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50
00849 Meanwhile, Same Time : Seven =========================================================================
아니. 발코니의 여성은 여인이라기보다는 소녀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용모였다.
우선 터럭 한 올도 삐져나오지 않게 야무지게 틀어 묶은 머리카락은, 마치 황금을 녹여 실로 뽑아낸 것처럼 눈 부신 빛을 발한다. 키는 160 중반 즈음으로 아담하며 이목구비는 단정하지만 약간 앳된 끼가 남아 있다.
그리고 따뜻한 날씨라 그런지, 가볍게 차려입은 옷차림 새로 보이는 근육도 보기 좋게 발달해 있었다. 우락부락하게 부푼 근육이 아니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오밀조밀하게 잡혀 있다. 가령 매끄럽고 탄력적으로 보이는 탄탄한 허벅지처럼.
여하튼 여인이든 소녀이든 간에, 상당한 미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단순히 외모뿐만이 아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가 여성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소녀는 발코니에 서서 발밑으로 보이는 풍경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곱게 세공된 황옥을 박아 넣은 듯한 아름다운 눈동자는 당당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흡사 무언가 이뤄냈다는 성취감, 혹은 자부심처럼 보인달까.
실제로 소녀는 몇 달 전 있었던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거대한 산맥을 지배하던 아르코느 오크와의 대 전쟁을.
오크를 상대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용자가 죽었는지는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전투 교육을 받은 오크는 하나하나가 강인한 전사였다. 그뿐만 아니라 요상한 술수를 부리던 오크 주술과, 대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오크 로드와의 최후의 일전을 생각하면 지금도 섬찟 소름이 돋는다.
돌이켜보면 전혀 쉽지만은 않은 전투였지만, 어쨌든 승리는 남 대륙으로 돌아갔다. 공포의 대명사라 불리던 오크 성을 함락하고 끝내 라그나로크에 이르는 길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이 도시요, 이 웅장하고 호화찬란한 궁전이었다. 남 대륙의 모든 사용자는 푸른 궁전을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칭찬은 자연스레 이 궁전을 차지한, 아르코느 오크와의 전쟁을 이끌었던 클랜의 칭송으로 이어졌다.
그 이름은 바로 오딘(Odin).
아르코느 오크와의 전쟁 이후, 남 대륙 사용자들은 오딘 클랜이 대륙 최고라고 추켜세웠다. 물론 그 내면에는 남 대륙이 제일이라는 심리가 깔려 있었다. 어쩌면 서 대륙이 폐쇄되고 사용자가 대거 유입됐을 때 그런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냉정히 말하면 남 대륙 한정이라는 말이 덧붙어야겠으나, 오딘 클랜의 수장은 사용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굳이 막지 않았다. 왜냐면 소녀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미 도시 복구 작업은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었고, 사용자들은 라그나로크를 기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도시가 하루가 멀다고 흥에 겨울수록 소녀의 자신감도 굳건해졌다. 비록 많은 손해를 보기는 했으나 라그나로크 자체로도 손실을 만회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
그때였다. 한창 상념에 잠겼던 소녀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발코니 입구 안쪽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걸 보며 물끄러미 시선을 집중했다. 그렇게 몇 초간을 쳐다보고 있으니 문득 결 좋은 보랏빛 머리카락이 흔들거리며 튀어나왔다.
“엘도라!”
발랄한 목소리와 동시에 누군가 짠하고 등장했다. 소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늘씬한 키에 밝은 연갈색의 가죽 갑옷을 입은 여인이다.
엘도라라 불린 소녀는 몸을 돌려 여인을 빤히 응시했다. 또각또각, 모델처럼 가늘고 긴 다리맵시를 내세워 걸어오는 여인은 상큼한 눈웃음과 함께 활짝 웃었다.
“여기 있었네? 우리 엘도라. 한참 찾아다녔잖아.”
“제가 그렇게 부르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탈리.”
엘도라가 짐짓 엄한 음성으로 말하자 여인, 아니 나탈리는 눈을 살짝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응? 그럼 뭐라고 해? 코르넬리우스? 이건 예쁘지 않아.”
“뭐가 됐든 좋습니다만….”
낮은 음성으로 말을 잇던 엘도라는 싱글벙글 웃는 나탈리를 보고 가벼운 한숨을 흘렸다.
“아무튼, 한참 찾아다녔다는 말씀은…?”
“아, 우리 선지자님께서 엘도라를 찾으시더라고. 그것도 아~주 애타게 말이야.”
나탈리는 ‘우리’라는 말을 계속 강조해서 붙이며 히히 웃었다. 그러자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엘도라의 얼굴에도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멜리누스가요?”
“응! 그리고….”
그 순간 엘도라는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더 말하려던 나탈리는 동그래진 눈으로 소녀를 좇았다. 그러나 엘도라는 이미 입구로 들어가 성큼성큼 멀어지는 중이었다.
“엘도라, 엘도라! 아직 말이…!”
등 뒤로 나탈리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엘도라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급하다 느껴질 만큼 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그런 엘도라의 얼굴은 흡사 오랜 친우를 만나러 가는 것처럼 화색이 돌았다.
잠시 후, 방을 나서 긴 회랑을 지난 엘도라는 다른 건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를 건너, 그 너머로 나무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나타난 건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나선 계단이었다. 소라 껍데기처럼 빙빙 도는 계단을 내려갈수록 아래로 가지런히 배치된 탁자와 여러 기록이 빽빽이 꼽힌 서재가 보였다. 보이는 그대로 지식의 보고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커다란 도서관이었다.
이윽고 끝없이 이어지던 계단도 서서히 끝나갈 무렵, 문득 조용한 도서관을 울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귀에 흘렀다.
“혼자서 할 수 있을…?”
“글쎄. 한 번 봐야겠지만 아마도….”
엘도라는 계단 끄트머리에서 멈추고 살며시 안을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잿빛 로브를 걸친 백발의 노인이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비스듬히 놓인 흰 지팡이와 책상에서 홀로 불빛을 비추는 호롱불, 그리고 정갈히 허리를 편 채 부드러운 눈매로 기록을 탐독하는 모습은 흡사 현자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이따금 아래까지 늘어진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끄덕이거나, 손에 침 묻혀 기록을 넘기는 모습을 보며 엘도라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 나탈리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호의 가득한 낯빛이다.
신뢰에 찬 눈길을 보내던 엘도라는 살짝 헛기침했다.
“응?”
“어머?”
목소리는 두 곳에서 들렸다. 노인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한 삼십 대 중반은 되었을까. 풍성한 흰색 로브를 걸친 우아한 여인이 기록을 한 아름 든 채 걸어오다가, 은근슬쩍 나타난 엘도라를 보고 깜짝 놀라 서 있었다. 설마 한 명이 더 있을 줄 몰랐던 엘도라도 약간 놀란 빛을 보였다.
그 반응을 본 여인은 곧 표정을 추스르고는 스리슬쩍 미소 지었다.
“나탈리가 제가 왔다는 말은 안 해줬나 보네요?”
“아니요. 제가 듣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올리비아.”
엘도라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올리비아는 어머, 라고 말하며 한 손을 볼에 대고 빙긋 웃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오딘 로드는 여전하네요.”
라그나로크의 아틀란타처럼 중앙 도시를 중점으로 네 개의 외성이 이어진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올리비아는 그중 한 도시를 맡고 있는 클랜의 로드였다. 물론 오딘과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다.
엘도라가 미소로 화답하자 노인이 껄껄 웃으며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탁자에 들어가 있던 의자가 쓱 나오더니 저절로 움직여 엘도라의 앞에 놓였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엘도라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멜리누스.”
“그렇지요. 상의할 일이 하나 생겨서 말입니다.”
“상의할 일이요?”
“음, 그게.”
엘도라가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멜리누스는 흘긋 옆을 쳐다봤다. 흰 로브의 여인은 기록 더미를 책상에 내려놓은 후,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가 고요히 입을 열었다.
“오딘 로드. 제가 듣기로는 아직 칼집을 찾는 중이라 들었는데, 맞나요?”
엘도라는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가 의아한 빛으로 수긍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근래에는 큰 신경을 못 썼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올리비아가 꽤 재밌는 정보를 들고 왔더군요.”
보이는 것과 다르게 걸걸한 목소리를 낸 멜리누스가 곧장 끼어들었다. 어느새 이야기는 자연스레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클랜 로드는 혹시 이 라크나로크 대륙에 얽힌 신화를 알고 계시는지요.”
“그렇게 자세히는…. 그냥 먼 옛날 신들 간에 거대한 전투가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라고 말한 멜리누스는, 치렁치렁한 수염을 부드러이 쓸어내리며 기록을 뒤적였다.
“라그나로크…. 직역해보면 신들의 황혼이라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다르게는 신들의 운명 혹은 신들의 몰락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몰락이라…. 썩 좋게 들리지는 않는군요.”
“크게 신경 쓸 건 없습니다. 전투의 끝은 응당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법이니까요. 이 경우 패자를 몰락과 연결할 수 있겠지요. 물론 그 몰락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만.”
“네. 하지만 그 신화가 제가 찾는 칼집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그때 올리비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얼마 전 세상의 끝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발견했어요. 다른 말로는 최후의 전쟁이라고도 하죠. 신들이 마지막 전투를 벌인 장소라고 이해하시면 돼요.”
그 순간 엘도라의 눈이 살며시 반짝였다. 아직 자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지만, 왠지 모험의 냄새가 풀풀 풍겼다. 안 그래도 오크 성 공략 이후 줄곧 라그나로크에만 있어 몸이 근질거렸는데, 무언가 느낌이 왔다. 아르코느 오크와의 전쟁 때 보인 활약으로 전신(戰神)이라는 칭호가 붙은 만큼, 엘도라도 천성이 전투에 인색하지 않은 사용자였다.
“어째서 그 유적을 그 장소라고 추정하는 겁니까?”
“벽화가 있었거든요.”
엘도라가 묻자 여인은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답변했다.
“정확히 말하면 유적 외곽에 긴 벽을 따라 그려진 그림이 있었어요. 우리는 근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고대 지식 전문가들을 동원해 벽화를 해석했고, 나름의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죠.”
“가장 큰 성과는 아까 말한 몰락의 의미를 찾아냈다는 거지요. 마지막 그림은 아마 신을 봉인하는 과정을 그린 게 아니겠느냐고 말하더군요.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올리비아는 멜리너스를 스리슬쩍 흘겼다. 이제 중요한 얘기를 하려는데 왜 당신이 빼앗느냐는 눈초리였다.
“아무튼, 사실 저도 확신은 못 해요. 그곳이 어떤 장소인지는 직접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죠. 하지만 최소한 단서는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거기까지 말한 올리비아는 잠시 숨을 돌리려 했지만, 엘도라는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며 아차 탄성을 질렀다.
“아, 미안해요. 제일 중요한 얘기를 빼먹었네. 방금 멜리너스가 말한 봉인 과정을 그린 그림에서, 우리는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바로 칼집이죠.”
“칼집?”
“칼집이 그려져 있었다고요. 생각해봐요. 오딘 로드의 엑스칼리버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일종의 성물이잖아요? 그리고 역사상 절대자를 봉인할 때 성물이 사용된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요. …어때요. 이 두 사실의 연관성을 알겠나요?”
“…험험.”
올리비아는 혹여 또 멜리너스가 끼어들까 봐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말했고, 노인은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이제나저제나 영리한 엘도라는 금세 올리비아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담담하던 두 눈이 약간 치떠진 게 그 방증이었다.
“…설마.”
“그래요, 엘도라. 그 벽화가 진정 신화 시절에 그려졌다면, 그 칼집도 성물일 가능성이 높아요. 음~. 여기까지만 말해도 아시겠죠?”
“엘핀 로드. 저희가…!”
“물론, 저 또한 오딘의 힘을 빌리고 싶어 찾아온 거랍니다.”
그렇게 말한 올리비아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엘도라는 열망에 찬 눈동자로 멜리너스를 응시했다.
“으음. 클랜 로드의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동안 오매불망 찾아온 칼집이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겠지요.”
“그 말씀은 제가 가져온 정보가 지푸라기라는 건가요?”
올리비아가 뾰족한 음성으로 쏘아붙이자 멜리너스는 긴 수염을 어루만지며 점잔을 뺐다.
“그게 아니라, 급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엘핀 클랜이 어려워하는 곳이니만큼, 저희도 마냥 쉽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후유, 알겠습니다.”
그러나 엘도라를 한 번 본 멜리너스는 이미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느꼈는지 긴 한숨을 흘렸다. 이어서 명치 부근을 슬슬 쓰다듬더니 인자한 미소를 짓는다.
“클랜 로드. 방심은 금물이니 기사단 전원을 소집하십시오.”
“물론입니다. 알겠습니다.”
이미 발동이 걸렸는지 엘도라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돌연 우뚝 멈춰서 빤히 바라봤다. 아까는 명치를 만지더니 이번에는 복부를 은근히 쓸어 내리는 중이다.
“아.”
엘도라의 시선을 느꼈는지 손은 금세 헐렁한 소매 안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이 늙은이가 식사할 시간 정도는 주시겠지요?”
구변 좋게 말한 멜리너스는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