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80
80. 돌려주러 왔어
“아저씨들, 나한테 볼일 있어?”
2031년 9월 11일.
헌터 옥션 2일 차.
무사히 칩 벌이를 끝낸 아연이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는 베르데를 포함하여 외국인 헌터가 셋. 그들의 목적이야 알 법했다.
“너지?”
“엥. 무슨 소리야?”
“내 아이템을 훔쳐 간 거 말이다.”
베르데는 이미 다 알고 왔다는 듯한 얼굴로 아연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연은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든 다음 대놓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러게 내가 주머니 간수 잘하라고 했지?”
“오리발 내밀지 말고 얼른 내놔.”
“무슨 소리야? 내가 훔쳤다는 증거는 있고?”
없잖아. 야구 모자 아래 진분홍색 눈동자가 천진한 기색으로 휘어졌다.
“너 말고는 짐작 가는 곳이 없어.”
“이봐요, 아저씨. 그건 심증이지 증거가 아니잖아염.”
에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은 아연이 양손을 교차시켜 X 자를 그렸다.
“아무튼 난 아님. 절대 아님.”
그대로 그들을 지나치려는 순간.
크르르릉─ 컹! 컹!
불쑥 나타난 대형견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아연을 물어뜯을 기세로 이빨을 드러냈다.
둘, 셋, 넷…….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없었던 대형견들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테이머가 있군.’
소환 특성을 지닌 헌터. 그중에서도 동물을 다루는 헌터를 흔히 테이머(Tamer)라 불렀다.
싸움이 길어지면 귀찮아지겠다.
소환 계열 헌터들은 마력이 남아 있는 한, 랭크에 따라 최소 십에서 몇십, 최대 몇천까지도 물체를 소환한다고 했다.
일대일 전투에 특화된 아연에게는 그야말로 천적인 격.
게다가 상대는 셋. A급 헌터 베르데의 고유 능력은 아연이 알기로 식물 조작. 나머지 한 헌터는 랭크도 고유 능력도 미지수. 즉 상성을 예상할 수조차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취해야 할 행동은 단 하나. 아연은 빙글 등을 돌렸다.
“아저씨 개야? 귀엽긴 한데, 난 고양이파라서.”
그리고.
“……?!”
연기처럼 휙 사라진 소녀.
당황한 베르데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어디에도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위? 아니다. 문자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도망을 친 것인지 단순히 모습을 감춘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쫓아.”
한 헌터가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그것이 방아쇠인 양 대형견들이 일제히 주변으로 흩어졌다.
* * *
‘2반에 강아연 말이야. 기초 생활 수급자래.’
‘걔 어렸을 때 부모님 게이트 사고로 죽고, 작년까지 보육원에서 자랐다던데?’
‘진짜? 2반 친구가 그러던데 걔한테서 이상한 냄새도 난다더라.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걔가 움직일 때마다 쉰내가 진동한대, 큭. 양말도 맨날 같은 거만 신는다던데?’
‘집에 물이 안 나오겠지.’
으, 더러워.
‘그거 들었어? 1교시 체육 시간에 2반, 털렸다더라.’
‘털렸다니?’
‘1교시 끝나고 교실로 돌아갔더니 애들 지갑이 다 없어졌대. 자물쇠 안 걸린 사물함도 전부 열려 있었대.’
‘헐, 대박.’
‘근데 X나 소름인 게 뭔지 알아? 애들이 교실에서 지갑 없어졌다고 다 난리 치는데, 강아연이 교실 뒷문에서 그걸 보고 웃고 있었대.’
‘미친. 뭐야. 개무서워.’
‘걔 맨날 체육 시간마다 배 아프다고 양호실 간다며. 그럼 딱 각이 나오지 않냐?’
──강아연이지 뭐.
‘아연아. 선생님한테만 솔직하게 말해 줄래? 왜 그랬니? 필요한 물건이 있었던 거라면…….’
저 아니에요.
‘네, 황 쌤. 아무리 물어봐도 끝까지 아니라고 해서요. 그게…… 아연이는 부모님이 안 계시잖아요. 지금부터 벌써 이러면 앞으로 애가 어떻게 될지…… 저도 머리가 아프네요. 네, 우선 잘 타일러 볼게요. 네네. 알겠습니다.’
……저 아니라고요.
‘아연아, S급 판정 받았다는 거 진짜야?’
‘오늘 학교 마치고 시간 돼? 옆 학교 오빠들이랑 카페 가기로 했는데, 너도 데리고 오래.’
‘아연아, 우리 우정 팔찌 맞출래?’
‘여기. 요점 정리 노트. 너한테만 보여 주는 거야.’
우리, 단짝이잖아.
‘아연이 덕분에 우리 학교가 TV에도 다 나오고. 선생님은 정말이지 우리 아연이가 너무 자랑스럽구나.’
‘그래서 말인데, 아연아. 혹시 괜찮으면 학교 홍보 영상 촬영, 조금 도와줄 수 없을까? 아연이가 영상에 나오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넌 우리 학교의 얼굴이잖니.
아연아.
우리 아연이.
아연아.
강아연─.
…….
…….
투둑, 투둑…….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빗줄기가 점차 거세게 변해 간다. 두꺼운 빗방울이 사정없이 얼굴 살갗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쿨럭.”
기침을 토해 냈다. 비릿한 맛이 혀 전체에 퍼졌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자 뺨을 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한층 더 강해진다.
“이제 그만 내놔. 아이템.”
꾸욱.
뺨에 닿은 신발 밑창의 감촉이 축축하다. 아니 어쩌면 젖은 아스팔트의 감촉일지도 몰랐다.
아연은 바닥에 쓰러진 그 상태 그대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베르데를 응시했다.
“……싫은데.”
퍽!
베르데가 신발로 아연의 머리를 공 차듯 차 버렸다. 뇌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강도. 시야가 크게 뒤바뀐다.
그러나 아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안일…… 했어…….’
설마 마지막 한 헌터가 ‘블로커(Blocker)’였을 줄이야.
블로커에 대해서 들은 적은 있었으나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적의 일부 스킬을 무효화(無效化)한다. 흔히들 상쇄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차라리 ‘봉쇄’에 가까웠다.
원리는 알 수 없었다. 블로커마다 ‘조건’을 ‘달성’하는 방법이 상이하니까.
하지만 예상하건대 이 헌터의 조건은 아마도…….
‘화살.’
그가 쏜 화살촉에 스킬을 봉쇄하는 일종의 독이 발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달려드는 소환견들에게 신경이 쏠린 나머지 가까스로 피하지 못했던 화살. 그 화살에 스친 이후부터 아연은 스킬이 봉인되었다.
‘지금 와서 눈치채도 늦었지만.’
헌터 간의 전투에서 승패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랭크와 상성, 또한 ‘정보’였다.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서는 우선 적을 알아야 하고 나를 숨겨야 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 이것은 몬스터와의 전투에서도 유효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연은 안일했다. 제 랭크를 너무도 믿었던 것.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것이 바로 패인(敗因)이었다.
아연은 초점이 흐릿해진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특성▶ ‘날렵한 움직임’ 활성화.] [실패하였습니다.] [상태 이상 ‘침묵’. 특성 및 스킬 사용이 제한됩니다. 남은 시간 5:49]아직 지속 시간은 5분이나 남았지만 예상컨대 블로커를 기절시키면 그길로 상태 이상은 풀릴 것이다.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
그러나 현재 블로커는 두 명의 동료와 함께였다. 심지어 소환견들까지 합한다면 아연은 1 대 10, 혹은 그 이상의 적을 마주한 상태.
놈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블로커에게 접근하여 그를 기절까지 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능력까지 봉쇄당한 이 상태에서는 더더욱.
“나 기억났어.”
블로커가 중얼거렸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저 애, 몇 년 전 뉴스에 나왔던 애잖아.”
“뉴스에?”
“그래.”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를 검색하는 블로커. 이내 동료들에게 쓱, 액정을 들이밀었다.
“봐. 한국의 네 번째 S급.”
“어라, 지금이랑 얼굴이 좀 다른 것 같기도……?”
“아냐. 자세히 봐 봐. 맞다니까.”
그들은 액정 속 앳된 소녀의 얼굴과 아연의 얼굴을 대조해 보았다.
아연이 가진 특성 중 하나인 ‘교란’은 전투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아연이 원한다면 상대에게 혼란을 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든가 말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스킬을 봉쇄당한 지금 시점에서는 풀려 버린 모양. 아연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베르데가 성큼 다가왔다.
“이거 너 맞아?”
“…….”
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흙투성이인 아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베르데는 이내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핫, 진흙 바닥에 나뒹구는 꼴도 그렇고, 함부로 남의 주머니에 손을 대는 버릇도 그렇고.”
스윽. 아연의 귓가에 속삭이듯 내려앉는 목소리.
“한국의 S급은 참 걸작이군. 마에스트로가 한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간 이유도 잘 알겠어.”
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이어지는 발길질. 아연은 작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고 그것을 견뎌 냈다.
쳇, 재미없게. 시끄러운 빗소리 사이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항도 없어 흥이 식은 모양이었다.
그러다 우뚝 발길질을 멈추더니,
“……그나마 있는 백야마저 산송장인 마당에 차세대 젊은 S급이 고작 이런 수준이라니. 한국인들도 참 불쌍하군.”
찰칵, 찰칵.
이어지는 카메라 셔터음.
움직임이 없던 아연이 시선만 굴려 그들 쪽을 바라보았다.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국의 S급 헌터가 피떡이 된 채 진흙 바닥에 뒹굴고 있는 꼴을 앨범에 담고 있는 것.
“이 사진, 좋아요 몇 개나 받으려나.”
찰칵, 찰칵, 찰칵…….
끊임없이 이어지는 셔터음.
초점이 풀린 눈으로 그들을 응시하던 아연이 그들 너머로 낯선 인영을 발견했다.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걸음을 멈추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휙. 베르데가 쏘아보듯 뒤로 돌았다.
“뭐야.”
행인은 흠칫 어깨를 떨더니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우산 속에 얼굴을 숨겨 버렸다.
타닷…… 멀어지는 발소리.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점이 되어 사라지는 빨간 우산.
“…….”
더러운 진흙 위에서 아연은 소리 없이 웃었다.
기대하지 않았다. 전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득이 없으면, 목적이 없으면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나서 주지 않는다. 그게 지극히 정상이었다.
왜냐면,
나도 그랬으니까.
“────.”
재수 없는 외국인 헌터 놈들이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배, 등, 어깨. 발길질은 여전히 이어진다. 아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르데, 저기 저 사람──.”
“──니까? ──척 가시죠.”
문득 쉴 새 없이 아연의 신체를 가격하던 발길질이 멈추었다.
무슨 일이지? 감았던 눈꺼풀을 스르륵 들어 올리자,
또각─
눈앞에 다가온 검은 구두코. 이 날씨에도 진흙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아연은 이끌리듯 시선을 들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새까만 밤하늘.
새까만 양산 아래,
“…….”
그보다 더 새까만 눈동자.
아연이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였다.
“……언, 니?”
기분 탓이었을까, 검은 홍채에 희미하게 황금빛 안광이 스친 것 같았다.
“이봐요, 당신. 끼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안 들립니까?”
솨아아아아─
빗방울이 거세졌다.
아연에게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차갑고, 이기적이고, 실리적인 것.
“팸플릿, 돌려주러 왔어.”
하지만 어쩌면……
“나도 다 외웠거든.”
꼭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