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877
00876 Battle Of The East Continent, Four. =========================================================================
이른 아침의 성은 조용하고 차가웠다. 동이 튼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 새벽 서리가 가시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정원은 안개로 뽀얗게 가려져 있어 으슥한 기운마저 감돌고 있다.
며칠 전 가시나무 관 덕분에 진화(?)한 마르는 성내 회랑을 사뿐사뿐 걷고 있었다. 아니. 숫제 뛰는 걸음으로 걷는 것이, 더 이상 아장거리는 아기가 아닌, 어여쁜 소녀라 봐도 무방할 듯싶다.
그런 마르의 얼굴빛은 흡사 갓 피어난 꽃처럼 화색이 만연하다. 선물 포장을 하나씩 벗기는 아이처럼 잔뜩 기대하는 얼굴 하며,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걸을수록 걸음도 빨라진다.
“아빠! 들어갈게요.”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한 마르는 노크도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여왕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기품과 거리가 먼 행동이나, 니뮤에는 그저 잔잔히 웃으며 뒤따를 뿐이었다. 마르가 이날을, 정확히는 아빠의 호출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마르는 금실로 장식된 붉은 카펫을 밝으며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음.”
양손을 꼭 모으며 말하니 앞쪽에서 담담히 수긍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김수현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단지 의자를 돌린 채 테라스 쪽을 보고 있어 앞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 마르가 고개를 갸웃하자, 김수현이 말문을 열었다.
“들었다. 제대로 된 클랜원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김수현은 살짝 의자를 돌렸다. 팔을 뻗어 책상에 놓인 기록을 집고 소리 내 읽는다.
“클랜원 등급 등록, 장비 반출 허가 요청, 호출석 마련 등등…. 너에 관해서 여러 요청 건이 올라와 있더구나.”
마르는 낯을 붉히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김수현은 아직 테라스 쪽으로 몸을 둔 터라, 어떤 얼굴인지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니뮤에는 암암리에 느꼈다. 상대의 말투나 태도가, 썩 탐탁잖아 하고 있다는 걸.
“네…. 허락받고 싶어요.”
“글쎄.”
마르가 간곡한 음성으로 말했으나 김수현의 반응은 모호하다.
기실 최근 마르의 입장이 애매해진 건 맞다. 원래는 보살펴야 할, 시쳇말로 ‘비전투 사용자’에서 순식간에 ‘전투 사용자’로 상승했다. 말인즉 햇수로 겨우 이 년을 넘은 아기라는 사실과, 각성을 통해 한 명의 어엿한 클랜원으로 성장했다는 사실 사이의 괴리였다.
어쨌든 한 번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기는 하다.
단순히 탐험, 원정만 나가는 거라면 문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거대한 대륙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서, 김수현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고연주는 그 점을 꼬집어 말한 것이다.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계속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참가하게 할 것인가.
물론 마르 본인은 사용자로서의 활동을 원하고 있고, 그럴만한 힘도 충분히 있다. 아니. 차고 넘치는 수준이다. 그러나 어디에나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고, 그게 바로 김수현이라는 점이 가장 문제였다.
“네 생각은 장하다만, 이 아비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일러요?”
마르가 약간 늦게 반문한 순간,
“니뮤에.”
김수현은 갑작스레 화살을 돌렸다.
“현재 마르의 힘은 어느 정도 수준입니까?”
갑작스러운 질문. 왜인지 상대가 알면서 묻는다는 기분을 느꼈지만, 니뮤에는 성실하게 설명했다.
“저는 전대 여왕님을 한 분, 그것도 짧은 기간밖에 모시지 못했으나…. 제가 겪었던 어느 요정들보다 강한 기운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김수현은 간단히 끄덕이더니 재차 되묻는다.
“그럼 경험 면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니뮤에는 문득 알아차렸다. 김수현이 왜 탐탁잖아 하는지, 그리고 어느 부분을 걱정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이윽고 안절부절못하는 마르를 보며 조용히 말을 잇는다.
“그 점에 관해서는 저번 날개 이식 설명 때 말씀드렸습니다.”
“날개에는 힘과 지식만이 아니라 경험까지 녹아 있다. 거기에는 전투 경험까지 포함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신지요.”
“…네. 물론 익숙해질 시간은 필요.”
“그걸 못 믿겠다는 겁니다.”
부연하려는 찰나, 김수현은 니뮤에의 말을 단호히 끊었다. 동시에 마르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태어난 지 두 살밖에 안 된 애가, 사용자로 활동하겠다?”
마르는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영리하고 똑똑해, 왜 김수현이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있는 그대로만 보면, 머셔너리 클랜원들은 정예 중의 정예. 홀 플레인에서도 머셔너리는 소수 정예의 대명사로 불리는 클랜이다. 머셔너리 일반 클랜원이 타 클랜의 대 간부 이상이라는 우스갯소리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실적이 증명한다. 당장 굵직한 것만 봐도 고대 마법 도시 마지아, 용이 잠든 산맥, 강철 산맥 2, 3, 4 지역, 야만 왕의 무덤, 빙하의 설원 등등.
김수현 휘하의 전투 사용자들은 산전수전, 공중전, 시가전을 헤치며 사선과 너나들이한 사용자들이다. 거기다 임무 수행으로 경험치를 꾸준히 쌓아왔고, 지금도 쌓고 있다.
이러할진대, 마르가 갑자기 이들과 동등한 선상에 놓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각성을 통해 강해졌다고 해도.
단, ‘증명’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실력을 입증한다면 말이다.
“그럼 어떡해야 믿어주실 건데요…?”
자못 서운함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였다.
“증명해봐.”
순간 서늘한 기운이 집무실에 흘렀다.
“증명…?”
“그래. 정말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지. 아니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에 불과한지.”
낮고 차가운 음성. 그러나 왜인지 폭풍전야의 느낌이 맴도는 말투였다.
한데, 뜻밖에도 마르의 얼굴은 태연하다. 오히려 다소곳이 선 채, 김수현의 기운을 예사롭게 받아넘기는 것이다.
이윽고 마르는,
“네. 좋아요.”
그럼 좋다는 듯이 아주 간단하게 수락했다.
“대신 납득하신다면, 꼭 허락해주시는 거예요?”
“호오.”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터졌다. 김수현의 입장에서는 맹랑하다고 느낄 법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세상의 먹이 사슬의 정점을 찍은 사내니까.
이윽고 의자가 빙그르르 돌더니 김수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럼….”
그 순간, 마르와 니뮤에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걸음을 물렸다.
“그 반대의 경우도 납득하겠다는 거겠지?”
비로소 드러난 김수현의 얼굴은 소름 끼칠 만큼 무표정하다. 마르 앞에서는 언제나 따뜻한 미소를 보였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붉은빛을 뿌리며 뚫어지라 응시하는 두 눈은 일견 두렵기까지 하다.
허나, 두 요정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친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선 보이는 건, 귀걸이와 허리춤에 걸린 네 자루의 검. 이어서 소망의 셔츠와 치우천왕의 갑옷, TOPG, 오벨로 기사 부츠, 붉은 달의 망토, 라실라시의 축복, 행운의 네 잎 클로버….
“아, 아빠….”
김수현은 그야말로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시커먼 갑옷과 핏물을 연상케 하는 붉은 망토를 걸친 모습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거기다 은연중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군주여, 호령하여라.’ 의 기운은, 두 요정을 무섭게 압박한다. 최근 원정을 나간 적이 없는 만큼, 한층 어색하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이게 바로….’
간신히 진정한 니뮤에는 긴장한 눈으로 상대를 훑었다.
‘저 사내의 진정한 모습…?’
불현듯 니뮤에의 뇌리로 각성 전의 마르와 나눴던 대화가 스쳤다.
‘아빠를 돕고 싶어요.’
‘네. 아빠는 정말 좋은 분이세요.’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굉장히, 무서울 때가 있어서….’
‘제가 느끼는 ‘거짓된 실체’에서, 아빠를 구해드리고 싶어요.’
*
한편.
‘남 대륙으로 가라고? 아니, 아니지. 아직은 갈 이유가 없지.’
“젠장.”
독립 공간 ‘천상’의 가장 드높은 곳에서는, 가브리엘이 신경질적으로 손을 놀리는 중이었다. 아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머리에 꽃 꽂은 여인이 손을 마구 휘젓는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조금 순화하면, 허공을 키보드 삼아 피아노 치는 중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선, 너희는 정보부터 모으도록 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제기랄.”
그러는 동안, 고운 입에서는 험한 욕설이 연달아 튀어나온다.
‘거듭 말하지만, 정확한 정보부터 모아. 동, 서, 남 대륙 전부 포함해서.’
“빌어먹을.”
실제로 가브리엘은 눈썹을 한껏 치킨 채 험악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두 눈에서 뿜는 살기는 활활 타오르다 못해, 끝이 보이지 않는 천상의 천장까지 뻗는다. 그 탓에 주변의 천사들까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그전까지는 수현이 부를 생각 꿈에도 하지 말고. 어떻게 할지는 우리가 정할 테니까.’
“아아아아! 왜애애애애애!”
결국에는 가브리엘이 폭발했다. 양팔을 휙 떨쳤다가 그대로 힘차게 내리꽂는다. 무언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흡사 마음대로 되지 않자, 어린이가 생떼를 부리는 듯한 광경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후….”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가브리엘이 피로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왜 연결 복구가 안 되는 거지?”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어느새 얼굴은 진지해졌다. 진심으로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는 듯 허공을 노려보고, 또 노려본다.
“아무리 대 악마, 아니 설령 사탄이라도…. 이 정도로 광범위하게 간섭을 한다고?”
물론, 노려본다고 뾰족한 수가 생길 턱이 없다.
“아 몰라.”
결국, 자조 어린 말을 뱉고서 공중에서 드러눕는다. 하아아아, 기나긴 숨이 연이어 흘러나온다.
그때였다.
“저…. 가브리엘 님.”
망연한 얼굴을 한 가브리엘의 옆으로 한 천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왜.”
“긴히 보셔야 할 것이.”
“뭔데.”
“서 대륙의 현황입니다.”
그러자 가브리엘은 그건 또 무슨 소리냐며 휘둥그레 쳐다본다.
“거기는 이미 점검했잖아? 예전에 조금 시끄럽다가, 최근에는 조용해졌다며?”
“그게….”
“그게?”
“…….”
계속 우물쭈물하는 태도가 갑갑했는지, 가브리엘은 성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사가 가져온 자료를 바로 확인한 순간,
“…….”
가브리엘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까맣게 침잠했다.
“이건…?”
이 의문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어떻게 된 거야?”
마침내 천사와 악마.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전쟁이, 그 서막을 알렸다.
============================ 작품 후기 ============================
독자 님들.
제가 오늘(5월 7일)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내일(5월 8일) 연재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가족 행사인데 아마 집에 몹시 늦게 들어올 것 같네요.
하루 건너고, 5월 9일(토요일)에 연재를 재개하겠사오니, 부디 너른 양해 부탁 드릴게요. _(__)_
그리고….
어제 저보고 웅녀라고 부르신 분들.
제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s( ̄へ ̄ )z
3차 전쟁에서 뵙도록 해요.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