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17
00316 Game =========================================================================
찌르르. 찌르르.
둥근 달이 하늘에 떠있고 야영지 인근에서는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온다. 알알이 박힌 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 아래, 나는 넓적한 풀밭에 앉아 연초를 태우고 있었다.
사실상 지금은 내가 불침번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교대할 때 나는 같이 번을 서는 사용자들에게 잠깐의 양해를 구하고 따로 빠져 나온 상태였다. 따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초를 깊게 빨아들이며 한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앞에는 꼿꼿이 서 있는 고연주와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은 한 명의 남성이 있었다. 고연주를 올려다보는 그의 태도는 어딘가 힘이 없어 보였다. 얼굴을 초췌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눈동자에는 연한 잿빛이 감도는 게 멍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니까, 8명 중에 2명만 제외하고는 지금 전부 백서연을 원망하고 있다는 말이지?”
“다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서 원망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끔 보면 불만은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그래 그래. 괜히 추적대에 꼈다가 약탈도 못하고 참 슬프겠다. 그렇지? 그럼 그 2명은 백서연이랑 어떤 사이니?”
“예. 이해인, 이가인입니다. 이해인은 통과의례 때부터 함께 해온 사이로 알고 있고, 이가인은 백서연이 직접 부랑자로 만들었습니다. 상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둘은 백서연의 심복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평소 친밀한 관계를 보였습니다. 부랑자들 중에서는 조금 특이한 성격으로 불리지만 그만큼 따르는….”
고연주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슬며시 얼굴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자 그녀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남성의 눈동자는 원래의 빛을 되찾았고 곧바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거친 콧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게 어지간히 힘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수고했습니다. 그 놈은 여기 놔두고 먼저 가 있어요.”
“수현은요?”
“잠깐 챙길 것만 챙기고 따라가겠습니다.”
고연주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훌쩍 몸을 돌려 총총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남성은 아직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나는 그를 한 번 슬쩍 훑고 야영지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려앉은 야영지는 조용했다. 야영지를 지키는 불침번이 힐끗 돌아보았지만 이내 나라는 것을 확인했는지 다시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간간이 코고는 소리들이 들렸지만 나는 일행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오늘 저녁 먹다 남은 짐승 고기 스튜 한 그릇, 깨끗한 생수 한 병, 치료 물약 한 병. 이윽고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기고 불침번들이 모여있는 장소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나도 갈래.”
앳된 목소리가 옷깃을 붙잡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안솔과 잘 놀아주는 암살자 소녀였다. 홀로 번을 서는 게 다소 심심했는지 모닥불에 비친 소녀의 얼굴에는 지루함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단박에 거절했다.
“안 돼.”
“왜.”
“넌 아직 어려.”
부랑자들을 포로로 잡은 이후로 불침번은 4명씩 3교대로 바뀐 상태였다. 하지만 오늘 조금 특별한 일이 있을 예정이기에 부랑자들을 따로 떼어놓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불침번을 한쪽에만 몰아서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야영지를 지키는데 최소 한 명은 필요했다. 그리고 그 한 명에 암살자 소녀가 당첨된 것이다.
“곧 부랑자 감시하는 사람들 이쪽으로 보내줄 테니까, 그 사람들이랑 놀아.”
“싫어. 그 사람들 재미없어. 나도 갈 거야.”
“자꾸 떼쓰면 앞으로 안솔이랑 못 놀게 한다?”
“치, 치사해.”
암살자 소녀는 비장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가 이 한마디에 다시 앉고 말았다. 이윽고 뾰로통한 얼굴로 나를 보는 게 제법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제 3의 눈을 활성화했다.
1. 이름(Name) : 구예지(1년 차)
2. 클래스(Class) : 암살자(Normal, Assassin, Runner)
3. 진명 · 국적 : 아직은 순수한 소녀 · 대한민국
4. 성별(Sex) : 여성(15)
5. 성향 : 중립 · 선(True · Good)
‘1년 차라…. 나름 괜찮네.’
“씨이. 나만 따돌려. 오빠 미워.”
원망에 찬 소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바로 몸을 돌려 쓰러진 부랑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아직도 땅에 쓰러져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실상 2주를 훌쩍 넘는 기간 내내 사용자들에게 횡포를 당했으니 지칠 만도 했다.
“일어나.”
나는 부랑자의 머리를 걷어차려다가, 생각을 바꿔 팔을 붙잡아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부랑자는 팔을 붙잡아준 게 의외였는지 눈을 서너 번 깜빡이다가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따뜻하게 데워온 고기 스튜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나는 숟갈에 큼직한 고기를 담아 먹는 척을 하다가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한 입 먹을래?”
부랑자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껏 당해온 게 있으니 저절로 거부반응이 일은 것이다. 하지만 목 울대가 꿀꺽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아, 숟갈을 그의 입 가까이에 가져다 주었다.
“…….”
부랑자는 냉큼 미끼를 물지 않았다. 다만 갈등 어린 얼굴로 나와 숟갈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 상태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제 3의 눈으로 부랑자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담담히 입을 열었다.
“안 먹을 거야?”
그리고 내가 다시 손을 거두려는 순간이었다. 부랑자는 눈을 질끈 감더니 숟갈을 덥석 물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환희라고 해야 할까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 하기야 고연주의 음식 솜씨는 발군이고 그 동안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마실 것을 나눠줬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 먹었으면 가자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고맙습니다.”
나는 부랑자의 대답에 픽 웃음을 터뜨린 후 불침번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고맙다 라. 과연 이게 고마워 해야 할 상황일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
약 5분 정도 걷자 저기 앞에서 공터와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터에는 부랑자 여덟 명이 무릎을 꿇은 채 일렬로 늘어서 있는 상태였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사용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니 꽤나 서글프게 느껴질 만한 상황이었다. 상대가 부랑자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나는 마력 회로를 터뜨린 이후로 부랑자들에게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사용자들의 행동을 방관했다고 해야 할까.
백서연은 1회 차에서 유명세를 떨쳤던 부랑자 중 한 명이기도 하지만, 나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년이기도 했다. 그녀의 성격이나 특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에 맞춰 계획을 잡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껏 사용자들의 행동을 묵인한 것이다. 내 계획과 부합되는 행동을 해주는데 굳이 막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아무튼 이제는 계획의 첫걸음을 시작할 단계였다.
“수현. 오셨네요. 그런데 그건…. 스튜? 왜 가져왔어요?”
공터 안으로 들어서자 고연주가 아는 체를 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데려온 부랑자를 들여보냈다.
사용자들은 딱히 별다른 행동을 취하고 있지는 않았다. 아마 고연주가 있어서 그런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일렬로 꿇어앉아있는 부랑자들이 앞에 그릇과 물을 내려놓자 단박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나는 잠시 몸을 돌려 사용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내 행동에서 뭔가 이상한 기류를 느꼈는지,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이의는 받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미를 담아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오늘 부랑자들의 감시는 저와 고연주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야영지로 돌아가 불침번을 서주세요.”
현재 이곳에 있는 사용자는 총 4명. 그 중 나와 고연주를 제외하면 총 2명이었다. 외팔이 사용자, 강간당한 여성 사제. 둘은 오늘 부랑자를 제대로 괴롭히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못 아쉬운지 다들 시무룩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때, 나는 뭔가 생각이 들어 돌아가는 한 명을 붙잡았다.
“거기 사제님 잠시만요.”
“네, 네?”
“사제님은 잠시 이곳에 남아주시겠어요?”
“……?”
여성 사제는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돌렸다. 이윽고 외팔이 사용자가 혼자서 쓸쓸하게 야영지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위는 고요했다. 특별 손님 및 도우미 고연주. 만약을 대비한 사제. 그리고 부랑자 9명. 무대는 마련됐다.
나는 남몰래 입술에 침을 적시고 부랑자들의 앞에 섰다. 그들은 하나같이 파리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같잖은 짓은 그만둬.”
차가운 목소리가 내 말문을 막았다.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자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는 백서연이 보였다.
“같잖은 짓이라. 뭘 그만두라는 거지.”
백서연은 눈앞에 놓인 스튜와 물을 보고는 사늘히 말을 이었다.
“네가 밤마다 한 명씩 데리고 가서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고 있어. 꼴랑 음식 가지고 우리를 회유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절대로 네 말을 따르지는 않을 거니까. 이 악마 같은 자식아.”
“그건 네 생각이고. 그리고 악마라니. 말이 좀 심하잖아. 난 딱히 너희를 건든 기억은 없는데.”
“하. 동료를 죽이고, 마력 회로도 네가 파괴했지? 우리를 이 꼴로 만들어 논 장본인인 주제에, 뭐가 어쩌고 어째?”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품속에서 연초를 한 대 꺼내 물며 뜸을 들였다.
“그거 참 웃기는군. 애초에 도시를 습격한 것도 너희들이고 쫓아온 것도 너희들이야. 그리고 너희들은 포로로 붙잡혔지. 내가 적을 죽이지 않고 이 상황에서 포로 압송을 위해 마력 회로를 파괴하지 말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해봐.”
“…….”
백서연은 아무런 대답도 않은 채 그저 죽일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딱히 거북하지는 않았다. 인간이란 원래 자기합리화에 능한 동물이니까.
“뭐 확실히 건드리지만 않았을 뿐이지 방관한 것은 있지. 그리고 밤마다 그림자 여왕을 시켜서 정보를 캐낸 것도 있고. 너희 부랑자란 놈들은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생각하거든. 개인적으로 말이야.”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부랑자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놈들 중 일부 몇 명에게서 뭔가 기대하는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부랑자들은 지금까지 모진 고초를 당했다. 근 3주에 가까운 기간 동안 잠도 자지 못하며 사용자들에게 횡포를 당했다. 식량과 식수는 최소한으로 배급했다. 밤마다 걸리는 유혹의 눈동자에 정신을 오염시켜 황폐화를 가속했다. 그리고 이제 도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들은 시시각각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부랑자들의 처우를 결정할 수 있는 최고 권력자가 자리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일말의 관심도 보이지 않던 내가 미묘한 뉘앙스를 풍긴 것이다. 즉 부랑자들은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혹시나.’하는 생각을 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뭔가 다른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지. 부랑자들 중에서도 사정이 있는 자들이 있다고 하더군. 예를 들면 납치를 당했거나, 모종의 사정으로 부랑자가 됐다거나….”
“푸. 놀고 있네. 그래서, 그런 사정이 있는 놈들을 따로 살려주겠다?”
“백서연. 아직 내 말 안 끝났다.”
“아 그래? 미안. 그런데 딱 한마디만 더할게. 개소리 집어치워. 네 시커먼 속을 누가….”
“입 다물어.”
그 순간이었다. 내 말이 떨어지자 백서연의 그림자가 훌쩍 일어나더니 이내 그녀의 입을 꽁꽁 봉했다.
“지금부터 내 허락 없이 함부로 끼어들면 죽는다.”
이윽고 눈가에 살기를 가득히 담아 뿌리자 부랑자들이 움찔하는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살기를 풀고 현재 백서연에게 불만을 갖고 있다는 부랑자들을 응시했다. 그들의 눈은 아까와는 다르게 한없이 가라앉아있었다.
“잘 들어. 사정을 봐주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너희들 사정에는 관심도 없고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지는 않잖아. 나는 도시로 돌아가자마자 규칙대로 너희들을 모두 재판에 올릴 생각이다.”
“…….”
“하지만 개중에는 아주 조금이라도 억울한 사람도 있겠지. 아니면 다시 사용자로서의 신분을 획득하고 새 출발하고 싶은 부랑자도 있을 테고. 어쨌든 나는 기회를 주겠다는 말이야.”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 정확히는 침묵은 아니었다. 백서연이 어떻게든 말을 하려는지 용을 쓰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그럼…. 살려주시겠다는 말입니까?”
그때였다. 피곤에 찌든,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까 전 스튜를 한 숟갈 먹은 남성이 보였다. 옆에서 백서연이 읍읍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어설픈 말로 구슬리기보다는 최대한의 사실을 말해주면 가능성을 열어주어야 한다.
모두의 시선이 나와 남성에게로 모인 가운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그건 장담할 수 없어. 아까 말했던 대로 나는 너희들을 모두 재판에 회부할 생각이야.”
“으음….”
“그전에 일단 내 소개부터 하지. 나는 머셔너리 클랜 로드 김수현이다. 그리고 저쪽은 그림자 여왕 고연주. 들어본 적 있어?”
“예. 두 분 모두 들어본 적 있습니다.”
부랑자의 말투가 확실한 경어로 바뀌었다. 나는 속으로 확신을 가지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생각을 바꿨다면 길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생각을 바꾼 부랑자들에 한해서 최대한 변호해줄 생각이다. 나와 그림자 여왕, 둘이서 말이야.”
“그럼….”
“그 뒤는 전적으로 너희들에게 달렸지. 만약에 억울한 사정이 있다면 밝혀질 것이고, 죄가 있다면 죄를 덮을 만큼의 공을 세워야 할 거다.”
“공이라면…. 정보를 팔라는 말씀이십니까.”
“잘 생각해. 이미 이번 전쟁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알아낸 상태니까. 하지만 우리라고 전부 알아냈다고는 생각지 않아. 저기 백서연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처형…. 아니, 처형만 당하면 다행이지. 아무튼 너희들이 저 정도는 아니잖아. 가서 실컷 고문당하고 정신조작으로 정보만 뱉다가 죽을 건지, 아니면 자의든 타의든 이왕 뱉어낸 거 확실하게 전향하고 구명 줄을 잡을 건지. 아, 서비스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앞으로 도시에 도착하기까지 비교적 정상적인 포로생활도 보장해주지. 그리고….”
나는 뜸을 들이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한마디 더 덧붙여주었다.
“스스로들도 느끼겠지만, 마력 회로는 아직 살아있을 거다. 조금 시간은 걸리겠지만 신전의 힘을 빌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자, 잠시만….”
“내가 해줄 말은 여기까지야. 더는 이런 얘기를 꺼낼 일도 없을 거고…. 아무튼 결정해. 이대로 자살을 하던가, 고생하면서 개죽음을 당하던가, 아니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곤 이미 식어버린 스튜 그릇과 생수를 조금 더 앞으로 내밀었다.
“내 말을 듣고, 먹던가.”
그때였다. 내게 처음 말을 건 남성이 바로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그릇에 머리를 처박았다. 이윽고 게걸스럽게 스튜를 먹기 시작하는 그를, 백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로, 다른 부랑자들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동자로 응시했다. 그리고 난 흡족한 기분을 느낌과 함께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 없어?”
“…….”
“없으면 말고. 그럼….”
“자, 잠시만요!”
*
나는 신기한 마음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득 담았던 스튜와 물병은 따로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결 안도한 얼굴로 연초를 피고 있는 남성과, 나중에 추가로 걸어 나온 여성 부랑자 한 명이 보인다. 여성은 입가에 스튜를 잔뜩 묻힌 채 고연주가 먹여주는 물을 삼키고 있었다.
결국 내 말에 넘어간 인원은 총 두 명이었다. 나머지 일곱 명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몇 명은 혹한 것처럼 보였지만 미친 듯이 읍읍소리를 내는 백서연의 눈치를 보는 건지 아직 나서지 않고 있었다.
아직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솔직히 말하면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나중에는 다 죽일 생각이었다. 저런 부랑자들 백 명보다 백서연에게서 나오는 정보가 더욱 값어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얼마나 독종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일반적인 방법으로 정신을 망가뜨리는 건 힘들다. 해서, 나는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고연주. 잠시 백서연 입 좀 풀어보세요.”
“야 이 멍청한 새끼들아! 그 뭐 같지도 않은 말에 홀랑 넘어가? 너희들이 어떻게…!”
“다시 막아요.”
“읍! 읍읍! 읍읍읍읍!”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충분한 여유공간을 마련하고 고연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연주. 지금 식량이나 식수 상황이 어떻게 되죠?”
“둘 다 부족해요. 식량이야 보급하면 된다고는 하지만 식수는 근시일 내로 확보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먹는 입을 조금 줄일 필요가 있겠군요. 어차피 두 명이 넘어왔으니 다른 놈들은 굳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고….”
나는 일부러 흘리듯 말하며 부랑자들을 쓱 훑어보았다.
“고연주. 힘 좀 빌려주셔야겠습니다.”
“얼마든지 빌려드릴게요. 대신 이자까지 쳐서 갚아주셔야 해요.”
“어떻게요?”
“침대에서요.”
잊을만하면 나오는 고연주의 성적인 농담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까르르 웃고는 내게로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간단한 게임을 하나 할 생각입니다.”
“게임이요?”
“보시면 알 겁니다. 일단 저기 저 두 명을 다리를 꽁꽁 묶고 앞에 공간으로 놓아주세요.”
고연주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내 명령에 착실히 따라주었다. 이윽고 두 명의 여성이 그림자에 들려 각기 다리가 묶인 채 나와 부랑자들 사이에 놓여졌다. 한 명은 백서연의 심복이라고 알려진 이가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내 말에 반응을 보인 여성이었다.
“그 다음에는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만 그 상태를 유지해주세요.”
나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일월신검을 뽑았다. 그리고 두 여성 사이를 가로질러 꿇어앉아있는 부랑자들에게로 다가섰다. 달빛을 받은 일월신검이 사늘한 빛을 뿜으며 남은 다섯 명의 얼굴을 비췄다. 나는 그 중에 아무나 고른 남성의 어깨를 짚었다.
“잘 들어. 너는 저기 왼쪽에 있는 여성 팀.”
“무, 무슨…. 어, 어!”
푹!
가볍게 배를 찌르자 남성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신속하게 다음 타자인 이해인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는 오른쪽에 있는 여성 팀.”
“아…!”
푹!
이해인은 복부에 칼을 찔린 채 입을 벌렸다가 뻐끔뻐끔 거리며 핏줄기를 토해냈다.
나는 칼을 거둔 후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온 치료 물약을 꺼내었다. 그리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흔들어준 후 나직이 입을 열었다.
“게임 내용은 배틀 로얄. 지금부터 둘이 싸워.”
“무, 무슨.”
“싸우라고. 네가 이기면 이 부랑자를 살려주고. 네가 이기면 이 부랑자를 살려준다.”
나는 남성과 이해인을 각각 가리킨 후 백서연을 쳐다보았다.
“으으읍! 으으으으으으으읍! 읍읍읍!”
백서연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발광하고 있었다. 나는 물약을 다시 품속에 넣은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참고로 둘 다 이 상태면 10분 안에 죽는다. 싸워서 이기면 한 명은 사는 거고, 아니면 둘 다 죽겠지.”
백서연은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내 다시 자리로 몸을 처박는 게 고연주가 솜씨를 부린 것 같았다.
“으으읍! 으으으으으으으읍!”
그리고 이가인과 나머지 여성 부랑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서로만 쳐다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아,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든 1시까지 재회 파트까지 써서 올리려고 했는데, 또 분량 조절에 실패했네요. 플롯을 짠 걸 보면 가능할 것 같았는데 막상 집필을 시작하면 왜 이렇게 되는지….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일단 이번 파트 소제목은 바꾸겠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독자 분들의 깊은 양해를 바랍니다. _(__)_
PS. 리리플은 하루 쉬고 다음 회에 합쳐서 하겠습니다. 오늘 어머니 생신이라서 외식을 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와서요. 정신 없이 집필하다 보니 머리가 빙빙 돌아요. 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