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898
898
“그게 무슨 말인가!”
“누구 앞이라고 감히······.”
자이드 국왕의 양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바삼 국방장관과 아심 국장이 동시에 얼굴을 붉히며 크게 반발했다.
거기다 만수르 회장 역시 상당히 거북한 표정을 하고선 탐탁지 않다는 듯 혁권에게 책망하는 시선을 보냈다.
“자네 말이 너무 지나친 것 같군.”
사방에서 압박감이 느껴졌으나 혁권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 있는 자이드 국왕하고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이자가 정말!”
눈을 부라리며 바삼 국방장관이 벌떡 몸을 일으키는 걸 자이드 국왕이 한쪽 팔을 들어서 제지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보고 빈 살만에게 허리라고 굽히라는 건가?”
“소모적인 다툼에서 벗어나 서로한테 이득이 되는 길을 선택하자는 것입니다.”
“흥. 결국 그게 그거지.”
“지금처럼 중동 정세가 엄중한 상황에서 같은 수니파이자 리더로서 양국이 힘을 합쳐 주변국들을 이끌어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듣기 좋은 말로 은근히 속살거리자 날이 서 있던 자이드 국왕의 눈매가 살짝 느슨하게 풀어졌다.
비록 알아차리기 힘든 변화였으나 상대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예리하게 관찰하던 혁권의 눈에는 꽤 괜찮은 징조로 여겨졌다.
“이번에 빈 살만 왕세자님의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사우디아라비아도 아랍에미리트의 곤란한 점을 해결해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령 올해로 예정되어 있는 유엔 비상임이사국 선거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자 테이블을 둘러싼 이들의 공기가 순간 바뀌었다.
다들 노련한 정치인인 만큼 겉으로 티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혁권의 말에 집중하여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자이드 국왕의 표정이 눈에 보이게 달라졌다.
“지금 유엔 비상임이사국 선거라고 했나?”
의도한 대로 관심을 보이자 그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영향력이 큰 사우디아라비아가 지지를 해 준다면 경쟁국인 카타르를 제치고 먼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으음.”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최근 위상이 깎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중동 맹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였기에, 혁권의 말대로 뒤를 밀어준다면 유엔 비상임이사국 선거에서 상당한 지지표를 끌어모을 수 있을 터였다.
카타르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아랍에미리트로서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아주 솔깃한 제안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두 측근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머릿속으로 득실을 따지기에 바빴고, 미리 귀띔을 받지 못했던 만수르 회장 역시 그에게 살짝 책망 섞인 시선을 보내고는 이복형인 자이드 국왕의 눈치를 살폈다.
“남부저항군 문제 역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인정을 받게 된다면, 후티 반군 토벌 이후에도 하디 대통령이 섣불리 건드릴 수 없을 테니, 비록 분리 독립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목표를 상당 부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나중에 예멘 정부군과 남부저항군이 정면충돌한다면 그건 아랍에미리트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는 신경전 정도에 불과했던 것과 달리 그리된다면 사실상 사우디아라비아하고 대리전을 벌이는 거였기에 껄끄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막말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겠지만 흘러넘치는 오일 달러와 달리, 인구가 극히 적은 아랍에미리트였기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작정을 하고 공격해 온다면 그걸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연방국의 특성상 일이 벌어졌을 때 다른 토호국들이 아부다비를 외면하고 사우디아라비아 쪽에 붙을 수도 있었기에 더욱 조심스러웠다.
조금이지만 상대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혁권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이드 국왕을 설득했다.
“그리고 생각을 조금만 뒤집어 본다면 지상전에 참가하더라도 남부저항군을 앞에 내세운다면 아랍에미리트의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점령지를 넓혀 영향력을 더 키울 절호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한쪽 손을 들어 턱수염을 매만지던 자이드 국왕은 이내 양옆에 앉아 있는 측근들하고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자이드 국왕이 어둡게 변한 눈동자로 깊은 생각을 하는 사이, 혁권은 상대의 표정 변화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신중히 지켜보았다.
속은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이쪽이 급하거나 초조한 기색을 드러낼수록 자이드 국왕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을 쉬이 들을 수 없을 것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입을 굳게 다문 채 고심을 거듭하던 자이드 국왕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어 혁권을 쳐다봤다.
“사우디아라비아와 하디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남부저항군의 자치권을 인정한다면 지상전에 참여하도록 하지. 물론 유엔 비상임이사국 선거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도 약속을 해 줘야 되겠지.”
그러자 혁권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물론입니다.”
자이드 국왕과의 면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혁권은 만수르와 함께 바깥으로 향하는 회장을 걸었다.
“이번에는 형님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해낼 줄은 몰랐군.”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목소리로 만수르 회장이 말했다.
“역시 보통 수완이 아니야.”
“회장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애초에 성사되지 못했을 일입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이번엔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을 뻔했어. 조금 도가 지나쳤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겠지?”
“예.”
자칫 했다가는 중간에 다리를 놔준 만수르 회장한테 피해를 줄 수도 있었던 일이었기에 혁권은 살짝 머리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어떻게든 일을 성사시키고 싶은 마음에 회장님께 누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만수르 회장도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고 넘어갔다.
“결과가 좋았으니 됐네. 하지만 앞으로는 조심을 하도록 하게.”
“그러겠습니다.”
“아무튼 일이 잘 끝나서 다행이야. 덕분에 고전하고 있던 유엔 비상임이사국 선거에도 힘이 붙게 생겼고 말이야.”
사우디아라비아뿐만 아니라 아랍에미리트도 얻을 걸 다 받아 냈으니 아주 만족할 만한 협상이었다.
협상이 잘 끝나 홀가분한 기분으로 호텔에 돌아온 혁권은 정장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창가 앞 소파에 앉았다.
차가운 얼음을 곁들인 위스키를 조금씩 홀짝이며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돌연 스마트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조금이라도 쉬게 해 주질 않는군.’ 하고 투덜거린 혁권은 이번엔 또 무슨 전화인가 싶어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만수르 회장의 연락인 것을 보곤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회장님.”
왕궁에서 헤어진 지 채 1시간도 안 된 때였다.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혁권이 전화를 받자 어둡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식 들었소?
뜬금없는 말에 그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무슨 소식 말씀이십니까?”
-이런 아직 모르고 있나 보군.
“······.”
뭔가 불길한 느낌이 뒤통수를 스치고 지나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온더록스 잔을 탁자에 내려놨다.
-아무래도 빈 살만 왕세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네.
방금 합의한 것을 뒤집는 말에 혁권은 정색을 한 채 귀에 댄 스마트폰을 고쳐 쥐었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겁니까?”
-방금 소식이 들어왔는데, NRF가 알무카에 있는 남부저항군을 기습 공격해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하네.
NRF는 사망한 살레 전 대통령의 조카인 타리크가 이끄는 친정부 성향의 무장 세력으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통일 예멘을 지지하는 쪽에 있어 분리주의인 남부저항군하고는 오래전부터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의 등장에 크게 놀라면서도 그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얼른 입을 열었다.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긴 하지만 두 세력이 부딪치는 건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지 않습니까? 그걸 가지고 굳이 협상을 깰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소. NRF의 박격포 공격에 재수가 없게도 알 알라비 중장이 전선 시찰을 나갔다가 그대로 폭사를 했다고 하오.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알 알라비 중장은 예멘에 파견된 아랍에미리트 군 총사령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반 사병이 희생됐다고 해도 문제를 풀기가 쉽지 않을 텐데 고위 장성이자 파견군 총사령관이 폭사를 당했다면, 이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
-함께 있던 부관을 비롯한 수행원들도 죽거나 크게 다쳐 아군 사상자만 열 명이 넘는 걸로 파악됐소.
알 알라비 중장 같은 고위급 장성이 혼자 움직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같이 있던 수행원들이 포격에 전부 다 한꺼번에 휩쓸렸을 터였다.
낮게 침음을 흘리는 가운데 만수르 회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크게 분노하신 형님 전하께서 당장 NRF에 보복을 하라는 지시를 군에 내리셨네.
“보복이라면······.”
-곧 F-16 전투기들이 출격해서 예멘 남서부에 위치한 NRF 주둔지에 공습을 가할 걸세.
알 알라비 중장의 사망에 공습까지 이어진다면 상황은 더욱 최악으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재고를 해 줄 수는 없는 겁니까?”
그러자 스마트폰에서 정색을 한 만수르 회장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치욕스러운 일을 당했는데 보복을 하지 말고 가만히 당하고 있으라는 건가?
실수를 깨달은 혁권은 얼른 사과를 했다.
“다급한 마음에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아무튼 일이 그렇게 됐으니 안타깝지만 조금 전 왕궁에서 형님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건 없었던 걸로 하도록 하게.
힘들게 일을 성사시켰는데 얼마 되지도 않아 허무하게 무산된 것에 속이 쓰렸지만 지금으로써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예.”
-결과가 이렇게 돼서 유감일세.
“아닙니다.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알라의 뜻이니 어쩌겠나?
“네.”
-난 다시 왕궁에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으니 다음에 또 연락하도록 하세.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혁권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잇새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하필이면 이 시점에 이런 일이 터지다니 어처구니가 없고 허탈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빈 살만 왕세자한테 결과를 보고하기 전에 상황을 알게 된 거였다.
만약 그랬다면 혁권 자신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빈 살만 왕세자를 농락한 꼴이 되어 버렸을 것이었다.
혁권은 열 받은 속내를 진정시키려고 차가운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었지만 그래도 좀처럼 기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유리잔을 거칠게 탁 내려놓고선 소파에서 일어나 방 안을 서성거리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걸려 있는 이득이 너무나도 컸다.
한참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민을 거듭한 그는 이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큰 소리를 말했다.
“하킴!”
그러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킴이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보스.”
“밖에 함단이 있으면 바로 들어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한 하킴이 방을 나가자 그는 얼굴을 굳힌 채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