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468
00467 左遷. =========================================================================
홀 플레인.
북 대륙 내 남부 소 도시 코란.
남부 자유 연합.
자고로 연합이란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 서로 합동하여 하나의 조직체를 이루는 말을 일컫는다.
하나의 연합이 만들어지는 원인은 실로 매우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약소국이 강대국에 대항하여 하나로 뭉치거나, 아니면 각자의 이해득실을 계산해 서로 힘을 합치는 것 등등.
이러한 관점에서 헤아려보면 홀 플레인이라는 세상에서도 연합이 생기는 까닭이 엇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예를 들어보면, 남부 소 도시 코란에 자리 잡은 남부 자유 연합을 가장 좋은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홀 플레인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사용자가 모여 클랜을 만들고, 클랜이 모여 도시를 이룬다.
코란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클랜이 모여’가 아니라 ‘클랜들이 모여’라는 점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코란은 총 8개의 클랜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연합 도시로써, 각 클랜은 수(秀), 아르테미스(Artemis), 남벌, 세렌게티(Serengeti), 백화, 상인 조합, 가리사니, 이끼 클랜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처음 연합을 이룰 때는 단일 세력으로는 강하다고 보기 어려운 중견 클랜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그러나 코란을 접수한 이후 차차 세를 불려나가더니, 현재에 이르러서는 클랜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대형 클랜의 연합으로 성장한 클랜들이다.
세간에서는 남부 자유 연합이 이렇게 세력을 커다랗게 키울 수 있었던 배경으로, 구성 클랜들의 적당한 역할 나눔과 서로를 향한 적절한 견제를 근거로 들고 있다.
이 중 적당한 역할 나눔이란, 즉 분업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수, 아르테미스, 남벌, 세렌게티 클랜은 순수 전투 클랜이고, 백화, 상인 조합 클랜은 순수 상단 클랜이며, 가리사니, 이끼 클랜은 순수 정보 클랜의 역할을 맡고 있다.
한 마디로 무력, 자금, 정보 이 삼박자를 고루 갖춤으로써 상호 공존하는 구조를 만들어, 대형 클랜으로 발돋움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남부 자유 연합의 역사는 여러 중견 클랜들이 서로 힘을 합치면서, 선의의 경쟁을 통해 대형 클랜으로 성장했다는, 하나의 좋은 본보기가 될 만한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북 대륙에 알게 모르게 떠도는 소문으로는, 연합은 겉만 멀쩡해 보이지 내부로는 선의의 경쟁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의 극심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일례로 2년 전, 한때 연합을 선두에서 이끌며 기반을 다진 김용만의 실종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탐험 중 실종이라 발표됐으나, 기실(其實) 연합 내 새로운 물결을 바라는 이들에 의해 몰래 제거됐다는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다.
연합에서는 극구 부인하는 중이나, 김용만과 주변 측근 전원이 동시에 실종됐다는 사실을 보면 그냥 소문이라 치부하기에는 꺼림칙한 면이 없잖아 있지 않을까.
물론 진실은 본인들만 알겠지만 말이다.
*
남부 소 도시 코란의 어느 건물, 아니 연합 회의실에는 엄숙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회의실은 자못 어두웠다. 그러나 아주 캄캄하지는 않다. 테이블 둘레를 따라 아름다운 장식품이 둥글게 이어져 있었고, 중간중간 구멍 뚫린 공간에는 조막만 한 수정이 박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무튼 회의실에 있는 사람은 총 16명. 그 중 8명은 띄엄띄엄 거리를 둔 채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상태였고, 남은 8명은 의자 옆에 미동도 않으며 기립해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를 무렵.
“음…. 보아하니 다 모인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시작하는 게 어때?”
한 사내가 말끝을 살짝 올리며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자 연초를 태우고 있던 사내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여인도.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이 말을 꺼낸 사내를 주시했다.
사내는 언뜻 보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전반적으로 푸근한 인상에 거뭇거뭇한 턱수염. 그리고 살짝 나온 뱃살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사내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마냥 인상 좋은 아저씨로 생각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사내의 이름은 서지환.
연합 내 상인 조합 클랜의 클랜 로드이며 코란에 흐르는 자금을 한 손에 쥔 거물 사용자였다. 또한 김용만 시절부터 연합을 이끌어왔으며, 지금껏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 안 되는 공신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이윽고 씩 웃어 보인 서지환은 머리를 끄덕끄덕 주억이며 바로 앞에 놓인 기록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어디 보자…. 바바라, 그러니까 중앙 관리 기구 쪽에서 연락이 왔어. 이번 달 안으로 현재 헤일로, 도로시, 베스를 맡고 있는 임시 클랜들이 물러나고, 직접적으로 도시를 대표할 클랜을 선발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염병, 길기도 하네.”
일순간 기록을 쭉 읽어 내려가던 서지환의 이마에 주름살이 생겼다. 이내 테이블로 툭 내던진 서지환은 쩝쩝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훑었다.
“어차피 저번 1차 회의 때 얘기한 내용도 있고, 다들 사정은 알고 있을 거 아니냐. 그러니까 그냥 자질구레한 거는 생략하고, 바로 투표에 들어가는 게 어때. 응?”
“흠. 아저씨께서 말씀하시니 그러도록 하죠.”
서지환의 말을 받은 사내는 바로 박태진이었다.
박태진. 연합의 중추 클랜이라 할 수 있는 수 클랜의 클랜 로드로, 김용만의 자리를 이어받은 사용자. 태양의 검투사라는 시크릿 클래스를 갖고 있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머셔너리 클랜과 아주 약간 연관이 있는 사용자였다.
연관이라 함은, 한때 모니카의 꽃이라는 임한나를 두고 영입 경쟁이 붙은 적이 있는데, 러브 하우스에서 고백하였다가 차인 전력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는 사람만 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회의실 안에서는 공공연한 이야기였다.
그런 우스갯소리는 있었지만, 사실 박태진의 입지는 연합 내부에서도 거의 1, 2위를 다툴 만큼 강력했다. 원래는 김용만과 측근에 가려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실종을 기점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와 수 클랜을 장악한 사용자였다.
그러나 추후 관리에 지속적으로 신경을 쓰고, 호방하면서도 기품 있는 성격은 수많은 사용자들이 박태진을 지지하게 만들었다.
박태진은 태우던 연초를 옆에 기립한 사내에게 넘긴 후, 바로 맞은편으로 시선을 올려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래. 신혁. 너는 어떻게 생각해? 바로 시작해도 상관없겠어?”
박태진의 입에서 신혁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러자 태연한 얼굴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사내, 아니 신혁이 까딱 고개를 들어 박태진을 마주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신혁의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신혁 또한 연합을 구성하는 클랜 중 하나인, 남벌 클랜의 클랜 로드였다. 박태진과는 잠재적인 경쟁 관계로써 마찬가지로 연합 내 탄탄한 입지를 갖추고 있었다.
성격이 음험하고 호색해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수완이나 일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매우 뛰어나, 주변에서 나름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
이윽고 신혁이 말했다.
“응? 아아. 나야 상관없지. 아니 오히려 내가 너한테 질문해야 하는 거 아닌가? 박태진. 너야말로 지금 해도 괜찮겠나?”
“…무슨 소리지?”
박태진은 한쪽 눈을 슬쩍 추켜올리며 되물었다. 신혁은 여전히 손가락으로 테이블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소리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박태진의 얼굴도 서서히 굳어져갔다.
타다닥, 타다닥, 탁!
그리고 손이 멈추었을 때, 신혁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이렇게 자신 있어 하는걸 보니까…. 흐흐. 좋은 거라도 먹여서 표 좀 확보했나 봐? 응?”
“뭐라고? 혁이 형!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요!”
신혁의 말이 끝난 순간, 박태진의 옆자리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박태진이 곧바로 손을 들어 진정시키자 씨근거리며 콧김을 내뿜었다.
사내의 이름은 백두산으로, 평소 박태진과 두터운 친분을 나누는 사용자였다. 또한 세렌게티라는 클랜의 클랜 로드를 맡고 있는 명성 높은 전투 사용자이기도 했다.
“두산이는 진정하고…. 신혁. 조금 전은 무슨 말이지?”
“아 그렇잖아. 우리 더는 의뭉스럽게 굴지 말고, 그냥 까놓고 말하자고. 사실 다들 알고 있잖아? 지금 상황이 어떤지.”
“…머셔너리 사건을 들먹이려는 건가.”
“그래. 머셔너리. 도로시야 서부 자체에서 해결할거고, 베스는 욕심 많은 동부 새끼들이 처먹겠지. 그래도 그쪽에서 바바라를 먹었으니, 일말의 양심은 있으니까 헤일로는 건드리지 않을 거잖아. 그런데 푸른 늑대에서는 관심 없다 하고 이스탄텔 로우는 여력이 안 돼지. 그럼 남은 데는 어디겠어? 우리 남부 자유 연합, 아니면 머셔너리 클랜이잖아?”
넉살스럽게도 말하는 신혁을 박태진은 지긋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침착히 목을 가다듬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가 경쟁 상대인 머셔너리를 젖혔으니까 헤일로를 차지하는 게 타당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아주 똑똑해. 그리고 역시나 다들 알고 있었네? 그래 맞아. 머셔너리 사건은 내가 주도했어. 그런데 너희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건 똑같이 눈감았다는 소리 아니야? 응? 아니야?”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고작 이걸로 머셔너리를 젖혔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고작 이 사건으로 젖혔다고 생각해? 아무래도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이대로 주구장창? 머셔너리가 산맥에 들어간 지 벌써 두 달하고도 일 주, 아니 이 주 가까이 지났다고. 그런데 생환은커녕 돌아오고 있다는 연락도 없잖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안 그래요 다들?”
신혁이 동의를 구하려는 듯 주변을 돌아보자, 일부는 머리를 끄덕여 공감했고 일부는 시선을 회피했다. 이내 신혁의 눈이 서지환에게 닿았을 무렵, 서지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사실 혁이 말이 아주 틀렸다고는 볼 수 없지. 사실 내 생각에도 헤일로는 머셔너리가 가져갈 가능성이 높았어. 복구 지원이야 우리가 조금 더했다고는 해도, 전쟁이나 북 대륙 안정화 기록들을 보면 우리가 현저하게 밀리니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사건은 확실히 우리에게 도움이 됐어. 이대로 실종되면 말 그대로 굿이겠지만…. 아무튼 의뢰로 먹고 살던 클랜이 의뢰를 실패했으니 평판이 떨어질 것은 당연한 이치. 그동안 잘나가던 머셔너리에 꽤 커다란 흠집을 냈고, 머셔너리를 비방하던 기사 일부에 힘이 실릴만한 여지를 주었으니까…. 뭐 사실 머셔너리야 의뢰를 실패한 것뿐이지만, 그동안 그들의 행보에 배 아팠던 사람이 한둘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이렇게 이슈가 된 거지.”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때였다. 앉아있는 사용자들 중에서만 대화가 오고 갈 무렵, 서 있던 사용자들 중에서 누군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말을 꺼낸 사용자는 깔끔하면서도 준수한 이목구비를 가진, 바른 자세로 서 있던 청년이었다. 미미하게 웃는 눈과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져 있는 게 누가 봐도 첫눈에 호감을 가질만한 인상이었다.
어차피 길었던 이야기도 막 끝마친 터였다. 서지환이 말해보라는 듯 턱을 들어올리자, 청년은 예의 바르게 머리를 숙이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는 머셔너리 클랜은 헤일로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마법의 탑 클랜과 협동해 마법 도시 마지아를 활성화한다고 해서….”
“큭!”
“후….”
“쯧.”
그러나 청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말을 꺼내는 도중 비웃는 소리, 한숨을 뱉는 소리, 혀를 차는 소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흘러 들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잠깐 어리둥절한 듯 머리를 갸웃했으나 이내 박태진마저 눈치를 주자 꾸벅 머리를 숙이며 물러섰다.
“어이, 박태진. 저놈이 요즘 네가 데리고 다닌다는 그 청년인가? 참 착하네. 세상을 선하게 볼 줄 알아.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고 말이지. 흐흐흐.”
“으음…. 모를 수도 있지. 아무튼 환희야. 조용히.”
박태진은 조용히 주의를 주고선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와 반대로, 신혁은 한껏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신혁은 연초를 한 대 꺼내 불을 붙였다. 이내 우뚝한 코에서 가느다란 연기 두 줄기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그럼 아저씨 말대로 자질구레한 건 싹 치우고, 이만 재투표를 시작하자고. 다들 알아들은 것 같으니 말이야.”
“…….”
“아니 왜 갑자기 벙어리가 되셨나. 꿀이라도 한 단지 잡쉈나? 아니면 정말 저 바른 청년처럼 생각하고 있던 건가?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면 설마 그 머셔너리에 가슴 큰 년이라도 생각…. 아 농담이야, 농담. 너무 그렇게 보지 말라고. 가족끼리 농담도 할 수 있는 거지. 하하하…. 아저씨? 진행 안 해요? 내가 할까?”
“으음…. 잠깐만. 그런데 말이야. 태진이 말도 아주 일리가 없는 건 아니야. 이대로 낙관하는 건, 솔직히 그동안의 머셔너리를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되거든. 그리고 사실 나는 오늘 대충이라도 협의가 될 거로 생각해서 왔는데, 이래서는 저번 투표랑 다를 게 뭐가 있겠나. 수 클랜에 2표, 남벌 클랜에 2표, 그리고 기권 4표. 저번이랑 또 똑같은 결과가 나오겠지. 아무튼 지금 아주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넉넉히 갖고….”
신혁의 독촉하자 서지환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곤조곤 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혁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아 그놈의 생각, 생각! 적당히 좀 합시다! 1차 투표도 미루고 미루다 한 건데, 2차 투표도 또 미룰 셈이요?”
“아, 알았어! 알았다 이놈아! 그럼 하자고, 해! 어차피 태진이도 아까 하자고 했으니까…!”
그때였다.
쿵!
서지환이 손사래를 치며 머리를 끄덕이는 순간,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한 사내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자 모두가 문 쪽을 돌아보았음에도 사내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다급한 발걸음으로 신혁에게 다가가 귓가에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닥였다.
그리고 사내의 속삭임을 들은 순간, 신혁의 얼굴이 하얗게 일변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긋하기 그지없던 낯빛이 꼭 일순간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하게 변한 것이다.
잠시 후, 신혁은 허공에서 이끌리듯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침을 한 번 삼키고, 차분해지려 애쓰는듯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입술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자, 잠시. 크흠! 바쁜 일이 생겨서. 이,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 투, 투표는 다음으로 미뤄도 상관없어.”
이내 말을 마친 신혁은 바람처럼 달려나가 회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회의실 안에 있던 모두는, 그런 신혁을 의아한 눈초리로 쫓았다.
아니. 모두는 아니었다.
오직 단 한 명. 박태진의 옆에 서 있던 청년은 문을 흘끗 쳐다봤다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청년의 시선이 꽂혀있는 장소는 바로 테이블 장식품에 박혀있는 수정구였다.
수정구들은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어두운 회의실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유독 2개의 수정구가 다른 수정구보다 약간이지만 더욱 밝은 빛을 흘리는 중이었다.
문득, 땀이 흥건한 듯 청년은 살그머니 손을 비비며 수정구들을 응시했다. 반들반들한 겉면에는 주변 회의실이 풍경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한편, 같은 시각.
남부 소 도시 모니카. 머셔너리 클랜 하우스.
마찬가지로 고요한 기운이 흐르는 로비로, 한 여인이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왔다. 푸른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인은 바로 정하연이었다.
그리고 로비에는 무수한 사용자들이 이리저리 앉아, 천천히 내려오는 정하연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사용자들의 얼굴에는 뜻 모를 비장함이 감돌고 있었다.
이윽고 정하연은 계단의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서 오른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가녀린 오른손에는 얼음 빛을 흘리는 통신용 수정구가 들려있었다.
돌연히, 정하연의 입술이 열렸다.
“클랜원 분들에게 알려드릴게 있어요.”
“…….”
“조금 전 검후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용이 잠든 산맥으로 떠난 머셔너리 클랜원의 전원 생존을 확인했으며, 또한 산맥 공략 및 안현과 백한결의 구출은 물론. 살아남은 생존자까지 모두 구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용이 잠든 산맥 공략.
안현과 백한결의 구출.
의뢰인을 포함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구조.
이 사실을 들은 순간, 머셔너리의 로비에서 환희에 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모자라 모여있던 클랜원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약간의 시간이 흘러 로비는 함성과 박수 소리로 가득히 메워졌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역시 클랜 로드!”
“해냈다! 해냈어! 클랜 로드가 해냈어!”
“김수현! 김수현! 김수현! 김수현!”
거의 광신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뻐하는 클랜원들을 보며 정하연은 쓴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그동안 김수현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만큼 머셔너리는 알게 모르게 행동을 조심해야 했고, 때마침 안 좋은 사건도 터진 터라 연합 내 분위기도 한동안 우중충했었다.
결국 그 사건으로 김수현이 복귀하고 용이 잠든 산맥으로 떠나기는 했지만, 회의적인 시선으로 보는 클랜원도 적잖이 있었다. 그냥 믿고 기다리기에는 여태껏 쌓아온 용이 잠든 산맥의 악명이 너무나 높았던 탓이다.
어찌 보면 용이 잠든 산맥은 김수현의 공식적인 복귀와, 현재 머셔너리가 직면한 상황과 맞물려있다고 볼 수 있었다.
말인즉슨 해결 여부에 따라 이 분위기를 반전시킬지 아니면 더욱 가라앉힐지 가늠할 수 있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용이 잠든 산맥은 해결하기에 꽤 가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김수현은 멋지게 해냈다. 의뢰인의 문제를 해결한 것뿐만이 아니라, 공략과 동시에 다른 사용자들도 구조하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지금 클랜원들이 이렇게나 환호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복귀에 맞물린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으니 그에 따라 신뢰감이 깊어지는 건 물론, 다시 클랜의 중심을 잡아줄 사용자가 돌아오는 걸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어지간히 기뻐할 일이 없기도 했지만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놔두고 싶었으나, 정하연은 천천히 손을 올려 클랜원들을 진정시켰다. 아직 한 가지 더 말할게 남아있었다.
환호는 바로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정하연의 신호를 본 몇 명이 소란을 진정시켰고, 그 결과 환호는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사그라졌다.
곧 완전히 가라앉은 주변을 훑으며 정하연은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말씀 드릴게 있어요. 현재 클랜 로드는 모니카….”
그러나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쾅!
일순간 문을 거칠게 밀어젖히는 소리가 통로를 타고 흘러와 로비 전체를 떠르르 울렸다.
그에 이어, 이내 십 수명이 내는 발소리가 복도를 정연히 울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음. 오늘 나온 등장 인물들이나 관계를 기억해주시면, 앞으로 나올 이야기를 이해하시는데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특히 이 중 몇 명은 이 파트가 끝난 후에도 몇 번 더 등장하오니, 더욱 좋으실 겁니다. 하하하. 😀
PS. 2차 투표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