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Drama King RAW novel - Chapter (166)
“그럼 곽 감독은 신혼여행은 미루기로 한 거야?”
“응. 촬영이 한창이니까 끝나고 가신다는 모양이야.”
“그렇겠지······.”
서예린의 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납득만 했다는 식일 뿐 주름진 얼굴에는 시원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들도 참, 늦은 나이에 결혼하는 데 그렇게 타협할 필요가 있나.”
“곽태영 감독님도 꽤 소탈하신 분인데 아내분도 만만치 않으신 모양이야. 굳이 갈 필요 있냐고 직접 그러셨다던걸.”
조카의 옹호에 서수현 작가는 되레 혀를 찼다.
“그런 건 여자가 그렇게 말해도 남자가 눈치를 써줘야 하는 거야. 평생에 한 번뿐인 결혼 아니야? 얼마나 아쉽고 설움이 남겠어.”
“···꼭 평생에 한 번뿐이라는 건.”
무심코 반박한 서예린이 아, 하고 말을 멈췄다.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에 대한 악담이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기색이었다.
뭐, 서수현도 조카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는 했지만 목석같이 생긴 놈도 그럴 줄은 몰랐네.”
어쩔 줄 몰라하던 서예린은 그 말에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고모는 그런 조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 피디 일, 혹시라도 네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라. 뒤로 넘어갈 테니.”
“뭘 굳이 그렇게··· 오래 된 일이라잖아. 진짜 한 것도 아니고.”
“결혼 생각하던 여자가 있다는 게 문제가 아니야. 그렇게 지나고도 아직 미련이 있다잖냐.”
서수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 마음은 새야. 두 다리로 기어 다녀서 이제 됐거나 마음을 놓으면 언제든지 훨훨 날아가게 마련이란 말이야.”
“그건 고모 드라마에서나 그렇고.”
“내 드라마는 다 세상 얘기 가지고 만든 거야. 가짜에서 온 건 하나도 없어.”
“···잘나셨네요.”
악담을 하는 건 대개 더 할 말이 없을 때이게 마련이다. 서수현은 조카의 반응에 답답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둘은 한동안 차를 마시며 조용히 침묵을 유지했다.
한참 후에 다시금 운을 띄운 건 조카 쪽이었다.
“···그럼, 고모는 이제 반대인 거야?”
“나는 그간 이 피디가 너한테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래저래 도와줬던 거고.”
서수현 작가가 한숨을 쉬었다.
“네 원고 초고를 통째로 외워다가 내 앞에서 읊어댈 때는 이게 웬 떡이냐 싶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쿵짝이 잘 맞는 걸 보면서 남녀로서가 아니라 동반자로서도 이만한 녀석이 없다 싶었어.”
“그러면······.”
“그런데 착각이었잖니.”
서예린은 재차 무어라 말하려고 했지만 진지한 얼굴을 보고는 말을 거두었다.
최근 얌전해진 성격만큼이나 상처가 드물던 입술이 재차 짓이겨졌다.
“됐어, 나도 이제 도와달라고 안 할 테니까.”
“예린아.”
“그 사람이 뭘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계획이 있다는 건 알아. 항상 그래왔으니까.”
바꿔 말하자면, 서예린 대신 김경숙을 선택한 건 자신이 그 계획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그럼 우선 그 인식을 박살내는 수밖에는 없다.
스타트라인은 그 후가 될 터였다.
“이 피디님께는 미안하지만 그 드라마를 애국가 시청률대에 박아버릴 거야. 그럼 생각이 좀 달라지시겠지.”
예전, 이현석이 처음 만났을 때의 서예린과 비견할 만한, 아니 그보다 더한 표정이었다.
“······.”
서수현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나름 오래 살아온 그녀도 저런 모습을 응원해야 할지 꾸짖어야 할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민하던 서수현은 이내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될 대로 되겠지.’
사실상의 포기였다.
#
“그나저나 어머니는 길이라도 잃으셨던 겁니까?”
결혼식이 끝나고 집으로 차를 몰며 내가 물었다.
식이 시작하기 전 지금 가겠다고 문자를 남겼던 어머니는 그로부터 20분 가까이 지난 식 중간에야 나타났다. 기다리다 못한 내가 걱정스러워져 찾으러 가려 일어섰던 무렵이었다.
“아니야. 그냥 시간 걸릴 일이 좀 있었어.”
“···내시경 검사는 잘 받고 계시죠?”
“어이구야, 그건 절대로 안 빼먹는다 이 녀석아. 네가 저번에 얼마나 지랄발광을 했는데.”
어머니가 혀를 찼다.
“의사도 반년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하는 걸 뭘 대학병원까지 가서 매달 받으라는 건지 원.”
“어머니.”
“어이구, 알았다니까!”
어머니는 신경질을 냈지만 이것만큼은 나도 타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전, 어머니의 사인은 위암이었다. 워낙 건강검진 같은 걸 질색하시던 분이라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시기로 따지면 지금부터 조짐이 생길 즈음이다. 마음 같아서는 2주일, 아니, 매주 받으시도록 하고 싶다.
의사가 한 달에 한 번도 충분하다 못해 과하고, 오히려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설득해 납득하긴 했지만 영 미심쩍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여간에 귀염성 없는 자식이 됐어. 예전에는 그렇게나 하는 짓이 귀여웠는데.”
“냅두십쇼.”
내가 정면을 보고 있자 삐졌냐? 삐졌지? 하고 어깨를 쿡쿡 찌른다. 하여간에 이 여사님이 사람 속도 모르고.
어머니는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예전에는 안 이랬는데, 하고 땅이 갈라져라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저번에 도나 왔을 때 앨범이라도 보여줄 거 그랬어. 그 때 기타 들고 찍은 사진 있었잖아. 우리 애가 이렇게 이뻤는데, 하고.”
“···그 정도로 보따리 풀었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보다 언제부터 호칭이 ‘도나’가 됐는지 모르겠다. 서예린 작가의 경우는 아직도 서 작가님이고 심지어 지아에 이르러서는 유지아 양인데.
그 인간의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던 걸까?
“됐다, 됐어. 이제 너한테는 기대도 안 해. 빨리 결혼이나 해서 딸자식 같은 며느리나 하나 생기게 해줘라. 그게 빠르겠다.”
“글쎄요······.”
나는 적당히 말끝을 흐리며 넘겼다.
뭐,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면 당장에 성화를 부리실 테니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하여간에, 하고 고개를 젓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나저나 현석아.”
“왜요, 또.”
“너네 회사에 그, 여자애들 있잖아?”
“여자애들이요?”
“그, 여럿이서 춤추고 노래하고 그러는 애들.”
“걸그룹.”
“그래. 에어컨인지 뭔지 하는 애들.”
에어컨이라니. 강아라가 들으면 당장에 비명을 지를 법한 호칭이었다.
나는 내심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에어리즈입니다. 걔네들이 왜요?”
“내가 오늘 누구한테 듣기로는, 거기 막내인 애가 좀 많이 그렇다고, 조심하라던데 정말이냐?”
잠시간의 간격 후 내가 되물었다.
“누가요?”
“말 안 하련다.”
“······.”
#
나는 어머니께 그런 사실 없다고, 누구한테 들었는진 몰라도 아무 말이나 함부로 믿는 건 좋지 않다고 설득했다.
어머니는 마지못해 수긍하긴 했지만 납득한 태도는 아니었다.
아무튼 조심하는 게 맞다고 우기는 모습은 어릴 적 용하다는 곳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듣고 왔을 때를 연상케 했다. 한 번도 들어맞은 적은 없었지만.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저기, 저는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닷!”
“······.”
뭐라는 거지.
내 황당한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강아라는 잠시 주눅이 든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털어냈는지 곧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옛 사랑은 옛 사랑! 버스 가고 벤츠 온다!”
“넌 버스고 뭐고 사귄 적도 없잖아, 이 멍청아!”
나는 셋째 언니한테 귀를 잡혀 끌려가면서도 바락바락 외치는 강아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둘째 언니인 주리 양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그 뒤를 쫓아갔다. 멀찍이서도 셋이 외치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하란다고 진짜 하냐? 도르신? 강아라 님 도르신?!”
“아니야, 이 멍청아! 지금 확실히 말씀드려야 돼!”
“지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네 대가리가 드디어 회까닥 했다는 거야, 이 돌고래보다 못한 년아!”
“얘들아, 다 들리잖아······!”
촬영장 스태프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으로 이 기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허겁지겁 뛰어온 로드가 고개를 숙인 뒤 보이지 않게 되자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김철 선배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석아. 쟤 지금 자기가 버스라는 거 아니냐?]‘···거 시집도 안 간 애한테 못 하는 말이 없으십니다.’
음, 글쎄.
고장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고 어머니의 점도 가끔은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뒤따라 들어오던 김경숙 작가는 기가 차다 못해 도리어 차분해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뭔가요, 저 정신 나간 애는?”
“그··· 평소에는 저 정도는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촬영장에서 얼굴이야 봤겠지만 둘은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김경숙 작가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표정을 바꿨다.
“이설 양은 아직인가요?”
“곧 오겠다고 합니다.”
“좋아요. 그럼 먼저 시작하지요.”
김경숙 작가는 가방에서 원고를 세 개 꺼내 올려놓았다.
“어차피 뒤는 정해져 있으니 중간 과정을 조금 바꿔봤어요. 차례로 A안부터 C안이라고 해두지요.”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일반적으로 대본은 늦게 나올 수는 있어도 함부로 바꿀 수는 없다. 이미 나온 데 따라 장소 섭외나 곡 의뢰 등의 기반적인 작업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따라서 대본을 바꾼다는 건 이미 정해진 장소에서, 이미 완성된 음악에 맞추면서 상세를 바꿔야만 가능한 거다.
말이 쉽지 어지간한 실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세 개를 동시에 뽑는 작업량이 되면 더욱이 그렇다.
“각각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배우한테 부담이 많이 걸리는 순서에요. 마지막 게 제일 낫지만 이설 양이 고생을 좀 해줘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씀은?”
“한 화에 인격 세 개를 동시에 연기해야 해요.”
음.
난 이설을 꽤 신뢰하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무리한 요구다. 나는 두 번째 원고부터 집어 들었다.
“저도 봐도 되나요?”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언제부터인지 이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기척 좀 내고 다녀라.”
“네에.”
영 심장에 나쁜 모습에 한 마디 하니 이설은 방긋방긋 웃으며 대답한 뒤 원고를 들춰보기 시작했다.
어째 희한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 보인다.
“떡볶이를 먹으면서 성격이 세 번 바뀌네요?”
“가능하겠어요?”
“네. 전 떡볶이를 좋아하거든요.”
김경숙 작가가 뭔 개소리냐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설은 그대로 나를 돌아보았다.
“감독님은 어떠세요?”
“난 별로인데.”
애초에 떡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별로셨구나.”
이설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
나와 김경숙 작가는 가만히 시선을 교환했다.
이 녀석 뭐 잘못 먹기라도 했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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