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42
42화.
42화
“최 상무님, 이거 열심히 하셨는데 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현재 세림 주식은 계속 곤두박질치고 있어요. 우리는 여유 자금부터 승산이 없는 게임입니다. 이미 경쟁이 붙은 부평은 값을 더 올릴 테고 예상했던 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이 자명하지 않습니까. 은행 쪽에서도 부정적으로 돌아서는 마당에 더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재무적인 손실보다는 세림의 이미지에도 커다란 타격이 옵니다. 거참, 닭 쫓던 개 꼴이 나는 거죠.”
번들거리는 이마에 굵은 주름을 그려 가며 박 이사는 느물느물 이야기를 꺼냈다.
“언론 타이틀에 ‘재벌 3세 간의 접전’ 정도로 이니셜로 오르내리던 것이 ‘세림 한성에 완패, 후계 구도에 차질’ 뭐 이렇게 발전되는 건 시간문제 아닙니까 ”
“박 이사! 입조심하시죠.”
참다못한 진 이사가 소리를 높였다.
“허, 원래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합니다. 꿀 발린 말로 입안에 혀처럼 구는 사람만 필요하다는 겁니까.”
“뭐요 ”
“유약한 충복만 거느리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요. 허.”
진 이사의 목에 잡히는 굵은 핏대를 보며 한혁은 욕심스런 얼굴의 박 이사를 향해 짧게 미소를 그렸다.
“옳은 말씀 감사합니다, 박 이사님.”
“으흠. 뭐 그리 말하시니…….”
한혁은 테이블 앞에 둔 서류철을 펴 넘겼다.
“박 이사님, 입사하신 지 27년이 되셨네요.”
“아, 네.”
“강산이 세 번 변할 만큼 계셨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가늠할 수 없어 박 이사는 벌거튀튀한 눈을 끔벅였다.
“충분히 많은 일을 하셨을 테죠.”
실룩이던 볼 근육이 굳어 가는 것을 보며 한혁이 낮은 목소리를 이어 갔다.
“제가 관심 있게 지켜본 박 이사님의 성과가 있습니다. 5년 전, LTS와 IT 시스템 컨설팅 계약을 추진하셨더군요. 반년 전에 역시 같은 회사와 서버 증설에 따른 시스템 보강으로 한 번 더 계약을 했고 세 달 전에 끝난 것으로 압니다.”
“그, 그건 인터넷 쇼핑 사이트 업그레이드를 위한 프로젝트였습니다.”
박 이사의 느물거리던 목소리가 터덕터덕 마른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44억, 57억. 34억. 5년 전에 계약한 프로젝트는 2차 3차 연장되면서 총 235억이 지불되었더군요. 최근 추가한 프로젝트는 46억. 맞습니까 ”
“저…… 제가 정확한 수치는.”
“제가 기억합니다. 맞습니다.”
박 이사의 얼굴이 프로젝트 금액을 부풀려 빼돌린 비자금 걱정으로 퍼렇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강 전무의 지시하에 벌인 많은 건들 중 일부였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동안, 특히 마지막 회차에서 많은 일을 하셨는데, 그중 하나만 말씀드려 송구하군요.”
“최, 상무님.”
“충복이라 하셨습니까 ”
한혁의 눈이 박 이사의 심장으로 얼음송곳이 되어 꽂혀 들었다. 맹수가 작은 먹잇감의 목줄을 눌러 놓고 날카로운 이를 세우듯 한혁이 이처럼 냉혹한 눈빛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수십 년간 그를 지켜보던 진 이사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박 이사님이 누구의 충복이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강 전무의 오른팔로 그의 지시하에 수없이 많은 일들을 벌인 박 이사는 무릎부터 등줄기까지 열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단, 충직한 도적은 그 수장이 누구든 뿌리째 도려낼 것입니다. 저는 너그러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음번에는 개인적인 부름은 없습니다. 회사 대신 검찰로 가셔야겠지요. 그 시기가 내일이 될지 영원히 미뤄질지는 제 변덕에 달렸겠네요.”
“저…… 상, 상무님. 오해가 있으신데…….”
“제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자비심 없는 경고가 박 이사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천천히 일어서 자리로 돌아가는 한혁을 보며 박 이사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상무님…….”
의자에 길게 기대어 앉은 한혁을 향해 진 이사가 다가왔다.
“진 이사님, 잠시만 혼자 있고 싶은데요.”
“……네, 제가 비서들에게 전하겠습니다.”
한혁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오전 스케줄을 잠시 미루고 한혁은 상무실을 나섰다. 내부 정보가 새기 시작한 지금, 물망에 오르던 외국계 투자 은행도 모두 후보 선상에서 지워 버렸다. 강 전무가 손을 뻗칠 수 없는 곳으로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해 줄 아이뱅크를 찾아가서 직접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복도에서 양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있는 서진의 모습이 보였다. 서진을 우연히 맞닥뜨릴 때마다 한혁은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을 느끼곤 했다. 진물이 흐르는 상처가 자극에 노출될 때처럼, 통각은 선명하고 급작스러웠다. 감정을 참는 것에 익숙하다 못해 무감각해져 버렸다 생각하였지만 누구보다 깊이 넣었던 윤서진이 뽑힌 자리에 남은 상처에 대해서는 그러하지 못했다. 서진은 양손 가득 들고 오는 자료가 버거운지, 걸음이 불안정했다. 한혁은 찌푸린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서진의 팔 위에서 높게 쌓은 책자 하나가 기우뚱하자 균형을 잡으려던 서진이 오히려 바닥으로 쿵 넘어졌다. 한혁은 회사 내부라는 것도 잊은 채 내달리듯 그녀 앞에 다가섰다.
“괜찮아 ”
서진은 한혁을 확인하고는 찡그렸던 얼굴을 억지로 폈다.
“괜찮아요.”
한혁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서진의 이마와 목덜미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더운 여름날 어지간히 씨름을 하고 온 듯했다.
“넌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매번 떨어뜨리고 넘어지고. 허리도 부실한 애가.”
서진이 떨어뜨린 것들을 주워 올리는 한혁의 눈매가 짜증스럽게 변했다.
“이게 다 뭐야 ”
두꺼운 책자 여러 권과 서진이 양손으로 들기에도 힘들어 보이는 묵직하고 커다란 화첩 몇 개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저, 이번 시즌에 아트 마케팅을 검토하고 있어서 갤러리에 갔었어요. 자료를 생각보다 많이 줘서…….”
“윤 팀장이 왜 거기를 가 ”
“제가 기획했던 거라 아무래도 제가 가서 설명하고.”
서진은 마케팅 담당 이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출근하자마자 인수전담팀 쪽에 양해를 구해 시간을 뺐다. 전담팀 일이 많아 마음이 바빠서 서두르느라 진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마케팅팀 다 해고야.”
“상무님!”
한혁이 서진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윤 팀장 지금 하는 일이 뭐야 이딴 거 대신 할 놈도 없는 팀을 내가 왜 두는데 ”
“죄송합니다. 제 잘못이에요.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제기랄. 하나같이!”
“죄송합니다.”
서진은 아직도 한혁의 손에 있는 책자들을 받으러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팔로 물건을 툭 넘기며 한혁이 말을 내뱉었다.
“제발, 윤서진. 너 내 눈에 띄지 마. 성가셔. 회의 때 네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물이 올라와.”
나무처럼 굳어 버린 서진을 버려두고 한혁이 멀어졌다. ‘성가셔.’ ‘신물이 올라와.’ 포장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말이 너무 잔인해 서진은 잠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슴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찬 바람이 올라왔다. 온몸에 한동안 사라졌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는 듯 묵직하게 팔로 전해지는 무게를 느끼며 서진은 발을 조심스레 떼었다.
리셉션의 안내로 SJ Finance 작은 회의실로 들어간 한혁은 깍지를 낀 손으로 관절을 하나하나 눌러 보았다. 급히 스탠포드 동기의 소개를 받아 찾아온 곳이지만 MBA 선배라는 사장과 별 친분이 없고 인지도도 떨어지는 작은 아이뱅크에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적당한 선에서 이야기를 꺼내고 접어야 하는지 망설이는데 문이 열리고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건장한 남자가 들어섰다.
“이렇게 직접 와 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서준우입니다.”
신뢰감을 주는 태도와 눈빛은 자욱한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막막한 기분을 약간 누그러뜨렸다.
“최한혁입니다.”
“성욱이한테 연락 받았습니다. 동기 되신다고요.”
“네. 사장님 많이 아래 후뱁니다.”
보기 좋은 미소를 만들어 내며 느긋하게 앉아 있는 서 사장의 모습을 보며 한혁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혁의 짧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간결하고 정확하게 상황을 집어내는 준우를 보며 한혁은 왜 SJ같이 작은 업체가 YK그룹 일까지 맡게 되었는지 재계에서 그의 이름이 종종 화제에 오르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부평은 인수 금액이든 원하는 조건을 최대한 절충하면 승산이 있겠지만 삭스백화점이 관건이네요.”
“네.”
“어느 정도 진행이 되셨습니까 ”
“삭스에서 데려온 사람이 있어 얼마 전에 그쪽 파트너와 비공식적으로 운만 띄워 놓은 상태입니다. 일단 부평이 진행되면 더 일을 진행시킬 계획이었습니다.”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계신데요. 삭스만 되면 부평 일도 오히려 더 쉬울 겁니다. 부평이 정 안 된다면 다른 쪽을 찾을 수도 있어요. 제 생각으로는 오히려 삭스가 우선순위여야 할 것 같은데.”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움직이는 한혁을 보며 서 사장이 싱긋 웃었다.
“그런 라인을 풀가동시키면 삭스를 설득시키는 일은 한성이 들이는 노력의 반만으로도 가능할 듯싶은데요. 물론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신뢰를 받은 사람인지 문제가 되겠지만 말입니다.”
서진의 얼굴이 떠오르자 한혁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신뢰 받는 사람일 겁니다. 더 진행되면 언제 같이 뵙지요.”
“좋습니다. 먼저, 부평과 부평을 대체할 수 있는 플랜 B에 대해 간략하게 검토한 후 말씀드리죠.”
서 사장은 시원한 대답을 던졌다.
***
막 샤워를 마치고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내던 참이었다. 책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깜박였다. 부재중 전화 두 통. 서진의 번호였다. 한혁이 핸드폰을 책상 위로 도로 내리고 다시 수건을 집어 들었다. 핸드폰 진동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최한혁!
수신 버튼을 누르자마자 서진은 확인도 없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크게 불렀다.
-듣고 있는 거야 왜, 최한혁 상무이사님이라 불러 줘야 대답할 거야
“듣고 있어.”
-어디야
“집.”
-잘됐네.
“윤 팀장은 어딘데 ”
-네에, 윤 팀장은 골목길 올라가고 있어요, 상무니임!
서진의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왜.”
-집에 가려고 골목길 올라간다. 달밤에 산보하려고 다니겠어 그럼
자세히 들어 보니 거친 말투에 맹맹거리는 콧소리가 묻어 들어오는 것이 아무래도 술을 많이 마신 듯하다. 한혁은 난감한 기분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정 회장님 덕분에 집 앞 골목은 평평해져서 좀만 올라가면 걷기가 낫겠지. 고맙다고 전해 줘. 니네 할머니한테!
“알았어.”
-씨이, 누구는 마루판 갈 돈도…… 없는데, 누구는…… 도로도, 닦고.
술을 마신 탓에 차를 두고 걸어오는 것이 힘든지 서진의 목소리가 가쁜 숨소리에 드문드문 끊어져 들렸다. 잘게 들이쉬는 숨소리에 문득 그날 밤이 눈앞에 그려져 아찔해진다. 한혁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더 흔들리기 전에 냉정하게 통화를 마무리하고 싶다.
“윤 팀장, 취했어. 집에 들어가.”
-전화 끊지 마! 할 말 있어.
“좋아, 용건을 말해.”
-나와.
“왜.”
-신물 올리라고. 체! 내가 네 앞을 언제 알짱거렸어, 어 네가 툭툭 튀어나온 거지. 난 뭐 너 보는 거 맘 편하고 좋은 줄 알아 내 마음은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인 줄 알어 소원대로 사표 써서 줄 테니까 나와.
“윤 팀장, 이 시간에 내가 어디로 나가.”
-이 시간에, 집에 있는 상무님, 상무님네 집 앞에 잘 닦은 평평한 도로로 나오라니까. 아니면, 내가 벨 누른다 못 누를 거 같아 내가 다 말할 거야.
한혁이 무어라 대꾸할 사이도 없이 서진은 전화를 팩 끊었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날 지경이다. 한혁은 드레스 룸의 붙박이장을 열었다.
훅한 여름밤이었지만 간간이 골목길에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살갗에 닿자 기분이 상쾌해진다. 서진이 어디로 걸어오는지 몰라 골목의 양쪽을 바라보며 천천히 두어 발 옮기며 두리번거렸다. 오른편 방향으로 조금씩 걸음이 흐트러지며 다가오는 서진의 모습이 자그마하게 들어왔다. 골목을 비추는 주황색 가로등 불빛을 흡수한 흰색 상의는 막 떠오르는 태양처럼 따스하다. 아래로 풍성하게 퍼진 보라색 스커트가 바람에 팔락이며 가느다란 선을 감질나게 드러냈다 감추곤 했다. 한참을 바닥만 보며 걸어오던 서진이 그제야 한혁의 모습을 발견하였는지 멈춰 섰다. 한혁은 서진을 향해 큰 걸음으로 다가섰다.
기세 좋게 나오라 소리쳤지만 정작 다가오는 한혁을 보니 서진은 그 자리에서 굳은 듯 꼼짝할 수 없다. 와인 한 병의 취기로도 무뎌지지 않는 가슴이 여지없이 싸르르 아려 오기 시작한다. 재수 없어, 정말. 차마 마주 하지 못해 고개를 숙이자 시선에 한혁의 다리만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