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682
00681 4. 약속된 이별. =========================================================================
시간이 흘렀다.
막 게헨나와의 관계를 끝낸 직후 나는 몸을 일으켜 긴 숨을 흘렸다.
‘역시 민망하네.’
몇 번을 생각해도 관계 시 게헨나는 굉장히 정열적인 반응을 보인다. 그에 맞추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경우가 많은데, 확실히 할 때는 좋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하고 나서 정열이 가라앉고 이성이 찾아올 즈음에는, 조금은 민망한 기분이 든다.
‘하기야 남다은 정도는 아니지만.’
잠시 쓴웃음을 지은 후 나는 시선을 내렸다. 한 차례 뜨거운 열풍이 지나간 아래는 게헨나가 물에 젖은 솜처럼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뇌쇄적인 나신에는 관계의 흔적이 여기저기 묻어 있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옅은 미소를 머금은 게 무척이나 만족한 표정이다.
살살 머리카락을 어루만져보았으나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는다. 잠이 든 건 아니고, 아마 관계 후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여태껏 계속 그래왔으니까.
그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나는 스르르 몸을 허물어 게헨나의 가슴 사이로 얌전히 얼굴을 묻었다.
곧 얼굴에 따뜻하면서 뭉클한 감촉이 느껴지는 동시에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도 느껴졌다. 한없이 안온하고 안락한 기분에 잠이 솔솔 오는걸 느꼈으나 억지로 참았다. 나는 마치 어린 아이라도 된 것처럼 게헨나의 젖가슴에 살짝살짝 얼굴을 비볐다.
시간은 조용하게 흘러갔다. 내가 어리광을 부리고 게헨나는 이따금 등을 토닥여주며 나를 보듬는 동안, 우리는 한 마디 입도 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날은 점점 깊어져 어느새 시야가 점차 어두워졌다. 흑승 구간에 밤이 찾아왔다.
이윽고 몸을 살짝 움직여 게헨나의 옆으로 굴러 나왔을 즈음.
“왜. 잠들 때까지 계속 응석부리지 않고. 언제나처럼 말이다.”
드디어 게헨나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마치 네가 웬일이냐는 어조 같아 나는 싱겁게 웃었다.
“그냥. 애기가 힘들까 봐.”
이번에는 게헨나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아이는 매우 기뻐하고 있느니라.”
기뻐하고 있다고?
“그걸 어떻게 알아?”
“느껴지니까.”
“……?”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아비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 아이 된 입장에서 어찌 기뻐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잔잔한 음성이 되묻듯이 말한다. 그리고 게헨나는 양손으로 배를 소중히 감쌌다.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런 게헨나를 보며 나는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도 며칠 전이라면 모를까. 지옥 구간 최상층인 등활 구간을 앞둔 상황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무언가 뼈가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헨나도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는지 얼굴이 살짝 굳어 있었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게헨나는 나를 보지 않는 방향으로 살며시 몸을 돌아누웠다. 돌연 초조한 기분에 애꿎은 손가락만 움직이다가, 나는 살그머니 게헨나의 등에 붙어 배를 쓸 듯이 어루만졌다. 게헨나는 편안한 신음을 흘릴 뿐 딱히 거부하는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배를 쓸듯이 어루만지다가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 게헨나.”
“응?”
정말 말해도 괜찮을까, 고민이 스쳤으나 간신히 용기 내어 말을 이었다.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서, 아버지에 관해서 물어보면…. 그때 어떻게 말해줄 거야?”
게헨나는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더욱 지면에 묻더니 한동안 고른 숨소리를 흘렸다.
“글쎄. 아마….”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왠지 모르게 조심스럽다 생각되는 게헨나의 음성이 귓가로 천천히 흘러들었다.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자는걸 좋아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어리광을 부리는 아비였다고 말하지 않을까.”
“…응?”
“또한 너를 임신시키자마자 도망치듯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간 아비라고도 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은 있었다고 말해두도록 하마. 비록 그 사정이 무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야. 그건 좀….”
정말 그렇게 말할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에 가볍게 항의를 할 찰나였다.
“그리고.”
“너무….”
“일견 겉보기에는 차가우나, 어미를 안아줄 때만큼은 애틋하게 해주는…. 속마음만큼은 따뜻한 사내였다고도 말해줄 생각이다.”
“…….”
그러나 게헨나의 말이 이어진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게헨나도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결국에는 또다시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나는 살며시 손을 뗀 후 게헨나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아누웠다. 별안간 뇌리로 오만 복잡한 생각이 스쳤다가 빠르게 사그라졌다. 무어라 말을 하고는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갑자기 가슴 한 켠이 아릿하게 아려올 뿐.
‘그러고 보니 다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문득.
‘가기 싫다.’
라고 생각한 순간, 스스로 놀라버렸다. 방금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는 형도 한소영도 그리고 클랜원들의 생각이 주를 이루었다. 내가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아니. 차고도 넘친다. 지금껏 그 목적이 흔들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 그런 내가 처음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비단 게헨나뿐만이 아닌, 내 핏줄을 품은, 나로 인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됐다는 사실은 상상 이상으로 나를 어마어마하게 짓누른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이제껏 내가 살아온 근간을 흔들어버릴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다.
“…….”
나는 까닭 없이 머리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게헨나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돌아누워 있었다.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은데. 그리고 시선을 느꼈다면 한 번쯤은 돌아봐줄 법도 한데. 끝끝내 게헨나는 나를 돌아봐주지 않았다.
그렇게 네 번이나 머리를 돌렸다 되돌리기를 반복했을 때, 갑자기 무언가 견디기 힘들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결국 한 번 더 입을 열고 말았다. 지금껏 참고 참아왔던 말을 꺼내기 위해.
“게헨나.”
자는 걸까. 대답은커녕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꼭, 여기서 낳아야 하는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마침내 게헨나가 반응했다. 괜히 다급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 말이야. 꼭 여기서 키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무, 물론 너만 좋다면 말이지만.”
말을 하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내가 어딘가 모르게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이왕 말을 꺼냈으니 제대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흐응. 확실히.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러나 게헨나가 곧바로 화답한 순간 눈이 저절로 크게 떠졌다.
그러니까 괜찮다는 건가? 게헨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러면…!”
“허나,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무언가 부정하는 어조가 들려왔을 때, 나는 서서히 고조되던 기분이 도로 가라앉는걸 느꼈다.
“감당…. 할 수 있냐고?”
“그래. 그대와 나는 애초 다른 존재이지 않느냐. 그대와는 다르게 나는 그쪽 세상에서 거주하는 게 허락되지 않은 몸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간단하다. 그대와 나는 서로 갖는 무게가 다르다는 소리다.”
“너도 그때는 우리 세상에 소환됐잖아? 이번에도 같은 방식으로 가면 되는 거잖아?”
“억지를 부리는구나. 그대 정도라면 어떤 문제가 있을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그때도 그렇고, 설령 이번에도 소환해서 간다손 해도, 나는 그 세상에서 길게 머무를 수 없다. 결국에는 역 소환되는 과정을 거치고 자연스레 이 장소로 돌아올 뿐.”
“…….”
“물론 그때마다 또다시 소환 의식을 치를 수는 있겠지. 허나 방금 말했듯이, 일개 인간과 한 차원의 지배자가 갖는 무게는 다르다. 달라도 심히 다르다. 나를 한 번 소환하려면 실로 어마어마한 제물을 필요로 하는데…. 과연 그대나 나나, 계속 그 제물을 마련할 수 있을 지가 의문이구나.”
이렇게 그동안 주저하던 고민과 마주한 순간, 느닷없이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안 되는 건가….’
괜스레 물어봤다는 때늦은 후회가 찾아 들었다. 물론 게헨나의 말로 미루어보면 아주 경우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다. 듣기로는 얼마 전 쳐들어왔던 악마들도 가히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게헨나를 강제로 차원 이동 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뿐일까. 비단 악마들뿐만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도 1천 명이 넘는 인간이 희생됐다. 안솔의 기적이 있다고 한들 나한테는 매번 그 정도 제물을 준비할 여력은 없다.
“…그렇구나.”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
그러는 사이 어느새 어둠은 완연하게 내려와 주변을 물들였다. 동시에 갑자기 심한 피로가 전신을 엄습했다. 머릿속으로 이대로 자고 싶다는 생각만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야 게헨나의 등에서 시선을 떼고 완전히 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무거워지는 눈꺼풀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몸에 닿은 지면이 유난히 차갑다.
그때.
“그래도…. 그대의 억지가 과히 기분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구나. 오히려 고마운 기분이다.”
꿈결과도 같은 아련한 음성이 흐르듯이 들어온다. 이어서 몸을 움직이는 소리와 등에 꽂히는 따뜻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게헨나가 비로소 나를 돌아봐준 것이다.
그러나.
“…자느냐?”
나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게헨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자꾸만 떠지려는 눈을 간신히 감은 채로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왜냐하면….
“벌써 잠들었느냐….”
이대로 돌아봤다가는,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았기에.
*
다음날.
잠에서 깨어난 이후 나와 게헨나, 김한별, 베히모스 4명은 등활 구간으로 이동했다.
최상층에 도착했다고 해서 딱히 별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느 구간에서나 그랬듯이 등활 구간의 명물을 소개한 이후, 베히모스에게 일러 어탑을 이용한 귀환 준비를 하라 지시했다. 게헨나는 그렇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했다.
…아니. 사실은 딱 하나 크게 변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분위기였다. 언제나와 같은 똑같은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항상 방정맞게 입을 놀리던 베히모스는 오늘따라 유독 침묵을 지켰다. 명물 소개가 끝난 이후 김한별은 스스로 베히모스를 따라 사라졌다. 모두가 오늘은 뭔가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때부터는 게헨나도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등활 구간에서 의식을 치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마지막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이전처럼 정열적이지도, 그렇다고 서글프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게헨나는 간간이 멍한 눈빛을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그렇게 어설프기 그지없는 관계를 마친 후.
“이쯤이면 준비가 끝났겠구나. 어서 가도록 하자.”
몸을 추스르고 의연하게 일어서는 게헨나를 보며 나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물론 그 감정은 전적으로 나만이 느끼는 감정이다. 그리고 게헨나를 탓할 이유가 못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게헨나는 애초의 약속을 한치의 가감 없이 그대로 이행해주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나를 강제로 잡아두지 않고 곱게 보내주는 것에 감사해야 할 입장이다.
하지만, 왜일까.
나를 대하는 태도가 딱히 차가워진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저런 게헨나의 모습에 뜻 모를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걸까. 왜 게헨나가 매정하다고, 야속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왜, 도대체 왜….’
그때.
“이제 조금 알 것 같구나.”
끝없이 차오르는 의문에 망연한 기분을 느끼는 와중, 문득 게헨나의 음성이 나를 일깨웠다.
“옛말이라고 했던가? 그대가 말한 이별은 빠를수록 좋다는 말…. 처음 들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이어지는 말에 시선을 들어올린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는 어탑을.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새 등활 구간의 중앙에 도착한 것이다.
“음. 다들 기다리고 있군. 우리도 어서 가자.”
그러나 무어라 채 말할 틈도 없이 나는 게헨나의 손에 이끌려 어탑의 중앙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아. 오셨군요.”
“오빠. 오셨어요?”
게헨나의 말대로, 어탑 주변에는 무언가 커다란 자루를 짊어진 김한별과 베히모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못한 채 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준비는 모두 끝냈느냐?”
“예. 이제 발동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베히모스는 투구를 꾸벅 숙이며 응답하더니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말을 흐렸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투구를 긁적이는 베히모스를 보며 게헨나가 반문했다.
“아니. 문제라기보다는…. 그래도 이게 마지막인데…. 나름 작별이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무슨 말을 하는가 했더니. 되었다. 이별은 빠를수록 좋은 법이니까.”
“네?”
“가고 싶다는 이를 너무 오래 붙잡아두지 않았느냐. 이들도 한 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을 터…. 애초 약속한 것도 있으니 지키는 게 도리겠지. 아무튼 되었으니 발동 준비에 들어가자꾸나.”
그리고 게헨나는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대도 그러고 싶겠지?”
“…응.”
모종의 반발 심리였을까. 한 박자 늦기는 했지만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수긍했다. 그럼에도 게헨나는 여전히 미소 띤 낯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한 걸음 살짝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입을 열어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흘러나오는 주문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머릿속은 한층 복잡하게 변했다.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가야 한다는 생각과 조금 더 남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싸우고 있었다.
“허 참….”
그런 게헨나를 보며 탄식을 뱉은 베히모스는 이번에는 나를 보며 음성을 울렸다.
“저…. 그럼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그러나 나는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안 그래도 복잡했거니와 별로 말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그러자 베히모스는 어깨 갑주를 한 번 크게 들먹이더니 딱딱 이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쩝. 그러면 저라도 하겠습니다. 어쨌든 두 분께 여러모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부왕과 아가씨가 계시는 동안 정말 오랜만에 인간 시절의 감정을 느껴본 것 같네요.”
“잠시만요. 부왕…? 아니 아니. 맙소사. 인간 시절의 감정이라고요?”
“응? 자자. 우리 막판에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맙시다. 웃으면서 헤어져야죠.”
“그게 아니라…!”
그 순간이었다.
우웅!
김한별이 발칵 따지고 들려는 찰나, 갑작스레 웅혼한 소리가 귓전을 크게 울렸다. 이어서 차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마력의 흐름까지.
얼른 시선을 돌리자 한껏 집중한 채 주문을 영창하는 게헨나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온다. 풍성하게 흘러 넘치는 머리카락은 모조리 하늘로 치솟아 세차게 나부끼고 있었다.
우우우웅!
그러한 찰나, 고막에 거슬리는 마력 소리가 들려오는 동시, 어탑이 찬란한 붉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흔들거리는 대지의 흙 조각들이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치솟기 시작하고, 마지막으로 나와 김한별 그리고 게헨나의 몸도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른다.
쿠르르르르르르릉!
바로 이어서, 하늘이 갈라졌다. 그 사이로 칠흑과도 같은 타원형 구멍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 내가 지옥으로 들어오기 직전 봤던 구멍과 흡사한 모양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정말로 귀환이 가까워졌다는 소리였다.
확실히 존재 자체가 달라서 그런 걸까. 헬레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였다.
“아, 아?”
김한별이 불안한 비명을 지르며 나를 붙잡는다. 하지만 이전에도 확인한 광경인 만큼 별로 놀랍지는 않다.
아니. 놀랐다기 보다는, 내 눈은 마주 떠오르는 게헨나에게 아까부터 고정돼있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로 주문을 외우는 게헨나의 얼굴에.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절로 주먹을 움키고 말았다.
‘정말로 이대로 헤어지는 건가? 이대로 허무하게?’
처음에는 느릿하게 올라가던 속도는 이내 에스컬레이터를 탄 듯 점차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허나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한순간 마음속으로 무수한 생각과 심한 갈등이 교차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있고 싶어. 지금이라면 소환 의식을 멈출 수 있을지도 몰라.’
‘김한별을 먼저 보내는 방법도 있잖아.’
‘게헨나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홀 플레인이잖아?’
‘생각해보니 이름을 지어주지 못했다고 할까? 그래서 조금 더 남는다고 할까?’
그때였다.
“후….”
구멍에 거의 다다른 순간, 돌연 게헨나가 가는 숨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벌써 주문을 마친 건가?
“근 1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도저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을 즈음, 살며시 눈을 뜬 게헨나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그대와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아마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나 싶구나.”
“게, 게헨나.”
“어떻게, 그대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생각해보니 한 마디 정도라면 여유가 있을 것 같은데.”
“어….”
한 마디. 고작 한 마디였다.
“…없느냐?”
그러나 어느 순간, 게헨나의 낯에 서린 처연한 기색을 발견했을 때. 나는 갈등으로 점철된 마음이 한순간 백지장으로 변하는 현상을 경험했다. 시야가 하얗게 물들고 게헨나도 빛에 가려 희미해졌다.
허공에 떠오른 몸.
살을 스치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
귓전을 울리는 웅혼한 소리.
천천히 다가오는 게헨나.
그 모든 것들이 정신을 멍하게 만들고 있다.
“나를 구원해주고, 행복을 주어서 고맙다. 그대 덕분에 나도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
이제 왕이 태어나고 1 군단이 부활하면…. 나 또한 본연의 직책인 1 군단장으로 돌아가야겠지.”
1 군단?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미련인가.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구나.”
그때, 아주 잠깐 게헨나의 얼굴이 눈앞으로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아무튼 그대가 나한테 행복을 준 만큼, 그대도 어디서든 행복하길.”
그것은 정말이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입에서 묘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자 마침내 시야가 활짝 넓어졌다.
“그럼…. 이제 정말 마지막인가….”
이윽고 마지막이라는, 여전히 가라앉은 음성이 귓가로 속삭이듯이 흘러 들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자느냐?’
‘벌써 잠들었느냐….’
‘어떻게, 그대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없느냐?’
그 순간.
“게헨나, 잠깐ㅁ…!”
미처 말을 이을 틈도 없이 검은 구멍은 내 몸을 삼켜버렸다. 이내 배꼽이 훅 쏠리는 기분에 이어, 삽시간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까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을 내뻗고 말았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시선을 내린 순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면서도, 나는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서서히 닫혀가는 하늘 구멍 사이로 손을 흔들고 있는 베히모스와, 여전히 허공에 뜬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게헨나를.
============================ 작품 후기 ============================
확실히 여러 독자 분의 의견을 구하니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네요.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도 많아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