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ing Memory RAW novel - Chapter 41
41화.
41화
예린은 담 벽 쪽으로 바짝 붙어, 차량들을 스쳐 지나는 서진을 가리키고 있었다. 드문드문 비추는 가로등 불빛 아래, 골목길을 걸어가는 서진의 뒷모습을 보며 한혁은 못마땅해했다. 왜 이 시간에 혼자 걷고 있나.
“됐어.”
한혁은 미련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어, 오빠 잠깐. 저 언니 좀 이상하네. 아픈가 ”
예린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한혁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담 벽을 짚으면서 걸어가던 서진이 몸을 구부린 채로 쭈그려 앉아 움직임이 없었다. 판단을 하기 전에 한혁은 핸들을 꺾어 차를 정차시켰다. 튕겨 나가듯 차에서 빠져나왔다. 한혁이 뛰다시피 다가갔을 때까지 서진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구부리고 있는 서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디, 다쳤어 못 걸어 어디, 허리 아파 ”
서진은 고개를 겨우 들고 눈을 천천히 깜박여 보았다. 붉어진 시야에 반쯤 들어오는 사람은 잔뜩 찌푸린 얼굴의 한혁이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잠시 후 겨우 말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두통…….”
“두통인데 걷지도 못해 ”
“좀 어지러워서.”
좀 어지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온몸의 혈류가 바닥으로 쏟아지고 순간 눈앞이 빨갛게 물들었다. 서진은 한혁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발을 떼었다.
“타라.”
한혁이 차 뒷문을 열자 앞좌석에 앉아 있던 여자애가 빠끔 고개를 뒤로 내밀었다.
“누구 ”
“동생이야.”
서진은 예린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예린요. 근데 어디 아프세요 ”
사랑만 듬뿍 받고 곱게 자란 여자아이답게 예린은 아무런 벽도 만들지 않고 어린애같이 눈을 반짝였다.
“예린아, 지금 힘든가 봐. 말 시키지 마.”
“정말 말도 못하게 아프면 병원 가야지.”
“괜찮아요. 전 윤서진이라고 해요. 상무님이랑 같은 팀에서 일했어요. 오늘 오후부터 지독한 두통이 왔었는데 어떤 때는 저혈압 증세도 따라와서 잠시 꼼짝 못할 때가 있어요.”
어질거리던 기운이 좀 가라앉자 살 만해진 서진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너 그렇게 아픈데 어디를 거기까지 걸어 나와 ”
“약, 사러…….”
한혁의 무뚝뚝한 소리에 예린이 놀란 듯 쳐다보더니 이내 표정을 지우고 생긋 웃으며 서진을 보았다.
“그럼 말할 수 있죠 나 너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저 언니, 사실은 몇 번 봤거든요. 학교 갈 때, 언니가 집 앞에서 차 타는 거 여러 번 봤었고 저기 아래 샌드위치 집에서도요. 사실은 언니랑 같이 있는 남자보고 제 친구들이 엄청 잘생겼다 해서 봤거든요. 두 번 정도 봤어요. 왜 키 크고 울 오빠만 하나 조금 작나 좀 차갑게 생긴 사람. 매번 인상 쓰고 있던데.”
예린이 검지를 미간에 대고 이맛살을 찌푸려 보였다. 서훈은 여학생들이 몰려 있는 장소를 꺼려 했다. 장난스레 관찰당하는 느낌이 싫다나. 왕자병이냐, 하고 놀렸는데 어느 정도 사실이긴 했다.
“아, 제 동생 봤나 봐요.”
조금 걸어 내려가면 있는 샌드위치 전문점은 서훈이 좋아하는지라 가끔 서진과 서훈이 나란히 가서 간단히 먹거나 아침거리로 사 들고 오곤 했었다.
“어머, 동생이구나. 남자 친구인 줄 알았어요. 다르게 생겼던데.”
“네, 한 살 아래 친동생요.”
“근데요, 언니 그때 보고 되게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아 엄청 고민했는데 있죠, 울 엄마 닮았더라구요. 신기하게도 많이. 그치, 오빠 ”
“아니, 큰어머니가 훨씬 더 미인이셔.”
좀 어이가 없어야 하나, 서진은 대꾸할 기운이 없다. 서진을 보며 거리낌 없이 조잘거리는 예린의 소리도 커졌다 작아졌다 울리고 있어 겨우 대답만 하는 정도였다. 어지러운 눈을 들어 창 밖을 응시하였다. 창 너머로 높고 긴 담이 눈에 들어왔다. 집 앞이다.
“고맙습니다, 상무님.”
서진은 돌아보지 않는 한혁에게 인사를 건네고, 예린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예린 씨.”
“잠시만 있어.”
서진이 문을 열기 전에, 한혁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뒷문을 열고서, 차에서 내려오는 서진의 손을 잡았다. 한혁의 눈에 언짢은 기운이 가득했다.
“아픈데 어디까지 혼자 내려간 거야 서훈이 집에 없어 ”
“걔야 요즘 프로젝트 들어가서 새벽이나 들어오는데……. 저기 아래 약국이 문 닫아서 조금 더 갔어요.”
“들어가서 쉬어. 힘들면 내일 천천히 나와.”
한혁은 서진의 대답을 듣기 전에 차에 올랐다. 차고 문이 열리고 그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도록 서진은 그대로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온몸을 돌던 피가 멈추나 싶더니 발바닥에 구멍이나 뚫린 듯 모조리 콸콸 쏟아져 나간 느낌이다. 털썩 꺾일 것만 같은 다리를 힘겹게 움직였다.
한혁이 차에 오르자마자, 예린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오빠. 저 언니랑 친해 아니, 좋아하니 ”
“무슨 소리야.”
“왜 반말 써 아픈 거 같다는 소리 듣고 그렇게 번개처럼 달려 나가 언니한테 화도 내던데 ”
한혁이 예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쓸데없는 상상 말아. 같은 팀에서 일했으니 친하고, 나보다 어린 사람이니까 반말 썼어. 그리고, 번개처럼 안 나갔어. 예린이, 할머니께는 아무 말 마라. 저 언니 곤란해져.”
“왜 곤란해져 ”
한혁이 답 없이 예린을 조용히 바라보자 예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방에 주스를 가져와서도 한혁을 피곤하게 한다는 연화의 걱정이 한참이었다. 예린은 그저 알았어, 알았어요, 건성건성 답했다. 도무지 앞집에 사는 서진이라는 언니와 한혁 오빠의 사이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연화가 가져온 당근 주스를 반쯤 마시다 말고 예린이 속삭이듯 말했다.
“엄마, 앞집 사는 언니, 세림 다닌다는 사람. 왜 할머니가 되게 똑똑한 인재라고 한 언니요. 내가 엄마 닮았다 그랬죠 ”
“응. 네가 얼마 전에 와서 내 예전 앨범도 뒤졌었잖아.”
“엄마는 보신 적 없죠 ”
“글쎄, 나는 기억에 없는데.”
“이상해. 오빠 수상해.”
“응 ”
예린은 주스를 비워 내며 뜻밖의 말에 궁금해하는 연화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엄마, 오빠가 할머니한테 꼭 비밀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두 사람 뭐가 있어요.”
지루한 일상에 뭐 하나 재밌는 거리나 생긴 듯이 예린은 서진을 우연히 골목길에서 보고 차에 태워 온 이야기를 살짝 부풀려 가며 말하였다. 연화가 예린의 수다를 들으며 빙그레 웃었다.
“오빠가 아니라고 했다며. 그럼 그런 거지. 쓸데없는 말 만들지 말고 책 좀 보다가 자.”
“내 느낌이 분명한데 촉이 왔다고요.”
“알았어. 최예린, 공부해. 응 ”
예린의 방문을 닫으며 연화는 혹시, 하는 마음으로 예린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어머님이 이사 오던 날 지나는 말로 언급하셨다. 앞집에 사는 딸이 세림이 공들여 스카우트해 온 인재라고. 차 속에서 스쳐 지난 적도 있었는데, 어떻게 생겼더라…….
서진은 억지로 약을 삼키고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기훈의 망연한 얼굴과 여전히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 한혁의 얼굴이 차례로 어른거려 두통은 가라앉을 기미도 없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이라도 자야겠다고 침대 옆의 스탠드를 껐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방의 불을 켜고 문을 열자 예상처럼 걱정스런 얼굴의 소양이 아니었다. 방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윤 교수였다. 서진이 긴장 어린 시선을 떨어뜨렸다.
“서진아.”
윤 교수도 머뭇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진이 조금 옆으로 비켜서자 윤 교수가 들어섰다. 마치 꾸중을 기다리는 아이 모양 있는 서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프다던데 괜찮아 ”
“네, 약 먹었어요, 아버지.”
“앉아라.”
서진이 책상 의자를 당기려 하자 윤 교수는 괜찮다는 표시를 하며 의자를 당겨 침대 옆쯤에 놓았다. 침대에 불편하게 걸터앉아 자신의 발만 내려다보는 서진을 보며 윤 교수는 긴 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일이 힘드니 요즘 무슨 일을 하는데 ”
서진은 눈을 들어 윤 교수를 보았다. 미국에서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 번도 제대로 서진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한 내색조차 하지 않던 아버지였다.
“지금 회사에서 작은 백화점 하나를 인수하려 합니다. 그 일 전담 테스크 포스팀에 들어갔어요. 그래서 평소보다 일이 많은 편이기는 한데 괜찮습니다.”
“중요한 일을 하는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고개를 들어 윤 교수를 보는 서진의 눈동자가 놀라움과 서러운 감정으로 흐려졌다. 윤 교수는 서진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미안하다.”
서진의 고개가 다시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하버드 경제학 박사 과정 어드미션을 받았다고 했을 때 자신을 부둥켜안고 그렇게나 기뻐하셨다. 단 한 번도 그날처럼 흥분하며 기뻐하던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연락을 끊고 뉴욕 매장에서 일하는 딸을 보며 불같이 화를 냈었다.
윤 교수는 그 무엇도 인정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총명하고 경제학에 열의를 보였던 딸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행로를 엉망으로 만드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그토록 꿈꾸던 자리를 시궁창에 처박고 판매 점원이나 하고 있는 모양을 어떻게, 어느 부모가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의 논리는, 감정은 바위처럼 움직일 수도 깨뜨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저녁, 기훈을 보고 하얗게 질려 버리는 서진을 보며,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직선적으로 내보이던 소양을 보며 아무것도 모른 채 서진만 탓했던 자신은 도대체 서진에게 무엇이었던가. 과연 부모이며 아비던가, 심한 자책감으로 가슴 아팠다.
“서진아.”
잡혀 있는 서진의 손이 작게 떨렸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실망시켜 드려 너무 죄송합니다.”
뉴욕에 찾아와 화만 내는 아버지에게 서진도 같은 기세로 화를 내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서로 모진 말을 주고받았다. 아버지는 오로지 경제학 박사만이 인생 최대의 사안인 것처럼 강요했고, 서진은 아버지의 꿈을 자신에게 투영시키지 말라 하였다. 이제 지겹다고, 내 인생의 그림은 내가 그릴 것이라 하였다. 한마디 제대로 된 변명도 않고, 매몰차게 몰아붙이는 아버지를 향해 원망만 했다.
“실망……. 아니야. 언제나 내 자랑이다.”
두터운 윤 교수의 손이 서진의 손을 툭툭 다독였다.
***
이사회에서 한바탕 폭풍이 일어난 후, 한혁의 사무실 안에는 정적만 감돌았다.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어 진 이사도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몇 번을 확인한 서류철만 들여다보았다. 한성유통 쪽에서도 부평과 일을 깊숙이 진행시키고 있었다. 삭스백화점으로도 공식적인 컨텍이 시작되었다. 정확하게 세림의 계획을 한발 앞서 선수 친 까닭에 이사회는 발칵 뒤집어졌다. 의뭉한 강 전무의 조종으로 벌써 세림은 재영을 이사로 추진해 보려는 세력과 한혁을 여전히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었다. 한성 측 혹은 강 전무 측에서 정보를 흘린 덕분에 벌써 언론들은 최대 라이벌 유통 기업 간의 인수 전쟁의 향방을 주목한다는 기사 초안을 잡고 이니셜로 먼저 떠보기 시작하는 경솔함을 보였다.
최 부회장이 사망하고 흐트러진 세림은 얼마 전 성공적으로 계열사를 상장시킨 한성에 비하면 회사 전반의 상황은 물론이고 여유 자금도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였다. 한성의 유리한 입장을 알리는 기사가 연이어 나가자 주식시장은 벌써 출렁이기 시작했다. 한성유통의 주식은 7% 가파른 상승을 보이는 반면 세림은 4% 가까이 빠져나갔다. 이사회는 일방적이었다. 최한혁 상무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커졌다. 무참하게 매도되면서, 한혁은 덤덤하게 자리를 지켰다. 거센 비난을 변명 없이 받아 내었다.
진 이사에게 현재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한혁은 굳게 입술을 다문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내부에서 정보가 흘러나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부평은 그렇다 하더라도 삭스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진 이사가 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혁과 진 이사 누구도 입에 올리지는 않지만 생각은 같았다. 오직 한혁 하나만을 목표로 한 강 전무의 치졸하고 얄팍한 수법이라는 것을.
“언론에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상무님.”
진 이사에게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한혁은 그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얕은 눈매를 만들고 있었다. 데스크 전화벨 소리에 굳어 있던 한혁의 손이 움직였다.
“네.”
“박 이사님 왔습니다.”
“들어오라 하십시오.”
한혁이 서류철 하나를 테이블 앞에 두고 사무실 소파에 깊숙이 앉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박 이사가 문가에서 한혁을 보고 하는 둥 마는 둥 성의 없이 머리를 숙였다.
“앉으시죠, 박 이사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진 이사를 향해 박 이사의 불거진 눈동자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쳐져 오는 볼살을 실룩이며 그는 진 이사인지 한혁을 향한 것인지 모를 조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