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17
00516 Vs 101. =========================================================================
공찬호와 끝까지 갈 수는 없었다. 뒤늦게 교육생들의 신고를 받은 교관들이 달려와, 현재 상황을 정리해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거기서 더 버텨봤자 득 될 것도 없어 나는 순순히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공찬호가 여전히 문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득달같이 달려들던 공찬호는, 업어 치기 이후 갑자기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교관들이 말을 걸어도 응답하지 않고, 오직 흐릿한 눈동자로 하늘만을 보고 있었다. 떠올리건대, 대(大) 자로 누운 그 모습은 흡사 죽은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결국에는 사제의 치료 또한 소용이 없어, 교관들이 공찬호를 부축해가는 것으로 상황을 일단락 짓고 말았다. 아마 정신 쪽에 커다란 충격을 입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지금.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성하얀은, 나와 진수현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그것도 양손으로 싹싹 빌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얼굴로.
성하얀을 보고 있자 조금이지만 애처로운 기분이 든다. 이 상황과 연관해서 안쓰러운 게 아니라, 그냥 성하얀 개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성하얀의 모습은 2년 전 보았을 때와 굉장히 달라져 있었다.
…도대체 무어라 해야 할까.
그냥 한 명의 노예, 혹은 걸인을 보는 것만 같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뺨에 미미한 자국이 비쳐 보일 정도였고, 심지어 작지만 퍼렇게 멍이 맺힌 부분도 보였다.
예전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선하게 웃어 보이던 청순한 공주님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뭐든지…. 하라는 건 뭐든지 다할 테니까….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런 성하얀은 아직 정확한 정황이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사과를 하는 중이었다.
기실 대충 짐작은 간다. 그래도 그동안 살을 부대끼고 살아온 만큼, 사건이 터지자 본능적으로 공찬호의 소행이라 여긴 듯싶었다. 뭐, 그게 거의 사실이기도 했고.
한동안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성하얀을 응시하다가, 나는 흘끗 옆을 곁눈질했다.
옆자리에는 진수현이 딱딱히 굳은 상태로 앉아있었다.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 딱한 눈초리로 성하얀을 바라보는데, 그러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다. 보아하니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경험 부족인 것처럼 보이니, 조금 나서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차후 돈독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발판으로 말이지.
속으로 계산을 마칠 수 있어, 나는 양손을 바짝 엇갈려 맞추며 말했다.
“2년 전이랑은…. 많이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최대한 부드럽게 하려 애쓰며 말문을 열자 성하얀이 고개를 번쩍 든다. 그러더니 이내 울긋불긋한 주먹으로 눈을 쓱 닦고는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였다.
“네…. 흑! 머, 머셔너리 로드님도 그렇게 느끼셨군요…. 흑!”
“음…. 많이 힘….”
“머셔너리 로드님도 기억하실 거예요…. 우리 클랜 로드…. 2년 전만 해도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예?”
“그런데.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됐는지…. 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항상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고…. 웃다가도 화내고…. 밤에 자다가도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고….”
“아…. 그렇습니까.”
“네….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 사람이 변한 것 같아요….”
“…….”
사실 공찬호가 아니라 성하얀을 지칭한 거였는데.
하지만 굳이 지적할 분위기가 아니라, 나는 잠자코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물론 변명에 불과한 이야기들이지만…. 그, 그래도 거짓말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발…! 부탁 드릴게요…!”
성하얀의 애원. 나는 이번에는 대놓고 진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느꼈는지, 진수현 또한 눈을 끔뻑이며 나를 마주 바라보았다. 이내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눈빛을 보내자 머리를 빠르게 흔들며 어깨를 으쓱인다. 이건…. 완전히 맡긴다는 의미인가?
…공찬호.
과거 천하무쌍의 이름을 속으로 되뇐 후, 나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하얀은 걱정이 듬뿍 담긴 얼굴로 노심초사 내 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그러던 하늘이, 갑작스럽게 심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흡사 하늘에 지진이라도 난 듯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러나 공찬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 없는 얼굴로 하늘을 주시한다.
왜냐하면,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로 하늘이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니라, 땅에 부딪친 몸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하늘이 흔들려 보일 뿐이라는 것을.
잠시 후.
하늘은 도로 잠잠해졌다.
“머셔너리 로드!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공찬호 교관! 공찬호 교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뒤늦게 신고를 받고 달려온 교관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상황을 정리하고 또 누군가는 공찬호를 흔들며 말을 건다.
하지만 그 모든 자극에 공찬호는 일체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흐릿한 눈동자로 하늘을 올려다볼 뿐.
그런 공찬호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차오르고 있었다.
‘졌다.’
그랬다.
말 그대로, 공찬호는 김수현과의 대련에서 져버렸다. 더구나 아슬아슬하게 진 것도 아닌, 거의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이며 패배한 것이다.
하지만 고작 패배라는 단어 하나로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기에는, 공찬호의 입장이 조금은 가엾지 않을까.
왜냐하면, 공찬호는 무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결같이 이 순간을 기다려왔으니까.
처음 수라마창을 얻었을 때 공찬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 현재의 수라(壽拏)는 더는 신창이 아닙니다. 착용자에게 끈임 없이 피를 갈구하고 파괴를 부르짖는 하나의 마창(魔槍).
– 수라(壽拏)에 잠재된 불길(不吉)은 착용자에게 지속적인 고난과 시련을 부여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마성(魔性)을 극복했다고 생각한 순간, 마창(魔槍)이 그대를 가차없이 삼킬 겁니다.
그 누구도 수라마창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이 창은 그저 힘을 빌려주는 것에 불과하며, 언제고 사용자를 잡아먹으려는 하나의 괴물이다.
그것은 하나의 마약이나 다름없는 감각이었다. 거칠 것 없는 힘에 절로 끌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경각심을 일게 만드는.
그렇게 생각한 공찬호는 수라마창을 잡았고, 동시에 극도로 경계했다.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하게 철저히 관리했으며, 수라마창에 먹히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년 전, 공찬호의 생각을 완전히 깨부수는 사용자가 등장했다.
‘수라마창을 직접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김수현은 정말로 수라마창을 잡았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불길(不吉)을 되레 제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수라마창의 실체를 이끌어냈으며, 종래에는 하늘마저 가르는 위력을 선보였다. 그것도 공찬호가 보는 바로 앞에서.
공찬호 내부에 열등감이라는 감정이 생겨난 것도. 그리고 수라마창을 경계하는 마음을 버리고 가까이 하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김수현이 수라마창을 온전히 다루는 것을 확인했을 때부터, 수라마창의 기운에 의도적으로 자신을 노출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나도 하늘을 갈라보겠다.
그리고 진정한 수라마창의 주인으로 인정받아 보이겠다.
굳게 다짐한 공찬호는 주변의 모든 걸 포기하면서까지 수라마창에 매달렸다.
그러나 김수현처럼 화정이라는 상승의 기운이 없는 이상, 가능할 턱이 없었다. 아무리 애를 쓰고 악을 써도 공찬호의 수준은 제자리걸음에 불과했고, 하늘을 베어 가르기는커녕 실체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럴수록 공찬호 내부의 열등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수라마창이 그런 공찬호에 지속적으로 악영향을 미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결과, 결국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어찌됐든, 현실은 어떻게 할 말도 없는 깨끗한 패배였다.
아니. 추잡한 패배였다. 구걸까지 했음에도, 막무가내로 달려들었음에도. 공찬호는 김수현에 상처하나 내지 못했다.
…그토록 노력했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돌연 눈가가 아려오고 시야가 뿌옇게 변해오기 시작해, 공찬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았다. 이어서, 그제야 비로소 텅 비어버린 내부에 냉엄한 현실이 들이닥쳤다.
마치 전신의 감각이 끊어진듯한 감각을 느끼며 공찬호는 이미 감은 눈을 더더욱 꾹 감았다. 더는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거니와, 그나마 남은 힘도 술술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그저 언제 흘러내릴지 모르는 눈물을 참는 게, 공찬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얼마나,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 걸까.
다시 눈을 떴을 때. 공찬호의 눈에 보인 건 하늘이 아닌 상아빛 천장이었다.
약 3초의 시간이 흐른 후 눈을 크게 뜬 공찬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절반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도로 드러눕고 말았다. 온몸에 힘이 없기도 했고 갑작스럽게 목이 타는듯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띵할 정도의 강한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공찬호는 본능에 따라 손을 더듬었다. 그러자 누군가 쥐어주기라도 한 것처럼, 요행히 무언가 차가운 게 손에 잡혀 공찬호는 확인할 생각도 않고 입안으로 들이켰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차가운 액체가 범람하듯 흘러 든다. 가슴에 스며든 시원한 기운은 끓어오르는 갈증을 식혀주었고, 공찬호는 그제야 약간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공찬호는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건….”
근 2년간 단 하루도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본 적 없는 공찬호였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이상하게도 머리가 맑음을 느꼈다. 악의에 가득 차 있는 게 아닌, 마치 온천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뜨끈뜨끈하면서도 홀가분한 기분이랄까.
공찬호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야 주변 상황이 차분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숙소는 결코 성하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디 한 군데 성한 구석이 없다. 모조리 깨지거나 부서져 있었다.
이윽고 절반이 조각난 수정을 멍하니 들여다본 순간, 공찬호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수정에 반쯤 비치는 얼굴이 너무나 낯설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옛날에는 인상이 좋다거나 시원시원한 호남으로 평가를 받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초췌하고 형편없는 얼굴만이 눈에 보일 뿐이었다.
“이게…. 나라고…?”
공찬호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은 찰나였다.
“이제 정신이 좀 드세요?”
선한 목소리가 공찬호의 정신을 한층 일깨웠다. 공찬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고 이내 한쪽 구석에 다소곳이 서 있는 성하얀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성하얀의 옆에는 잘 닦여진 수라마창이 곱게 세워진 상태였다. 또 그 옆으로는 미리 준비를 해놓은 듯 가득 찬 물병이 서너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문득 자신의 손에 쥐어진 물병을 응시하던 공찬호가 약간은 끓는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정신을 잃은 지 며칠이나 지났지?”
“…….”
“내 말 안 들려?”
“…사흘이요.”
성하얀의 대답이 이어진 순간 공찬호는 숨을 멈췄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눈 한 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무려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다고?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의문도 들었다.
“사흘이면…. 그럼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성하얀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한동안 공찬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다가와 천천히 A4용지만한 기록 하나를 내밀었다.
그리고 첫 줄을 읽자마자 공찬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중앙 관리 기구 징계 회의 결과.』
기록에 적혀있는 내용은 간단했다. 그간의 공찬호의 정황이 자세히 기록돼있었다. 같은 교관을 공공연히 비방하고 다닌 점. 교육생들에게 폭언을 일삼은 점. 그리고 교육을 빙자한 과도한 대련 등등.
거두절미하면, 그러한 점들을 종합해 교관 자격을 박탈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즉 퇴관 조치를 당한 것이다.
“이건…. 뭐냐?”
“거기 적힌 그대로예요. 앞으로 못해도 일주일 안으로는 나가야 해요.”
“누가 몰라서 물어? 그러니까 내가 왜!”
“…그래도 머셔너리 로드님이 최대한 신경을 써주신….”
성하얀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기록을 반으로 쫙 찢은 공찬호가 흉흉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쌍! 지금 뭐라고!”
“히이이익! 죄, 죄송해요! 제, 제가 잘못했어요! 때, 때리지만 말아주세요!”
성하얀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치 이제 맞을 거라는걸 알고 있다는 듯,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탕! 탕, 탕, 탕….
가지런히 세워진 물병이 바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
한껏 팔을 젖힌 공찬호는 반사적으로 몸을 멈추고 말았다. 그런 공찬호의 눈동자는 수정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주시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엉….”
기어코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한참 동안 흐느낌이 이어진 후, 공찬호는 힘없이 팔을 떨어트렸다.
============================ 작품 후기 ============================
으음. 복선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지금 알려드릴 수는 없어요. ;ㅇ;
일단 나온 내용대로라면 당연히 김수현과 공찬호가 연관돼있기는 합니다만….
에잇. 아무튼 이로써 공찬호 파트도 끝입니다.
다음 회 초반에 나머지 처리 과정과 수현의 속내가 나온 후, 곧바로 새로운 파트로 진입할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