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43
43. 매니저의 고난
「속보입니다. 오늘 오전 7시경, 서울 여의나루역 부근에서 버스트 게이트가 출현했습니다. 이세윤 기자입니다.」
「여의나루역 2번 출구가 경찰관들에 의해 엄격히 통제되어 있습니다. 오전 7시 13분, 한 시민으로부터의 제보─.」
TV 속 앵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리모콘으로 TV를 끈 시우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 냈다. 어두운 곳에서 보면 흑발로만 보이던 검푸른 머리칼이 형광등 아래에서 물기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후.”
짧게 한숨을 쉰 시우가 휴대전화를 툭 건드리자 최근 착신 메시지가 액정에 팝업되었다.
[박제휘] [오전 9:01] 이제 막 이유라 헌터님 댁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참입니다.오늘 오전 여의도에서 버스트 게이트가 출현했다. 예상 난이도는 A급.
A급 이상의 고난도 게이트는 여타 저급 게이트보다 훨씬 경매가 치열했다. 그만큼 고가의 자원을 기대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군단이나 늑대 등 재력이 대단한 길드가 한 번에 억 소리 나는 돈을 내놓는 경우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낙찰이 완료되곤 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큰손이 경매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경매는 최장 5일 동안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해당 게이트는 방치되느냐.
그건 아니었다. 협회는 다음 경우에 한하여 요원들을 출동시키고는 했다.
1. 게이트 출현 후 2시간 이상 낙찰이 결정되지 않을 시.
2. 일반인이 게이트에 휩쓸렸다는 신고가 들어올 시.
바로 오늘 같은 경우다.
부르르─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까맣던 액정 위로 신착 메시지가 반짝 떠올랐다. 시우는 기다렸다는 듯 곧장 메시지를 확인했다.
[박제휘] [오전 9:06] 그런데 대표님, 정말 A급 게이트에 이유라 헌터님을 보내도 되는 걸까요?요원의 수가 부족할 시, 협회는 특례법에 의거하여 일반 길드에게 소수 헌터의 특별 출동을 요청할 수 있다.
특히 이번과 같은 고난도 게이트의 경우, 늑대와 같은 대규모 길드에게 특별 출동을 요청하는 경우가 잦았다.
하지만─.
‘어째서 선배를?’
젖은 수건을 내려놓은 시우가 침대에 풀썩 걸터앉았다. 그리고 굳은 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흑염의 프린세스는 F급. 심지어 컨셉 헌터였다. 협회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왜 하필 그녀를 콕 집어 특별 출동 요청을 보낸 것인지, 시우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미간을 한껏 좁힌 시우가 턱을 괴었다. 여전히 물기가 남은 머리카락에서 툭,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설마 군단에서 수작을 부린 것은 아니겠지요?’
흑염의 프린세스 출동 요청에, 제휘는 우선 그들을 의심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시우의 생각은 달랐다.
군단, 트릭스터 측은 은하가 가지고 간 게이트 핵을 지금까지도 탈환하지 않고 있었다.
녀석의 인성을 미루어 보았을 때 아예 게이트 핵을 잃어버린 셈 치거나 직접 응징했으면 했지, 협회를 통해 골탕을 먹이는 등의 귀찮은 방법을 선택하진 않았을 터.
‘그렇다면…….’
푸른 눈이 가늘게 접혔다.
문득 그의 뇌리에 옅은 금발의 남자가 스쳐 지나갔다. 여유 만만하던 그 미소를 떠올리는 순간 가지런한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아니, 그럴 리가.
시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한국의 1세대 헌터라고는 하지만 현재 그는 미국 소속의 헌터다. 그가 한국 헌터 협회를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겨 있기를 수십 초.
아랫입술을 짓씹은 시우가 뒤집어 두었던 휴대전화를 휙 집어 들었다.
「네, 대표님.」
통화 연결음이 멎고, 수화기 너머로 제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는?”
「차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선배에게 누군가 접근한다 싶으면 내게 바로 보고해.”
젖은 머리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날카로운 턱선을 따라 미끄러져 내린다.
이윽고 시우가 서서히 푸른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마치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 지독하게 가라앉은 눈동자 속에 희미하고도 시린 안광이 언뜻 비쳤다.
“……내가 알아야겠어.”
그것은 경계.
어쩌면 시우 본인조차 모르는 또 다른 무언가일지도 몰랐다.
* * *
‘또 기분이 안 좋으신가 보군.’
제휘는 통화가 끊긴 휴대전화를 응시하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실버문이 창사되기 이전부터 시우를 모셔 온 그였다. 그간 보모에서 수행 비서로 업그레이드를 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새우 등 터지는 신세는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기분이 흙구덩이에 추락하는 시우에게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더 예민하시단 말이지.’
이럴 때는 쥐 죽은 듯 시키는 일만 철저하게 수행하는 편이 서로에게 이득이었다.
전화를 끊고 주차 장소로 돌아오자 검은 드레스를 입은 은하가 보였다. 기다리는 동안 이미 차에서 내린 것인지, 차에 비스듬히 기댄 채 양산을 펼친 모습이다.
“통화는 끝났나요?”
“예.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산이 까매서 햇빛 차단에 용이하겠네요.”
은하가 힐끗 자신의 양산을 바라보며 짧게 답했다.
“……그러네요.”
사실 은하도 ‘우아한 양산’을 양산의 용도로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늘 흉기 휘두르듯 몬스터를 박살 내는 데에만 사용했으니.
“별 이야기는 없었고요?”
“네. 그냥…… 몇 가지 당부 사항만 전달하셨습니다.”
제휘가 힐끗 은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우리 대표님은 세상만사에 무심하신 줄로만 알았더니, 이 헌터님께는 꽤 신경을 쏟고 계신 모양입니다. 하하.”
“내게요?”
“네. 이 헌터님을 모시는 날이면 하루에 세 통씩 전화가 오거든요. 일은 잘 끝났는지, 별 사고는 없었는지…… 사사건건 궁금해하시더라고요. 방금도 대표님의 전화였고요.”
제휘의 눈이 도르륵 허공을 맴돌았다. 막상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제 말에 더욱 확신이 생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음. 아마 제가 여동생을 생각하는 기분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여동생이 있어요?”
“네. 부산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슬쩍 말꼬리를 흐린 제휘가 할 말을 고르듯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요즘 부산 쪽 게이트 출현율이 급증하지 않았습니까?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 서울으로 돌아오라고 했는데도 끝까지 말을 안 들어서요. 조만간 억지로라도 끌고 올라오든가 해야죠.”
후우. 제휘가 한숨을 쉬었다.
잘은 몰라도 여동생을 각별히 아끼는 듯해 보였다.
“그럼 가실까요?”
두 사람은 여의나루역으로 향했다. 버스트 게이트 출현 경보가 단말기 및 휴대전화를 통해 일찍이 전해졌던 탓인지 어느 순간부터 행인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반경 300m를 기준으로 경찰들이 시민들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수고하십니다.”
바리케이드를 친 경찰관들을 지나 조금 더 걸었다.
버스트 게이트의 영향일까,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주변 가로수는 마치 겨울나무처럼 비쩍 말라 있었다.
파삭파삭.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낙엽 더미를 밟으며 제휘가 입을 열었다.
“A급 게이트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요원으로서 표면적으로 출동한 것뿐이니, 낙찰 길드가 입장할 때까지 적당히 눈치껏 계시면 됩니다. 전투랄 것도 크게 없을 겁니다.”
“네.”
“그리고…… 내부에서라도 혹시 누군가 헌터님께 말을 걸어온다면 어디 소속의 누구인지, 또 어떤 말을 했는지 꼭 기억해 두십시오.”
“왜요?”
은하가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휘는 뺨을 긁적이며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음……. 아무래도 대표님께서는 이번에 이 헌터님께서 요원으로 호명된 것이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거든요.”
뭐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최근에 트릭스터의 일도 있었고.
F급인 흑염의 프린세스를 A급 게이트 요원으로 호명했다는 것은 은하가 생각하기에도 기이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은하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휘는 그녀의 이런 점이 좋았다. 누구와는 달리, 그녀는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 언제나 선을 지켰으며 맡은 바 이상의 일도 이하의 일도 하지 않았다.
함께 일을 하기에 이 이상의 좋은 파트너는 없으리라.
어쩌면 대표님께서도 그녀의 이런 점을 높게 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여의나루역에 도착해 있었다.
“우와. 협회가 심각한 일손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건 들었지만, 이건 좀 심한데요?”
역 앞에 모인 헌터들을 보며 제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버스트 게이트 요원의 투입 수는 보통 열 명 남짓.
그런데 눈앞에 협회 유니폼을 입고 있는 정식 요원은 단 네 명뿐이었다. 그 말은 즉 나머지 여섯 명은 모두 은하와 같은 특별 출동 헌터라는 소리였다.
한국 헌터 관할 협회의 인재난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인 듯했다.
“여기서 또 뵈네요.”
그때 등 뒤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신지.”
은하가 고개를 갸웃하자 남자의 얼굴에 쩌적 금이 갔다.
“뫼비우스.”
그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B급 아쿠아리움 게이트에서 리더를 맡았던 바로 그 헌터였다.
“A급 버스트 게이트에 F급 헌터가 온다기에 누구인가 했더니, 또 당신이로군요.”
뫼비우스가 입매를 비틀었다. 웃고 있는 듯했지만 그것은 결코 반가움의 표시는 아니었다.
“이 헌터님? 이분은…….”
“잘 모르겠네요.”
서로에게 딱히 반가운 얼굴은 아니니 굳이 아는 척할 필요는 없겠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은하가 그렇게 그를 지나치려던 때였다.
“늑대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협회도 구워삶은 모양입니다.”
뫼비우스가 은하 앞을 막아섰다.
“그렇다면 어쩔─.”
은하가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어? 누나!”
퍽!
무언가로 인해 뫼비우스가 종이 인형처럼 휙 고꾸라졌다.
‘뭐야.’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뫼비우스는 홱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밀쳐 낸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
제자리에서 쩍 얼어붙었다. 괴물이라도 목격한 양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누나 여기서 뭐 해요?”
뫼비우스를 철퍽 밀어 버린 주인공은 바로 귤색 머리칼에 카모플라쥬 후드 티를 입은 트릭스터, 송민주였다.
민주는 마치 방과 후에 교문 앞에서 부모님을 만난 초등학생처럼 기뻐 보였다. 자기 때문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한 뫼비우스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당신…….”
뫼비우스가 얼떨떨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제야 민주는 스륵 눈만 돌려 뫼비우스를 바라보았다.
“왜?”
입가에 걸려 있던 천진한 미소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할 말 있어?”
그 앞에서 뫼비우스는 뻣뻣하게 굳어 버린 입술을 억지로 달싹였다.
“아, 아니…… 요.”
“그럼 비켜. 방해되잖아.”
“…….”
건방진 중학생 소년 앞에서, 뫼비우스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소년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편 뫼비우스만큼 놀란 이가 현장에 또 한 명 있었으니…….
“이, 이, 이 헌터님?”
바로 제휘였다.
지진이라도 난 듯 그의 눈동자가 극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 눈이 지금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지금 이유라 헌터에게 매미처럼 달라붙어 있는 꼬맹이는─.
‘트릭스터잖아……?!’
어떻게 그녀가 트릭스터, 대한민국의 S급 헌터와 친분이 있는 거지? 심지어 눈으로 보기에 둘 사이의 친분의 두께가 예사롭지 않은 듯했다.
돌처럼 굳은 제휘 앞에서 은하는 트릭스터의 머리에 툭, 손을 얹으며 말했다.
“제가 이전에 구해 주었던 아이예요.”
“아하, 그렇군요. 헌터님께서 구해 주었던…….”
읭?
눈이 잘못되었나 싶었더니 이젠 귀까지 잘못된 걸까.
대체 누가 누굴 구해 주었다고?
“그날은 잘 들어갔나 보구나.”
“네. 덕분에요.”
“여기에는 요원으로 불려 온 거니?”
은하는 제게 대롱대롱 매달린 민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
이번에는 민주가 굳었다.
대답하기가 곤란하기라도 한 듯 동그란 눈이 허공에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음, 그게요…….”
“숨길 필요 없어.”
은하는 당황한 듯한 민주를 보며 낮게 웃었다. 그리고 제휘를 향해 힐끔 시선을 던졌다.
“그럼 다녀올게요.”
“예? 아, 예…….”
가자. 은하가 민주에게 손을 뻗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민주는 그 손을 또 기쁜 듯이 덥석 잡는 것이 아닌가.
친남매보다 더 다정해 보이는 그들의 뒷모습을, 제휘는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그리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 뒷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어서 대표님께 알려야 한다.
다급히 다이얼을 누르는데, 갑자기 주변 공기가 어수선해졌다.
불현듯 한 남자가 협회 요원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오늘 여러분의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왼쪽 가슴을 받친 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색소가 옅은 금발. 그리고 검은 정장. 큰 키에 수려한 이목구비까지.
제휘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마에스트로라는 이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툭.
제휘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힘없이 추락했다.
‘……대표님.’
X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