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33
00832 우리는 열심히 돌파하고 있는데. =========================================================================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돌아가는 발걸음은 응당 가벼워야 정상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멸 무저갱을 벗어난 이후, 아틀란타로 돌아가는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을 느꼈다. 기절에서 깨어난 척을 해도 네 여인은 오롯이 내 건강을 걱정할 뿐, 가타부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 하지만 이따금 뒤통수가 은근히 따갑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물론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하기야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나라도 화가 나지 않았을까.
또 한편으로는, 눈을 뜬 척하고 클랜원들의 행색을 살폈을 때, 나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냐면 의복이 찢어진 건 기본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와 체액으로 범벅이 돼 있는데, 얼마나 고생해서 왔는지 안 봐도 훤했으니까.
그래서 더 낯이 뜨겁다. 특히 같이 불침번이라도 설라치면 아무 말도 않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데, 이런 모습이 더 무서웠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정을 알아낸 것이 틀림없다.
그럼 차라리 투정을 부리거나 실컷 욕이라도 하면 시원하련만. 아니, 최소한 그냥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다면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았을 터.
그나마 비슷하게 깨어난 김한별과 이유정이 상황을 눈치채고 조용히 있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여하튼 네 여인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견디고는 있었지만, 기실 내가 놀란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아틀란타로 돌아가면서 종종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드드드드, 드드드드….
행군을 멈추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와중, 문득 수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진동은 일정한 주기로 떨렸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나는 가만히 진동이 울리는 방향을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서….”
“백미터. 서북쪽 45도 방향으로 접근 중.”
그리고 막 입을 열려는 찰나, 고운 음성이 먼저 선수를 쳤다. 임한나는 말린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망설임 없이 활을 잡았다. 이어서 고연주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른 정보는?”
“땅을 울리는 소리가 강하기는 한데…. 생각보다 심하지는 않으니 네 발보다는 두 발 같네요.”
“두 발로 이 정도 진동이 가능한가?”
“흥분 상태라면 가능하겠죠. 아마 꽤 굶은 놈들일걸요?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정확하게 들어오고 있어요.”
나는 멀뚱히 임한나를 응시했다. 왜냐면 내가 하려던 말과 정확히 일치했으니까. 고연주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씹던 육포를 퉤 뱉었다.
“아깝다. 뱉으면 어떡해요.”
“육즙만 빨고 버린 거야. 전투 직전에는 예민해지니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도 클랜원들은 어느새 한 명씩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각자 알아서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문득 고연주가 나를 돌아봤다. 지시를 바라는 건가?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이미 진동은 확연히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서쪽을 가리켰다. 사전에 알아차린 이상 요격이 최선이다.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두 여인은 동시에 뛰어 삽시간에 나무 위로 올라갔다. 고연주는 연기처럼 스르르 흩어져 몸을 숨기고, 임한나는 나뭇가지에 발을 디디며 전방을 유심히 관찰한다.
“응? 처음 보는 괴물이네?”
잠시 후,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키는 이 미터…. 인간형…. 살은 거칠어 보이고…. 눈은 뻘겋고…. 무기는 들고 있지 않네요. 아, 수는 약 서른은 넘는 것 같아요.”
아직 준 안정화 지역이라 볼 수 있는 만큼, 새 괴물의 출현도 염두에 둬야 한다. 당황할 필요 없이, 궁수가 알려주는 정보를 토대로 각자 대응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침착하지? 이쯤이면 적당한 호들갑이 나와야 정상인데, 원래 이런 원정대가 아니었잖아?
“어디 한 번….”
그때였다. 문득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온 순간, 화살 모양의 빛무리가 번쩍하며 날아가 수림 속으로 스몄다. 잔뜩 높여둔 청력에 작은 비명이 걸렸다. 이제 한 오십 미터 정도 남았나?
“한 마리~.”
현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상냥한 목소리가 울린 찰나, 또다시 빛이 번쩍였다.
“두 마리~.”
번쩍!
“세 마리~.”
그렇게 세 번의 빛이 연달아 시야를 번쩍이자, 비로소 눈앞의 수림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임한나가 알려준 정보와 정확히 일치하는 놈들이 우수수 모습을 드러냈다.
특이하게도 놈들은 괴물 특유의 괴성은 지르지 않았다. 시뻘건 눈으로 우리를 보자마자 세찬 콧김과 함께 무작정 달려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걸렸네?”
어디선가 고연주의 나른한 음성이 들려온 순간, 돌연 거뭇한 줄기들이 광범위하게 솟구쳤다. 놈들이 들어오는 지점을 정확히 계산해 그림자를 깔아둔 것이다.
치솟은 그림자 줄기들은 이내 뾰족한 창으로 변해 괴물의 몸을 사정없이 찔러 들어갔다. 이어서 구슬픈 비명과 함께 진형이 흐트러진 순간, 나는 곧장 앞으로 돌진했다.
그러한 찰나,
“응?”
…뭐지?
원래는 정면으로 들어가 혼란을 한층 가중시킨 후 빠져나오려고 했다. 말인즉 빠르게 쳐서 발을 묶고, 바로 빠질 생각이었다.
그러나 뛰쳐나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왼쪽에서 비스듬히 달려들어 갔다면, 오른쪽에서는 진수현이, 그리고 언제 돌아갔는지 남다은이 후방에서 나는 듯 치고 들어오고 있다.
이윽고 눈앞에서 걸리는 놈들이 베며 중앙으로 파고들자, 나머지 두 명도 나와 비슷하게 안쪽에 도착했다. 최소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고, 내 움직임을 읽어 기회를 맞춰 노렸다는 방증이다.
저절로 이것 봐라?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와 연계를 하겠다고? 아니, 했다고?
그 순간 앞으로 무너지는 놈의 목을 찌르며 스치듯 옆을 지나쳤다. 후드득, 그림자에 찢긴 살점이 몸을 두드린다.
생각할 틈이 없다. 고통에 미쳐 날뛰는 놈들을 기계적으로 베어 넘긴 순간, 허공은 물론, 사방에서 무시무시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는 크게 검을 휘두르며 내가 들어왔던 길로 도로 달려나갔다.
혼자만 있는 게 아닌, 세 명이 동시에 치고 나가자 빠지는 것도 훨씬 수월하다. 이내 흘끗 돌아보니 남다은과 진수현도 곧바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순식간에 간격이 멀어졌을 때, 빛나는 화살과 여러 개의 마법이 놈들 사이로 작렬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광역 공격이 한바탕 제대로 휩쓸자, 이후의 전투는 일사천리였다. 나를 포함한 근접 계열은 다시 몸을 돌렸고, 쓰러져 신음하거나 운 좋게 벗어난 놈들을 처리해 금세 매듭지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은 전투가 끝난 후,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클랜원들을 돌아봤다.
엄밀히 말하면 어려운 전투는 아니었다. 사실상 육탄 공격만 조심하면 되는 별 볼 일 없는 괴물이거니와, 어쨌든 이기는 게 당연한 전투다. 그러나 아무리 쉬운 경기라도 3:0으로 이기는 것과 1:0, 2:1로 이기는 건 엄연한 차이가 있다.
무조건 방진으로 차근히 물리치는 게 아닌, 각자 요격 상황에 걸맞은 역할을 해줬다. 사전에 공격을 알아차렸고, 도발하고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며, 고연주의 함정부터 시작된 연계가 아주 괜찮았다. 개인적으로 비유해보면 5:0, 아니 10:0으로 이긴 경기라고 할까. 어찌 보면 이것도 당연하기는 하지만.
“왜요?”
내 멍한 시선을 느낀 걸까.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살며시 팔짱 낀 고연주가 느긋한 미소와 함께 눈웃음을 쳤다. 마치 ‘그래서, 어때요?’ 라고 당돌하게 평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고 싶은 말이라.
사실, 있기는 있다. 모두 고생했다고. 구해줘서, 기대에 부응해줘서 고맙다고.
그러나 이미 말을 하기 늦었다는 것도,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
그래도.
“…좋은.”
나는 살짝 웃으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은, 전투였습니다.”
*
제갈 해솔의 수송 어빌리티에 힘입어, 우리는 닷새 만에 도시로 귀환할 수 있었다.
어차피 큰 의미 없이 나갔던 원정이라, 도시에 도착하고 나서도 엄청나게 떠들썩하지는 않았다. 그저 언제나처럼 각자의 공로를 바탕으로 실적을 발표하고, 가져온 보상을 하나씩 꺼내며 기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 이유정이 마침내 B등급으로 올라섰다는 사실은 확실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또한, 가장 중요한 보상 배분에서 나는 스스로 빠질 것을 선언했다.
사멸 무저갱에서 얻은 성과는, 금은보화나 영약, 약초 등을 제외하고서도 장비도 상당수 차지했다. 하지만 개중에 내가 쓸 건 거의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딱히 욕심을 부리고픈 생각은 없었다. 등급제에 기인하면 내가 최우선으로 선점할 수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고생한 클랜원들에게 권리를 양보하고 싶었다.
보상을 포기한 것에 화가 풀린 걸까. 네 여인은 생각보다 나를 못살게(?) 굴지는 않았다. 가끔 은근한 시선을 던지기는 했으나 오직 그뿐, 심하게 티를 내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업무에 관해서는 공사(公私)를 구분하는 모습을 보였다.(실은 날이 갈수록 불안감이 심해졌다. 이렇게 조용히 지나갈 리가 없었고, 서로 모여 쑥덕거리는 광경을 번번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뭐 나야 그렇다손 쳐도, 김한별과 이유정도 걱정이었다. 워낙 네 여인의 입김이 막강하다 보니 내가 모르는 곳에서 등쌀이 있지는 않을까 근심이 들었다.
그러나 며칠 주의 깊게 살펴본 결과,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없었다. 하기야 그렇게 비겁한 짓을 벌일 여인들도 아니고, 정말로 그랬다면 나도 가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것저것 우선하여 처리할 일을 끝내고 나서, 나는 나름 의뢰자격인 형에게 연락해 공략을 끝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반응은 무심했다. 그러냐고, 정말 수고했다는 등 영혼 없는 인사뿐이었다.
단, 끊기 직전 곧 한 번 보자는 말을 들어 뜻 모를 의구심이 일었는데, 무어라 묻기도 전에 통신이 끊어졌다. 요즘 꽤 바쁘게 지낸다는 말은 언뜻 들었지만, 내심 서운한 마음이 없잖아 들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은 내 결재를 기다리는 여러 일과 마주하자 곧 사라졌다.
우선은 조승우가 희소식을 가져왔다. 조만간 ‘밤의 거리’에 마력 영약이 경매 리스트로 올라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이미 신 코란 연합에서 물품 인수를 마쳤다고.
조승우는 거기서 더 나아가 즉시 구매를 목적으로 판매자와 물밑으로 접촉했다는데, 값을 무진장 비싸게 불러 포기했다는 말로 보고를 끝냈다.
즉시 구매를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사실 이 정보만 해도 충분한 성과였다. 원래 경매 리스트든 뭐든, 밤의 거리에 관련된 물품은 일체 외부에 유출하지 않는 게 철칙이다. 한데 스스로 원칙을 깨고, 게다가 판매자와 앞서 접촉하게 해줬다는 건 아마 신 코란 연합에서 우리의 처지를 배려한 듯싶다.
사멸 무저갱 원정으로 마력 영약 하나를 새로 얻었으나, 나는 경매에 참가하기로 결심하고 충분한 자금을 확보해두라 지시했다. 어쨌든 능력치 관련 영약은 있으면 도움이 되는 물건이며, 제한 조건을 잘만 이용하면 두 개를 한 번에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 그대로 비비앙이 마력이 부족하다고 힘들어하는데, 개인적으로 후자를 노려 고민을 해결해주고 싶었다.
조승우도 내 의견을 듣고 일리 있다고 여겼는지, 마침 이번 원정 성과로 재정이 넉넉해졌으니 충분히 모을 수 있을 거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물론 당면한 일, 아니 희소식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원정에서 돌아온 후, 또 하나의 기쁜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