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55
00454 잊혀진 영웅들. =========================================================================
잠시 후.
쿵!
무언가 추락해 지면을 강하게 때리는 소리가 울렸으나, 돌아볼 겨를은 없었다.
‘아….’
시야가 가물가물하다. 예고했던 현기증이 온몸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꼭 정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듯한 기분에, 나는 안간힘을 쓰며 정신 줄을 붙잡으려 애썼다. 아직 용의 최후도 확인하지 못했거니와, 추후 영혼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은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차차 기울어지고 있었다. 눈꺼풀에는 무거운 추라도 달렸는지 자꾸만 감기려고 한다.
그때였다. 이내 머릿속으로 어둠이 찾아들고 시야가 완전히 하얗게 일변했을 즈음.
– Tempus Auxilium….
결국 또 정신을 잃는 건가라고 생각한 순간, 귓가로 자그마한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으로 나타난 이리저리 움직이는 노란빛 광채 하나. 일순간 엘릭서를 먹이려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은은한 빛이 흐르는 노란빛 광채는 오직 눈앞에서 연신 살랑살랑 흔들리는 중이었다.
이윽고 왼쪽 가슴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감촉은 가슴을 쓰다듬는 느낌으로 오른쪽으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배꼽 부근을 확 당기는듯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그리고 이어서 찾아든 감각은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이걸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몸을 강제로 한 쪽으로 끌어당기는 기분? 시계 태엽을 억지로 되감는 기분?
아니. 낯설기는 하지만, 나는 분명 이와 비슷한 감각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래. 시간 역행.
이건 꼭 1회 차 마지막에 이르러, 제로 코드를 발동했을 때와 흡사한 감각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불현듯 내부에서 화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래 맞아. Tempus Auxilium. 지금 네 몸에는 시간 역행 마법이 걸려있어.
‘템…. 뭐라고?’
– Tempus Auxilium. 시, 간, 역, 행. 네 몸에 한정에서, 억지로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야. 즉 지금 상황을 보면, 몸을 화정을 사용하기 직전의 상황으로 돌리는 거지. 아직도 이해 못하겠어?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바로 기함하고 말았다. 화정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무척 느린 속도이기는 했지만, 어느새 현기증이 가라앉고 시야도 차차 회복되고 있었다. 몸 상태가 확연히 나아지고 있다. 다만 회복이라는 느낌이 아니라, 화정의 말대로 힘을 사용하기 직전의 몸 상태로 되돌아가는 듯했다.
‘그게…. 가능한 마법인가?’
– 비록 신화 시절 때 소실돼 전승되지는 않았지만,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마법이야. 하지만 신화 시절 때도 사용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 엄청난 고난도 수준의 마법으로 실제로 사용하는 마법사도 드물었거니와…. 발동한 마법사는 피 대상자의 상태를 되돌리는 대신, 그와 동등한 대가를 치러야 하거든. 뭐, 지금은 영혼 상태라 그리 의미는 없겠지만.
화정의 말은 매우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니 화정이 고난도 마법이라고 말한 것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야 노란빛 광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마 구원받은 영혼 중 한 명이, 내가 쓰러진 걸 보고서 신화 시절의 마법을 걸어준 듯싶었다.
이대로 꼼짝없이 기절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몸이 회복된다. 또한 영혼이 이런 마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방증이었다. 나는 간신히 안도할 수 있었다.
‘다행이군.’
–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왜 화를 내는 거지?’
– 너…. 지금 속 편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고. 조금 전에 너, 확실히 죽을뻔했어. 그 사실은 알고나 있는 거야?
…죽을뻔했다 라.
솔직히 죽는다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약간은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막연히 막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나, 처음 부딪쳤을 때 그 무시무시한 힘에 압도당할 뻔했으니까.
– 압도당했을 뿐만 아니라, 너란 그릇 자체가 깨지기 일보직전이었다고. 어?
‘그릇?’
– 그래 이 멍청한 자식아! 원래 네 체력으로는 선포한 영역을 간신히 유지하는 수준이었어!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힘을 잠식해서 되돌려? 미쳤어? 그건 네 한계를 확실히 넘어서는 일이었다는 말이야! 예전에 그릇을 억지로나마 넓히지 않았다면 어쩔뻔했는데?
‘그릇을…. 억지로 넓혀놔?’
연신 이어지는 화정의 뜻 모를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 후…. 이봐 너. 지금부터 잘 들어.
큰소리를 친 게 약간은 미안했는지, 화정은 곧 약간은 꺾인듯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자꾸 너라고 하는 게 약간 거슬리기는 했지만, 나는 경청하겠다는 의미로 눈을 감았다.
– …후유. 그래, 주인아. 예전에 네 부탁으로 수라의 힘을 받아들였을 때를 기억할거야. 그때의 일로 말미암아 체력 92에 맞춰져 있던 그릇이 101까지 넓혀지기는 했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넓혀지기만 했을 뿐이야. 그릇의 강도 자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나는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릇이란, 한 마디로 한계를 비유한 말이었다. 현재 내게 허락된 화정의 힘은 딱 체력 90정도에 해당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 한계를 초과할 정도로 힘을 사용한 것이다.
다행히 예전에 수라의 힘을 받아들인 일로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었지만, 그릇 자체는 거의 깨지기 일보직전이었다는 소리.
‘…그런가. 정말로 죽을뻔했던 건가.’
어쩌면, 아까 조금만 잘못됐다면.
아마 그대로 먹혀버렸거나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 번 깨진 그릇을 다시 복구하는 건 요원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 이해해. 그리고 네 말대로 지금 Tempus Auxilium를 사용할 수 있는 영혼이 있는 건 천운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시는 이런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마. 그 기적인지 뭔지 웃기지도 않는 능력이나 엘릭서 등등.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를 해놨다고 해도,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발생해 네가 힘을 끌어다 쓰려고 한다면…. 나는 절대로 힘을 빌려주지 않겠어. 이건 네 목숨을 담보로 한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길게 말을 마친 화정은, 자신이 할 말은 다했다는 양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하여 내 쪽에서 몇 번이나 말을 걸어보았으나, 역시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차분히 얼굴을 쓰다듬었다.
화정의 말이 맞다. 목숨을 담보로 한 일.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저 화정의 힘을 이용해 조금 더 용이한 전투를 이어나갈 생각이었는데, 시작부터 잘못된 계획이었다.
“클랜 로드!”
“오라버니! 오라버니!”
문득 들려온 나를 부르는 목소리들.
어느새 몸 상태가 꽤 안정된 걸 느껴, 나는 차분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서 나를 보고 있는 한 영혼을 볼 수 있었다.
온몸에 은은한 빛이 흐르는 영혼은 온화한 인상을 주는 여인이었다. 머리카락은 샛노란 황금빛을 띠고 있었는데, 아까 흔들리던 노란빛 광채가 아마 이 머리칼인 듯싶었다.
여인은 나를 보며 상냥히 웃어 보이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훌쩍 멀어지는 여인을 보며, 그제야 내가 바닥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클랜원이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만 제외하면, 대기를 떠르르 울리던 용의 포효도, 이글이글 타오르던 불길의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다. 오직 요새를 비추는 따뜻한 햇살이 얼굴을 가득히 물들여오고 있었다.
나는 차분히 손을 더듬어 땅을 짚었다.
“용은…?”
조용히 입을 열며 상체를 일으키자, 나를 부축해오는 여러 손길들을 느낄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용은 죽었어.”
허준영의 담담한 목소리. 나는 손을 들어 설레설레 흔들었다. 부축해줄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몸 상태는 확실히 괜찮았으니까.
“괜찮으니까…. 조용히 좀 해봐. 머리 울린다.”
이내 힘껏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자,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클랜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었다. 그 와중, 나는 엘릭서를 들고 있는 신재룡을 보며 안도했다. 혹시 사용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마개가 덮여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도…. 나도 참 어지간하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엘릭서를 생각하는 나를 보니 절로 쓴 물이 올라온다.
나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죽었다고…? 어떻게 된 거지?”
“네 공격이 결정적이었다. 온몸이 불타오른 용은 허공에서 몇 번 비틀비틀하다가, 결국 아래로 추락했지. 그리고 우리와 저 영혼들이 힘을 합쳐, 추락한 용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사실상 일방적인 공격이었어. 네가 해치운 거와 다름없는 거야.”
나는 허준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온몸에서 허연 김을 뿜어내는, 하늘을 활보하던 본 드래곤을 볼 수 있었다.
크기도 크기였지만 외양에는 아직도 그 특유의 흉포함이 남아있다. 그러나 제 3의 눈은 본 드래곤의 확실한 사망을 말해주고 있었다.
얼핏, 두개골에 돋은 뿔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오라버니…. 정말로 괜찮으신 거예요?”
문득 안솔이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들며 흐느꼈다. 목소리도 울먹울먹 거리는 게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듯한 기세였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안솔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이윽고 다시 한 번 용의 사망을 확인한 후, 이번엔 사방으로 느릿하게 시선을 돌려보았다. 그러자 나와 안솔, 클랜원이 서 있는 중앙 광장 사위로, 모든 영혼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혼들은 더는 혐오스러운 해골의 모습이 아니었다. 생전의 모습을 되찾은 말끔한 모습으로, 외양에 흐르는 어슴푸레하며 흐릿한 빛은 거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그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시선은, 하나같이 경외와 호의가 담긴 눈길이었다.
나는 한동안 안솔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솔.”
“흑, 네.”
“이제는 설명을 들어야겠구나.”
“서, 설명이요?”
“그래. 이들이 누구인지.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저들이 왜 지금 여기에 서 있는지. 그리고 네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네가 아는걸 얘기해주려무나.”
“아…. 그, 그러니까….”
그때였다.
한 번에 너무 많은 걸 물어봐서 그런지, 안솔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거렸다.
그렇게 어벙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는 찰나, 갑자기 영혼들 사이로 작은 어수선함이 일었다. 하여 소란이 이는 곳을 바라본 순간, 나는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는걸 느꼈다.
빽빽이 모여있던 영혼들이 좌우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갈라진 틈으로 한 영혼이 차분히 걸어오고 있었다.
잠시 후, 이내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춘 영혼은 연갈 빛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리한 선한 이목구비를 가진 사내였다.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사내는 점잖게 머리를 숙였다.
– Lorem ipsum dolor…. Nos Salvator….
“?”
– Lorem ipsum dolor…. Nos Salvator….
“…흠. 당최 무슨 말인지.”
똑같은 말이 연이어 들려왔으나,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혹시 비비앙이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시선을 돌렸지만, 비비앙 또한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다는 뜻의 제스처를 취하자, 사내는 지그시 웃으며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이윽고 사내는 침착히 몸을 돌려 영혼들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한 손을 번쩍 치켜들어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 Drrrr…. Ea – Yaal!
어느덧 요새를 가득 채우던 안개는 한 줌도 남김없이 걷힌 상태였다.
사내의 음성은 더는 처음의 낮고 불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인상처럼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져, 바닥에 길게 드리워진 햇살을 따라 여운처럼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우리를 주시하던 수천의 영혼들이.
– Lorem ipsum dolor…. Nos Salvator….
하나같이 웅장한 합창을 이루며,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 작품 후기 ============================
쿵짝짝 쿵짝짝.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보 to the 상의 시간이 왔습니다! 아 미치겠네요. 얻을게 너무 많다 보니까, 정리하는 것도 일입니다. ㅋㅋㅋㅋ. 아마 제가 장담컨대, 독자 분들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아니, 아니요. 그냥 장담 안 할래요. 하도 매의 눈을 가진 분들이 많으셔서…. 그냥 몇몇 분들은 놀라실 수도 있습니다. -_-a
그리고 설날도 왔지요! 몇몇 남성분들은 고생 엄청 하시겠어요. 교통은 교통대로 정체되고, 운전은 운전대로 힘드시고. ㅜ.ㅠ 저는 저번에 후기에 말씀드렸듯이, 사촌 결혼식 가는 겸 다녀와 큰집에는 이미 다녀온 상태입니다. 그래서 내일 외갓집만 다녀오면 되요. ㅇㅅㅇ 그래서 계속해서 연재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
독자 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날이니까 맛난 것도 많이 드시고요!
PS. 아. 조만간 김수현, 김유현 형제의 사용자 정보를 업데이트 할 예정인데, 그 후 한 번 모든 캐릭터를 정리해서 설정에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
PS. 고장난선풍기 님! 팬 아트 고맙습니다! 김수현도 정말 대단했지만, 고연주가…. 진짜…. 아, 정말 이러시면 너무 감사합니다.(?) 제 뜰에 고장난선풍기 님께서 직접 올려놓으니 한 번 구경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