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1
1화.
Prologue
Ethan H. Choi
한혁은 지갑에 들어 있던 명함을 모조리 꺼냈다. 한 장씩 조각조각 찢었다. 시애틀발 인천행 비행기는 지금부터 10시간 이후면 목적지에 도착한다. 1등석은 넓고 안락하고 고요하다. 한 장씩 찢을 때마다 조용한 공간에 얕은 파문이 인다. 간혹 돌아다보는 사람이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느리고 신중하게 이름을 찢을 때마다 미국에서 보냈던 지난 세월을, 편견과 비아냥에서 해방되었던 자유를 버렸다. 가책 없이 당당하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기대를, 원치 않는 이름을 버린 채 방랑하며 살 수 있다는 착각을 찢었다. Ethan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15년을 넘게 살았다. 고등학교 1학년에 왔던 미국은 패배자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한혁은 그 땅에서 완벽하게 숨어들었다. 누구의 아들이 아닌 평범한 학생으로 운동장을 달리고 수업을 들었다. 손가락질도 혹독한 평가도 싸구려 호기심도 없었다.
공과대학 입학 이후 금전적 지원은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자금 대출을 조금씩 갚고 MS사에 입사하며 영주권도 취득했다. MBA에 진학한 이후에는 의지와 달리 한국에서 온 타 그룹 사람들에게 어느 집안의 아들로 인식되곤 하였다. 하지만 한혁은 여전히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회사의 지원으로 MBA 과정을 오게 된 Ethan이었다.
‘세림요 그런 일이 있었나요 워낙 한국을 떠난 지 오래라서.’
남의 이야기 하듯 집안 이야기를 들었다. 한 여자의 소식을 구태여 언급하는 인간도 더러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혼이시죠. 그럼요, 연락하죠. 미국을 워낙 좋아하셔서 자주 오시더군요. 올 때마다 뵙는 건 아니지만.’
‘맞습니다. 저 생모 많이 닮았습니다. 가발만 쓰면 똑같을걸요 아, 좀 짙은 화장을 해야 하나 ’
기대와 다른 답에 실망하는 표정을 보며 그 얼굴에 침을 뱉어 준다면 어떨까 상상하기도 하였다.
MBA를 마치고 MS사에 복귀하여 회사의 미래 전략에 토대가 되는 중요한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1단계의 성공적 수행을 기념하여 팀원 간 자축 파티를 벌였다. 샴페인이 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 박수와 함성 속에 한혁은 멋지게 인사말을 하였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다가와 속삭였다. 소프트웨어가 구현되는 실물 형태를 담당하는 실력파 디자이너이자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이든, 오늘은 좀 달라 보여.’
‘네 말을 이해 못하겠는데 ’
여자가 나란히 서더니 셀피 모드 핸드폰 카메라를 비췄다.
‘여길 봐. 네 눈.’
‘눈 ’
‘이든, 너의 눈은 언제나 검은 얼음이었어. 영감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름다웠지만 볼 때마다 차가움에 숨이 막힐 것 같았지.’
‘지금은 ’
여자가 귀에 바싹 입을 붙였다.
‘보석 같아.’
한혁은 시니컬하게 웃었다.
‘어설퍼.’
‘알아.’
여자가 풍성한 블론드 머리를 넘기며 답했다.
‘유혹은 사절. 어설픈 유혹은 아웃. 그래도 오늘 이 말은 사실인걸 ’
여자가 핸드폰 화면을 치워 버리더니 코가 닿을 듯 마주 보며 붙어 섰다.
‘이든, 처음이야. 네 눈에서 빛이 나. 언젠가 블랙을 모티브로 디자인을 한다면 모델은 너야.’
이든이라는 이름으로 숨은 마지막 밤에 샴페인은 달고 차가웠다.
새벽녘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진회성 이사였다.
-한혁아.
‘아저씨 ’
-부회장님께서…… 방금 운명하셨다.
전경련의 주최로 브라질에서 치르는 행사에 참여 중이었다. 출국할 때만 해도 누구도 건강을 의심치 않았다. 이른 아침 호텔 부근에서 가벼운 조깅을 하다가 세림그룹 부회장은 절명했다.
세림 부회장의 장례를 치른 지도 5개월이 지났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회장과 집안을 등진 손자와의 줄다리기는 끝났다. 한혁은 마지막 한 장 남은 명함까지 모조리 찢어 버린 후, 조각조각 난 명함을 빈 물컵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옆자리에서 여태 모르는 척 조용히 있던 진 이사가 흩어진 명함 조각을 치우는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아저씨, 제가 할게요. 이건 제 쓰레기예요.”
진 이사가 종잇조각을 집어 올리던 동작을 멈추었다.
“……미안해.”
“뭐가요 직분에 충실한 행동에 대해 ”
“MS 내부를 건드린 건.”
“회장님 지시였겠죠.”
“아니야, 내가 그랬어. 미련 완전히 끊으라고.”
한혁은 진 이사를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만에 하나, 내가 회장님 소원대로 경영에 참여하면 말이죠.”
기내 테이블 위에서 한혁의 손가락은 느리게 움직였다.
“진 이사님부터 자를 거예요.”
한혁은 진 이사와 눈을 맞춘 채, 하나 남은 명함 조각을 컵에 집어넣었다. 진 이사는 명함 조각이 떨어진 컵을 쳐다보다가 기운 빠진 웃음을 지었다.
“네, 그러십시오. 부디 제발 경영권 잡고 나 잘라 버리시죠. 나는 갈 곳 많습니다.”
진 이사가 피로감을 떨치려 안경을 벗고 눈을 문질렀다. 잠시 감았던 눈을 떠 보니 한혁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검지로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왜 이렇게 늙었어요 ”
“몸 바쳐 일하느라고요.”
“요즘은 남자들 바르는 아이크림도 있던데, 좀 발라요.”
“일없습니다. 와이프는 아직 내가 최고로 멋지답니다.”
한혁이 낮게 웃었다.
“하긴, 옛날에는 아저씨 되게 잘생기고 멋졌어요. 나 데리러 울산에 왔던 날, 차 안에서 ‘가위바위보’도 해 주고 쌀보리 놀이도 가르쳐 주고, 동요 CD도 바꿔 가며 틀어 줬어요. 그때가 내가 일곱 살이었으니까, 아저씨는 몇 살이었죠 결혼도 안 한 총각이 꼭 애 아빠처럼 얼마나 잘 놀아 줬는지.”
“그러게요. 그때는 막 입사한 신입이라 비서실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싶었답니다. 어이구, 일회성인 줄 알았지, 이렇게 20년 넘도록.”
진 이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날 이후부터 내가 이날까지 줄곧 속이 썩어서 그 잘생김이 다 무너져 내렸어. 어휴우우, 내가 회장님이랑 사이에 끼여서 제명에 못 살지.”
“그러니까 내가 잘라 준다고요.”
한혁이 조각조각 찢어 버린 명함이 든 물컵을 들어 올렸다. 신기한 물건이라도 관찰하듯이 제 눈에 가까이 대고 흔들었다.
“……한혁아.”
“네 ”
진 이사가 문득 손을 내밀었다.
“뭐죠 가위바위보는 아니고 쌀보리 놀이 ”
답 없이 물컵을 손에서 뺏어 제자리에 두더니 진 이사가 한혁을 향해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아니면, 악수 ”
한혁이 키득거리며 손을 건넸다.
“나 세림 안 들어가요. 아저씨 안 잘라요.”
“잘라도 돼.”
“설마, 농담이에요.”
진 이사가 한혁의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기도하듯 마주 쥐고 말하였다.
“정말로…… 잘 컸다. 기특해.”
“갑자기 왜 그러세요 ”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잖니.”
“무슨, 꼭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처럼.”
진 이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인천 공항 도착하면서부터.”
“네.”
“내내 붙어 있을 거야. 내 새로운 임무지.”
“그러시겠죠.”
“그래도 이젠 네가 나를 아저씨라 부를 수 없을 테니까.”
진 이사가 손을 뻗어 가만가만 팔을 두드렸다.
1화
6년 전 겨울…….
창으로 겨울 햇살이 길게 늘어진다. 서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창가로 다가섰다. 꼭꼭 닫아 놓았지만, 창틀에서 한기가 여지없이 들어와 온몸에 순식간에 오소소 소름이 인다. 창에는 금세 입김이 뿌옇게 맺혔다. 뿌연 창을 소매로 문질러 본다. 창 너머 겨울 아침은 공기까지 얼어 버린 듯 투명했다. 어제까지 끈질기게 퍼붓던 눈으로 온통 하얗게 변한 기숙사 앞길은 동화처럼 아름답고, 그림처럼 적요하다. 처음 맞는 보스턴의 겨울은 상상을 뛰어넘는 추위였다. 매일매일 새롭게, 지독하게 추웠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은 매번 심장을 할퀴었다. 적어도 서진에게 보스턴의 겨울은 아무래도 익숙해질 수가 없는 혹독한 계절이다. 오늘같이 눈까지 쌓인 길이라면 더욱 움츠러들게 된다. 평소와 달리 기훈 선배가 교수님을 뵈러 일찍 등교한지라 혼자 학교로 가야한다면 더욱더.
“아오, 추워.”
서진은 어깨를 떨며 손을 교차하여 양팔을 문질렀다. 세수를 마친 직후라 아직 이마께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질끈 묶었다. 작은 화장대에 화장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마트에서 산 초록색 상표가 붙은 커다란 플라스틱 원통의 보습크림이 전부였다. 넉넉히 덜어 뺨에 펴 발랐다. 피부과 의사들이 꼽는 최고의 기초 화장품 중 하나라는 이 크림의 품질이 가격 대비 매우 훌륭하다는 점이 몹시 다행이다.
“자아, 오늘도 칼바람에 나의 피부를 지켜 다오. 제발 얼음지치기를 한나절은 하고 온 아이 모양으로 벌게지지만 마라.”
서진은 크림을 펴 바른 뺨을 탁탁 소리 나도록 두드렸다. 무서운 바람 앞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지퍼를 끝까지 올린 긴 파카 위에 캐시미어 머플러도 둘렀다. 마지막으로 티백을 넣은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부어 단단히 마개를 덮었다. 얼어붙을 입과 심장을 녹일 수 있을 것이다. 서진은 빠른 속도로 채비를 마치고 현관에 섰다. 현관 문고리는 손끝이 얼얼해지도록 차가웠다.
‘도대체 누가 왜, 이 하버드의 겨울이 아름답다고 했지 아마도 하버드의 화려한 간판에 반쯤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지.’
텀블러를 손으로 감싸 쥐었지만 온기는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덜덜 떨려 오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입이라도 잘못 벌릴라 치면 매서운 찬 공기가 폐까지 하얗게 얼릴 기세다. 지나는 자리마다 눈길에 폭폭 발자국이 생겼다. 서진은 조심스레 움직이던 발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버스 시간을 놓쳐 다시 한참을 추위에 떨 수는 없었다.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배정되는 원 베드 룸 아파트는 물가가 비싼 보스턴에서 월 2,200불이라는 상당히 저렴한 렌트비에 비해 매우 우수한 시설이었다. 유일한 불만은 학교까지 차로 15분 정도 가야 한다는 점이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몸을 재촉하여 발걸음을 재게 움직이고 있을 때 갑자기 휙 하고 불어오는 바람에 대충 둘러맨 목도리가 풀어졌다. 어엇, 목도리가 완전히 날리기 전에 붙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발바닥이 미끈하면서 길바닥에서 떨어졌다. 서진은 그대로 균형을 잃고 보기 좋게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 이게 뭐람.’
손에 잡히지 않은 목도리는 한 발 옆으로 팔락이며 먼저 떨어지고 다른 쪽으로 텀블러가 굴렀다. 주위에 사람은 없었지만 몹시 창피하고 당황스럽다. 서진은 급히 일어서려다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허리로 느껴지는 급작스런 통증은 일자로 뻗은 몸 전체를 잠식했다. 눈앞이 어찔해 왔다. 희푸른 겨울 하늘이 길게 뻗은 몸, 눈길 바닥까지 닿았다 다시 올라갔다.
대학 3학년 봄 무렵, 이유 없이 다리가 저려 오는 것 같아 찾았던 정형외과에서 허리 디스크라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은 피하고 오랜 기간 동안 약물 치료를 받았지만, 계속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그녀에게 허리 통증은 발목을 잡는 지루한 악몽이었다. 서진은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엎드린 자세에서 무릎을 당겨 팔을 바닥에 짚고서 어떻게든 일어나려 한참을 애쓰고 있을 때, 말소리가 들렸다.
“Are you okay ”
“아아. 아파.”
고개를 들어 보려 했으나 목이 저절로 꺾여 들고 새된 비명만 나왔다.
“일어날 수 있어요 ”
한국말로 묻는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아찔한 고통으로 시야가 흐려졌다. 남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