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80
00679 4. 약속된 이별. =========================================================================
황급히 달려나간 안현이 바라본 천막 밖은 이미 아수라장이 돼 있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누군가를 빙 둘러싼 채 웅성거리고 있었고, 중앙에서는 두 여인의 살벌한 고성이 한창 오고 가는 중이었다.
“씨팔, 장난해? 존나게 기다리게 해놓고서는, 그딴 미적지근한 대답이 어디 있어!”
한껏 날 선 목소리로 고함치는 이유정의 음성이 인근을 왕왕 울렸다.
“어쩌라고! 그럼 나보고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데!”
이어서 억울함이 깃든 어조로 맞고함 치는 비비앙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구경하는 사람을 헤집으며 안으로 들어간 안현은, 핏발 선 눈으로 양손을 미친 듯이 흔들어 젖히는 이유정과 멱살이 잡힌 채 두 눈을 치뜬 비비앙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여인이 서로를 노려보는 와중 진수현은 입을 헤 벌린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완전히 얼이 빠져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리고 백한결은 한쪽에서 고개만 푹 숙인 채 눈물만 글썽거리고 있었다.
“지금 결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한두 명인 줄 알아? 그런데 그게 말이야? 다시 가서 알아와! 아니, 그냥 내놔. 그 계약서인지 뭔지 내놔! 내가 가서 알아낼 테니까!”
이유정이 잡아챈 멱살을 바짝 끌어당기며 으르렁거렸다.
“네 마음대로 해!”
비비앙도 지지 않고 손에 쥔 계약서를 후리듯이 내던졌다. 반으로 접힌 기록이 이유정의 얼굴에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부딪쳤다가 너울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탓일까. 잠깐 가려졌다가 도로 드러난 이유정의 눈동자가 분노의 불꽃이 튀겼다.
고성은 시시각각 높아지기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누구라도 붙잡고 전후 사정을 묻고 싶었지만, 안현은 그러지 못했다. 두 여인 사이로 조금 더 있으면 주먹이 오고 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기운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한껏 독 오른 낯짝이 어찌나 살기등등한지 그 누구도 감히 나서서 말리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에 고연주나 신재룡 등이 없는 이상 자신이라도 나서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안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마음 한 켠에 물밀듯 차오르는 불안을 억누르며 이유정을 잡아 끌었다. 마침 이유정의 손은 서서히 올라가고 있던 중이었다.
“자자. 우선 멱살부터 놓고. 이게 무슨 짓이야. 왜 비비앙한테 이래. 얘한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나 이유정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저 잠시 안현을 흘끗 흘기고는 무 감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을 뿐.
“손 놔. 껴들지 말고 꺼져.”
안현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한숨을 푹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을 그딴 식으로 하냐. 아무튼 그만 좀 하라고.”
“놔. 놓으라고 했어.”
“적당히 하자니까.”
“놔.”
“이유정.”
“놔…! 악?”
그 순간이었다.
“야.”
자그마한 음성. 동시에 햇빛을 가리는 어두운 그림자가 크게 드리워진 찰나, 이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눈을 형형히 빛내는 안현을 바라본 순간, 더는 아까와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얼굴을 찡그린 것도 노려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층 우묵해진 안현의 눈과 마주하자 무언가 항거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더불어 손목에서 느껴지는 심한 격통까지.
그래도 잡고 있는 비비앙의 멱살을 놓지 않자 안현은 기어코 이유정의 손목을 강하게 비틀었다. 그리고 되레 이유정의 옷깃을 잡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이유정은 채 비명을 지를 생각도 못한 채 안현과 가까이 마주하고 말았다. 속으로는 상당히 놀란 상태이기도 했다. 이유정이 기억하기로는 안현이 진정으로 화내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말로 할 때 좀 쳐들어라. 옛날 성깔 쳐 나오게 만들지 말고.”
낮디 낮은 음성이 끓는 듯이 흘러나온다. 이유정은 반사적으로 벗어나려고 애썼으나 작정한 안현에게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설령 초반에는 안현보다 조금 앞섰을지 몰라도, 이유정은 어느 순간부터 오랫동안 정체돼있는 상태였다. 그에 반해 안현은 이번 강철 산맥을 경험하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겪었다. 이미 둘 사이로는 비슷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지금 너만 힘드냐? 왜 애꿎은 비비앙한테 화풀이야.”
“…….”
“힘들면 혼자 힘들어해. 나 궁상 떤다고 여기저기 광고하지 말고.”
“…….”
눈을 치뜬 안현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자 이유정이 아랫입술을 세게 씹었다. 허나 그렇게나 분한 걸까. 낯이 서럽다는 듯이 일그러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허나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반박할 수 없는 듯 결국에는 서서히 시선을 내리깔고 말았다.
안현도 약간 지나쳤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잡은 옷깃을 놓아주었다. 이유정은 잠깐 비틀거렸다가 무너지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망연한 빛으로 주변에 모인 사람을 둘러보더니 결국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어허어어어엉….”
“유정 양? 이게 무슨 일입니까!”
공교롭게도 신재룡이 뒤늦게 달려와 무리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서럽게 우는 이유정과 씨근거리는 안현을 번갈아 보고는 차분히 이유정을 달래기 시작했다.
“오빠가…. 오빠가….”
“유정 양.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이윽고 정하연까지 달려와 이유정을 어르고 달래자 이유정은 부축 받으면서 천막으로 돌아갔다. 백한결은 곧바로 천막으로 따라 들어갔고, 진수현은 안현의 눈치를 살폈다가 주변에 모인 사람을 소리쳐 몰아냈다. 그제야 웅성거리던 주변에 가벼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유정은 계속해서 울었다. 가까운 천막에서 자꾸만 서러운 울음이 흘러나왔으나 누군가 수면 마법을 사용했는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동안 숨을 고르며 억지로 호흡을 가라앉힌 안현은 흘끗 아래를 응시했다. 입을 삐쭉 내밀고 있는 비비앙이 아까 던진 계약서를 주섬주섬 줍고 있었다.
안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비앙.”
“…왜?”
기운 빠진 음성이기는 했으나 비비앙도 어느 정도 평정은 되찾은 듯했다.
“어떻게…. 됐어?”
한순간 표정에 심한 갈등이 어렸으나 안현은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사실 이유정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했으나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 기대란 다름 아닌 김수현과 비비앙이 맺은 계약서였다. 예전 부랑자의 습격으로 김수현이 뮬에서 실종됐을 때 계약서를 활용해 김수현의 생존을 확인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해 김수현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보려 한 것이고.
“모르겠데.”
그러나 비비앙의 기운 없는 대답은 안현의 초조한 기대와는 한참이나 어긋난 소리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겠다니?”
“말 그대로야. 그리고 나도 잘 몰라. 모든 신전을 돌아봤는데도 다 똑같은 말을 하는걸 어떡해.”
“그러면 형이 정말 죽었다는 소리야?”
“아니. 그걸 모르겠다고. 그쪽에서 한 말은 이거 하나야. 이 계약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만 효력이 발동한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을 시 발동 여부는 아직 확인해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 계약서로 김수현의 생사여부를 가늠하기란 불가능하다.”
안현을 보고 말하던 비비앙이 돌연 훌쩍 코를 들이켰다. 삐쭉 내민 입이 부르르 떨린다. 이유정과 다투느라 봉두난발이 된 머리카락은 그렇다 치더라도, 비비앙도 돌아오는 내내 울었는지 눈도 상당히 부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부터 목소리도 살짝 젖은 상태였다.
“나쁜 년….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언가 더 말하려던 비비앙은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며 울먹거렸다. 그리고 더는 말하기 싫다는 듯 몸을 돌려 어딘가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한다.
그 힘없는 모습에 안현은 불러 세울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현재 안현의 속은 그 정도로 매우 복잡하고도 미묘한 상태였다. 차라리 죽었다고 말해주면 실컷 슬퍼하고 울기라도 하지. 며칠을 기다린 대답은 너무나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깊은 한숨을 흘린 안현이 비틀거리듯이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거의 입구에 다다랐을 즈음.
“어떻게….”
“그래서….”
문득 천막 왼쪽에서 두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한 명은 임한나.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고연주의 목소리였다. 안현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하, 하지만 언니…. 비, 비비앙이 계약이 파기됐다고 말했잖아요. 그렇다는 말은….”
계약 파기?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안현은 자연스레 청력을 돋우며 들려오는 말에 집중했다.
“비비앙 말로는 정말로 알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봤다고 하더라. 신전에서는 생사여부는 둘째치고서 라도, 적어도 이 세상에 수현씨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더라고. 그래야지 최소한 계약 파기가 가능하다면서.”
“그러면…. 거, 거의 사망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흑!”
“울지마. 아무튼 나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은 하는데. 비비앙이 워낙 강하게 부인하니까. 이 세상에만 없을 뿐이지, 다른 차원에서는 살아 있을 확률이 있다고 하더라.”
“어떡해…. 어떡해요….”
이윽고 임한나가 작게 흐느끼는 소리와 고연주가 말없이 토닥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후.
“이건…. 비밀로 하는 게 좋겠죠?”
조금은 진정했는지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래야지. 특히 아주버님한테는 더더욱. 그러고 보니 아주버님 상태는 어떠니?”
“악화일로에요. 처음처럼 미친 듯이 날뛰시지는 않는데, 요즘에는 수면 마법과 진정 마법을 달고 사실 정도에요.”
“…그 정도야?”
“그게 없으면 아예 주무시지를 못하니까요. 충격이 엄청 크신가 봐요. 그분이 그렇게 되실 줄 누가 알았겠어요. 사제 말로는 이미 몇 번이나 자살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거기까지였다.
그 순간 안현의 다리가 힘없이 풀렸고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내 말소리가 멈추고 누군가 급히 달려 나오는 기척을 느꼈지만, 안현은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그저 암담한 기분만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냥 이대로 기절했다가 언제고 김수현이 돌아오는 날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원래 저번 주 안에 외전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집안 사정이 겹치느라 진도가 늦어졌네요. 이 부분 독자 분들의 깊은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아마 2회 안에는 끝날 것 같네요.
작은 사촌 누나 결혼식은…. 잘 치렀습니다. 사실 결혼식 자체는 거의 보지 못했어요. 축의금 계산하고 찾아오신 하객 분들께 식권 지급하느라…. 하하. -_-a 조금 서운해도 다들 정신이 없었으니 그러려니 해야겠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부터는 다시 정상 연재를 시작하겠습니다. 🙂
PS. 고장난선풍기 님께서 새로운 팬 아트를 그려주셨습니다. 김수현, 한소영, 지옥 대공 등등 새로운 그림들은 보니 눈이 즐겁네요.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_(__)_ 제 뜰에 친히 올려주셨으니 독자 분들도 한 번 방문하셔서 구경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