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live the protagonist!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
135화.
탈모(脫毛).
유전자를 통해 전해 내려지는 피의 새겨진 저주다.
후대에 걸쳐서 남자들에게 전해지는 이 저주에 걸리면 피할 방도가 없다. 아무리 많은 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강한 권력과 끝없는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두피에서 이별을 고하고 떨어져 나가는 머리털을 붙잡을 순 없다.
“대머리가 되느니 차라리 암에 걸려 뒤지고 말지. 나는 그렇게 못 살아.”
누가 봐도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젊은 외모의 청년도 순식간에 중년의 아저씨로 만들어버리는 악랄한 질병. 이것에 걸리느니 차라리 암에 걸려 뒤지는 것을 선택할 정도로 사람들이 치를 떠는 유전병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피의 저주에 걸려 있었다.
“흐음······. 내 유전자 구조는 또 처음으로 분석해 보네.”
실리코프 한국 지사에 설립된 연구실. 그 연구실을 통째로 전세 낸 나는 마지막 남은 방학 기간을 불태워가며 골똘히 개발에 매진하고 있었다.
– 관리자님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이후 탈모가 진행될 확률이 94.7%로 나왔습니다. 기본적인 생활 습관에 주의하십시오.
“그럴 필요 뭐 있겠어? 95% 정도면 아무리 아등바등 기를 써도 머리털 빠진다는 건데 그럴 거면 빠지기 전에 하얗게 불태워야지.”
머리털을 지키겠다고 온갖 식이요법을 동원해가며 철저하게 생활 습관을 개선한다 하더라도, 빠진 머리가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니다. 게다가 빠지기로 한 머리털이 마음을 바꿔먹고 다시 머리에 붙어있는 것도 아니기에 나는 아르고스의 조언에 콧방귀를 뀌어댔다.
“식이요법이나 생활 습관 개선을 하면 된다는 말들은 죄다 엉터리라고. 그냥 자기가 직접 치료 못 하니까 환자보고 알아서 하라고 떠넘기는 거지. 별 효과도 없는데, 그거 머리털 하나 보전하겠다고 무슨 자연인 같은 삶을 살아가면 그게 행복해?”
투덜거리며 나는 내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탈모의 저주를 모니터를 통해 바라봤다. 얼키설키 이어진 유전자의 사슬에 한 부분. 그 일부가 내 머리를 언젠가는 문어 대가리로 만든다는 점이 참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였다.
– 관리자님. 어떻게 탈모를 치료하실 생각입니까? 현대 기술로 인간의 유전자를 개조하거나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 유전자는 태어나지도 않은 배아 상태에서나 겨우 조작할 수 있지, 이미 다 자란 10대에서는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아르고스는 이 세계의 모든 의학적 지식을 분석해봐도 탈모를 치료하기 위한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유전자 자체를 건드릴 생각은 없어. 그랬다가는 생명 윤리라든가 잡다한 규정 위반이라면서 온갖 시비를 다 걸어댈 거 아냐?”
어떤 질병에 걸리든,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원인이 내 몸을 구성하는 일부라면 제거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미 그런 방법은 완성되어 있었다.
똑똑
갑자기 누군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유진이 의아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차폐된 연구실 문을 열어주었다.
“도대체 여기는 왜 오라고 하신 거예요?”
새하얀 실험실 복으로 완전무장한 채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다짜고짜 나에게 물었다.
“왜 오라고 했겠어요? 오랜만에 유진에게 시킬 일이 있으니 오라고 했죠.”
여유롭게 그녀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나는 바쁘게 피펫을 놀리며 시약을 옮겨 담았다. 그리고 유진은 내 행동을 유심히 쳐다보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또······.또 뭘 만들고 계신 거예요?”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올해의 노벨 의학상이요.”
“노벨 의학상이요?”
“네. 전에 말했잖아요? 노벨물리학상부터 화학상, 의학상까지 한 번씩 받겠다고요.”
정확히 3년 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화학상을 내 이름으로 연달아 받아냈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의학상도 암 치료제인 킬 코드와 신체 완벽 재생체 불로초로 2번은 더 수상해야 했지만, 내 이름이 아니라 실리코프 사의 연구진들 이름이었기에 공식적으로 내 이름이 적힌 노벨 의학상은 아직 없었다.
“그거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냥 해본 말 아니었어요?”
내가 노벨 의학상을 운운하자 유진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이미 노벨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생했던 그녀였기에 내가 또 다른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겠다는 것에 대해서 불안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 리가요? 원래라면 작년에 냈어야 했는데 2년 동안 좀 바빠서 보류하고 있던 거에요. 이제 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금은 뜻깊은 무언가를 해 놔야죠.”
이번 방학에는 로켓 발사에만 온 신경을 다 퍼부은 탓에 뭐 딱히 이룬 게 없었다. 그저 가만히 통제실에 앉아서 발사 준비 작업이 잘 진행되나 구경하면서 버튼 몇 개만 누른 게 다였다. 그러다 보니 이번 방학은 너무 헛되게 보냈다는 현자 타임이 너무 강하게 왔다.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던 모든 프로젝트가 내 손을 떠나가 버리니 할 일 없이 심심해진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지금 뭘 만드시는 건데요?”
“탈모 치료제요.”
“네······? 탈모요?”
“네. 왜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진을 보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그녀의 반응이 꽤 평온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할 지경이었다.
“아뇨······. 뭔가 민수님 치고는 꽤 평범한 거 만들고 있다 싶어서요.”
“이게······. 평범하다고요?”
탈모 치료제가 평범하다는 유진의 말에 오히려 내가 할 말을 잃었다.
“네. 탈모 치료제나 발모제 같은 것들은 이미 시중에도 많이 나와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그걸로 노벨상을 받을 수는 있을까요? 그보다 차라리 요즘 유명한 호흡기 질환인 사스(SARS)나······.”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실소를 내뿜었다. 그리고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유진은 잘 모르겠군요.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말이에요.”
“네?”
한올 한올 사라져가는 머리털을 붙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남자들의 고통을 여자인 유진이 깊이 공감할 리 없었다. 게다가 여자 중에서 대머리가 되어 고민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그녀의 반응은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진, 우리 내기할까요?”
“무슨 내기요?”
“과연 제가 만드는 이 발모제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나 말이에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아주 재미있는 한 가지 발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 자라나라 머리머리가 얼마나 엄청난 가치를 가졌는지 직접 뼈저리게 느끼도록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말이다.
“도대체 무슨······.”
유진은 사악하게 히죽히죽 웃고 있는 민수의 얼굴을 보며 일순간 엄청난 불안감을 느꼈다.
*
“하아······.”
민수 아빠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요즘 잠에서 깨어나서 먼저 밤에 베고 잤던 베개를 확인하는 것이 첫 번째 일과가 되었다.
“오늘도네······.”
자고 일어나면 배게 주변에 가득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그는 탄식했다. 탈모가 급격히 진행된다는 것을 깨달은 날부터 갖은 식이요법에 약이란 약은 죄다 동원하고 있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지난번에 산 그 한방 샴푸도 별 효과 없잖아? 에이 진짜! 돈만 날렸네.”
일전에 100만 원이나 되는 거금을 주고 산 샴푸가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연신 투덜거렸다. 사실 별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다는 심정에 산 것이었지만 역시나 사기였다.
“에휴······. 뭐 도움되는 특효약 같은 거 없나?”
그는 오늘도 컴퓨터를 켜서 탈모 갤러리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불치병에 걸린 여느 환자가 그렇듯이,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그는 오늘도 여러 글을 뒤적였다. 하루가 다르게 급격히 빠지는 머리털을 붙잡아 보기 위해서, 이미 자신의 단계를 먼저 앞서간 선배들에게서 고견을 듣기 위해서 말이다.
“이······이것들이 진짜!”
그는 인터넷 창을 뒤적이다가 하나의 글을 발견하고는 치미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대머리 대대리 머대리 머머리 텅빈 머가리~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아아······. 세종대왕······. 당신은 도대체······.
– 왜 난 다 똑같은 글자로 보이냐?
– 야 이 XXXX할 XXXXX야.
– 넌 진짜 밤길 조심해라. 지금부터 아이피 추적 시작한다.
– 애들아······. 그만 좀 놀려······. 대머리들 울겠다······.
“크흐흐흐흐흑······.”
민수의 아빠는 눈물을 흘렸다. 누군지 모를 머리가 풍성한 자의 놀림에 지금껏 억눌러왔던 모든 서러움과 울분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내가······. 대머리가 되고 싶어서 되는 줄 알아? 대머리가 되는 것도 억울한데 머리 풍성한 새끼들은 놀리기나 하고 말이야······. 이럴 거면 죄다 대머리나 되어 버려라.”
풍성한 자들은 모른다. 점점 비어가는 황량함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깟 털이 없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사회생활의 걸림돌이 되는지 말이다. 대머리인 것도 서러운데 그런 대머리를 놀리는 풍성한 새끼들은 진정 이 사회의 순수한 악(Pure Evil)이나 다름없었다.
“다녀왔습니다! 아빠! 혹시 집에 있어요?”
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오는 민수의 소리에 아빠는 화들짝 놀라며 컴퓨터를 껐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민수가 문을 열고 안방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빠? 있는데 왜 대답을 안 하세요?”
“으······으응? 아! 민수 왔구나? 뭐 좀 생각하고 있다 보니까 못 들었어.”
이상할 정도로 당황하는 아빠의 태도에 나는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빠의 눈이 빨갛게 충혈된 것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 혹시 우셨어요? 무슨 일 있어요?”
“어······어엉? 아니야! 울긴 뭘 울어? 그냥 눈이 좀 가려워서 비빈 것 뿐이야.”
깜짝 놀라며 갑자기 격렬하게 눈을 비비는 아빠를 보며 나는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뭐 아무튼 이리 와서 이거 받으세요.”
아빠는 내가 투명한 젤이 가득 담겨 있는 플라스틱 통을 건네주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이게 뭐니?”
“제가 만든 탈모 치료제에요. 오늘부터 매일 잠자기 전마다 바르세요.”
“뭐······? 탈모 치료제? 갑자기 나한테 그걸 왜?”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아빠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발뺌했다. 민수에게만큼은 절대 숨기고 싶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민수는 다 안다는 듯이 측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 괜찮아요. 저도 이제 다 컸는걸요. 그런 비밀은 굳이 숨길 필요 없어요. 대머리인 게 뭐 어때서요? 어차피 죽을 병도 아닌데 그렇게 숨기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다 안다는 듯이 어깨를 토닥이는 민수의 마지막 말이 아빠의 가슴을 울컥하게 했다.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미······민수야······. 크흐흐흑”
아빠는 애써 참았던 울음이 다시 터져 나오자 민수를 세게 껴안았다. 그러자 민수는 휘둥그레한 눈으로 눈에 띄게 비어있는 아빠의 뒤통수를 처음으로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크흐흐흐······. 내 머리가······. 내 머리가······.”
흐느끼는 아빠의 울음에서 지금껏 숨겨왔던 그의 슬픔과 설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탈모 치료제 뚜껑을 따서 그 투명한 젤을 손에 한가득 올려놓고 아빠의 비어버린 머리에 한가득 문지르듯이 발라주었다.
“아빠······. 괜찮아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외치면, 하늘이 감동해서 아빠의 머리를 다시 되돌려 줄 거에요.”
“지······진짜? 그런 기적이 정말 일어날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내 개소리에도 희망을 품으며 눈을 반짝이며 묻는 아빠를 보며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쩐지 왜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사이비에 빠지게 되는지 새삼 이해가 됐다.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빠에게 말했다.
“그럼요······. 머리가 다시 자란다는 굳은 믿음을 담아서 저를 따라서 외쳐보세요.”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파들파들 입을 떠는 아빠를 보면서 그 마법 같은 주문을 외쳤다.
“자라나라 머리머리.”
“자······자라나라! 머리머리!”
다시 머리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서 아빠는 그날 그 주문을 외치고 또 외쳤다.
끝
ⓒ 군만두먹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