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99 Princess of Black Flame RAW novel - Chapter 79
79. 타고난 장사꾼?
9월 11일. 헌터 옥션 둘째 날.
“픽시 파우더…….”
은하는 어제 아연에게서 받은 팸플릿을 정독 중이었다.
꽤 두께가 얇아 보였는데 정작 내용은 의외로 빼곡하게 차 있어서,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얻고자 하는 정보를 찾기 힘들었다.
‘여기 있다.’
팸플릿이 너덜너덜해질 때쯤이 되어서야 은하는 픽시 파우더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재작년에 출품됐었구나.’
낙찰 금액은 15만 7천 코인. 아연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
다행히 올해도 K 부스에서 출품 예정이라고. 13일 오후 2시 30분. 출품자는 비공개. 출품 수량은 딱 하나.
그때 정보를 꼼꼼히 읽어 내려가던 은하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춰 섰다.
[경매 참여 조건: 칩 1만 장]1만 장?
흰색 배지로 환전 가능한 칩의 최대치가 고작 1천 5백 장. 어제 벌어들인 칩이 약 4천 장. 오늘 중으로 어제만큼 판매한다고 해도 조금 부족한 수준이었다.
‘쉽지 않네.’
은하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턱을 괬다. 그 곁에서, 노란 메시지창이 불쑥 떠올랐다.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부루퉁한 얼굴로 매대를 응시합니다.] [코인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설마하니 칩까지 필요할 줄이야.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한 족속들이라며 투덜댑니다.]경매를 위해서는 칩이 필요하단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고양이는 줄곧 저 상태였다.
아마 자신의 활약이 반쯤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어쩌겠어.’
단순히 코인으로만 경매가 진행되었더라면 일이야 쉬웠겠지. 약 40만 코인을 보유한 은하였으니 말이다. 만일 부족하다 하더라도 은하의 고양이라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줄 테고.
‘주최 측도 돈은 벌어야 할 테니까.’
칩은 그들의 수입 수단이기도 했다. 이해 못 할 것은 없었다.
한편 은하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창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툭 내뱉듯 중얼거렸다.
“그렇게 속상하면 팔 만한 아이템 좀 나눠 주든가.”
그러자 노란 메시지창이 번뜩 빛났다. 유레카!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잠시만 기다려 보라며 털을 뒤적이기 시작합니다.] [어디 가서 우리 집사 기죽지 않게 내가 지금 당장 좋은 물건을 가져오겠다며 자신 있게 말합니다.] [ – – – Loading – – – ]집사는 누구 보고 집사래. 은하는 로딩창을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축하합니다! ‘입자가 고운 소금’을 획득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향이 좋은 흑후추’를 획득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소량만으로도 천상의 맛! 최고급 트러플 오일’을 획득하였습니다!]띠링띠링띠링.
연속하여 팝업되는 시스템창. 이 아이템들은 분명…….
‘언노운 게이트에서.’
그렇다. 그곳에서 몬스터의 생고기를 뜯어 먹으며 목숨을 부지할 당시 고양이가 건넸던 것들이다.
“이걸 어디다 쓰란 거야.”
“그땐 게이트 안에 갇혀 있는 신세였으니까. 지금은 달라.”
은하가 단호하게 답했다.
이러한 조미료나 향신료 따위, 근처 슈퍼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신시우라면 이럴 때 괜찮은 아이템을 가져다주었을 것 같은데.”
고양이의 반응이 재밌었던 까닭에 반쯤 농담으로 중얼거린 말이었다.
애초에 시우와는 계약이 파기된 이후였고, 만일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은하는 이런 일에까지 그의 손을 빌리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은하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은하는 농담에 전혀 소질이 없다는 것.
둘째, 고양이는 은하의 상상 이상으로 신시우를 적대시한다는 것.
[ – – – Loading – – – ]다시금 급히 사라진 고양이.
“…….”
[신수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가 이건 진짜진짜 아끼던 거지만 특별히 언니에게만 건네는 것이라며 강조합니다.] [어떠냐! 아무리 그 멍멍이 자식이라도 이토록 신선하고 윤기 나는 생선은 구해 오지 못할 것이라 호언장담합니다!]……아무래도 고양이가 소유한 아이템 중에 쓸 만한 것은 없는 모양이다. 은하는 인벤토리에 추가된 ‘바다 향이 그윽한 꽁치’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어찌 됐든 마음만은 고마웠다. 은하는 인벤토리창을 닫으며 고양이에게 감사를 전했다.
비록 고양이에게서 별다른 수확은 얻지 못했으나, 칩 벌이는 별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흑호의 가죽, 아직 남아 있나요?”
“송곳니 20개에 칩 1장 맞죠?”
“여기 칩 10장이요. 가죽 150장 묶음으로 교환하겠습니다.”
“칩 100장 치 구매하면 서비스 좀 얹어 주시나? 하핫.”
“그건 힘듭니다.”
지금 이 기세라면 최소 3천 장 이상의 칩을 거뜬히 벌어들일 수 있겠다.
다만 조금 피곤할 뿐이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도 거르고 칩 벌이 삼매경이었더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잠시 매대를 정리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였다.
“실례합니다. 흑호의 가죽 15장에 칩 1장이라는 얘기 듣고 왔는데요.”
젊은 헌터 한 명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녹색 머리카락. 마찬가지로 녹색 눈동자. 옅은 주근깨에 큰 코, 짙은 눈매. 외국인이었다.
어제 응대했던 그 많은 손님 중에 외국인 하나 없었을까. 배지에 자동 통역 기능이 붙어 있는 것도 이제는 알고 있다는 소리.
은하는 당황하지 않고 태연하게, 휴식 전 마지막 손님을 맞이했다.
“천천히 보세요.”
“가죽 말고도 꽤 여러 아이템이 많네요. 어, 이건…….”
남자의 시선이 우뚝 멈추었다.
‘응고된 몬스터 혈액’. 가죽이 많이 팔려서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하여 이제 막 올려 둔 아이템이었다. 은하의 매대 위에 진열된, 몇 안 되는 희귀 등급의 아이템이기도 했다.
“이거, 칩 얼마에 교환 가능합니까?”
헌터가 관심을 보였고 은하는 대답하기에 앞서 잠시 고민했다.
사실 은하는 옥션뿐만 아니라 이러한 아이템 거래 자체가 처음이었다. 현대의 택시 기본요금도 제대로 모르는 그녀가 아이템 시세에 대해 빠삭할 리가 없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은하 앞에서 남자가 빙긋 웃었다.
“100장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100장이라.
희귀 등급이라 하더라도 그래 봤자 몬스터의 피. 100장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여태 주로 판매했던 가죽이나 송곳니에 비하면 엄청나게 비싼 값이기도 했고 말이다.
은하가 섣불리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거래해 주신다면 150장까지도 지불할 의향이 있습니다만.”
칩 150장이라니. 가죽을 2200장 이상 팔아야 겨우 벌 수 있는 가격이었다.
다만 이렇게 쉽게 가격을 높인 것을 보니, 이 ‘응고된 몬스터의 혈액’이 보기와는 달리 꽤 값어치가 있는 아이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하에게 이 아이템이 쓸모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래요.”
생각을 마친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배지를 내밀었다. 이 기회에 얼른 팔아 치우고 칩으로 바꿔 먹는 것이 은하에게는 이득이었으니 말이다.
배지와 배지가 맞닿고 거래를 승인하면 그쪽 칩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구조. 남자 역시 자신의 배지를 내밀려던 순간이었다.
“스토옵.”
불쑥,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어림없지, 아저씨. 유 돈 노 양심?”
핑크색 야구 모자. 어디선가 튀어나온 아연이었다.
쯔쯔쯔, 혀를 찬 아연이 은하에게 쪼르르 달려와 소곤소곤 말했다.
“언니, 이 새끼 사기꾼이에요.”
“……뭐?”
“스코틀랜드 출신 A급 헌터 ‘베르데(Verde)’요.”
작년에도 장사가 어설픈 헌터만 골라서 등쳐 먹더니 올해도 귀신같이 알아보고 납신 모양.
어휴, 나 이럴 줄 알았다니까. 크게 한숨을 쉰 아연이 찌릿 외국 헌터를 노려보았다.
“어디서 날로 먹으려고, 팍씨. 가만있어 봐요. 여긴 나한테 맡기고.”
아연은 자신이 장사에 있어서만큼은 정직한 편이라 자부했다. 적어도 여기 이놈처럼 코 묻은 떡 뺏어 먹는 짓은 하지 않으니까.
아연은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처억! 두 손을 펼쳐 보였다.
“1천.”
“……뭐?”
“원 따우전이요, 이 아저씨야.”
아연이 씨익 웃었다.
“싫음 가든가.”
* * *
삑.
「현재 잔여 칩 10,515 ⓒ」
화면에 떠오른 숫자를 확인한 은하는 다시 배지를 거두었다. 결국 이틀 만에 1만 칩을 버는 것에 성공한 것.
F급 헌터인 까닭에 현금으로 환전 가능한 최대 칩이 1천 5백뿐이었던 데다, 인벤토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이템 중엔 값이 나가는 물건이 없었기에 우려가 컸었는데…….
배지를 거둔 은하는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미처 고맙단 말을 못 했어.’
외국 헌터와 한바탕 말씨름을 한 아연은, 결국 그에게서 칩 1천 장을 뽑아내 주었다.
그런데 배지로 칩 교환에 성공한 다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뒤돌았을 때 이미 아연은 사라진 뒤였다.
‘이것도 돌려주고 싶었는데.’
은하는 손에 들고 있던 팸플릿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필요한 정보도 모두 확인했으니 이제 이건 필요 없었다.
조금 너덜너덜해지긴 했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면 팸플릿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아연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찾아볼까?’
아직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 숙박 중인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가기 전, 은하는 옥션 회장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뭐? 수확이 하나도 없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그 녀석,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네가 알아? 계속 실랑이를 벌였으면 주변 이목이 다 쏠렸을 거야.”
멈칫.
은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스코틀랜드 출신 A급 헌터 ‘베르데’. 아까 그 녹색 머리카락의 헌터가 동료로 보이는 다른 헌터들과 대화 중이었다.
아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로수 뒤로 몸을 숨긴 은하. 의도하지 않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럼 ‘한냐의 가면’은? 일본의 D급 헌터가 칩 150장에 내놓았던 고급 등급 아이템 말이야.”
“그것도 뺏겼어. 같은 녀석한테.”
“뭐? 그럼 뭐야. 그 녀석도 테이스터야?”
테이스터(Taster).
헌터 사이에서 통하는 은어로, 전 세계 헌터 옥션들에 참여해 마지막 날 경매는 참여하지 않고 플리마켓에서 간만 보는 이들을 지칭했다.
그들의 목적은 경매에 출품되는 비싼 아이템들이 아니었다.
옥션 초보자, 아이템 가치에 무지한 까막눈 헌터들. 순진한 그들이 시세보다 값싸게 내놓는 각종 희귀 아이템만 골라서 쓸어 담는 족속이었다.
베르데와 그의 동료들 역시 테이스터였다.
“딴 건 몰라도 ‘한냐의 가면’마저 뺏기면 어떡해? 경매 방문 목적 중 하나였잖아. 마스터한테 드릴 말씀이 없어.”
“그럼? 끝까지 따라와서 내가 교환하려는 물건마다 훼방을 놓는데 어떡할까. 한 방에 칩 3천을 불러 버리는데 손 놓아야지.”
“3, 3천?! 경매도 아니고 플리마켓에서 그 정도 칩을 한 번에 냈다고?”
“그래.”
베르데의 눈빛이 변했다. 잠시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던 그가 주변을 확인하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테이스터가 아닌 거야. 그 녀석.”
“…….”
같은 얼굴로 입을 닫는 동료들. 다들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베르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나머지 물건들은 다 챙겨 왔으니까. 분명 여기에…….”
허공을 가볍게 터치하는 베르데. 인벤토리를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 있…… 어야…….”
하는데……? 베르데는 돌처럼 제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없다. 분명 인벤토리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고급, 희귀 아이템들이.
“……하나도 없잖아.”
“뭐? 잘 찾아 봐. 정렬 버튼 눌렀어?”
“정렬이고 나발이고 인벤토리가 텅 비었어. 원래 있던 것들까지, 모조리 다.”
“우리 몰래 다 팔아 치운 건 아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 젠장. 대체 어떻게 된…….”
그 순간.
벼락처럼 뇌리를 스치는 기억.
‘그렇게 남들 등쳐 먹고 다니다간 혼쭐날걸. 주머니 간수 잘해야겠다, 아저씨.’
툭툭. 어깨를 건드리며 웃던…….
핑크색 야구 모자.
“젠장, 설마 그 꼬맹이가!”
베르데가 휙 고개를 돌렸다.
인벤토리 속 아이템까지 훔쳐 갈 수가 있나? 모르겠다. 하지만 그 건방진 소녀 말고는 짐작이 가는 바가 없었다.
타닥!
어디론가 다급히 뛰어가는 베르데. 동료들은 의문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천천히 그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가로수에 숨어 있던 은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또각.
검은 구두 소리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