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ut of Count's Family RAW novel - Chapter 174
173화.
케일은 일행과 함께 일전에 머물렀던 여관을 다시 방문했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의자 등받이에 기대는 케일의 표정은 드물게 진이 빠져 있었다.
-인간, 아주 즐거웠다! 역시 나는 위대하다!
반면에 투명화한 라온의 목소리는 생기발랄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범고래 아치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지독한 놈들.”
여기서 지독한 놈들은 끝마을 엘프들이었다.
케일은 천장을 보며 눈물의 송별식을 하던 엘프들을 떠올렸다.
‘이리, 이리 짧은 시간을 머물다가 가신다니요? 너무 슬픕니다.’
‘꽁꽁 언 호수 아래서, 근 몇십 년 만에 아름다운 빛을 마주한 시간이었습니다. 제 평생의 축복이자 환희의 순간을 잊지 못할 겁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라온에게 이렇게 말하던 엘프들.
‘걱정 마라! 금 용 할배 데리고 또 온다!’
신이 난 라온의 호언장담에 연신 감탄사를 흘리며 환호하던 엘프들.
그 사이에서 엘프와 정령들을 헤치며 떠나야 했던 케일은 처음으로 고단함을 느꼈다. 케일은 제 손을 잡고 연신 매만지던 중년 엘프이자 촌장을 떠올렸다.
‘우리가 남인가?’
어쩌다 내가 엘프와 우리가 된 것인가.
케일은 알 수 없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라 그러려니 끝마을 엘프들을 잊어버렸다.
탁!
그런 그의 앞에 술잔이 놓였다.
“뭡니까?”
케일이 절망의 호수에 가기 전에 머물렀던 여관. 그 여관의 주인인 노인을 보며 케일은 이 술잔의 의미를 물었다.
노파는 케일과 일행들을 쓰윽 보더니 중얼거렸다.
“…멀쩡히 살아 돌아왔구먼.”
케일은 절망의 호수에서 딸과 사위를 잃었던 노인에게 말했었다.
‘살아 돌아와서, 여기서 이 술 다시 마시죠.’
스치듯 케일 일행을 보는 노인의 눈꼬리 끝이 흔들리고 있었다. 케일은 장난스레 물었다.
“공짜죠?”
“예끼, 돈도 많아 보이는 놈이!”
짓궂게 웃던 노파는 케일의 머리 바로 옆을 힐끗 보다가 흘러가듯이 말했다.
“…뭐, 따뜻하니 술로 속을 데울 필요는 없을 테고. 술 한 잔으로 충분하겠지.”
따뜻하니?
케일은 물론이거니와 라온도 멈칫했다.
-인간! 이 할머니 인간 이상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케일이 붙잡기도 전에 벽난로 옆 의자로 가버렸다. 이를 지켜보던 케일의 앞에 노인의 손자 솔리가 나타났다.
“…할머니가 안주도 주라고 하셔서요.”
주춤주춤 그는 쟁반 위의 음식들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의 표정은 뭐라 설명하기 힘들 만큼 복잡해 보였다.
부모를 절망의 호수에서 잃었기에 그 호수가 어떤지, 어떻게 멀쩡히 살아 돌아왔는지 아주 궁금했다.
또한 이들이 누군지 궁금했고, 어찌 됐든 살아 돌아와서 기뻤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가 자꾸 눈에 거슬렸다.
“…저기.”
그는 그 거슬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염색 마법으로 갈색 머리칼이 된 케일과 달리 진짜 갈색 머리칼에 주근깨를 지닌 순박해 보이는 청년.
절망의 호수 옆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라 마을 밖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솔리는 제 눈을 비비며 케일에게 말했다.
“저기, 손님.”
케일은 이상하게 찝찝해져 왔다.
여관 주인 손자의 시선이 케일 자신에게서 미묘하게 벗어나 있었다. 분명 케일을 쳐다봤으나 제대로 보면 그 시선은 케일 옆의 허공을 향해 있었다.
그래, 케일 눈에는 허공이었다.
솔리의 입이 열렸다.
“그, 죄송한데 제 눈이 이상한 건지. 아, 정말 이게요.”
그는 횡설수설하며 케일과 최한 머리 사이 허공을 가리켰다.
“무슨 붉은 털실 뭉쳐놓은 것 같은, 작고 동그란 빨간 게 보이거든요? 제, 제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걸까요? 아, 내가 왜 이러지?”
솔리는 제 눈을 비벼댔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붉은 털실 뭉치가 케일 옆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순간 케일은 생각했다.
‘미치겠네.’
정령사야?
케일은 싸하다 못해 기가 찼다.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쟤 정령이 보이나 보다!
케일은 당연히 지금 제 머리 옆의 붉은 털실 뭉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라온을 포함한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왜냐면 힘이 부족한 정령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힘을 아끼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절망의 호수 아래 엘프 마을에서 엘프 사제가 어색하게 웃으며 보여줬던 빨간 털 뭉치는 안다.
‘저, 케일 님.’
케일이 떠나기 전, 엘프 사제 아디테는 난감한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괜찮으시면 여기 우리, 음, 태어난 지 1년이 되신 아기 불 정령 님이 케일 님께서 호수 밖 마을 입구까지 가는 길을 배웅하도록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반투명한 붉은 털 뭉치가 둥둥 뜬 채 케일의 곁으로 날아왔다. 이건 또 뭔 짐덩이인가 싶어 케일이 아디테를 응시했고 아디테는 황급히 설명했다.
‘아직 형체를 못 정하셔서 그렇지 곁에 두시면 따뜻해요. 정령들은 태어난 후에 자신의 길을 정하면 그에 따라 모습이 정해지거든요.’
제대로 형상도 못 이룬, 붉은 털실 뭉치가 불 정령이었다. 케일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지자 아디테는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케일 님을 존경한다고, 꼭 배웅하다고 싶다고 생떼, 아니, 간곡한 청을 하셔서요.’
‘… 날 존경한다고?’
아디테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네. 이렇게 파괴적이고 미친 불의 힘은 처음 본다고! 닮고 싶대요!’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불 정령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를 들은 순간 케일은 즉시 답했다.
‘마을 어귀까지만 배웅하고 깔끔하게 헤어진다. 알았어?’
‘네!’
아디테가 밝게 답했고, 붉은 털실 뭉치는 케일 머리 옆으로 날아오더니 점점 투명해져 갔다. 그리고 그 투명해진 상태로 이곳 여관까지 따라왔는데.
‘그랬는데, 그 불 정령이 보인다고?’
케일은 여전히 귀신이라도 본 듯, 아니면 얼떨떨한 듯 눈을 비비는 솔리 너머 그의 할머니를 쳐다봤다.
방금 전 그녀는 케일에게 말했다.
‘…뭐, 따뜻하니 술로 속을 데울 필요는 없을 테고.’
그 말에 케일은 멈칫했다. 지금 이 순간, 케일의 머릿속은 ‘정령사’라는 단어가 크게 차지했다. 그는 솔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으아!”
갑자기 솔리가 놀라며 두 팔로 제 얼굴을 가렸다.
챙그랑.
쟁반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 갑자기 털 뭉치가 이리로 와서요!”
솔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연신 뭔가가 제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는 듯 고개를 움직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케일은 곧바로 여관 주인을 쳐다봤다. 노인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저것들이 보인다고 했을 때 우리 남편이 그랬지. 정령이라고.”
노인은 케일을 보며 말했다.
“내 딸은 저것들이 보이지 않아서 안심했지. 혹시 나를 닮아서 저것들이 보일까 봐 걱정했거든.”
저것들. 분명 정령이다.
노인의 눈동자에 서린 회한이 보였다.
“왜냐면 내가 저것들한테 꼬였거든. 잠깐잠깐 마을에 나타나는 저것들 보려고 내가 이 절망의 땅에 터를 내렸어. 그런데 빌어먹게도, 저것들이 보이지 않아도 호수는 사람들을 꾀더구먼.”
할머니는 이제 손자를 바라봤다.
몇십 년 동안 저것들이 보이지 않아서 안심했다.
자신에게 다가오지도 않고, 눈처럼 손에 쥘 수 없는 정령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건 괴로웠으니까.
그런데 손자가 보인다.
“…저것들이 먼저 다가가기도 하는구나.”
저것들이 인간에게 먼저 다가가는 광경을 처음 보았다.
노인은 솔리에게로 다가간 정령과 그런 정령이 원래 따라다니던 케일을 번갈아 눈에 담다가 케일에게 고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쓸데없는 걸 내 손자한테 보여줬어. 그러니 술값 내.”
케일은 그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술값은 사주신다고 하셨으니 얻어먹겠습니다.”
잠시 최한과 아치가 흐린 눈동자로 케일을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일은 여전히 웃고 있는 할머니에게 말했다.
“대신 안줏값은 거하게 내죠.”
“흐흐, 웃긴 놈이야. 딱 봐도 귀족이구먼.”
노인의 관찰력에 일행이 멈칫했지만 케일은 신경도 쓰지 않고 솔리를 쳐다봤다.
정령사라니.
케일은 뜻하지 않은 존재를 알게 되었다. 라온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인간! 쟤도 같이 가나?
아니.
뭐 하러?
케일은 이유 없이, 굳이 더 사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웬만한 자연 속성 고대의 힘을 다 지닌 자신이 정령사를 곁에 둘 이유가 없었다.
‘…완전히 다 지닌 건 아니지만.’
케일은 지배하는 물의 힘이 담긴 목걸이를 매만졌다. 동시에 사제 아디테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혹시 심판자를 아나?’
‘심판자요?’
‘어. 동대륙으로 간 심판자라던데.’
세계수가 케일에게 찾으라고 했던 심판자. 케일은 동대륙 출신의 가샨과 론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혹시나 싶어 아디테에게 물었다.
아디테는 널찍하게 펄럭이는 소매 사이 삐져나온 손으로 머리를 살짝 문지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봐요.’
‘그래?’
케일도 기대하지 않았다.
‘네. 심판하는 물은 들어봤는데.’
‘…뭐?’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디테는 케일의 반응에 고심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심판하는 물이라고, 고대의 힘인데요.’
아디테는 긴 설명 대신 마을의 도서관에서 낡은 목판을 하나 가져다주었다.
‘목판에 새겨진 글자가 워낙 충격적이라서 기억해요.’
‘…내가 빌려가도 될까?’
‘…이걸요?’
아디테는 진심이냐는 듯 케일을 쳐다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대로 하세요.’
케일은 아디테가 그리 말한 이유를 충분히 짐작했다.
목판에는 세 줄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 첫줄이 보였다.
그리고 그다음 줄도 보였다.
강렬했다.
그 순간 느꼈다.
심판하는 물. 이것도 제정신은 아니겠구나.
마지막 줄을 보며 확신했다.
또 희한한 걸 주워야 될지도 모르겠구나.
케일은 그리 확신했다.
그는 갑갑한 마음에 술을 대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일행과 솔리, 할머니, 보이지 않는 불 정령이 만들어가는 난장판을 가만히 지켜봤다.
‘다시 만나겠어?’
약간 파괴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큰 아기 불 정령과 순박을 넘어 어벙해 보이는 솔리, 그리고 날카로운 할머니.
케일은 이들과 엮일 일이 없을 것이라 예측했다.
하지만 그는 불 정령이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솔리의 어깨에 매달려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불벼락. 존경. 불바다. 강력.’
웅얼웅얼 단어만 내뱉는 불 정령의 형체가 점점 성향에 따라 변화해 갔다. 그래 봤자 아직 불 뭉치라 다들 그 형체를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불 정령은 솔리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케일로서는 알 수 없는 광경이었다.
***
“드디어 왔군요.”
최한이 감탄과 함께 성문 안으로 나타난 도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하얀 눈이 쌓인 뾰족한 지붕들. 지붕들도 하얘서 마치 눈의 왕국 같아 보였다.
그는 하얀색 신관복을 입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백발의 남자.
케일은 신관복을 정돈하며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어. 다 함께 가자고.”
케일은 파에른 왕국 수도 바고에 입성했다.
당연히 왕세자 알베르가 구해준 신분패로 유유히 성문을 통과한 그는 신관복 차림의 일행을 이끌며 앞장섰다.
그의 머릿속으로 라온이 말했다.
-인간, 여기 축제 하나?
하얀 지붕과 하얀 눈. 저 멀리 하얀 왕성. 그곳에 화려하게, 아니면 소박하게 내걸린 장식물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로잘린이 다가와 케일에게 입을 열었다.
“신관님, 바고 시가 화려하네요. 축제인가요?”
그녀는 케일에게 물으면서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성문을 통과하는 평민들이 굉장히 많았다. 수도 안 거리는 추운 날씨와 달리 시끌벅적했다.
최한도 이를 보았고, 다른 이들처럼 답을 알고 싶다는 듯 케일을 쳐다봤다. 그때 혼혈 고래족 파세톤이 입을 열었다.
“…다들 모르고 오셨습니까?”
“뭐가요?”
로잘린은 왕국의 후계자 1순위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거의 단절되다시피 한 북쪽 끝 왕국의 축제를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의문을 드러내자 파세톤은 로잘린 대신 케일을 쳐다봤다.
케일은 드물게 평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파에른 왕국은 1월이 되면 특이한 축제를 합니다.”
냐아아옹.
붉은 고양이 홍이 케일의 팔을 두드리며 어서 말하라고 재촉했다. 케일은 홍의 털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 해의 슬픔을 미리 거둬가 달라고 신의 눈물이 있다는 호수에서 제를 올리고, 바고 시 곳곳에서 축제를 펼치죠.”
최한은 멈칫했다.
딱 들어도 중요한 행사 같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신의 눈물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호수에 불을 지르러 간다.
그 시기가 왠지 이번 축제와 겹칠 것 같다.
최한은 케일을 쳐다봤다. 케일은 남들이 듣지 못하게 은밀히 속삭였다.
“사람이 다치면 안 되니까, 제를 올리는 날은 빼고. 마지막 날 밤에 광장에서 다 같이 모여 춤을 춘다던데.”
마지막 날 밤. 축제의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할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추위도 잊은 채 춤을 추고 노래할 것이다.
호숫가에는 경비병 빼고는 사람도 없을 터. 경비병 몇 명이 다치지 않게 움직이는 건 쉬웠다.
케일은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에게 웃으며 물었다.
“축제의 마지막은 불꽃놀이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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