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702
00701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
눈을 뜨자 상앗빛 천장이 흐릿하게 보였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창문을 투과해 비스듬히 꺾여 들어오고 있다.
숨을 한 번 들이키자 찬 공기가 맡아졌다. 몽롱하던 머리가 확 깼으나 아직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현기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방의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이어서 살에 닿는 아늑하고 푹신푹신한 감촉까지.
나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일어난 장소가 집무실이라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어제 마르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냥 잠들어버린 건가. 잠깐 쉬려는 생각에 침대에 누운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아마 그대로 깊이 잠든 듯싶다. 아무래도 요즘 알게 모르게 피로감이 쌓였던 모양이다.
흘끗 시선을 돌리자 책상에 반듯이 놓여 있는 기록과 이지러진 연초 꽁초들이 보였다.
“…….”
아직은 이마가 띵하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몸을 일으키려는 생각에 이불 아래로 손을 넣은 찰나였다.
‘응?’
이불을 치우고 일어나려는 순간 손에 무언가 부드러운 감촉이 잡혔다. 자그맣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하다. 이불 속에 무언가 정체 모를 것이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 했다. 그 감촉이 하도 기분이 좋아, 그냥 멍한 채로 꼭꼭 찌르면서 계속 괴롭혔다.
“이잉….”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그대로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반사적으로 입을 더듬었으나 입은 깨어났을 때부터 꾹 닫혀 있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그머니 이불을 들쳤다. 그리고 이불 속에는….
“색…. 색….”
새근새근, 가쁜 숨을 흘리는 무언가가 내 가슴에 웅크리듯 누워 있었다. 나는 멍하니 아래를 응시했다.
아침 햇살을 반사하는 찬란한 은백색의 머리카락. 그 사이로 뾰족하게 돋아난 앙증맞은 귀. 아기처럼 뽀얗고 보들보들한 살결. 자그마하면서도 미끈한 곡선을 그리는 몸매는, 이 무언가가 약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여아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등에서 보이는, 온몸을 덮듯이 감싸는 13쌍의 날개까지.
거기까지 인지한 순간이었다.
“추….”
여아는 몸을 꼭 움츠리며 내 가슴에 고개를 더욱 묻었다. 그게 마치 얼른 이불을 내놓으라는 무언의 아우성 같았으나 나는 도로 덮어줄 생각도 못 했다. 그냥 갑자기 홀린 듯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빛나는 머리카락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러자 축 늘어져 있던 귀가 갑자기 쫑긋하게 세워졌다.
이윽고 부드러이 쓰다듬자, 기분이 좋은 걸까. 귀가 곧 팔락팔락 움직이기 시작했다. 휙 손을 떼면 축 늘어졌다가도, 또 쓰다듬어주면 도로 정신 없이 움직였다. 아. 사랑스럽다.
“응…. 으응….”
몸을 꿈틀거리며 옹알이를 하던 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 한참 졸린 듯 눈은 꼭 감은 상태였지만 눈 부근이 실룩실룩 움직이고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반짝 뜬 눈 사이로 드러난 올망졸망한 눈동자가 나를 어지럽게 응시한다.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아름다운 은색이었다.
잠깐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르니?”
이미 거의 확신에 가깝게 예상하고 있는 터라, 나는 가볍게 침묵을 깨트렸다.
“…아빠.”
여아, 아니 마르 역시 내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나는 빙긋 웃었다.
“언제 왔어?”
“오늘…. 새벽에….”
아직 잠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마르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차분히 안아 올리자 천진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웃더니 안아달라는 듯 가녀린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가 뜬 마르는 물끄럼말끄럼 한 눈초리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리고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쪽.
“…아?”
갑자기 볼에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바로 정신을 차리자 살며시 떨어지는 꽃봉오리 같은 입술이 보였다. 그야말로 완벽하면서도 기습적인 입맞춤이었다.
“마르야. 놀랐잖아.”
괜히 쑥스러운 기분에 나는 누운 채로 있는 힘껏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아빠아.”
그래도 무에 그리 좋은지 계속 안아달라는 어리광을 부리면서도 헤실헤실 웃는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였다.
“후르르르…?”
“삐?”
갑자기 발끝에서부터 이불이 들썩들썩 움직이더니 흡사 파도가 치는 것처럼 꾸불꾸불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은빛으로 번쩍이는 뿔 하나와, 그 옆으로 샛노란 주둥이가 이불 속에서 불쑥 솟아나왔다.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나와 마르를 올려다보는 두 쌍의 눈동자. 그 시선과 마주하자마자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전보다 한층 성숙한 자태를 뽐내는 유니콘과 아직은 어린 페가수스였다.
“너희도 있었구나. 하하하.”
유니콘은 주둥이를 크게 벌리더니 후르르르 울어 젖혔다. 아기 페가수스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작게 코웃음 치고는 홱 고개를 돌렸다. 나 참, 도도는 여전히 도도하네. 나는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흔들며 허공으로 올렸던 마르를 내려 품에 안았다. 아이 특유의 신선한 내음이 코끝을 물씬 자극했다. 나는 마르의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내렸다.
“아빠…. 아….”
그 순간, 문득 가슴에서 부르르 떠는 감각이 전해졌다.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마르의 표정이 조금 변화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진난만하던 낯빛이었는데, 느닷없이 눈과 입이 미약하게 실그러졌다. 이제는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 아….”
그 순간, 울 듯 말 듯하던 마르의 표정이 갑자기 한쪽으로 완연히 쏠렸다.
“아, 아빠…. 아빠….”
서서히 흐트러지는 눈매.
“보, 보고….”
부르르 떨리는 입.
잠깐 참으려고 애쓰는 것 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마르는 결국 참지 못했다.
“보고 싶었어요….”
이윽고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애처롭게 변하는 동시, 감은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서러운 소리가 이어졌다.
“어엉…. 어어어엉….”
“미안해. 그동안 걱정 많이 했지?”
자그마한 등을 토닥이며 나는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르의 울음은 한동안 계속해서 이어졌다.
*
아침에 일어나 재회를 마친 후.
나는 마르 그리고 두 영수와 가벼운 세안을 마친 후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처지라 오늘 아침만 먹고 바로 아틀란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애초 그렇게 말하고 오기도 했고.
식당에는 대부분이 클랜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히 안부를 나누고 나서, 조승우와 어제 하지 못했던 도시 복구 지원 작업에 관하여 말을 나누었다. 정하연이 말을 잘 전했는지 사실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계속 자재와 거주민들을 모으면서, 3개월 후 북 대륙의 모든 걸 정리하고 넘어올 준비를 하라는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렇게 계속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 순간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동시, 상남 형님이 커다란 접시에 고기 요기를 한 아름 담아 가져왔다. 노릇하게 익은 겉면에 시뻘건 소스를 듬뿍 바른 게 굉장히 맛깔스러워 보이는 요리였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제대로 된 진수성찬이었다.
물론 고연주나 임한나의 음식 솜씨도 나무랄 데는 없지만, 그래도 스튜만 계속 먹다 보면 질리니까. 나는 곧바로 포크를 들고 덤벼들었다.
“마르는 오늘 아빠 왔다고 어리광부리는 거니?”
한창 식사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상남 형님이 문득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인자하게 물었다. 마르는 내 무릎에 앉아 열심히 포크를 놀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아니에요….”
마르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클랜 로드. 마르가 참 착하고 의젓합니다. 우리가 걱정해도 괜찮다고 웃고, 그러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클랜 로드의 무사 생환을 기도했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는데, 이렇게 클랜 로드가 오시니 이제야 좀 아이답네요.”
상남 형님은 허허 웃으면서 인자하게 말했다. 나 또한 가볍게 웃고는 고기를 작게 잘라 마르의 입에 넣어주었다. 마르는 낯을 살짝 붉히면서도 받아먹고는 얌전히 입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이 자못 귀여웠는지 식당에 한 차례 웃음이 흘렀다. 어제 침체한 공기가 조금씩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그러다 문득 한 명에게 생각이 미쳤다. 아직 식당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그러고 보니 한별이는….”
“아까 다녀왔는데 안 먹겠다고 하더라.”
주변을 둘러보며 묻자 노노 누님이 날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보니까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늘 아침부터 영감님 무덤 앞에 계속 서 있던데…. 괜찮을지…. 어휴.”
“거의 스승과 제자 관계 아니었습니까. 충격이 클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클랜 로드. 클랜 로드가 좀….”
노노 누님의 한숨에 공감하는지 조승우가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말을 흐렸다. 나는 포크로 탁자를 두어 번 두드렸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야겠죠. 허나 지금은 그냥 울게 놔두고 싶네요.”
“그래도.”
“자기 앞가림은 잘하는 애입니다. 과한 걱정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
딱 잘라 말을 맺은 후 나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히 상념에 잠겼다.
지옥에서도 눈물 한 번 보이지 않던 김한별은 어제 정말 엄청나게 울었다. 정말 부모님이 사망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몇 시간을 내내 울고 흐느꼈다. 도중에 혼절하지 않았다면 계속 그랬을지도 모를 정도로 서글프게 눈물을 흘렸다.
아마 조승우의 말대로 충격이 클 것이다. 클랜 안에서 애들한테 배척 받을 때 나를 제외하고 기댄 사용자가 영감님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김한별을 믿는다. 아마 다른 애들이었으면 진작 어르고 달랬겠지만, 김한별은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별하는 성격이니까. 그러니 지금은 얼마든지 슬퍼해도 좋다. 중요한 건 이후 일상으로 돌아갈 때 극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여태껏 보여온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김한별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서 나는 미리 작별 인사를 마쳤다. 마르는 의연한 척하면서도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지만, 자주 연락하겠다고 하자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콘은 이제는 완연히 의젓해진 태도로 살짝 고개를 숙였고, 아기 페가수스는 내 발목을 깨물었다.
배웅은 나오지 말라고 했다. 조승우는 그럴 수는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지만, 김한별과 둘이서만 말을 나누고 조용히 떠나겠다고 하자 곧바로 수긍했다.
그렇게 식당에서 작별을 마친 후 나는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사 중에 들었던 대로 김한별은 무덤 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어제 실컷 울어놓고도 아직도 남았는지, 망연한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다.
김한별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어설픈 위로 따위 할 생각은 없어, 품에서 조용히 연초를 꺼내 들었다.
‘어디 보자…. 오른쪽이 신상용 씨였고. 그럼 왼쪽이 영감님 무덤이로군.’
꺼내 든 세 개의 연초 중 나는 두 개에 불을 붙여 각 무덤에 하나씩 놓았다. 딱히 특별한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나만의 애도하는 방법이랄까.
연초를 하나씩 놓고 김한별의 옆에 서자 “할아버지 연초 안 태우시는데….” 라는 혼잣말이 들려온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웃었다. 그리고 남은 연초 하나를 물고 불을 붙였다.
“남고 싶으면 남아도 좋아. 추스를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후욱,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전에도 느꼈지만.”
김한별이 말문을 열었다. 잔뜩 쉰 음성이었다.
“오빠는 참, 의연하신 것 같아요. 마치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많이 겪었으니까. 익숙하거든.”
나는 담담히 대꾸했다. 그러자 빤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돌아보지는 않았다.
이윽고 연초를 끝까지 태우고 털어 내린 후, 마지막 인사도 할 겸 정중히 머리를 숙였을 때였다.
“기록에…. 무슨 말이 적혀 있었어요?”
조금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김한별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나는 품에 넣어둔 기록을 보여줄까 하다가 그냥 입을 열기로 했다.
“고맙고 미안하다. 부디 홀 플레인에서 뜻한 바를 이루기 바란다.”
“…….”
“그리고 너한테 눈치 없이 굴지 말고, 잘 좀 대해주라신다. 너는?”
“저는….”
바로 되묻자 김한별은 약간 놀라면서도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김한별이 입을 열었다.
“고맙고 미안하다.”
여기까지는 똑같군.
김한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알려준 보석에 관한 지식들이 도움이 됐기를 바라며….”
“…….”
“기회는, 기다리기만 해서는 오지 않는다.”
“음. 진부하지만 좋은 말씀이네. …그런데 마지막 말씀은 틀리신 것 같은데.”
김한별의 낯에 의아한 기색이 서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기다리기만 한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때….”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직 대답도 안 해주셨으면서….”
찰나의 순간, 김한별은 멍한 낯빛을 보이기는 했지만, 곧 손등으로 얼굴을 훔치며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흘렸다.
잠깐 김한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쉬어도 좋고 따라와도 좋아. 선택은 네 몫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몸을 돌려 정문으로 걸음을 향했다.
잠시 후.
“…같이 가요. 오빠.”
김한별이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눈치도 없어. 이럴 때 손이라도 내밀어주지….”
이어서 나 들으라는 듯한 불만이 들려와, 나는 천천히 걸음을 늦춰주며 손을 내밀었다. 이내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이 내 손을 살그머니 붙잡는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꼭 맞잡은 채로 같이 걸음을 옮겼다.
아틀란타를 향해서.
============================ 작품 후기 ============================
네. 오늘 내용으로 이번 파트도 끝이 났네요. 실질적으로 한 에피소드의 종결이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도시 발전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이야기는 여기서 맺고, 이제는 그동안 뿌려놓은 복선을 발판으로 새로운 에피소드를 그려내야겠지요.
그리고…. 어제 이만성의 죽음에 애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캐릭터의 죽음을 감사하는 입장이 옳은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만든 캐릭터니까요. 그냥 감사하다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하하하.
그럼 저는 내일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분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