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569
00568 싱크 홀(Sink Hole)로의 돌입. =========================================================================
아직은 어두컴컴한 하늘.
“으하하함~. 졸려….”
막 천막에서 나온 사내가 입이 찢어져라 긴 하품을 했다. 그리고 흘긋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입 부근을 쓱쓱 매만지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신 하품을 하면서 비척비척 걷는 게 아직도 완연히 잠에 취한 모습이다.
비칠비칠 걷던 사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아래 구덩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이었다.
“어~이. 이제 그만 교대하자고.”
사내는 여전히 잠이 덜 깬 듯 반쯤 감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회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고요한 밤바람만이 스치듯 불어와 사내를 살랑 지나칠 뿐. 인근은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
어리둥절한 얼굴도 잠시. 한순간 사내의 두 눈동자에 깃들어있던 졸음이 싹 가셨다. 이내 날카로운 빛을 번득이더니 사내가 자세를 한껏 낮추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내의 클래스는 궁수. 뭔가 묘한 기분이 온몸을 엄습해 들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느릿하게 전진하며 주변을 자세히 살필 즈음이었다.
“어. 교대하러 온 거야?”
아래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말한 듯 자그마한 목소리였으나 예민해진 사내의 청각은 확실히 들었다. 하여 곧바로 안력을 높여 시선을 내리자 구덩이 앞에서 한 손을 흔드는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같은 동료이니만큼 사내도 확실히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사내는 안도의 한숨을 흘린 후 터덜터덜 언덕을 내려갔다.
“뭐야. 왜 여기 내려와 있어? 위험하게시리.”
사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여인은 시선을 거두고 아래를 지그시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냥. 조금 이상해서.”
“이상하다고?”
“응. 뭔가 이상한 게 보이는 것 같아서…. 뭔가가 자꾸만 고개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또 고개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뭐야?”
사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고 재빠르게 두어 걸음 물러나 구덩이 안을 살폈으나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칠흑 같은 어둠만이 캄캄하게 들어차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데? 잘못 본 거 아니야?”
사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인은 정말 미안하다는 얼굴을 하더니 살며시 콧등을 눌렀다.
“미안해. 사실은 깜빡 졸았어.”
“야 인마.”
“그래도 언뜻언뜻 보이기는 한 것 같은데…. 확실하지 않아서 나도 내려와 본 거야.”
“잠결에 잘못 본 거겠지. 하여간 깜짝 놀랐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됐으니까 들어가서 잠이나 자.”
여인은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사내도 같이 올라가려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더 구덩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너 혼자 온 거야?”
“응? 아, 그렇지. 희영이는 조금 있다가 올 거야. 수철이랑 잤잤했는지 조금 힘들어 보이더라. 큭큭.”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응? 뭐가 할 수 없어?”
자신이 한 농담에 웃던 사내가 여전히 낄낄 웃으며 여인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여인의 몸이 스르륵 미끄러지듯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어?”
미처 놀랄 틈도 없었다. 그저 사내가 느낀 거라고는 자신의 가슴을 떠미는 두 손의 감촉과, 시야에 들어오는 서서히 기울어지는 세상뿐. 사내가 마지막으로 본 건,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여인의 싸늘한 얼굴이었다.
“어어어어어어어어?!”
긴 비명이 구덩이 속으로 쑥 떨어져 내렸다. 여인은 잘 내려갔다 확인해보려는지 깨금발로 구덩이를 살피고는 차분히 몸을 돌려 언덕을 응시했다. 잠시 후 누군가 한 명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인은 번쩍 손을 올렸다.
“어. 교대하러 온 거야?”
*
고연주는 잠시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지만, 곧바로 한 명을 지목했다.
“저는 다은이로 하겠어요.”
남다은. 좋은 선택이다. 머셔너리 내 근접 계열 사용자들의 순위를 매겨보면 남다은은 확실히 첫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사용자니까.(물론 나는 제외한다.) 용이 잠든 산맥에서 나와도 호흡을 맞춘 적이 있으니, 검후라면 그림자 여왕과도 좋은 궁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남다은은 생글생글 웃으며 걸어 나왔다. 다음으로, 나는 안솔을 보며 고갯짓했다.
“안솔. 호명하도록.”
“으응…?”
안솔은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머리 위로 물음표를 동동 띄우더니 이리저리 클랜원들을 훑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또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갔다가. 또다시 왼쪽으로 갔다가…. 이 녀석이?
“그만. 장난하지 말고.”
자꾸 고개를 휙휙 돌리는 게 이제는 거의 틱 장애로 보일 지경이라, 나는 강제로 안솔의 머리를 잡아 고정했다. 안솔은 갑갑하다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꿀밤을 한 대 먹이자 금세 얌전해졌다. 잠시 후, 나는 물음표가 느낌표로 반짝 변하는걸 볼 수 있었다.
“저기, 저~기로 할래요.”
안솔이 가리킨 사용자는 다름 아닌 허준영이었다. 아마 차소림이랑 두고 고민한 것 같은데…. 그래. 그래도 허준영 정도면 나쁘지 않지. 아니. 안솔 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선택이다.
“부르는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허준영은 차분히 걸어 나오더니 안솔의 머리를 퍽 때렸다.
“악! 뭐, 뭐예요! 왜 때려요!”
“내 이름은 저기가 아니라 허준영이다.”
“그냥 넘어간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려고 했는데. 네가 으스대는 꼴을 보니 왠지 때리고 싶어졌어.”
안솔이 캬악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신재룡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용자 신재룡. 호명하시면 됩니다.”
“흐음….”
신재룡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클랜원들을 응시했다. 진수현이 자신을 뽑아달라는 듯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헬레나는 가슴골을 드러내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안솔은 어떻게든 돌진하려는지 이익이익 용을 쓰고는 있었지만, 허준영의 한 손에 얼굴부터 막혀 속절없이 양팔만 휘두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도대체 얘들은 왜 이러는 걸까.
그때였다.
“안현으로 하겠습니다.”
“…예?”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나는 바로 두 손을 내렸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의외라는 얼굴이다. 심지어는 안현마저도 눈을 휘둥그래 만들었을 정도였다. 안현이 부족하다기보다는 그보다 더 좋은 사용자 정보를 가진 클랜원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 현이로 호명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재룡은 잔잔한 미소를 띄운 채 조용히 말했다.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한 번 더 호명할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혀, 형!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안현은 정말로 바꿀세라 허겁지겁 튀어나왔다. 내가 물끄러미 응시하자 신재룡은 차분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호명을 번복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였다. …안현이라.
“형.”
“어.”
“저.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비록 형에게 힘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
안현은 무언가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뜨거운 눈초리를 내게 보냈다. 얘는 또 왜 이래.
결국에는 한숨을 흘리며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안현도 기본 이상을 하는 사용자였고, 신재룡이 아무 생각 없이 호명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니 둘이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는데, 그만큼 호흡을 잘 맞출 수도 있는 노릇이니.
이윽고 다른 클랜원들은 모두 돌려보낸 후, 나는 호명된 이들을 모아 구덩이 작전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어디선가 흘러내린 차가운 물방울이 사내의 이마에 똑 떨어졌다. 사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신을 차린 것이다. 눈도 뜨지 않은 채 주변을 더듬은 사내는 뭔가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을 느꼈다. 이어서 온몸에 고통이 찾아 들었다.
“크으….”
짧은 신음을 흘린 사내가 힘겹게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건 벽에 걸려 아른아른 타오르는 횃불이었다.
“오. 이제 일어났나?”
그때 거친 쇳소리가 귓전을 거슬리게 울렸다. 사내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신음을 삼키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몸을 더듬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사내는 그제야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이 좋았지. 마침 내가 구덩이 부근에 있었거든. 깜박하고 지나쳤으면 너를 못 볼뻔했지 뭐야. 영영 말이지. 히히히.”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사내는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말을 건 이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입을 쩍 벌리고야 말았다. 한 괴이한 사내가 의자 같은 것에 앉은 채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평범한 모습은 아니었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부분은 온통 시커먼 문신으로 뒤덮여있어, 흡사 괴물을 보는 듯했다. 거기다 미친 야수처럼 번뜩이는 눈동자까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내는 어딘가 익숙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이윽고 괴이한 사내가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몸은 좀 괜찮나? 형식이 너, 꽤나 오랫동안 잠들어있었다고.”
형식이. 그 말을 들은 순간, 형식이라 부른 사내의 눈동자에 경악의 빛이 스쳤다.
“…너, 너!”
“응? 갑자기 왜 그래.”
“혀, 현호? 현호 아니야?”
“…호오.”
작은 감탄. 현호라 불린 괴이한 사내의 입가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차마 미소라고 말하기에는 상당히 미묘하다. 하지만 사내는, 아니 현호는 히히 웃으며 형식의 어깨를 짚었다.
“역시. 너라면 알아봐 줄 줄 알았지. 살린 보람이 있어.”
“뭐라고? 하지만 분명 현호는 3년 전에….”
“강철 산맥 공략에서 실종됐지. 하지만 죽은 건 아니잖아? 히히히!”
“아, 아니야. 아니야! 너 괴물이지? 현호를 잡아먹고,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잖아!”
그러자 현호의 입에서 또 한 번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야~. 벌써 거기까지 알아낸 건가? 꽤나 유능한 사용자가 있나 보네?”
“이 괴물 자식이!”
“하지만.”
“……!”
현호는 형식의 고함에 아랑곳 않고 도리어 몸을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떨어진 여파가 남은 건지 온몸이 비명을 질렀으나 그보다는 현재 느끼는 충격이 더욱 크다. 형식은 고통마저도 잊은 채 현호를 바라보았다.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주고 어깨를 툭툭 쳐주는 행동에서, 조금도 살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친근하고 반가운 모습만이 보일 뿐이지.
“걱정 마.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괴물은 아니니까.”
“뭐, 뭐라고?”
“뭐, 사실대로 말하면 영향을 안 받은 건 아니야. 하지만 정체성은 너랑 처음 홀 플레인에 들어왔을 때의 주현호. 그대로라고. 히히히.”
“…….”
“아무튼 정신은 차린 것 같은데. 그러면 우선적으로 신고를 해야 하니까, 나가자고. 상황이 비록 이렇게 됐지만, 어쨌든 너도 살고 싶을 거 아니냐.”
“시, 신고?”
형식이 의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얼굴은 멍하기 짝이 없다. 이제 막 깨어났는데 여러 믿을 수 없는 정보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현호는 몸을 돌려 문을 나서는 중이었다. 그러자 이제야 비로소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오는지, 형식은 느릿느릿 걸어가면서도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형식은 멍하니 현호를 따라가면서도 생각했다.
일단 확실한 건 구덩이에 떨어진 것. 그러면 여기는 구덩이 아래, 땅속이라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공기 중에 축축한 습기가 가득하다. 기다란 통로를 걷는 것 같은데 어두운 어둠뿐이라 잘 보이지 않는다. 발바닥으로 차가운 흙을 밟는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천장을 쳐다보니 둥글게 깎인 흙이 보이면서도, 마치 핏줄처럼 보이는 것들이 울룩불룩 돋아나와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뭔지도 모를 입구를 나서자 기다란 토굴이 나왔는데, 걸으면서 상상 이상으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운 냄새가 콧속을 찔러 들었다. 묘하게 철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결국 형식이 지금 여기서 기댈 곳은, 한 곳뿐이었다.
“너…. 정말 현호 맞아?”
“왜. 그러면 너 어렸을 때, 남의 차에 오줌 싸다가 걸린 얘기까지 해야 믿겠냐?”
영문 모를 물음에 앞에서 걸어가던 현호가 비웃는 목소리로 회답했다.
그 순간이었다.
“끼아아아아아아악!”
갑작스럽게, 거센 비명이 통로를 떠르르 울렸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현호의 걸음이 우뚝 정지했다.
“보지 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와. 봐서 좋을 거 없다.”
처음으로 낮아진 목소리가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형식은 이미 마력을 끌어올려 안력을 돋운 상태였다. 현호가 혀를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흐릿하던 어둠 속의 통로가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형식은 본능적으로 근처를 살폈다. 이내 자신이 나올 때와 비슷한 입구와 굳게 박혀있는 쇠창살. 그리고 그 안의 공동을 바라본 순간, 형식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빠직!
“끄아아악, 끄아아아아악!”
공동에는 한 사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형식과 마찬가지로 알몸이었다. 그리고 알몸의 사내를 4명의 사람이 둘러싸, 각자 팔과 다리 하나씩을 잡은 채 있는 힘껏 뜯어 당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빠지지직!
피가 사방으로 튀겼다. 어찌나 힘이 강력한지, 살이 쭉 늘어지다 못해 찢어져 내부의 속살을 노출한다. 벌건 근육도 여지없이 찢어지고, 하얀 뼈도 사정없이 떼어졌다. 종래에는, 사내는 사지가 잘린 모습으로 배를 푸들푸들 떨었다. 더 이상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사이 좋게 사지를 나누어 먹은 놈들은, 아직 부족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배를 갈랐다. 그리고 갈라진 부분으로 하나같이 머리를 처박아 후루룩, 핏물과 장기를 들이마신다.
“아….”
형식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리를 들었는지 한창 심장을 우물거리던 여인이 언뜻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형식을 보는 순간 희번덕 눈빛을 빛냈다. 형식은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때였다.
“그러니까 보지 말라고 했잖아.”
얼른 다가온 현호가 형식의 목을 휘어 감았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강제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저, 저건…. 뭐, 뭐….”
“필요가 없어진 놈이야. 안 그래도 수컷은 쓸모가 없는데, 효용이 다하면 결국 먹이 행이지.”
“뭐, 뭐라고? 너 지금 그게 할 말…!”
“어이, 어이! 진정해! 큰소리는 내지마!”
형식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멱살이라도 잡으려는 듯 손을 휘저었으나 하릴없이 허공만 젓는다. 어느새 현호는 두어 걸음 물러난 상태였다. 그리고 긴 한숨을 흘린 현호가 으쓱 어깨를 들먹였다.
“너무 화내지는 마. 여기서는 나도 어쩔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니까. 사실 너 하나 데려온 것도 엄청 힘들었다고.”
막 주먹을 꽂으려는 형식의 손이 멈칫했다. 현호는 빙그레 웃으며 그런 형식을 잡아 끌었다.
“가자.”
“젠장! 자꾸만 어디를 가자는 거야! 지금 여기가 어딘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나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말이다!”
“이해해. 하지만 일단 가자. 가면 알게 된다. 어차피 거의 도착했다.”
“주현호!”
“조용히 해. 방금 놈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그때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른단 말이야.”
“…….”
그 말에 형식은 입을 다물었다. 아까 사지가 찢기며 비참하게 울부짖던 사내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차라리 죽으면 곱게 죽었지, 그렇게 되기는 죽기보다 싫다.
잠시 후, 현호가 다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형식은 멍하니 서 있다가 홀린듯한 기분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다는 현호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약 10분 정도를 추가로 걸었을 무렵 또 하나의 입구가 보였고, 그 안으로 들어간 현호가 번쩍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다른 곳은 여전히 어두컴컴했으나 현호가 들어간 입구는 약간 탁한 빛이 비친다는 정도일까.
“왕의 굴에 온 것을 환영하마.”
이윽고 형식이 따라 들어가자 현호가 두 팔을 번쩍 들며 맞이해주었다.
“왕의…? 굴…?”
망연한 반문. 하지만 현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씩 웃으며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을 뿐. 형식은 현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더러운 머리칼이었다. 다음으로 까뒤집힌 눈이 보였다.
형식은 설마 설마 하면서도 더욱 머리를 젖혔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무언가가.
아니, 무언가가 아니다. 형식과 똑같이 발가벗겨진 여인들이었다.
천장에는, 사지가 묶인 여인들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 작품 후기 ============================
이번 회에 눈살을 찌푸리신 분이 있다면, 다음 회 초반 부분은 필히 스킵 하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오늘 내용보다 몇 배는 더 불쾌하실 겁니다. * 문양으로 시점을 변경할 테니, 그 이후부터 보시면 됩니다.
PS. 현호와 형식이라는 인물을 간단히 기억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