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27
00326 미래, 뒤틀리다. =========================================================================
이효을은 꼭 확답을 듣고 싶었는지 내게 연속적으로 참가를 권유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의사를 확실히 밝혀주었다. 이 정도까지 얘기를 들었는데 소집령의 진짜 목적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바보로 인증하는 꼴이었다.
아무튼 오늘 이효을과의 만남은 제법 유익한 시간이었다. 서로의 속내를 완전히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생각이 나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시간낭비가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설령 일을 터뜨린다고 해도 주도와 수습을 도와줄 이가 필요했는데, 이효을이라면 그런 역할에 적격일 것이다.
이윽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이효을은 차분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가게?”
“응. 가기 전에 네 주최로 열리는 소집령의 일정을 알려줘야지.”
“날짜는 3주 후. 작업이 막바지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마무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리고 장소는 물색 중이야. 3일 안으로 전령을 보내줄게.”
“그래 알겠다. 아, 그리고 너. 소집령 전에 우리 클랜에 한 번 방문해야 할 것 같은데.”
이효을은 처음에는 고개를 기울였지만 이내 눈을 살짝 치켜 올리며 말했다.
“왜?”
“그전에 한 가지 더. 네 주최로 모이는 사용자들은 모두 너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거지?”
“그렇지. 다들 나랑 적게나마 함께한 전력이 있는 녀석들이니까.”
“그럼 모두 믿을만한 사람들이라는 소린가?”
이 말을 꺼낸 순간, 이효을의 눈이 깊어졌다.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 이상 내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왕 참가하는 거, 나는 이번 소집령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언제쯤 방문하면 되는데?”
이윽고 이효을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머셔너리 로드.”
“아, 오셨군요.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약속을 잡아주셔서 미안합니다. 그 동안 제가 이래저래 바쁜 일이 있어 짬을 못 냈습니다.”
나는 내 집무실로 들어온 신재룡을 보고 앞에 놓인 소파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원래 하루만 머무르기로 했었지만 어느새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기간이 길어져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딱히 터치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내 의사는 확실히 전달한 상태였다. 그리고 어떤 사용자이든 간에, 아니 연차가 높은 사용자일수록 새로운 둥지를 찾는 것은 굉장히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런 신재룡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기에, 그 동안 머셔너리를 둘러볼 시간과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충분히 준 것이다.
이윽고 내가 권해준 자리에 앉은 신재룡은 지나치리만큼 정중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요즘 상황이 이러니 당연히 바쁘실 겁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죄송하네요. 하루만 머무르겠다고 해놓고 염치없이 지금까지 신세를 졌습니다. 하하.”
“신세라뇨. 그 동안 클랜원들이 신재룡씨에 대해 하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일도 도와주시고, 안솔에게 적절한 조언도 해주신다고요.”
신재룡에 대한 클랜원들의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사실상 구조대에 참가했을 때부터 그를 좋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터라, 차후 가입하게 되면 큰 무리 없이 녹아들 것이라 생각되었다.
신재룡은 쑥스러운 미소를 한 번 내비치고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미리 선수를 쳐주기로 했다.
“그럼 마음의 결정은 내리신 겁니까?”
신재룡은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가, 침을 삼키는 듯 목 울대를 꿀꺽 움직였다. 하지만 바로 차분함을 되찾는걸 보니 내 말대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보였다.
“처음 암시를 주셨을 때는 조금 당황했었습니다. 말로는 모든 정리를 끝냈다고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제 마음속에는 여울가녘의 클랜원들이 남아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잘 생각해보니, 그때 그 말씀은 제 처지에 참으로 감사한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 어제 비로소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머셔너리 클랜에서 지내면서 참 좋은 사람들이 많다고 느꼈고, 이 기회를 놓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아직 그 말씀이 유효하다면 이제는 감히 제가 먼저 요청하고 싶습니다. 워낙 대단하신 분들이 많아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가입을 받아주신다면 최대한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1. 이름(Name) : 신재룡(4년 차)
2. 클래스(Class) : 일반 사제(Normal, Priest, Expert)
3. 성향 : 선 · 열정(Good · Passion)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농담하지마.’
나는 제 3의 눈으로 사용자 정보를 확인하며 신재룡을 쳐다보았다. 그는 일단 사제였고, 이 정도의 사용자 정보라면 무조건 도움은 된다. 더구나 사제로서는 드물게 체력의 능력치가 높아 더욱 높은 효율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성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대규모 전쟁을 생각해보면, 지금 사제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머셔너리로서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영입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손을 앞으로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최대한 넉살 좋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하. 그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는 더욱 바빠질 예정이니 어떻게든 도움은 되실 겁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할 일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거든요. 앞으로 머셔너리를 위해 분골쇄신 노력하겠습니다.”
신재룡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후 내게로 다가와 손을 맞잡아주었다. 그러자 손에서 따뜻하면서 포근한 느낌이 전해져 들어왔다.
똑똑.
그때였다. 신재룡과 따뜻한 악수를 하고 서로 손을 거둘 즈음, 누군가 가볍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와 그가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명의 여성이 모습을 보였다. 이유정이었다.
“오빠…. 어, 이야기 중이셨네. 나 들어가도 돼?”
“이미 문 열어놓고선. 들어와. 무슨 일인데.”
눈짓으로 신재룡에게 양해를 구한 후 고개를 끄덕이자, 이유정은 냉큼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윽고 책상 앞까지 다다른 그녀는 신재룡을 한 번 흘끗 쳐다보더니 이내 곱게 접힌 기록을 내게 내밀었다.
“오빠 이거. 해밀 클랜에서 전령을 보냈어.”
“해밀 클랜에서?”
‘이효을이 보냈나?’
나는 담담히 기록을 받아 겉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살짝 멈칫하고 말았다. 발신인은 이효을이 아니라 내 형 김유현이었다. 여기서 바로 기록을 읽어볼까 하다가 문득 앞에서 멀뚱히 서 있는 신재룡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용자 신재룡. 다시 한 번 머셔너리로의 가입을 축하합니다. 앞으로 많은 활동 부탁합니다.”
“아, 예!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조만간 아침 회의에서도 볼 수 있겠네요. 아무튼…. 우선 임시 숙소에서 개인 숙소로 옮길 필요가 있겠네요. 이유정?”
“응? 아, 응!”
나와 신재룡의 대화를 들었음이 분명한데, 의외로 이유정은 그렇게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아마 이곳에 계속 머무르는 것을 보며 그의 가입을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오늘 부로 신재룡씨도 머셔너리 클랜원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네가 이것저것 신경 좀 써주렴.”
“아하. 역시나. 알겠어요~. 가입 환영해요 아저씨! 앞으로 잘 부탁해요!”
이유정은 밝게 미소 짓더니 신재룡의 손을 잡아 휙휙 흔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재룡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클랜원들 중 한 명이었다.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기색이 훤히 드러나는 게, 예전에 김한별을 대할 때 보였던 태도와는 천지차이였다.
‘배신자라고 했던가?’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예. 이유정. 클랜원들에게 소개도 시켜드리고, 개인 숙소도 안내해드리고. 알고 있지?”
이유정은 대답 대신 눈을 곱게 흘기곤 입술을 뾰족이 내밀었다. 마치 “나도 이제 다 알고 있다고요.”라고 반항하는 딸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둘을 보다가, 나는 잠깐 내려놓았던 기록을 다시 집어 들었다.
*
클랜원들과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아까 읽었던 기록을 다시 천천히 훑어보았다.
처음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제법 두툼하길래 뭔가 있겠다 싶었는데, 밥은 잘 먹었냐, 몸은 좀 괜찮으냐 등의 쓸데없는 안부 내용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며 기록을 치우려고 할 즈음, 비로소 기록을 보낸 본 내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구구절절 내용을 써놓기는 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말이었다. 이효을을 당분간 머셔너리의 공동 클랜원으로 받아줄 수 없겠냐는 것.
‘물론 김유현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천사들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네.’
문득 며칠 전 이효을과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가 형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형 또한 이효을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만큼,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는다, 나를 키워준다는 등등 어떤 명목으로든 요청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형은 나를 위한다는 마음에 흔쾌히 수락했을 것이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아니 많은 고민이 들었다. 비록 정체를 아는 사용자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들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북 대륙의 수호자가 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호’라는 말이 들어가서인지 빚을 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에 한해 수호자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면 ‘자기 자신을 희생해 남을 도와주는 자.’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이끄는 자라고 해도 결국에는 천사들의 따까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사들은 하나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더욱 용이하게 달성하기 위해 수호자를 내세운 것이다.
지금 현재만 봐도 알 수 있다. 이효을은 수호자면서 왜 지금 침공 받는 도시들을 구하러 가자고 하지 않을까? 구원은커녕 오히려 중앙, 서부의 클랜들이 속속히 동부와 남부로 자리를 옮기는 중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직감이지만 그 배후에 이효을이 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농후했다. 즉 대륙의 수호자라는 존재는 천사들의 대리인이고, 그들은 목적 달성에 철저히 맞춘 행보를 보인다.
한마디로, 지금의 이효을은 황금 사자 및 우호 클랜들을 쳐내는 게 북 대륙을 위해 더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무튼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이효을이 머셔너리로 들어오는 것은 영 탐탁지 않다. 또한 처음 만났을 때 그녀를 죽이려는 마음을 먹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지금에서야 형의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는 있지만, 추후에는 지금의 황금 사자 꼴이 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물론 지금 당장은 죽이겠다는 마음은 접었다. 상황이야 어찌됐든 현재의 이효을은 내가 지향하는 행동과 상당히 비슷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형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지금까지 형을 비롯한 여러 클랜들을 키워옴으로써 쌓아온 수호자 자체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정말 복잡하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기록을 툭 내던졌다. 어째 산 넘어 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하나의 일이 해결되면 또 하나의 일이 튀어나왔다. 어쨌든 도대체 뭔 생각으로 내 클랜에 오겠다는 건지는 몰라도, 형 말대로 자세한 얘기는 직접 만나서 해야 할 듯싶었다. 그리고 그전에 세라프도 한 번 만나보고.
나는 의자를 빙글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에 완연한 어둠이 내려 앉은 게 밤이 찾아온 모양이다.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내가 해야 할 일들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하나의 일을 해결하면 다른 하나의 일이 튀어나온다. 이 순서에 따르면 이제는 또 다른 하나의 일을 해결할 차례였다.
오늘 식사에서 비비앙의 연구가 거의 완료됐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물약의 제조를 마쳤다는 말이었고, 백서연에 대한 작업을 들어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녀는 새벽쯤에 완전히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미리 가서 설명을 듣고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나는 바로 집무실을 나서 3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고요한 어둠이 스며든 복도를 걸어 끝 쪽 방의 문 앞에 다다랐다.
비비앙의 공방은 굳게 닫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한 약초 냄새가 콧속을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후기와 리리플은 하루 쉬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제가 9시 강의가 있는 터라, 7시에 집에서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얼른 이북 수정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거든요. ㅜ.ㅠ
그리고 전개 속도에 관해서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분 말씀대로 제가 지금껏 적어온 페이스가 있어서 당장의 변화는 조금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일전에 말씀 드린 데로 속도에 관해서는 차차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PS. 한 가지 질문에 답변을 드리자면 메모라이즈는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부와 2부 사이에는 약 1년~2년 정도의 공백이 있을 예정이고, 이후는 최대한 빠르게 완결을 위해 달릴 생각입니다. 지금은 당연히 1부이고, 현재 연재 분은 기승전결로 가정하면 전으로 보시면 됩니다. 동, 남부 클랜들이 서 대륙 사용자 + 부랑자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결에 해당하는 파트입니다. 백서연과 소집령에 대한 파트는 최대한 빨리 끝마치고, 결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전쟁 후 마무리 작업으로 1부를 끝내고, 잠시간의 휴식 기간을 가질 생각이고요. 하하.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