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1015
01014 외전 4. 천국과 지옥. =========================================================================
“그때 저는…. 아무것도 못 했어요.”
비는 여전히 쏟아지는 중이었다.
한참 집중하던 정하연은 창을 뚝 때리는 빗소리에 화들짝 턱을 젖혔다.
이야기가 끊기고 수 초가 흘렀을 때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왜냐면 일 처리는 완벽했으니까.”
심유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고연주는 한 마디 덧붙였다.
정하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기억하기로도 당시의 사건은 부드럽게 넘어갔었다.
살문과 황금 표국은 몰락했고, 머셔너리는 반대로 명성이 높아졌다.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비화가 있었다니….
나름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연주 씨는 두려웠던 건가요? 그때 그의 행동이나….”
안쓰러워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뭐라 말하려던 고연주는 문득 긴 숨을 내쉬며 반쯤 열었던 입을 닫았다.
“아니요.”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단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거린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때 드러났던 그의 어둠이 빙산의 일각이라고 느껴서….”
“네?”
“모르겠어요. 단지 그 시절의 나조차도 헤아릴 수 없었을 만큼…. 그 정도로 깊은 어둠을 품고 있다는 게 무서웠어요.”
“그 시절이라면….”
멍하니 말을 따라 하던 정하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살짝 눈을 치뜬 고연주가 힐끗거리자, 이제 알겠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뭐가요?”
“연주 씨요. 연주 씨도 현대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잖아요? 그이처럼.”
“뭐예요.”
싱겁게 대꾸한 고연주는 갑자기 로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라 눈을 돌린 정하연은 아! 작게 소리 질렀다.
오늘 업무를 마쳤는지 김수현이 뛰어오고 있었다.
양팔을 휙휙 흔들면서.
“내 새끼들~. 오늘 엄마랑 잘 놀았어?”
오자마자 고연주 앞에 무릎 꿇더니 그녀의 동산만 한 배에 볼을 싹싹 비비기 시작했다.
킥킥 웃던 정하연의 미소가 순간적으로 누그러졌다.
뭐랄까.
방금까지 이야기를 듣고 김수현을 보려니 약간 어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못 살아. 이제 우리는 보이지도 않죠?”
그러나 놀랍게도 고연주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금도 티 내지 않았다.
숫제 배에 입맞춤을 퍼붓는 김수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매우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턱을 괸 정하연은 고연주와 김수현을 한 번씩 번갈아 바라봤다.
“흠….”
비는 여전히 내리는 중이었다.
Omnibus – Queen Of Silhouette(完).
*
외전 4. 천국과 지옥.
요즘 머셔너리 캐슬에는 때아닌 기류가 감도는 중이었다.
어쩌면 전운이라고 봐도 좋을 긴장감이다.
왜냐면 일주일만 지나면 여인들이 임신한 지 꼭 열 달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기를 낳는 건 생리 날부터 적어도 40주는 걸리는 만큼 지금 당장 출산해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게 뭐 대수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임산부가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연주, 김한별, 남다은, 이유정, 임한나, 정하연, 제갈 해솔, 차소림, 한소영.
무엇보다 이 아홉 명은 김수현과 했던 모종의 여행에서 동시에 임신한 처지였다.
임신 테스트기, 병원, 생리 주기 등으로 몇 번이나 확인한 사실이다.
설령 수 분, 수 시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말이다.
말인즉 가능성은 적겠지만, 아홉 명의 아내가 동시에 출산이라도 한다면 상당히 곤란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니 신경이 곤두서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
“흥~. 흥~.”
신상용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악에 찬 두 눈동자는 흔들의자에 앉은 이유정을 바라보고 있다.
재회하고 오륙 개월이 지났으니 만삭이라 남산만 하게 부른 배는 별로 놀랍지 않다.
하지만 저 이유정이.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양손은 뜨개질하고 있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건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차라리 임한나라면 모를까?
“음…. 영양제라도 먹어야 하나. 요새 헛것이 보이는군.”
비단 신상용이 그런 게 아닌지 선유운이 콧등을 꾹꾹 누르며 지나쳤다.
당연히 이유정의 귀는 뚫려 있었고, 이내 실을 감던 나무 줄 바늘이 뚝 분질러졌다.
“뭐! 왜! 난 이런 거 하면 안 돼?”
“다행이다. 영양제는 안 먹어도 되겠어.”
“야! 너 죽는다? 우리 오빠한테 일러바칠 거야?”
“흠. 그게 사실이라면 좀 무섭군.”
선유운은 담담히 도망쳤다.
한동안 씨근거리던 이유정은 자기가 분지른 나무 줄 바늘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에이 씨. 이게 뭐야. 우리 애한테 선물할 저고리가….”
“?”
신상용이 머리를 갸웃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전깃줄 같은 털 뭉치가 어딜 봐서 저고리냐고 묻고 싶었다.
아니, 애초 저렇게 두꺼운 실로 저고리를 만드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생각만 했다.
“스, 스웨터를 짜고 있었군요.”
“응? 아! 상용이 오빠! 이건 스웨터가 아니고 저고리~.”
이유정은 예쁘게 웃으며 들고 있던 것을 활짝 펼쳤다.
신상용은 봉두난발 같은 털 뭉치를 애써 외면했다.
한편으로는 곧 태어날 아기한테 괜히 미안해졌다.
아무리 갓 태어난 아가라도 저걸 보면 분명히 크게 실망할 것이다.
“그,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응? 뭐가?”
“로, 로드가 걱정이 많으신 것 같아서요.”
“아. 그렇겠지.”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 중 한 명임에도 이유정은 태평하다.
“어쩔 수 없잖아? 동시에 임신해 버렸으니 뭐. 내 남편 정자가 강한 걸 탓해야지 뭐. 어쩌겠어? 안 그래? 상용이 오빠?”
아직 이런 이야기는 익숙지 않은 탓에 신상용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유정은 혼자 말하고 웃으며 깔깔거렸다.
“하긴 그때 여행이 좀 심하긴 했지.”
“여, 여행이요?”
“응.”
“뭐, 뭘 하셨길래…?”
신상용은 바짝 긴장했다.
기실 밀월여행 느낌이 풀풀 나는 이 단어는 그동안 거의 금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당사자를 제외한 남자 중 누구도 실체를 모르고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추측은 할 수 있지만, 호기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동시 임신이라는 현상이 발생한 것인지는 머셔너리 남자들의 주요 토론 거리 중 하나였다.
가령 ‘침대에 일렬로 가지런히 엎드려 뻗치게 해놓고 횡으로 이동하며 한 명씩 박았을 것이다.’ 라는 진수현의 주장이나, ‘아니다. 샌드위치처럼 아홉 명을 겹쳐 놓고 입맛대로 골랐을 것이다.’ 라는 안현의 주장은 상당히 그럴듯한 가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좀 선정적이긴 했지마는.
하여간 애초 가능하기나 할까?
어디까지나 학문적 호기심이라며 자위하며 신상용은 숨을 추슬렀다.
“아~. 여행 가서 뭐했냐고? 별것 아니야.”
뜻밖에도 이유정은 순순히 말했다.
한껏 긴장했던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그냥 놀이 좀 했지.”
“노, 놀이요? 무슨 놀이요?”
“있어. 천국과 지옥이라고.”
“처, 천국과…. 지옥…?”
놀이가 이름도 있다?
무언가 본격적이라는 생각에 신상용은 침을 꿀꺽 삼켰다.
“우선 아무도 없는 커다란 별장을 잡는 거야. 그리고 모두 옷을 벗고 알몸으로 들어가서!”
뜨개질을 무릎으로 던진 이유정이 양팔을 좌우로 활짝 펼쳤다.
신상용은 거세게 기침했다.
“그 별장 안에서 게임을 하는 거지. 아니, 서바이벌. 그래 서바이벌이 맞겠다. 가지고 간 도구는 사용할 수 있으니까.”
“서, 서바이벌? 도, 도구?”
“응응. 거기서 수현이 오빠는 결정할 수 있어. 즉 선택권이 주어진다고 할까? 그리고 우리는 선택을 받기 위해서 모종의 행동만 할 수 있고.”
“…모종의 행동이라는 게 뭡니까?”
뭔가 모호한 듯해 신상용이 질문했다.
“유혹하는 거.”
이유정은 간단히 대답했다.
신상용은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아름다운 아홉 명의 여인이 별장 곳곳에서 나신으로 유혹한다.
그 중심에 있는 남성은….
“과연. 천국은 그런 의미였군요.”
그때 이유정이 손가락 네 개를 쫙 펼치며 내밀었다.
“참고로 난 오 등! 무려 오 등 했지롱~!”
왜인지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는 듯해 신상용은 가까스로 반문했다.
“수, 순위도 있습니까?”
칭찬을 기대한 듯 쉴 새 없이 두 눈을 깜빡거리던 이유정은 신상용의 표정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하지! 말했잖아. 서바이벌이라고. 괜히 도구 사용이 허락된 게 아니야.”
그러니까 유혹이 성공하는 대로 순위가 정해진다는 건가.
그 도구란 게 어떤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준비해 간 고양이 귀와 꼬리가 제대로 먹혔었지. 연주 언니 표정을 봤어야 했다니까? 물론 육 등도 나쁜 순위는 아니지만 말이야.”
이유정은 신이 나서 말하더니.
“그런데 김한별 고것이 사 등한 건 좀 의외였어.”
갑자기 팔짱을 끼고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알몸으로만 경쟁했을 리는 없고. 뭔 도구를 썼냐고 캐물어도 도통 말을 안 해주니 원…. 정말 치사하잖아!”
“그, 그런가요?”
“아, 그러고 보니 화학용 글리세린으로 만들어진 약이라고만 알아두라던데. 오빠 혹시 뭔지 알아?”
“화, 화학용 글리세린이요? 그거야 대표적으로 화장품이나 관장….”
약, 까지 말하려던 신상용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김한별이 왜 말하지 않았는지 문득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목소리가 작아 이유정이 듣지 못했다는 것 정도려나.
“아무튼, 김한별도 선전했지만, 진짜 다크호스는 소림이 언니였어.”
“차, 차소림 씨 말입니까?”
“응. 아마 삼 등이었지? 그 근엄하기 그지없는 언니가 설마 기저귀랑 딸랑이를 가져왔을지 누가 알았겠어?”
“…….”
신상용은 점차 정신이 혼미해지는 걸 느꼈다.
순수하고 순정적인 그가 받아들이기에는 워낙 충격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호기심이고 뭐고 한 시라도 빨리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그나저나 지옥은 왜 지옥이라 하는 겁니까?”
“아, 간단해. 놀이가 끝나면 오빠는 이 등부터 구 등까지 바가지를 긁히거든.”
필사적으로 화제를 돌렸으나 이유정이 틈을 주지 않는다.
왜 그런 말도 있잖은가?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니라고.
“그, 그렇습니까?”
목구멍 끝까지 치솟았던 이만 가보겠습니다 라는 말이 쑥 들어갔다.
머리와 몸은 싫다고 했지만, 입은 부정직했다.
“뭐, 하지만 가장 대박이었던 건 바로 일 등의 주인공인 해솔이 언니였지. 세상에, 상상이 돼? 그 도도하고 콧대 높은 제갈 해솔이 뭘 준비했는지…!”
그때였다.
떠벌떠벌 침까지 튀기던 이유정이 느닷없이 입을 벌린 채로 말을 멈췄다.
왼쪽 어깨에 어느새 가늘고 고운 손이 얹어져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언제나처럼 매혹적인 각선을 자랑하는 제갈 해솔이 서 있었다.
“이유정~?”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가 날아오자, 이유정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기 시작했다.
“어, 언니….”
“쓸데없는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제갈 해솔은 다음으로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 신상용을 바라봤다.
“거기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 등장할 법한 남자 A 씨?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미리 말해두는데, 전 반강제로 당했어요. 이건 확실히 해두죠.”
“에이, 언니! 오빠가 강제로 하지는….”
“그러니까 반강제라는 거야. 애초 그 웃기지도 않은 놀이에 참가한 것도 또 유혹한 것도 나니까.”
“…….”
그 말에 이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뭐가 됐든 방금 들은 이야기는 잊어주세요. 아마 그러는 게 좋으실 걸요.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기만 해봐요. 하지만 고연주 씨에 대한 건 말하고 다녀도 괜찮을 듯해요. 여기서 중요한 건 제가 추측으로 말했다는 거죠. 즉 책임은 안 지겠다는 뜻이에요.”
제갈 해솔은 이 모든 말을 매우 빠른 속도로 이었다.
그러나 이유정이 고연주에 대한 건 말하지 않았다고 하자,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신상용은 울고 싶어졌다.
이윽고 제갈 해솔은 용무를 마쳤다는 듯 만삭인 배를 토닥거렸다.
“그나저나 우리 여보 자식 본 사람 있어요? 아침부터 어딜 갔는지 통 보이질 않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묻는다.
약간 초조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우리 멋진 남편은 왜 찾아?”
이유정이 반항하듯이 말했다.
제갈 해솔은 스리슬쩍 배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생글생글한 얼굴로 말했다.
“조금이지만…. 산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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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다시 가볍고 우스운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곧 태어날 귀여운 아이들이 이 침침한 분위기를 해소해줬으면 좋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