있기 때문에 호의로 이 자리까지 앉게 된 거네.”
자이드 국왕은 만수르를 흘깃 쳐다보고 다시 혁권과 시선을 마주쳤다.
“안타깝지만 빈 살만 왕세자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가 없겠군. 돌아가서 그리 전해 주게나.”
자이드 국왕의 입에서 재차 거절한다는 말이 나왔음에도 혁권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무슨 수작이냐는 얼굴을 한 자이드 국왕이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봤다.
“아랍에미리트의 도움이 없다면 피해가 늘어나겠지만, 그래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지상전을 재개할 거고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전력에서 차이가 나는 후티 반군은 근거지를 모두 잃고 와해되고 말 것입니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데다가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적을 우습게 여기고 쳐들어갔다가 호되게 당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전력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중심이 된 아랍동맹군이 월등하게 높은 것이 사실이었다.
민간인 오폭과 여러 가지 악재들로 인한 국제사회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휴전을 맺기는 했지만, 계속 전투를 벌였다면 결국에는 아랍동맹군이 승리했을 터였다.
“만약 이대로 후티 반군 토벌이 완료된다면 예멘 정부군과 아랍동맹군의 칼날이 어디로 향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혁권의 이야기에 자이드 국왕이 눈썹 끝을 위로 치켜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