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43
43화.
43화
“내려가자.”
한혁은 그대로 서진을 스쳐 지나며 말했다.
“다리 아파. 죽으라 올라온 길을 또 내려가 ”
“카메라로 생중계되고 싶지 않거든.”
한혁은 정 회장 집 주변에 설치되어 있는 보안용 카메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진은 구둣발 소리가 골목을 팡팡 울리도록 소리 내어 걸었다.
“그러다 또 넘어진다.”
앞질러 내려가는 서진의 뒤통수를 향해 한혁이 퉁명스레 말하였다. 서진이 몸을 홱 돌렸다.
“또 업어 주면 되겠네. 한혁 씨 나 업는 거 전문 아냐 ”
볼멘소리의 속뜻을 읽으려 한혁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서진은 다시 구두 굽이 부러져라 씩씩거리며 걸었다.
나쁜 놈.
‘허리 아파 ’
그날 밤에도 보자마자 그랬다. 넘어진 서진을 일으키며 타박을 줄 때도 그랬었다.
‘허리도 부실한 애가…….’
그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은 이후에도 한동안 떠나지 않았었다. 뭐지 디스크 앓았다고 얘기한 적이 있던가. 서진은 웬만해서는 자신이 디스크를 앓았었다는 것을 누구 앞에서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운이 좋은 편이어서 후유증이 거의 남지 않았기도 하고, 일을 시작하면서는 매일 꾸준히 운동을 하여 근력을 키웠기 때문에 크게 무리하지 않는 날이면 힐도 신을 수 있었다. 허리 통증을 호소한 적이 있었나, 고민하던 서진의 머릿속에 한혁의 수수께끼 같은 말이 잡혔다. 출장에서 돌아온 날, 상무실에서 한혁을 처음 만난 날이었다.
‘나를 믿을 수 있는 기회. 나를 어떤 사람과 같은 취급 하지 마.’
그의 말이 생생하게 떠오른 순간, 보스턴 눈길이 펼쳐졌다. 유달리 차갑고 재수 없게 굴던 남자. 하버드 학교 메디컬 센터에 앉아 올려다봤던 그의 얼굴, 지독하게 어두웠던 눈과 다르게 천사처럼 아름답던 그 얼굴. 서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열 오른 몸을 식히느라 찬물에 손을 씻었다.
백화점 앞에서 한혁을 처음 만난 날, 그는 굳이 서진의 스카프를 고쳐 매어 주었다. 왜 몰랐을까. 어떤 기시감이라도 느낄 법했건만, 같은 행동을 같은 사람이 해 주는데도 몰랐다. 하긴,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이미 가슴 한구석에서 모조리 밀봉하여 밖으로 내던진 보스턴의 단 하루의 기억을. 더군다나 그 기억이 치가 떨리게 싫었던 눈 쌓인 매서운 겨울날이었다면. 눈길에 나뒹굴어진 자신을 일으켜 세워 꼼꼼하게 캐시미어 머플러를 묶어 주던 그 장면이 어느 정도 인상적이었다 해도 이미 닫혀 버린 기억의 상자 구석에 처박혀 있었던 것을.
‘처음부터 다 알았던 거야, 나쁜 자식.’
서진은 끝없이 욕을 퍼부었다.
야근을 마친 뒤에 혼자 바에 앉아 서진은 와인 한 병을 빠르게 다 비웠다.
느릿느릿 뒤를 따라오는 한혁을 돌아보며 서진은 앙칼지게 소리쳤다.
“아, 빨리 와. 생중계 싫다며!”
힘들게 올라온 골목길을 돌아 놀이터 앞까지 내려왔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놀이터 벤치에 서진은 소리가 나도록 걸터앉았다. 술김에 저 아래서부터 걸어 올라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허리가 욱신거릴 뿐만 아니라 구두 굽이 발 속으로 박혀 들어오는 듯 아팠다.
한혁은 서진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한혁을 스치고 지나는 바람 끝에 샴푸 냄새가 묻어났다. 시원하고 부드러운 향기다. 그날 밤에 한혁은 거품을 일어 서진의 머리를 감겨 주었다. 몸이 갓 구운 빵처럼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얼굴을 가슴에 묻게 하고 거품을 씻어 주던 손길이 떠오른다. 향기는 너무 많은 기억과 감각을 재생시킨다. 쳐다보고 있자니 한혁이 다정하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몸은 괜찮아 그 몸으로 어디서 이렇게 마셨어 ”
“아, 술 먹으면 혈압이 올라 더 좋아.”
한혁은 골을 부리는 서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윤서진은 이런 사람이었지.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팩팩 오리처럼 화를 내고, 투정하고 금세 풀어지고.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눈으로 아파하는 모습은, 윤서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왜 불렀어.”
서진은 핸드백을 거칠게 열더니 봉투 하나를 던지듯이 건넸다.
“사표. 상무님, 이제 더 이상 신물 올리지 마. 나 없어져 줄 테니까. 내가 뭐 능력 없어 네 회사에 빌붙은 줄 알아 삭스 갈 거야. 안 그래도 삭스 파트너가 또 이메일 왔어. 다시 생각해 봤냐고. 자기가 맡은 팀에서 곧 프로젝트 시작하는데 같이 일하고 싶대. 꼬옥! 나랑! 나 능력 넘치는 여자야.”
한혁은 봉투를 열지도 않고 단숨에 찍찍 찢어 도로 서진에게 건넸다.
“능력 좋은 거 아니까 세림에 있어. 용건 끝났어 ”
서진을 보지도 않고 던지듯 하는 말이었다. 분노가 사랑을 앞서는구나. 짜증이 연민을 이긴다. 정말이지 한 대 쥐어 패고 싶었다. 서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최한혁, 똑바로 대답해. 나 처음 본 거 언제야 ”
조금 놀라는 듯한 눈이 이내 냉정한 빛으로 바뀌었다.
“언제야 백화점 앞에서 한혁 씨 불러 세웠을 때, 그때야 ”
“아니. 이제 알았어 능력이 넘치는 윤 팀장 기억력은 바닥이야.”
한혁은 빈정거리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럼 언제야 ”
“알고 있는 걸 왜 물어.”
“몰라, 대답해!”
서진의 말소리가 높아지자 한혁은 풋, 쓴웃음을 지었다.
“보스턴 캠브리지, 눈길에 나뒹굴어진 거 주웠어.”
“나쁜 놈.”
서진은 무릎에 올린 핸드백 위로 주먹을 쥐어 올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는지 젤을 바르지 않은 꽤 길어진 한혁의 머리가 부드럽게 컬을 만들며 이마를 반쯤 덮고 있다. 하버드 학교 병원 의자에서 허리의 통증 때문에 가물거리는 눈으로 겨우 올려다본 남자의 모습과 정확하게 겹친다.
“그날, 나 주워서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왜 갑자기 도망갔어 ”
한혁이 곤란한 표정이었지만 서진은 멈출 수가 없다.
“기훈 오빠 봤어 ”
눈매가 날카롭게 변하며 입을 꾹 다문다. 한혁은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버렸다. 서진은 감정을 제어하느라 움켜쥔 주먹에 힘을 더했지만 부풀 대로 부풀어 한계에 도달한 듯 터지는 말을 막을 순 없었다.
“처음부터 다 알았어, 다. 그래서 나한테 그랬어 백화점에서 몇 시간을 그렇게 따라다니고 내 부서로 들어오고. 재미있었어 내가, 니네들한테 재밋거리야 ”
“윤서진. 과장하지 마.”
“무슨 과장 ”
“백화점은 네가 먼저 부탁했고, 부서는 이사진과 상의 끝에 결정되었어. 능력이 넘치는 팀장이라 선택되었지.”
“아우, 짜증 나.”
서진이 구둣발로 바닥을 탕탕 두드렸다.
“다 됐고, 내 감정을 조롱하는 게 심심풀이 땅콩거리야 사람 바보 꼴 만드는 게 그렇게 신나는 오락거리였어 ”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했어. 나를 받아 주지 말라고도 했어. 수없이 너에게 인지시켰어.”
“나쁜 놈.”
서진은 기어이 주먹을 들어 한혁의 가슴을 때렸다. 툭툭 몇 번을 힘을 다해 손이 아프도록 부딪혔지만 그는 앞뒤로 조금씩 흔들릴 뿐 서진을 제지하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 순간에도 서진은 생각했다. 아플 텐데. 아팠을 텐데……. 그리고 힘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이 지독한 놈. 네 말의 심오한 뜻을 이제야 알았다. 그래, 나 머리 나쁘다. 어어헝.”
서진은 그대로 무릎에 얼굴을 박고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마. 우는 여자 질색이야.”
그는 정말 질색인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나쁜 인간, 지독한 놈, 냉정한 자식!
“너한테 이 시점에서 내가 왜 잘 보여야 하는데. 못된 놈, 개구리 돌 던져 맞혀 놓고 ‘시끄러, 울지 마, 개구리 우는 소리 질색이야.’ 그딴 소리가 더 먹히지. 아우! 질색이라니 더 울 거야.”
서진이 분기탱천하여 한혁을 노려보았지만, 술김에 마구 내뱉는 어이없는 말에 한혁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고개를 젖히고 시원한 웃음소리를 냈다. 이렇게 큰 소리로 웃어 보는 건, 상무 자리에 앉은 후 처음이다.
“웃지 마. 나 너 웃음소리에 약해.”
한혁이 웃음을 다 거두지 않고 말하였다.
“윤서진, 너무 그렇게 귀엽게 굴지 마라. 나중에 숙모님이라고 못 부르겠다.”
“헛소리,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일 없어.”
서진은 정색을 하며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였다. 외면하는 한혁의 팔을 붙잡아 멀어지는 시선을 돌렸다. 밤하늘을 닮은 그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기훈 형 좋은 사람이야. 너그럽고 뿌리 끝까지 따뜻한 사람이지. 햇살 같은 사람.”
“나한테는 네가 빛이야.”
한혁은 서진의 맑은 눈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눈의 여왕 대신 입을 맞추며 얼음을 녹이고, 과거를 지우고, 한혁에게로 들어온 서진은, 지금껏 욕심내지 못한 동화였다. 그리하여 심장에 박혀 있던 단단하고 뾰족한 얼음이 그녀와 함께라면 녹을 수도 있다고, 자신도 그림자가 아닌 햇살이 될 수 있으리라 꿈꾼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니야.”
한혁은 고개를 저었다. 서진의 마음에 대한 확신도 부서졌다. 한혁을 믿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녀를 붙잡을 수 있다고 고집 부렸지만 이젠 이미 늦었다. 정리해야 하는 감정의 잔재여야만 한다.
“윤서진 팀장, 나는 오늘 이후 사적인 연락에 대답하는 일은 없어. 나한테 이제 너, 여자 아니야. 유능한 직원 그게 전부야. 좀 성가시고 불편하지만 금방 나아지겠지.”
서진은 잠시 아무 말 없이 냉정한 표정의 한혁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손을 들어 한혁의 왼쪽 가슴에 대었다.
“네 입술은 진실인 듯 말하네. 하지만 네 심장은 다른 말을 하는걸.”
세차게 뛰어오르는 그의 심장에 머무르던 손을 올려 목을 감았다.
“입술에게도 다시 물어봐야겠어.”
서진은 한혁의 차가운 입술에 더운 입술을 포개었다. 여름날에도 언제나처럼 서늘하게 식어 있는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천천히 포근하게 감싸 안듯이……. 따뜻한 입술이, 열어 주지 않는 남자의 입술에 안타깝게 머물렀다.
한혁 씨.
서진이 한숨처럼 이름을 부른다. 그녀가 조용히 몸을 떼려 할 때 고집을 부리던 한혁이 서진의 입술에 부딪혀 왔다. 거침없고 열렬한 움직임에 서진이 움츠렸다. 깊은 자극에 정수리까지 머리가 울린다. 빼어 내는 몸을 꽉 끌어안으며 한혁은 더욱 집요하게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하였다. 젠장. 이윽고 한혁의 입에서 욕설이 나왔다. 어깨를 잡아 서진의 몸을 떼어 놓으며 경고하였다.
“윤서진, 자극하지 마. 이대로 너 끌고 어디로든 가고 싶으니까.”
서진은 검지로 부어오른 제 입술을 쓸었다.
“너 되게 나쁜 놈이야……. 제멋대로 굴고, 단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아.”
한혁이 서진의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대어 가만가만 쓸었다.
“나는 그 사람한테 말했어. 나 사랑하는 사람 있다고. 글자 그대로, 내 마음 가득히 채운 사람 있다고. 마음 한 자락, 손끝 하나도 그 사람한테 줄 거 없어.”
한혁이 입술에 손가락을 올린 채 서진을 지그시 바라다보았다.
“윤서진 넌, 언제나 바보 같은 선택을 해.”
“맞아. 쭉 바보로 살 거야.”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커트 자락을 정리하고 핸드백을 고쳐 멨다.
“먼저 갈게.”
한혁이 따라 일어섰다.
“가자.”
“생중계 싫다며.”
서진은 한혁을 지나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한혁이 성큼성큼 걸어 서진의 옆에 나란히 섰다.
“괜찮아. 그냥 가.”
아무 말 없이 걸어도 어깨를 맞댄 그림자만으로도 충분하였다.
***
“서훈아, 나 태워 가라아.”
서진이 부리나케 빠져나온 뒤로 대문이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차 문을 막 열던 서훈이 문소리에 놀란 듯이 서진을 쳐다보았다.
“미안, 나 실어다 주라.”
서진이 무안하게 웃으며 조수석 문을 열려고 할 때 옆으로 검정색 세단이 멈추었다. 창문이 열리고 예린이 얼굴을 내밀었다.
“언니, 출근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
예린은 서훈을 보고도 까닥 눈인사를 하더니 옆에 앉은 부인에게 눈짓을 하였다. 부인의 시선이 열린 창 너머로 서진에게 찬찬히 머물렀다. 서진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숙였다.
“저희 엄마예요. 아참, 몸은 괜찮죠 ”
“네.”
“그럼 언니, 담에 또 봐요.”
예린은 웃으며 창문을 닫았다. 예린의 어머니, 그가 예전에 많이 엄마라 부르고 싶었다는 분이다. 얼핏 보기에도 우아하고 고요한 분위기의 부인이다.
“저 집 딸이야 ”
차 문을 열자 서훈이 물었다.
“응.”
“왜 누나한테 아는 척을 해 ”
“우연히 지나가다가 본 적 있어. 인사했거든.”
서훈이 서진을 잠시 쳐다보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요즘 한참 일이 많은지 제대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할 틈도 없었는데 서훈은 별로 서진과 길게 말을 하고 싶은 기색도 아니었다. 서진이 조금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클라이언트사로 가니 ”
“어차피 시내에 있어. 회사까지 데려다줄게.”
서훈이 짤막하게 답했다.
붉은 신호에 걸렸을 때, 어색한 침묵을 깨고 서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