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980
980
#암운暗雲
기체에 필리핀 항공이라는 영문 이니셜이 선명하게 새겨진 보잉 767 여객기가 하얀 구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고는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둥근 방풍창 너머로 고개를 돌리자 발아래에 드넓게 펼쳐진 황색 서해 바다 위로 드문드문 떠 있는 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바닷가에 길게 뻗어 있는 활주로를 가진 어마어마한 크기의 인천 국제공항이 보였다.
일등석에 앉은 김인철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눈에 익은 경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내 양쪽 날개에서 바퀴가 빠져나오며 활주로로 접어든 여객기는 얼마 있지 않아 약간의 충격과 함께 지상에 내려앉았다.
로페즈와 함께 캐리어를 챙겨 비행기에서 내린 김인철은 같이 마닐라에서 온 승객들 무리를 따라 입국 심사대 앞에 늘어선 줄에 섰다.
빠르게 줄어드는 내국인 전용 줄과는 달리 외국인은 좀 더 깐깐하게 심사를 하는지라 시간이 걸렸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자기 차례가 되자 김인철은 심사관에게 여권을 내밀었다.
만약 여기서 위조 여권인 것이 발각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긴장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을 때 심사관이 여권을 펼쳐 보고는 ‘어라?’ 하면서 말했다.
“한국분 같으신데······.”
“교포입니다.”
“아, 그렇군요.”
심사관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눈가를 가리켰다.
“선글라스도 벗어 주세요.”
상대의 말대로 얌전히 선글라스를 벗은 김인철은 사진과 제 얼굴을 번갈아 보는 심사관의 행동에 절로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여행 목적은요?”
“개인 사업차 들렀소, 바이어와 미팅 약속이 있어서.”
심사관은 제대로 양복과 구두를 갖춰 입고 있는 김인철의 옷차림을 보더니 ‘그렇습니까.’ 하면서 다시 한번 여권 사진을 살폈다.
앞 사람은 금방 통과시켰으면서 그에게만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었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소?”
결국 초조함에 못 이긴 김인철이 그렇게 말하자 심사관은 하하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야, 이거 죄송합니다. 사진이 제법 잘 나온 것 같아서요.”
고작 그런 시답잖은 이유였나 싶어 어깨에 힘이 빠진 순간 심사관이 여권에 도장을 찍고 돌려주었다.
그 뒤는 바로 로페즈의 차례였으나 이번에도 몇 번 의례적인 질문만 하고선 쉽게 통과시켜 주었다.
딱히 이쪽을 힐끔거리지도 않고 전혀 의심하는 기색이 없는 걸로 보아 지루한 업무에 잠깐 잡담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괜히 사람 불안하게 하고 있어.’
김인철은 선글라스 너머로 숨겨진 눈매를 한껏 찌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 입국장을 나왔다.
그러자 노타이 차림의 젊은 필리핀 사내 두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앞으로 다가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앙헬리스에 머무는 동안 경호원으로 데리고 있던 자들로 사흘 전에 미리 한국에 보내 놨었다.
그는 거만한 태도로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차는 어디에 있지?”
“주차장에 세워 뒀습니다.”
로페즈한테서 짐을 건네받은 사내들의 안내를 받아 지하에 위치한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긴 김인철은 검은색 벤츠 승용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승용차가 공항 청사를 빠져나와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록신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조수석 글로브박스에서 반으로 접힌 서류 봉투를 하나 꺼내 김인철한테 건넸다.
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걸 꺼내자 칠이 살짝 벗겨진 미군 제식 권총이었던 베레타 M9 권총이 나왔다.
요즘 나오는 권총들하고 달리 손안에 꽉 차고 묵직한 느낌이 있었다.
“평소 쓰시던 놈으로 구했습니다.”
필리핀에 있으면서 사격을 즐긴 김인철은 제법 능숙한 동작으로 탄창을 빼내 총알이 가득 채워져 있는 걸 확인하곤 상의를 들춰 허리 뒤춤에 베레타를 찔러 넣었다.
“녀석은 어떻게 됐어?”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대고는 툭 내뱉듯이 묻자 록신이 몸을 뒤로 돌린 채 영어로 대답했다.
“보고드렸던 대로 계속 외국에 있다가 얼마 전에 입국해서 서울에 머물고 있습니다.”
“흥. 내가 왔으니 이제 그 자식 명줄도 여기까지야.”
서늘하게 한기가 느껴지는 얼굴로 그렇게 말한 김인철은 앞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일단 호텔로 가지.”
“예.”
대답을 들은 김인철은 고개를 돌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 한국의 모습이었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감상을 불러일으킬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김인철은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애시 당초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느낄 정도로 감수성이 있는 인간이었다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 하나 없이 지금처럼 살진 않았을 터였다.
그는 다만 거의 쫓기다시피 하며 도피한 땅에 다시 한번 발을 디뎠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무참하게 짓밟힌 자존심을 이번에야말로 되찾기 위해서 말이다.
“아!”
소현이 깜짝 놀란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케줄이 비는 틈을 타 혁권의 집에 놀러 온 소현이 이제 막 커피를 다 마시고 잔을 치우려던 찰나였다.
서로 장난치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한눈을 파는 바람에 손이 미끄러져 테이블에서 찻잔이 떨어졌던 것이었다.
“어머, 어떡해?”
소현은 허리께를 간질이던 혁권의 손을 내치면서 눈을 흘겼다.
“그러니까 하지 말랬잖아요!”
“미안.”
잔소리가 쏟아질 것을 예상한 혁권이 이크, 하고 피하는 시늉을 하자 소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괜히 사고를 쳐서 일을 만든다니까.”
“치우지 말고 그냥 놔둬.”
“그래도 위험하니까 큰 것만이라도······ 아야.”
쪼그려 앉아 깨진 파편 조각을 집어 들던 소현이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움츠렸다.
“다쳤어?”
순식간에 심각해진 얼굴로 혁권이 얼른 손가락을 살폈다.
다행히 조금 베인 것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티 하나 없이 매끈하던 손가락에 상처가 생긴 것을 본 혁권이 속상한 듯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이리 와서 연고 바르자.”
“그럼 깨진 건 어떡하고요? 그냥 놔두면 밟을 수도 있고 위험한데······.”
“나중에 도우미 아줌마 불러서 치우라고 할 테니까 넌 치료부터 먼저 해.”
그렇게 큰 부상도 아닌데 호들갑을 떠는 혁권의 행동에 소현은 피식 웃으며 알겠어요, 하고선 일어났다.
혁권의 집엔 만약을 대비한 구급 의약품이 항상 상비되어 있었기에 연고와 반창고 정도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혹시 모르니까 파상풍 약도······.”
“됐거든요.”
그냥 놔두면 응급실까지 데려갈 기세라 소현은 혁권의 말을 단칼에 잘라 버리곤 핸드백을 집어 들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아까 깨진 거 잊지 말고 꼭 치워야 해요!”
“알았어.”
혁권은 손을 흔들어 소현을 배웅한 후 매니저의 차를 타고 떠나는 뒷모습까지 확인하곤 도로 거실로 돌아왔다.
그새 도우미가 들어와서 정리를 했는지 바닥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다리를 꼬고 소파에 앉아 소현이하고 있는 동안 참았던 담배를 입에 물자 하킴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줬다.
“최필성이라는 분한테 전화가 왔었습니다.”
최필성이라면 DK정유에 다니는 대학 선배로 리비아산 원유를 처분하면서 몇 번 거래를 했던 사이였다.
“용건이 뭐래?”
“비즈니스에 관한 거라고만 밝히고 자세한 건 직접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도움을 받은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었기에 그는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화를 걸어 봐.”
“예.”
얼마 있지 않아 통화가 연결됐는지 하킴이 내미는 스마트폰을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아. 나야. 최필성. 바쁜데 연락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괜찮아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뭐. 항상 똑같지. 월급쟁이가 별다른 일이 있을 것이 있겠어.
“사업에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요.”
몸을 뒤로 기대면서 묻자 최필성이 목소리를 살짝 굳히고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요즘도 원유 거래를 하고 있어?
딱히 비밀도 아닌 데다가 왜 이런 걸 묻는 건지 대충 상대의 속내를 짐작한 혁권은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계속 손을 대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
최필성이 밝아진 목소리로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러면 지난번처럼 원유를 구매했으면 하는데, 가능하겠어?
“얼마나 필요합니까?”
-물량이 되는대로 최대한 확보를 했으면 해.
뭔가 다급해 보이는 느낌에 그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회사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러자 최필성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에 미국이 이란산 원유 수입 재제 일시 유예를 완전히 종료해 버린 건 알고 있을 거야.
양국 관계가 악화되면서 미국이 이란을 압박하기 위해 제일 먼저 꺼내 든 경제재제 카드가 바로 이란산 원유 수입 금지 조치였다.
한마디로 이란에서 채굴된 원유를 수입해서 쓰지 말라는 거였는데, 수출 대부분을 원유 판매에 의존하는 이란으로서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들 가운데서도 바로 이란산 원유 수입이 끊기면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곳들이 있었기에, 몇 개월간 한시적으로 유예 조치를 내려 줬다.
한국 역시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란 원유 의존도가 높은 만큼 분위기가 잘 풀려 유예조치 연장되길 기대했지만, 페르시아만에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미국이 아예 제재 예외 국가를 전부 없애 버리자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정부의 지시로 수입 비중을 줄여 나가고는 있었지만, 이번 달에 들어오기로 예정되어 있던 물량이 400만 배럴이나 됐는데, 그게 갑자기 막히는 바람에 대체할 원유를 구한다고 회사가 완전 발칵 뒤집혔어.
하루에 250만 배럴씩 수출되던 이란산 원유가 갑자기 시장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웃돈을 주고도 물량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일 터였다.
그 역시 미스라타에서 캐낸 원유를 가져와 팔면서 이번 조치로 꽤 짭짤한 이득을 보고 있었다.
“조건만 맞다면 매달 최대 300~400만 배럴 정도 공급을 해 줄 수 있습니다.”
-저. 정말이야?
잔뜩 흥분해서 당장이라도 달려올 것 같은 최필성하고 달리 혁권은 반쯤 피운 담배를 비벼 끄며 상대적으로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배럴당 얼마를 쳐줄 겁니까?”
-국제시세대로 계산하면 되지 않겠어.
“그건 곤란하지요. 물량이 없는 상황인 데다가 리비아에서 나오는 건 유황이 거의 포함되지 않은 최고급 원유인데, 국제원유 가격에 맞춰서 팔면 내가 손해잖아요. 선배가 부탁을 해서 도와드리는 건데 이거 실망이군요.”
평소에 알고 지내는 지인이라 해도 결코 손해 볼 거래를 할 생각은 없었다.
칼로 딱 자르는 것처럼 그리 말하자 최필성이 금방 꼬리를 내리고 굽히는 태도를 취했다.
-미, 미안. 급한 마음에 말이 헛 나왔어. 정말 미안하다.
“이번엔 그냥 넘어가죠. 하지만 다음부턴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래. 고맙다, 진짜. 내가 너 없으면 어떻게 사냐.
하하 웃는 말끝이 살짝 떨리는 게 십년감수했다고 속을 쓸어내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선배 체면도 있으니 배럴당 딱 10센트씩 더 쳐주면 물량을 넘기도록 하지요.”
-10센트라······.
한화로 100원 남짓한 돈이었으나 원유 총량에 더하게 되면 액수가 엄청 커졌다.
“대신 200만 배럴은 이주일 안에 넘겨주도록 하지요.”
-진짜로 그래 줄 수 있겠어?
“이삼일 안으로 가지고 나올 물량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합니다.”
-오오. 그래.
자밀 의장을 밀어낸 후세인 준장이 트리폴리 통합 정부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지만 내전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기에 원유가 저장 탱크에 쌓이는 대로 곧장 빼내 오고 있었다.
물론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원유를 유조선에 싣고 나오자마자 바로 판매가 이루어질 정도로 시장에 물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점점 격화되면서 국제 원유 가격이 강한 상승 압박을 받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아니나 다를까 최필성 역시 혹시라도 물량을 놓칠까 봐 길게 줄다리기를 하지 않았다.
-바로 윗선에 결재를 올려서 승인을 받을 테니까 절대 다른 데 물량을 넘기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줘.
“그리 오래는 시간을 못 드립니다.”
-하루. 아니, 반나절만 줘.
“그러지요.”
통화를 끝낸 혁권은 옆에 서 있던 하킴한테 스마트폰을 돌려주며 지시를 내렸다.
“아테네에 연락해서 유조선이 많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 서너 척 더 확보해 놓으라고 해.”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