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06
00605 커다란 줄기는 변하지 않는다. …않을까? =========================================================================
“잠시만요.”
그때였다.
의아한 기분이 채 가시지도 않은 찰나, 한소영이 재빠르게 형의 말을 제지했다.
한소영의 낯은 마치 얼음처럼 딱딱히 굳어있었다. 그 태도를 보고 나서야 나는 왜 도중에 말을 끊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서북 동맹.
서부와 북부와 동맹을 맺었다.
처음에는 한창 공략하는 와중 무슨 동맹이냐는, 뜬금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라도, 동맹이라는 말이 갖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무엇보다 지금, 듣는 귀가 많다.
만일 열에 하나 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이 어떤 식으로든 밖으로 유출된다면, 차후 결코 좋은 영향을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소문은 와전되는 법이니까 말이다.
“방금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역시나.
내 생각이 맞는다는 듯, 한소영이 바로 일대일 대화를 요청했다. 형은 상관없다는 양 머리를 끄덕여 수긍했고, 결국 나를 비롯한 다른 사용자들은 하릴없이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은 공사를 구분해야 할 자리였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오늘 이 천막에서 들은 이야기는 철저하게 비밀을 엄수하셔야 할 거예요. 그 어떤 이야기라도요.”
한소영은 ‘그 어떤’ 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경고를 잊지 않았다.
나는 천막을 나서기 전 형에게 슬쩍 눈짓을 보냈다. 한소영과 이야기가 끝나면 내가 머무는 천막으로 와달라는 신호였다.
형은 환한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
형이 천막으로 찾아온 건, 점심은커녕 저녁 시간도 훌쩍 넘겼을 때였다.
“아, 수현아~. 형 힘들어 죽겠다~. 이스탄텔 로우 로드, 정말로 깐깐한…. 어, 어? 수현아?”
형은 들어오자마자 힘껏 기지개를 피며 앓는 소리를 내었지만, 나는 곧장 어깨를 부여잡고 강제로 의자에 앉혔다. 형이 한껏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기다리느라 지쳐 죽는 줄 알았어. 자, 이제 말해. 어서 말해봐.”
채근하듯이 말하자 형이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한없이 불쌍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사랑하는 동생아. 형 조금만 쉬면 안될까? 조금 전까지 이스탄텔 로우 로드한테 죽을 만큼 시달렸다고.”
“알았으니까 말해. 말하면서 쉬면 되겠네.”
“제발…. 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해야 하는 내 입장도 생각해주려무나.”
“그래서 말 안 하겠다고? 정말로 안 할 거야?”
나는 형을 한껏 노려보며 말했다. 이 다음에 준비된 말은 ‘그래. 그러면 마음대로 해.’였다. 어조는 매우 뾰족하게.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형은 체념한 얼굴로 머리를 떨구었다. 그리고 간이 탁자에 비치된 음료를 들어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폭 한숨을 내쉰다.
“쩝….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야 어쩔 수 없지. 그래, 무에 그렇게 궁금한데?”
“당연히 전부 다 궁금하지. 도대체 우리가 공략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이효을 걔는 또 뭐했고?”
“아차, 그러고 보니 이효을이 전해달라고 하더라. 내 탓 아니니까 내 욕하지 마! 라고.”
“…….”
…왠지 머릿속에서 이효을의 음성이 자동 재생되는 것 같아,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윽고 한 차례 쓰게 웃은 형은, 천천히 턱을 어루만지며 끄덕끄덕 머리를 주억였다.
“뭐, 좋아. 어쨌든 너한테는 따로 얘기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어.”
“조건? 입 조심하라는 거?”
“아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르든 늦든 밝혀질 일일 테니까. 그냥 내가 말하는 도중에 툭툭 끼어들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누구처럼 말이야.”
“…응?”
뭔가 상당히 이색적인 조건이라는 생각에 나는 서너 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형은 계속해서 턱을 매만지다가(하도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턱이 아픈 모양이다.), 돌연 질렸다는 얼굴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갑자기 형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심했어?”
“어. 매우, 굉장히 심했어. 두세 문장 말할 때마다 꼬치꼬치 캐묻는데…. 무슨 말을 못할 정도야. 그 사람 원래 그런 성격이니?”
형은 강조에 강조를 거듭했다.
그러다 문득 내 눈치를 살피더니 한두 번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흐흠. 아무튼…. 그거 하나만 약속해주면 지금 바로 말해주도록 하마. 네가 원하는 대로 처음부터, 전부 다 말이야.”
말인즉 가만히 듣기만 하라는 소린데…. 궁금한 게 생기면 끝나고 몰아서 질문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중간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구두로 약속했고, 형은 그제야 그간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형의 말을 경청했다.
이야기의 첫 시작은, 북 대륙의 구조에 관한 원론적인 내용이었다.
북 대륙은 총 5개의 부(部)로 구분할 수 있다.
중앙, 동부, 서부, 남부, 북부.
그리고 3년 전, 그러니까 내가 갓 2회 차를 시작했을 때.
그때는 중앙의 황금 사자 클랜을 기준으로 서부와 북부가 우호 관계를 맺은 상태였고, 그들과 갈등 관계에 있던 동부와 남부 또한 서로간 암묵적인 우호 관계를 형성했다…. 아니, 잠시만.
“형. 이거 나도 아는….”
“약속했지?”
…젠장.
아무튼, 그러던 어느 날.
서로 미묘한, 아니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갈등하던 북 대륙에 커다란 지각 변동이 일으킬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1차 강철 산맥 공략이었다.
1차 강철 산맥 공략을 주도한 황금 사자는, 자신들과 우호 관계에 있던 서부와 북부를 위주로 원정대를 편성했다. 편성 과정에서 동부와 남부는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그러나 공략은 실패라는 말이 부족하다 생각될 정도로 처참하게 끝나버리고야 말았다.
10강 중 7명이 참가했으며, 결과적으로 전원이 사망했다.
처음 출발할 때의 원정대 규모는 5000명을 웃도는 수준이었으나, 생환한 이는 10%도 되지 않았다.
북 대륙의 실 전력을 담당하던 4700명의 정예 사용자들이(2년 차 ~ 6년 차), 단 한 번의 공략에 떼 몰살을 당한 것이다.
심지어는 클랜 자체가 아예 깡그리 몰살당한 사례도 있었다.
그 당시 피해는, ‘북 대륙 수준이 몇 년은 퇴보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히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고는 해도, 남은 이들은 고스란히 후 폭풍을 맞아야만 했다.
각 부를 주름잡던 클랜들이 버티지 못하고 하나하나 무너지는 것을 기점으로, 힘의 저울추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강철 산맥 공략 전후로, 중앙, 서부, 북부와 동부, 남부의 입장이 반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허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 서 대륙과 부랑자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연합군이 북 대륙을 침공해온 것이다.
북부 소 도시 뮬이 기습당한 것을 시작으로, 헤일로, 베스, 도로시 등의 서부 도시들이 깡그리 점령당했다. 종래에는 바바라까지 함락당하는 치욕까지 겪어야만 했다. 말 그대로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
결국 간신히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북 대륙은 또다시 의도치 않은 희생을 치르고야 말았다.
이 사건으로 서부와 북부가 더욱 힘들어진 건 자명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휘청휘청하던 와중이었는데, 아예 도시가 박살 날 정도의 타격을 추가로 입어버렸으니까.
그나마 전 도시가 멸망한 서부보다는, 한 도시만 멸망한 북부가 양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동부 또한 바바라를 탈환하는데 만만찮은 희생을 치르기는 했지만, 앞선 두 부와는 상황이 다르다. 적어도 자신들의 기반은 건재한 상태였다.
또한 서 대륙의 주력을 격파했다는 명성과, 북 대륙의 상징인 바바라를 되찾았다는, 사용자들에게 어필 가능한 상징성을 획득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남부는 애당초 거의 비다시피 한 서부 도시를 되찾는 역할을 맡았으니 피해가 거의 없는 편이었고.
그렇게 각 부의 상황이 각양각색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추가로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중앙 관리 기구가 출범한 이후, 이효을은 근 2년 동안 딱 하나에 초점을 맞췄다. 그동안 북 대륙에 누적된 피해를 치료하고, 퇴보한 수준을 예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으로.
거두절미하고 말해서,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전쟁 이후 신규 사용자들이 폭증하는 베이비 붐(Baby Boom) 사태가 일어났고, 중앙 관리 기구의 지원 아래 복구 작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새로운 강자들 또한 속속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순환 과정은 그간 북 대륙이 입었던 상처를 자연스럽게 치료해주었고, 어느 순간 예전 이상의 전력을 갖추게 만들어주었다.
그렇지마는.
좋게 보면, 딱 거기까지였다.
북 대륙 전체를 놓고 봤을 때는 확실히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가 아닌, 부를 구분해서 생각해보면 문제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각 부가 가진 힘의 균형이 문제였다.
정말 냉정하게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아무리 이효을이 중앙 관리 기구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려 애썼다고 해도, 각 부가 시작하는 출발선이 다른 이상 ‘차이’는 날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서부와 북부가 도시를 재건하고 새로운 사용자들이 자리잡게 만드는데 2년이라는 시간을 쏟았다면, 동부와 남부는 원래 가지고 있던 힘을 불리는데 사용했으니까.
그러면, 만약 몇 년이라는 시간을 더 주었다면, 언젠가는 서부와 북부도 예전의 성세를 되찾을 수 있었을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도시가 발전을 하려면 사냥을 통한 안정화나 유적 발굴 등, 실적을 쌓을 수 있는 자원을 필수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러나 북 대륙이 가지고 있는 자원은 절대로 무한정하지 않다. 엄연히 일정한 한도나 한계가 있으며, 자원이 떨어진 도시는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법이다.(이 말을 들을 때 조금 뜨끔하기는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 대륙이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 사용자들은 시시각각 늘어만 가는데, 자원은 말라가는 상황.
그렇게 일종의 포화 상태에 다다른 이상, 아무리 시간을 할애해봤자 도시는 발전하지 않는다.
잘해봤자 현상 유지, 아니면 고착화 현상만 심해질 뿐.
결국 거기서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새로운 대륙을 개척하는 것.
그래서 이효을이 적절한 시기를 조절해 2차 강철 산맥 공략 계획을 선포한 것이다.
사용자가, 클랜이, 아니 북 대륙이 오매불망 기다려온 강철 산맥 공략.
그러나 기다려왔다고 해서, 누구나 다 참가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중앙 관리 기구는 강철 산맥 공략 참가 자격으로 3가지 조건을 걸었다.
1. 0, 1년 차는 참가 불가.
2. 클랜 단위로 선발.
3. 동, 서, 남, 북 지역별 원정대 창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미 1차 공략 때 실행된 조건이었고, 그때의 실패를 거울삼아 새로 보완한 조건이 바로 세 번째였다.
사실 선발이 거의 확정된 소수의 대형 클랜들을 제외하고, 다른 소형 중형 클랜들은 미리미리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철 산맥을 공략하겠다는 사안은 이미 몇 달 전부터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었고, 그에 따라 참가를 원하는 클랜은 일찌감치 문을 활짝 열어 사용자들을 모으는 중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클랜 단위로 선발하겠다고는 했지만, 그게 모든 클랜이 선발된다는 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여기서, 클랜과 사용자간의 관계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강철 산맥 공략 참가를 원하는 사용자들 또한 적지 않았고, 참가하려면 클랜에 소속된 상태여야만 한다.
마침 기를 쓰고 사용자들을 모으려는 클랜이 부지기수로 생겨났으니, 사용자 입장에서는 나름 가능성 높겠다 싶은 곳에 응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바보가 아니다.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하고는 싶지만, 그보다 우선시하는 건 자기 자신의 안전. 즉 목숨이다. 공략 성공 시 주어지는 장밋빛 미래는, 응당 살아있어야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강철 산맥의 악명은, 그 지독하다는 용이 잠든 산맥조차도 몇 수는 접고 들어갈 정도였다. 황금 사자가 주도했던, 그 당시 나름 정예들만 모인 1차 원정대가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가?
강철 산맥 공략에 참가하고 싶다.
그러나 내 목숨은 소중하다.
이 두 명제를 놓고 저울질하던 사용자는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간단하다.
포기가 아닌 참가를 결정한 이상, 가장 자신의 안전을 잘 지켜줄 수 있는 클랜을 찾아 1차적으로 문을 두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클랜들은 서부와 북부가 아닌, 동부와 남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해있는 상태였고.
바로 이 시점부터.
그러니까 차후 3번째 조건을 공개했을 때부터, 북부의 상황이 상당히 애매해지기 시작했다.
“사용자들이 클랜을 평가할 때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지.”
오랫동안 이야기를 해서 그런 걸까.
잠시 말을 멈춘 형은 남은 음료를 전부 들이킨다. 그리고 바로 말을 잇는다.
“어느 유명한 사용자가 있는지, 자금력 및 지원은 어떤지, 실적은 어느 정도인지, 클랜 랭크가 어떻게 되는지 등등….”
그 모든 기준을 아울러 ‘명성’이라고 정의해보면, 북부로서는 사용자들의 발길을 끌어당길 만한 명성 높은 클랜이 전무한 상태였다.
확실히 형의 말대로였다.
동부에는 고려 클랜을 비롯한 여러 전통 있는 클랜들이 산재해있다. 전쟁에서 획득한 명성과 상징성을 십분 활용해 사용자들을 꾸준히 모집했고, 이후 고려 클랜은 암묵적으로 동부의 패자로 떠올랐다.
남부 또한 만만찮다. 앞서 형이 열거한 여러 사건을 겪는 동안, 가장 전력을 잘 보존한 지역이 바로 남부였다.
꾸준히 세를 확장하며 동부와 마찬가지로 힘을 불렸고, 그러한 과정에서 이스탄텔 로우라는 클랜이(내가 약간 도와준 것도 있지만.)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뿐일까? 우리 머셔너리 클랜 또한 온갖 유적을 쓸어 담으며 클랜 역사상 최초로 S랭크를 달성했고, 난공불락이라 여기던 용이 잠든 산맥까지 보란 듯이 공략했다.
“하지만 북부는?”
갑작스러운 형의 질문에 나는 침묵을 지켰다. 왜냐하면 북부에서 딱히 내세울만한 게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형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말한 대로, 북부는 꽤나 애매모호한 상황에 처하고야 말았다. 차라리 서부처럼 애당초 전력 외 판정을 받으면 속이라도 시원할까. 그러나 서부처럼 모조리, 쫄딱 망한 수준 까지는 아니었던 터라, 상대적으로 빠르게 회복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수준이다.
오랜 전통을 가진 동부처럼, 두터운 사용자층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었다.
남부처럼 실적을 우후죽순으로 쌓거나, 10강의 태반이 소속돼있는 화려한 명성을 날리는 클랜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쟁 이후 새로 부임한 대표 클랜들은 실적도 없고, 명성도 없다. 그저 현상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했을 뿐.
예전에는 북부에도 북녘, 스텔라, 멸화랑 등, 명망 높은 클랜들이 다수 포진해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영광에 불과하며, 지금은 사그라진 기억의 잔재일 뿐이다.
설령 어찌어찌 북부 원정대를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3년 전 1차 원정대보다 수준이 나을 거라는 보장이 없을 정도였다.
어쨌든 수요는 충분한 만큼 외부 사용자 영입을 통해 수준을 높이려는 움직임을 꾀했을 수도 있지만, 이미 동부와 남부에서 한 번씩 거르고 남은 이들임을 감안한다면 큰 상승폭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 마디로 북부는 서부보다는 낫지만 동부나 남부보다는 떨어지는, 딱 원정대를 구성할만한 커트라인에 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아예 참가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쉽다는 감정은 둘째치고서 라도, 서부처럼 합당한 명분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서 물러나버리면, 차후 북부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발전 가능성이 사라진 지역에 사용자들이 남아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게 북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커다란 딜레마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대표 클랜을 딱지 치기로 얻은 게 아니라면, 아마 북부를 관리하는 사용자들도 이런 상황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억지 춘향 격이라고는 해도, 자멸할 생각이 없다면 참가는 필수적인 일.
그리하여 참가를 결정하기는 했지만, 필연적으로 총 사령관 자리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형이 공찬호에게 들은 바로는, 북부는 총 사령관의 자리를 두고 매우 심한 갑론을박을 벌였다고 한다.
서로 하겠다고 가 아닌, 서로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원래는 일반 도시 대표 클랜이 맡는 게 정석이지만, 꼭 그래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남부 원정대만 봐도 그렇다. 칸의 대표 클랜인 푸른 늑대가 스스로 후미에 서기를 자청하고, 이스탄텔 로우에 권한을 이양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남부와 북부 사이 커다란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현재 처한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
한소영은 자타가 인정하는 사용자였고 그만한 명성도 있었다. 푸른 늑대가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이스탄텔 로우라는 훌륭한 후임자가 있다.
그러나 북부는 애당초 한소영 정도의 사용자가 없거니와(나는 여기서 또 뜨끔해야만 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북부에 적잖은 영향력을 끼칠 너도밤나무 클랜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누구도 맡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총 사령관이라는 직책은 그만큼 막중한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자리였으니까.
공략만 성공하면 그 누구보다 달콤한 과실을 맛볼 수 있는 자리이기는 했지만, 실패 시 그만한 반대급부도 각오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게 바로 공찬호가 총 사령관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공찬호는 어느 정도 명성이 있기는 했지만, 총 사령관을 맡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표 클랜들이 ‘나는 총 사령관 싫다.’, 다른 클랜들도 ‘나도 총 사령관 싫다.’고 하는데 별수가 있겠는가? 순번이 돌아가는 족족 거절당한 탓에, 우선 순위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공찬호한테도 제의가 들어간 것이다.
솔직히 공찬호가 무슨 생각으로 총 사령관 제안을 덥석 수락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탁 까놓고 말해서, 현재 ‘총 사령관’ 공찬호는 얼굴 마담, 혹은 버릴 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총 사령관이 정해졌을 무렵.
그 시점에서 하나의 변수가 추가로 생겼다.
바로 사용자 주호의 입안으로 계획된, 화계 공략 안건이 발표된 것이다.
화계 공략 계획.
그 계획은 딜레마에 빠진 북부 원정대를 구원해줄 수 있는 최고의 변수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적어도 화계 공략 계획이 시행된 지역은 한층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을 테니까. 상대적으로 수준이 달리는 북부 원정대로서는 동아줄 같은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 발표 후 이어진 동부의 움직임은 북부의 기대를 곧장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조성호가 동부 원정대가 제 1전력이라는 명분을 들어, 첫 번째로 돌입할 기회를 냉큼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북부로서는 어이가 가출할만한 상황이었다.
동부와 북부의 원정대 수준은 누가 봐도 명백한 차이가 있다. 물론 누가 꼭 첫 번째로 가야 한다는 법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북부는 도의상 자신들이 첫 번째로 돌입하기를 원했다.
그러할진대, 동부는 스스로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얌체 같은 행동을 보였다.
차라리 동부가 화계 공략이 시행된 거리를 포함시키지 않고 그만큼 추가로 진군했다면, 그랬다면 최소한 이해라도 했을 것이다. 적어도 서로 동등하게 최선을 다하자는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동부는 그러지 않았다. 처음 돌입 때부터 거리를 계산해 10일만에, 정확히는 7일치 거리에서 진군을 멈추고 공략을 완료했다는 보고를 보냈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피해도 습격도 입지 않았다.
기실 똑같이 하려고 했던 북부 입장에서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더욱 속이 터질 것이다.
하기야 나도 동부를 곱게 생각하지는 않는데, 북부 입장에서는 오죽할까.
“…….”
문득, 어쩌면 한소영이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 남부 원정대의 실제 진군 거리는 동부 원정대와 비슷하지만, 시일은 4일이 추가로 걸렸다.
그런데 나중에 듣기로는, 한소영은 공략 완료를 보고할 때 꽤나 상세한 자료를 덧붙였다고 한다. 그동안 모은 사체나, 괴물들의 특성. 심지어 구덩이 속 전투를 영상으로 찍어 보여주기까지.
그때는 그냥저냥 참 열심히 하시는구나 생각했는데, 지금 말을 들어보니 아마 서로간의 오해를 피하려고 그러셨던 게 아닐까.
“아무튼 그 상황에서…. 서부와 북부. 이 두 지역이 서로의 이해 관계가 일치한 거지. 그래서 서북 동맹이 탄생한 거고.”
이야기를 하느라 지쳤는지 형이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서북 동맹.
이제야 그 의미가 확연히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해 관계의 일치.
확실히 형의 말대로였다.
서부와 손을 잡는다는 선택은, 공략 강행이 결정된 이상 북부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막강한 전력으로 평가 받는 해밀 클랜. 또한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지휘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형의 존재는 북부 입장에서 가뭄의 단비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공략을 도와준다면, 차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공유해주겠다는 매력적인 제안을 건넨 것이다.
서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지금까지 강철 산맥 공략은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애초 정식 공략에 끼지 못한 채, 가만히 구경만 하는 서부는 나름대로 아쉬운 감정이 없잖아 있었을 터.
어차피 지원 임무도 맡았겠다, 명분상으로 문제될 것은 없다.
한편으로는 이대로 콩고물이 떨어지는걸 기다리기보다는, 설령 절반에 불과할지라도 떡 그 자체를 먹고 싶었을 것이다. 거기서 북부가 총 사령관은 공찬호로 둔 채 지휘 권한까지 일체 넘겨주겠다고 하니, 형으로서는 더 이상 거부할 이유는 없었을 테고.
“후. 이로써 어느 정도 이야기는 마쳤는데….”
이내 상당히 지쳐 보이는 얼굴로 침대에 멋들어지게 드러눕는 형을 보며, 나는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확실히 서북 동맹의 의미도 이해했고, 그럴만한 상황이라는 것도 이해했다. 그냥 복잡한 이해 관계가 얼기설기 얽혀있을 뿐,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제 궁금증 좀 풀렸어?”
…그리고 무엇보다, 돌연 형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주 예전에.
‘수현아. 너 정말 서부로 올 생각 없니?’
형은 나보고 서부로 와달라고 반 장난 식으로 부탁을 한 적이 있다.
그때는 그 말을 흘려 들었다. 그저 나를 안전이 보장된 원정대에 넣으려는 의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형 또한 한 명의 사용자로써 직접 강철 산맥을 공략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머셔너리 클랜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것이었으리라.
============================ 작품 후기 ============================
이전 회의 해답편입니다.
나름 독자 분들의 이해를 도우려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려 노력했는데, 너무 힘이 들어가지 않았나 걱정이네요. 그래도 최대한 노력했으니 너무 갑갑하다 여기지 마시고 어여삐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용을 읽고 궁금하시거나 의문점이 생기신다면, 그리고 꼭 답변을 듣고 싶으시다면 쪽지를 보내주세요. 주말을 이용해 밀린 쪽지를 전부 답신할 예정이니, 성심껏 답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어떻게든 자정에 올리려고 했는데, 퇴고 중에 깜빡 졸았네요. 코멘트는 내일 아침에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