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389
00388 변했다. 변하지 않았다. =========================================================================
그때였다. 갑작스레 서늘한 한기가 온몸을 엄습해 들어온다. 그대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키자, 뼛속까지 얼얼하게 만드는 차가운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외롭다….’
이윽고 스스로 외롭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눈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라버렸다.
외로움, 고독감, 그리고 쓸쓸함….
예전의 나는 이러한 감정들을 내내 달고 살았었고, 그런 만큼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야 정상이었다.
헌데, 조금 전 느낀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지금의 나에게 무척이나 생소한 감정으로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형, 한소영, 고연주, 정하연의 얼굴이 차례대로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지금, 실로 오랜만에 ‘누군가 옆에 있어주었으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
여전히 몸은 피로했고, 계속해서 수면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누워있다가는 한없이 감성적으로 변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젠장.”
결국 더는 참지 못하여,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잘그락!
허리춤에서 들려온 미약한 금속성이, 내려앉은 침묵을 자그맣게 흔들었다. 습관적으로 허리를 더듬자 한기를 받아 차디찬 ‘빅토리아의 영광’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창문으로 비추는 달빛에 드러난 피 묻은 침대 시트가 보인다.
“하.”
얼룩진 시트를 확인한 순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검을 차고 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몸을 씻지도 않은 채 침대에 몸을 누운 것이다. 이렇게 보니 이러나저러나 나 또한 정신 줄을 놓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곧바로 ‘태양의 영광’을 끌러 검을 내려놓았다. 원래는 지하 연무장으로 내려가 한껏 땀을 뺄 예정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전신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찝찝한 느낌이 제법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잠이 올지도 모르고.
‘대 목욕탕이…. 별관 지하에 있던가?’
나는 지체 않고 방을 나서 계단을 밟았다. 어차피 지금 시간대도 새벽이니, 아무런 방해 없이 느긋한 목욕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별관 지하 1층에 다다르자마자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떠 있는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목욕탕에는 환한 불이 켜져 있었다.
목욕탕을 바로 앞에 두고 잠시 머리를 긁적였지만, 이내 천천히 탈의를 시작했다. 어차피 욕실은 공공시설로 건축하였고, 남성 전용과 여성 전용이 나뉜 만큼 큰 상관은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몸에 빼곡히 새겨진 상처를 보이는 데는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지만….
‘그것도 이미 한 번 보였으니.’
여관 ‘조신한 숙녀’에 있었던 시절, 애들이 다 보는 데서 강제로 탈의 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고연주였고. 그때 그녀가 했던 말이 “남자의 옷은 이렇게 벗기는 거란다.”였었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나는 비치된 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김이 끼어있는 문을 약하게 밀어젖혔다.
그렇게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자, 희뿌연 색 수증기로 가득 찬 내부와 드넓은 공간에 비치된 여러 목욕 시설이 보였다. 한 쪽에는 마법진을 이용한 샤워 시설이 가지런히 나열되어있었고, 중앙부터 다른 쪽까지는 탕과 사우나 등을 구현해놨다.
처음 머셔너리 하우스를 건설할 때 최대한 현대와 유사하게 만들었다고 했는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만큼 정말로 비슷했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샤워 시설은 이미 누가 사용하고 있는지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렸다. 탕에 들어가기 전 몸을 씻어야 했고, 겸사겸사 누구인지도 확인해볼 겸, 난 뜨끈뜨끈한 증기를 맞으며 걸음을 옮겼다.
찰박찰박! 찰박찰박!
목욕탕은 물로 흠뻑 적셔져 있어, 발로 밟을 때마다 얕은 물을 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연한 호박 불빛이 아른거리는 사이로,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응? 긴 생머리?’
그 순간, 나는 이상한 느낌에 곧바로 걸음을 멈췄다. 언뜻 보긴 했어도, 긴 생머리는 눈앞 인영이 여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동시에 확신할 수 있었다. 여인의 정체는 절대로 고연주와 정하연이 아니라는걸.
일단 내가 목욕탕을 착각했나 혼란이 일었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남성 전용임을 확인하고 들어온 터였다.
한순간 다시 돌아나가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그러나 눈은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선은 전방을 자세히 주시하고 있었다. 아른아른 몽환적으로 피어오르는 수증기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안력까지 끌어올리고 말았으니까.
그러자 보이는 약간 옆으로 돌아서 있는 모습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흰 눈처럼 새하얀 나신이었다.
미끈한 어깨 아래로 보이는 가슴의 자태는, 정말이지 무척이나 탐스럽다. 그득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은 커다란 크기로 인해 살짝 늘어진 물방울 형태를 갖고 있었다. 그 언덕의 첨단에는, 케이크에 놓인 딸기처럼 도드라진 분홍빛 젖꼭지가 수줍게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아래 잘록한 허리로부터 이어지는 S자 곡선은,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엉덩이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이따금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마치 하얀 달덩이를 보는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꿀을 발라놓은 듯한 탄력적인 허벅지와 매끈한 종아리로 이어지는 각선미는, 싱그러우면서도 관능적인, 한껏 무르익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여인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러다 물 젖은 머리카락이 세차게 찰랑인 후 다시 움직였지만, 이어진 움직임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알아차린 건가?’
“랄랄라. 랄랄라.”
한순간 걸렸나 싶었는데, 이내 여인에게서 콧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잘못 본건가?’
그렇게 한동안 시선을 빼앗겨있었지만, 이내 물이 꺼지는 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보는 여인의 얼굴을 보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임한나임을 확인한 순간, 나는 속으로 자책했다.
나도 아직 멀었다고. 정신수양이 덜된 놈이라고.
‘고연주, 정하연. 미안합니다.’
“어머?”
깜짝 놀랐다고 말해주는 감탄이 들린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았다가 이내 잽싸게 천으로 하부를 둘렀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내 성기가 대책 없이 불끈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어머머. 머셔너리 로드.”
“미안합니다. 사용자 임한나.”
이어진 임한나의 목소리는, 깜짝 놀란 감탄사를 내뱉은 것 치고는 꽤나 상냥하고 차분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남성 전용 탕인데…. 사용자 임한나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사실 이미 볼 건 거의 다 봤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변명은 해야겠단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몸을 돌렸다. 뜨끈한 욕탕과 사우나를 이용하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이대로 혼욕을 할 수는 없는 일이잖은가.
그렇게 빠르게 한 걸음 내디딘 찰나였다.
“자, 잠시만요. 머셔너리 로드. 설마 아직까지 안 씻으신 거예요?”
순간 재빨리 내 손을 잡아채는 나긋한 손길이 느껴졌다. 이어진 말을 들어보니, 몸에 묻은 무수한 핏자국을 보고서 말하는 모양이다.
“씻으러 온 거 아니셨어요? 아니. 씻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너무 심하게 말라붙었어요.”
“그렇기는 한데…. 개인 욕실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왕 오셨는데…. 그냥 여기서 하세요. 저 때문에 나가시는 거라면 저는 괜찮으니까요.”
“예?”
사락, 사라락.
“아. 이제 눈뜨셔도 되요. 이렇게 하면 되죠. 후후.”
그 말에 나는 냉큼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어느새 전신에 천을 두른 채 상냥히 웃고 있는 임한나를 볼 수 있었다.
‘혹시…. 내가 들어올 때부터 알고 있던 건가?’
에이. 아니겠지.
약간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긴 했지만, 원래 성격이 그러려니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가되지 않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폐라니요. 오히려 저야말로 폐인걸요. 허락도 없이 멋대로 들어와서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왜….”
“아. 지금 여성 전용은 비비앙씨가 사용하고 있거든요.”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에 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내 기색을 느꼈는지, 임한나는 옆으로 눈초리를 보내며 말을 덧붙였다.
“혼자 있고 싶다고 하셔서요.”
그리고 이어진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예?”
“나가라고 눈치도 주시는 것 같고…. 그리고 저도 같이하는 게 부담스러웠거든요. 너무 심하게 우울해하셔서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 참. 이 녀석을 그냥.”
“아, 아니에요! 비비앙씨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저도 혼자 하는 게 좋아서 온 거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솔직히 전에도 새벽에 몰래 사용한적이 몇 번 있기도 해서….”
살짝 혀를 내미는 임한나를 보며 나는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버릇이에요. 혼자 하는 게 좋아서요. 그리고 여성 전용은 새벽에도 경쟁이 약간 있는 편이거든요. 그에 비해 남성 전용은….”라고 말을 흐리곤 배시시 웃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 참…. 어쨌든 비비앙에게는 나중에 제가 말을 해두겠습니다. 그러나 사용자 임한나 또한 다음 번에는 이런 일을 지양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이번처럼 불의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리고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고, 비비앙을 생각했다. 일단 이번 한 번은 주의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신상용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고, 정식적인 첫 제자였던 만큼 애착도 굉장했으니까.
이윽고 난 살며시 임한나를 응시했다. 혹시나 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저 미안한 기색만 내비치는걸 보니 자리를 비켜줄 의향은 없는 듯 보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핏자국은 그냥 지우기 어려우실 거예요. 일단 간단히 씻으시고, 뜨거운 탕에서 몸을 좀 불리시는 게 나을 거예요.”
“그렇긴 하지만…. 그런데 혹시 목욕 중이셨습니까?”
“아. 네. 이제 막 시작하려고 했는데….”
“…그럼 그냥 최대한 빠르게 씻고 비켜드리겠습니다.”
“아, 아니.”
나는 드디어 임한나를 지나쳐 비어있는 샤워 부스로 안착할 수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사용했던 곳이라 그런지 은은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나는 하부를 가린 천을 단단히 동여맨 후, 살짝 마법 진을 눌렀다. 그리고 쏟아지기 시작한 물세례로 몸을 닦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완전히 없애려면 탕을 이용하는 게 좋은데….’
나는 힐끗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임한나는 나를 빤히 응시하는 중이었다.
‘…….’
그러한 시선이 무척 신경이 쓰였지만, 지은 죄가 있기에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조금 전 안력까지 끌어올린 마당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해서, 그냥 대충 물로 세게 비비어, 얼른 나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유….”
그때였다. 거의 마무리에 다다랐을 무렵, 옆으로 가벼운 한숨이 들렸다.
“진짜 갑갑한 사람이야….”
그리고 이어진 혼잣말에, 나는 괜스레 속이 뜨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찰박찰박. 찰박찰박.
한껏 예민해진 감각에 물 바닥을 밟는 소리가 들린다. 혹시 나가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오히려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임한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말문을 열기도 전 그녀는 살며시 팔을 내뻗었고, 이내 등에 닿는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이쪽도 남아있네요.”
이윽고 등을 훑어 내리는 나긋나긋한 감촉을 느낀 순간, 나는 뒤늦게 입술을 떼었다.
“사용자 임한나.”
“머셔너리 로드.”
“지금 뭐하시는….”
“수현아.”
그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떠 임한나를 응시했다. 동시에 말한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놓은 것이다.
일순 당황했지만, 이내 아차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래서 친구 하나 있었으면 했거든요.’
‘그럼 저랑 친구할까요? 공식석상에서는 힘들겠지만, 사석에서는 말도 놓고요.’
‘아,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클랜 로드께…. 그런 뜻으로 말씀 드린 건 절대로 아니었어요.’
‘난 괜찮은데.’
‘저…. 그럼 저는 당분간 말을 높일 테니까, 클랜 로드께서는 저한테 말을 놓아주시면 안될까요?’
‘그래. 그럼 앞으로 사석에서는 말 편하게 해보도록 할게.’
‘감사해요. 저는 나중에 익숙해지면 그때 편하게 말할게요.’
순식간에 여러 기억들이 주르륵 스치고 지나간다.
확실히 그랬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임한나는 이후로 내게 말을 꼬박꼬박 높였고, 나도 어느새 그녀를 다시 존댓말로 대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다고는 해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임한나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도 못했으니까.
그러나 임한나는, 그에 아랑곳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 작품 후기 ============================
1) 이번 회, 다음 회는 임한나의 복선을 푸는 과정 및 수현의 내면을 가다듬는 과정입니다.(임한나에서 베드 신은 구상되어있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꾸벅. _(__)_)
2) 완결까지는 4회~5회 정도 남았습니다. 1부 완결 후 연재 방향도 거의 결정한 상태입니다. 그에 따라, 완결의 구상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기도 하고요. 확실한 마음의 결단을 내리게 되면 후기로 공지하겠습니다.
3) 요즘 글이 안 써진다기보다는, 많이 피곤해서 그렇습니다. 걱정 감사합니다. 그래도 1부 완결 전까지는 펑크 없이 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