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53
00352 전조 : 패, 승, 패, 승, 승 =========================================================================
짙은 어둠이 내린 밤. 인적이 드문 황야에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문득 버려진 들판에 주저앉아 멍하니 손목을 부여잡은 남다은의 모습이, 너무나도 처량해 보이는 건 왜일까.
우우웅. 우우웅.
그때, 들판 어딘가에 떨어진 검이 맑은 검음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렸 다. 그 검음에 정신을 차렸는지 남다은의 눈이 서너 번 끔뻑이더니, 이내 목 울대가 꼴깍 움직인다.
“좋은 한 수였습니다. 대련으로 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남다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찬사를 보냈다. 검을 한 번 섞어본 결과,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태도가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아…. 이게…. 아니…. 네…. 조, 좋은….”
남다은은 현재 심정이 무척이나 어지러운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남다은은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엔 고개를 푹 숙이고 나지막한 음색을 들려주었다.
“제가…. 제가 졌네요. 완벽히 졌어요. 소문이 사실이었어요.”
“글쎄요. 실제 전투와 대련은 엄연히 다른 법이니까요.”
“설령 그렇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어요. 위로는 괜찮아요.”
‘응? 꽤나 시원한데?’
이내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남다은을 보며 나는 약간의 호감이 이는 것을 느꼈다. 남다은이 만일 남자였다면, 아니 최소한 남성 혐오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제법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우웅. 우우웅.
내 일격에 남다은이 놓쳤던 검은, 여전히 들판에 놓인 채 청량한 검음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이윽고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간 그녀는 검을 주우려는지 살며시 허리를 굽혔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차분한 검음을 내던 검이었다. 그러나 남다은의 손이 닿은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맹렬히 울어 젖히기 시작한 것이다.
“서, 설아야? 갑자기 왜 그래?”
남다은은 한껏 당황한 음색으로 검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설아인가? 설마 자아가 있다거나….’
갑작스레 일어난 이상 현상에 남다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태도를 보였다. ‘설아’라는 검이 이런 현상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는지, 그녀의 얼굴에는 당황한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아.’
아무튼 볼 일은 끝났기에 나는 먼저 돌아갈까 심각히 생각하고 있을 즈음,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아직 확신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빅토리아의 영광’을 얻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모른척할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결국 남다은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내 예상이 맞는다면 어떻게 할까 마음속으로 고민하면서.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동부는 ‘비경(祕境)의 황야’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내부를 살펴보면 문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행군’ 하나만 보면 매우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그리고 ‘비경의 황야’ 다음으로 들어선 지역은, 바로 ‘성단(星段)의 숲’으로 불리는 지역이었다.
성단의 숲은 북 대륙에 현존하는 4년 차 이상의 사용자들에게는 꽤나 뜻 깊은 곳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한때 아직 바바라를 공략하기 이전 시절, 지금의 ‘강철 산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즉 성단의 숲은 바바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필수로 거쳐야 하는 지역이었으며, 공략에 커다란 희생을 치렀던 곳이기도 했다.
‘물론 규모나 난이도 자체는 강철 산맥과 비교할 수 없지만.’
아무튼 감회가 새로운 것은 당시 공략에 참여했던 사용자들에 한한 일이었고, 이곳에서는 탐사할 유적이 없는 만큼 나에겐 큰 의미가 없는 곳이었다.
바바라는 안정화만 따지자면 북 대륙 전 도시 중에서 첫손으로 꼽을 수 있는 도시이다. 그런 만큼 ‘비경의 황야’를 무사히 통과한 이상 가면 갈수록 원만한 항해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게 동부는 새로운 지역으로 순탄히 들어갈 수 있었고, 그와 동시에 나에게도 하나의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원래 프린시카에서 출발할 당시 나는 10강 서진우가 제대 장으로 있는 1제대에 편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남다은과 한 번 대련을 가진 이후 그녀가 나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는지, 변수를 대비하는 특별한 ‘조’에 선발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남다은과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매우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나는 그녀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대에 있을 때보다 더욱 자유로운 행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고, 수많은 사용자들의 틈에 끼어 지휘를 받는 것보다는 서로의 실력을 받칠 수 있는 소수와 날뛰는 게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남다은의 요청은 나를 참가시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머셔너리는 시크릿과 레어 클래스 사용자들이 총 인원의 7할 가까이 차지하는 클랜이었다. 그런 만큼 실력자들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검후’ 남다은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수정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남성 혐오증에 걸린 특이한 여성이라고 생각했지만, 겸허히 패배를 받아들이는 자세나 이후 나를 대하는 태도는 굉장히 정중했다.
물론 어떻게 보면 거리감을 두려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남성 사용자들과는 말도 섞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어쨌든, 나는 남다은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고심 끝에 세 명의 클랜원을 추천할 수 있었다.
일단 첫 번째는 무조건 고연주였다.
고연주는 암살자들이 모인 5제대에 편성되어있었는데, 조심스레 차출 명령을 내린 것에 반해서 5제대 장은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아니, 흔쾌한 정도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실력으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5제대의 장은 고연주가 맡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동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편성이 끝난 상태였고, 그녀 역시 제대 장이라는 직함에 큰 욕심이 없었기에 그냥 저냥 물 흐르듯 지나간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제대 장이 그렇게 쌍수를 들고 환영한 이유는, 아래에 ‘그림자 여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던 것 같았다.
물론 고연주 본인의 의사도 확실히 물어보았고, 그녀는 내가 참가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당장에 짐을 싸서 달려왔다.
그리고 마지막이자 두 번째로 추천한 클랜원은 바로 비비앙과 정하연이었다.
비비앙은 ‘질서의 오르도’를 얻은 이후로 ‘마수 군단’을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서 이러한 능력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하지만 정하연을 추천하는 것에는 정말로 많은 고민을 했는데, 일단은 이야기를 해보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어디까지나 강제성이 없는 만큼 우선 이야기를 해보고 그녀의 선택에 맡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과를 먼저 말해보자면, 비비앙과 정하연 모두 남다은의 제안에 응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연금술사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비비앙은 ‘조’가 뭔가 특별한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정하연은 처음에는 잠깐 생각해보겠다고 했지만, 내가 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바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남다은은 나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빠른 시간 안에 나를 포함, 총 네 명의 인원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
어느덧 동부는 ‘성단의 숲’을 벗어나는 것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 속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앞으로 하루, 이틀 안에 다음 지역으로 넘어갈 수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솔직히 다음 지역은 딱히 뭐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곳이었다. 왜냐하면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는 순간 바바라는 지척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에헴!”
문득, 비비앙은 잔뜩 힘을 준 목소리로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서너 번 추가로 기침을 연발한 그녀는 목을 빳빳이 세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가에는 거만한 빛이 가득한 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비비앙과 정하연을 데려오는 데는 한바탕 홍역을 치르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저번 회의에서 선율의 언행을 생각하면 그녀들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내뱉었던 말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지, 타로 카드 마술사는 둘의 차출 요청에 간단히 승인 허가를 내려주었다.
이로써 일단 ‘조’에 모인 인원은 총 5명이었다. 나, 고연주, 비비앙, 정하연 그리고 검후.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남다은 말고도 발굴에 활동하는 인원이 있다고 한다. 성단의 숲을 벗어나기 전에 활동을 마치고, 한 번 회합을 가진다고 하니 진득하니 기다리면 알게 될 일이었다.
“수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때, 옆에서 발맞추어 걷던 정하연이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흘끗 고개를 돌리곤 담담히 대꾸했다.
“아. 타로 카드 마술사에 대해서 조금 했습니다.”
“음. 확실히 수현이 좋아할만한 매력이 있는 분이죠. 가슴도 크고, 가슴도 크고.”
“…….”
“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정하연은 농담을 던졌지만 바로 내 반응을 봤는지 까르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쉬곤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쉽게 차출을 허락할지 생각은 못했습니다. 저번 회의에서 조금 안 좋은 광경을 본적이 있어서…. 특권 의식이 너무 강하더라고요.”
“어머. 그래요? 저는 그런 거 못 느끼겠던데.”
“그래요? 제대에서는 어땠는데요?”
이것은 조금 의외의 대답이었기에,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되물었다. 그러자 정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내 하나 하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음. 꼭 친언니 같았어요. 시크릿 클래스라는걸 알고는 이것저것 조언도 많이 해주시고, 잘 챙겨주셨고요. 가끔 수다도 떨고, 갖고 계신 카드로 점도 쳐주시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죠. 그렇지요 비비앙?”
이윽고 말을 끝낸 정하연은 동의를 구하려는지 비비앙을 돌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비비앙은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듯 떨떠름한 얼굴을 보이더니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 글쎄. 나, 난 별로. 잘 모르겠는데.”
정하연은 비비앙을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갑자기 “아.”, 뭔가 떠올린 얼굴로 킥킥 웃었다.
“아. 비비앙씨도 저번에 같이 점을 봤었거든요? 그런데 결과가 별로 안 좋았나 봐요.”
“오호. 점이라. 그건 좀 관심이 가는데요. 정하연은 어떤 점을 쳤는데요?”
“에이. 비밀로 할래요. 그리고 점은 그냥 재미로 보는 거예요.”
“그래도 궁금한데…. 뭐 비밀이라면 어쩔 수 없죠. 그럼 비비앙. 너는 어떤 점을 쳤고, 무슨 결과가 나왔지?”
나와 정하연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지, 비비앙은 일순 억울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분연히 입을 열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먼저 선수를 쳐, 품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계약서를 꺼내었다.
이윽고 아무 말도 않고 그것을 살랑살랑 흔들자, 비비앙은 목멘 음색으로 말했다.
“너…. 김수현…. 정말 나빠. 왜 나한테만….”
“그래 그래. 알았으니 어서.”
“으으….”
아까의 거만함은 어디 갔는지. 비비앙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소극적으로 반항했지만, 한층 더 재촉하자 겨우겨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냥…. 그게…. 내가 지금 가장 원하는 게 이루어질 가능성에 대해서 점을 쳤는데….”
“응. 원하는 거? 그게 뭔데?”
“그, 그건…. 그…. 엉덩….”
휘이익!
그때였다. 비비앙이 주저하는 태도로 입을 열려는 순간 전방에서 갑작스레 날카로운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잠시 행군을 정지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온 외침에 우리는 하던 대화를 멈추고 걸음을 정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응? 무슨 일이죠? 설마 괴물이라도.”
“글쎄요. 일단 기다려봅시다.”
정하연이 앞으로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지만, 나는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그런다고 보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휴. 살았다.”
그 순간 문득 나와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일단은 넣어두고 전방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20분 가량이 흘렀을까.
이윽고 수정구를 통해 들려온 소식은, 가장 앞서 나가던 동문 부대에서 바바라에서 나온 듯 보이는 사용자들과 조우했다는 소식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이북 수정에 들어가기 전에 저번 회 내용이랑 쪽지 답신에 열을 올려야겠네요. 하하.
그래도 간단히 말씀 드려보면, 능력치는 이미 +가 된 상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98(+4)면 장비를 해제했을 경우 94가 된다는 말이지요. 🙂
PS. 칼 등, 칼등마루 부분은 검신으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리리플(350회) 』
1. 레이암 : 1등 축하합니다. 1등 코멘트에서는 처음 뵙는것 같네요. 🙂
2. 난방랑자 : 음. 다른 사람들의 로맨스는 조미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어떻게 잘 조절하면 주인공을 드러낼 수도 있는 장치가 될 수 있지요. 하하.
3. 소수영서 : 네. 저도 문어발은 굉장히 싫어해서요. 제가 미치지 않은 이상 김수현이 수십 명의 여성을 거느리게 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
4. 명박짱의양양합일 : 어! 그 소설 아시는군요! 저도 아는 작가님 추천으로 읽었는데, 진짜 완전 사랑합니다. 고다이바 짱짱걸! 진짜 재밌게 읽었어요. 같이 재밌게 읽으셨다니 기분 좋네요!
5. 레필 : 그렇습니다. 물론 다른 캐릭터들의 비중이 높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김수현이 서 있을 것입니다. 🙂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최대한 거부감 없도록 조절하겠습니다.
『 리리플(351회) 』
1. 데슈카르 : 1등 축하합니다! 데슈카르 님! 요시! 그란도시즌! 이 뜻이 뭐예요? 너무 궁금해요!
2. dbss : 어우.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3. 산사나무 : 안현 짝이요? 2부에 나올 예정입니다. 이번에 확실히 정했어요. 후후후후.
4. 고장난선풍기 : 감사합니다! 오늘 간신히 버텼네요! 🙂
5. 바다숲을그리다 : 우와. 진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런 말 처음 들어요. ㅜ.ㅠ 맞아요. 제가 좀 야성적인 면이 강한데 독자분들이 그걸 몰라주시더라고요! ( –) 후후.
항상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은 언제나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