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6
96
딱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던 샌더스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물론 샌더스 씨가 정보를 흘렸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관계자가 빼돌린 거겠지요. 어찌 됐건 연락을 해 온 구매자가 상당히 좋은 조건을 제시했고, 그걸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작품 전부를 다 넘길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먼저 약속한 것이 있으니 열 점을 그대로 경매에 내놓겠다는 겁니다.”
상체를 편 혁권은 앞에 놓여 있는 찻잔을 집어 들면서 말했다.
“나름 최대한 성의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만족을 못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나머지 작품들도 전부 다 넘기는 수밖에요.”
그러자 샌더스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미 초대장까지 다 발송한 상태에서 이대로 경매가 취소된다면 손해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특히 금전적인 손실보다 지금까지 오랜 세월 힘들게 쌓아 올린 신뢰에 흠집이 생기는 건 너무나도 큰 타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권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작품 소유자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로 한 약속을 먼저 깬 것이 되기에 책임을 묻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상황을 수습하려면 열 점이라도 받아서 경매에 올려야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샌더스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는 태도를 바뀌었다.
“흠흠. 아까는 내가 좀 흥분한 것 같습니다. 경매를 취소할 수는 없으니 일단 열 점이라도 내놓는 걸로 하지요.”
혁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예정대로 작품들을 보내도록 하지요.”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은 종이를 하나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경매에 올릴 작품 목록입니다.”
목록을 확인한 샌더스는 쭉정이만 빼놓은 것이 아니라 유명 화가의 작품이 서너 개 포함되어 있는 걸 보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보며 혁권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의도치 않게 일이 이렇게 됐지만 서로 앙금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자 샌더스도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지요.”
눈앞에서 큰 거래를 놓쳐 입맛이 썼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샌더스도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혁권은 원만하게 소더비 측과도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며칠 뒤.
런던을 떠난 혁권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서 어두운 밤바다를 가르며 달려가는 포세이돈 함 함교에 있었다.
부아아아앙!
1만 마력의 출력을 자랑하는 강력한 엔진 3대가 한꺼번에 내는 소음이 귓가를 가득 울리는 가운데 케노스 함장이 혁권에게 다가왔다.
“20분 뒤면 상륙 지점에 도착합니다.”
그러자 아직 어두운 밤하늘 밖에 보이지 않는 방풍창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혁권이 머리를 끄덕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놓지 말도록 해.”
“예.”
신중한 성격의 혁권이었지만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표정이 굳어 있었다.
바로 화물칸에 낙찰 대금으로 받은 현금을 가득 실은 대형 트럭 두 대가 실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와 모함메드 장관의 몫을 제하고도 무려 1억 3천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이러니 마음을 놓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케노스 함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레이더를 맡고 있던 선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함교를 울렸다.
“11시 방향. 모터보트로 추정되는 고속 물체 일곱 척이 빠르게 본 함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뭐야!”
화들짝 놀라 달려간 두 사람은 레이더 모니터에 선명하게 떠 있는 광점들을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이걸 왜 이제야 발견한 거야!”
케노스 함장의 호통에 선원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대답했다.
“근처에 있는 암초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 나오는 바람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젠장!”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선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상대가 미리 매복을 한 채 포세이돈 함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밀수품을 노린 걸 수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이런 일이 전혀 없다가 하필이면 거액의 달러를 실고 있을 때 공격을 해 오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사이 노련한 케노스 함장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처를 하기 시작했다.
“거리는?”
“5킬로미터입니다. 지금 상태라면 5분 안에 적과 접촉할 겁니다.”
“전원 전투배치!”
“전투배치!”
함교에 있는 선원들이 명령을 크게 복창하는 것과 동시에 갑판장이 손을 뻗어 비상벨을 울렸다.
삐이익! 삐이익! 삐이익!
요란한 벨소리가 함선 내부를 가득 채웠고 선원들은 신속하게 전투태세를 갖췄다.
그런 가운데 혁권은 적이 다가오는 방향을 노려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전투배치!”
갑판으로 뛰어 나온 선원들이 30mm 6연장 AK-630 대공포를 감추려고 씌워 놓은 천을 재빨리 걷어 냈다.
그러고는 AK-630 대공포가 장착된 포가에 선원들이 올라탔다.
곧바로 장착된 사격통제 레이더가 가동됐고 빠르게 접근해 오는 모터보트들을 포착하는 것과 동시에 6개의 포신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투투투퉁!
쏴아아.
고성능 엔진을 장착해 개조한 작은 목선木船 뱃머리에는 예전에 코린시아 호텔 테러를 벌인 알 무하마드가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면서 서 있었다.
사방이 어두운 밤이어서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저 앞에 있는 먹잇감을 노려보며 무하마드는 눈을 번뜩였다.
지난번 이슬람 형제단의 공격 때 형무소를 탈옥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스만!”
“예.”
“속력을 더 높이라고 해!”
“알겠습니다.”
우스만이 뒤로 가고 얼마 있지 않아서 그가 탄 모터보트는 더욱 출력을 높여 날아가듯 파도를 가르며 돌진했다.
좌우에 있던 배들도 그를 따라 속력을 올렸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서 달려드는 모습이 마치 굶주린 하이에나 떼 같았다.
이대로 달려가서 RPG-7으로 포세이돈 함을 멈춰 세운 뒤 실려 있는 화물과 현금을 강탈해 갈 계획이었다.
강한 바람에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바라보던 무하마드는 시뻘건 불덩이들이 날아오는 걸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이내 불덩이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다급히 고함을 내질렀다.
“이런 기관포다! 어서 피해.”
소리를 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무하마드가 탄 모터보트는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물보라가 튀며 선체가 거의 크게 출렁이자 무하마드는 모터보트에서 튕겨 나가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난간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간발의 차이로 불덩이들이 방금 전까지 무하마드가 있던 곳에 떨어졌다.
다른 모터보트들도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면서 회피운동을 실시했다.
하지만 모두가 무하마드처럼 운이 좋지는 않았는데 왼쪽 끝에 있던 모터보트 한 척이 그만 기관포탄에 직격당하고 말았다.
강력한 30mm 대공포탄은 선체를 이루고 있던 얇은 합판을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퍼퍼퍽!
콰쾅!
“꾸엑.”
“아악!”
연료에 불이라도 붙었는지 작은 모터보트는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채 폭발했다.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불기둥을 보며 무하마드가 고개를 뒤로 돌려 키를 잡고 있는 부하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어서 거리를 바짝 붙여!”
출력을 최대로 올린 모터보트는 뱃머리를 거의 들다시피 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가지고 있는 RPG-7으로 상대에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최소한 500미터 안까지 접근해야 됐다.
분당 3천 발을 쏠 수 있는 6연장 AK-630 대공포가 쉬지 않고 포탄을 쏟아 냈다.
투투투퉁!
“쏴!”
붉은색 예광탄 줄기 6개가 화망을 이루면서 어두운 밤하늘을 꿰뚫고 날아가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렇게 발사된 포탄은 적이 탄 모터보트를 갈기갈기 찢어 놓으면서 죽음을 선사했다.
“탄약을 더 가져와!”
“적들이 계속 달려들자나! 어서 박살 내 버려.”
포술장의 악다구니를 들으면서 선원들은 대공포 양옆에 달린 핸들을 정신없이 돌려 적을 겨냥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팔 근육이 터질 것 같았지만 적을 막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리 사격통제 레이더가 장착되어 있다지만 출렁임이 심한 배 위에서 적을 정확하게 조준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이리저리 방향을 틀면서 격렬하게 회피 기동을 하고 있었기에 더욱 맞추기가 힘들었다.
“이 날파리들이!”
날아간 포탄이 애꿎은 바다 위를 맞히고 겨냥했던 모터보트가 간발의 차이로 피해 버리자 선원이 욕설을 내뱉었다.
“뭐 해! 어서 다시 쏴!”
“예.”
선원들은 다시 대공포를 조작해서 검은 바다 위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서 곧장 이리로 달려오는 모터보트를 조준했다.
다시 한 번 빛줄기가 포신에서 뻗어 나갈 때 모터보트들이 시뻘건 불덩이들을 쏘아 올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저건!”
“씨팔. RPG다!”
어느새 최대 사거리인 500미터 안까지 들어온 적들이 RPG-7을 쏜 거였다.
시뻘건 불덩이가 접근해 오는 걸 함교에서도 발견했다.
“우현 전타! 빨리 방향을 틀어!”
케노스 함장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조타수가 오른쪽으로 키를 최대한 돌렸다.
그러자 빠르게 달려가고 있던 공기부양정이 뒤집어질 듯 한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크읏!”
함교 밖에 나와 있던 혁권은 휙 쏠리는 무게중심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난간을 붙들고 이를 악물며 버텼다.
몸이 반절이나 바깥으로 빠져나와 있는 덕분에 부딪친 파도가 그의 머리칼을 축축하게 적시고, 입은 짠맛으로 가득했다.
크악, 윽 하는 소리가 신음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갑판을 쿠당탕 구르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혁권도 정신이 없어 주변을 둘러볼 상황이 아니었다.
“푸하!”
등을 난간에 기대고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간신히 옆으로 치운 혁권은 황급히 손으로 눈가의 물기를 닦아 냈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옆에 있던 하킴이 소리를 지르면서 그를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위험합니다!”
그 순간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내며 날아온 로켓탄이 선체 상부 구조물에 틀어박히면서 터졌다.
쉬이이익!
꽈아앙!
고막을 찢는 굉음이 울리면서 알루미늄 합금으로 만들어진 선체 벽이 흉하게 찢겨 나갔고 폭발 충격에 공기부양정이 크게 흔들렸다.
“으으.”
“괜찮으십니까?”
“그래.”
귀가 먹먹했지만 애써 참으면서 일어난 혁권은 로켓탄에 직격당한 지점을 확인하고는 얼굴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선체 일부에 구멍이 뚫린 채 마치 종잇장처럼 찢어져 있고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제길!”
이제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접근한 모터보트들을 노려보며 부드득 이를 간 혁권은 쉴 새 없이 포탄을 쏟아 내고 있는 대공포로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어서 저것들을 잡아!”
혁권의 고함이 아니더라도 모터보트를 막지 못하면 자신들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선원들도 필사적으로 대공포를 쏴 댔다.
투투투퉁!
선체를 뒤흔드는 강한 충격에 함교에서도 피격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어디서 난 소리야!”
“선체 후방에 맞은 것 같습니다.”
“뭐라고! 기관실 연결해.”
함교 요원 한 명이 선내 인터폰을 들고 급히 기관실을 연결하고는 케노스 함장한테 건넸다.
“함장이다. 기관실 상황을 보고해라!”
치칙.
잡음과 함께 기관사인 제노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방 먹었지만, 기관실 위에 있는 선실에 맞아서 엔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보고를 들은 케노스 함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