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39
00938 If You Change, One. =========================================================================
그 무렵.
비록 김수현이 일으킨 천재지변 급의 재앙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던 워프 게이트에도 한바탕 난리가 있었다.
멜리너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지원 병력이 오지 않자 노심초사하다가, 갑갑한 마음에 직접 에르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
전장을 가로지르던 걸음은 이십 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우뚝 멈췄다.
콧속이 익을 만치로 뜨거운 공기가 확 찔러왔다. 어디선가 자글자글 끓는 소리도 나고 있었다. 멍하니 사방을 돌아보는 멜리너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 분 전만 해도 시끄럽기 짝이 없던 초원은 어느새 죽어버린 듯 고요해졌다.
아니. 이제 초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어느 곳은 소행성이 충돌하기라도 했는지 땅이 산산이 조각나다 못해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이 정도면 싱크 홀이라고 봐도 믿을 정도였다.
또 어느 곳은 녹아내린 살과 핏물이 섞인 액체가 웅덩이처럼 고여 있으며, 인간, 요정, 마족을 가리지 않고 상반신과 하반신이 이등분된 시신도 부지기수였다.
그때 할 말을 잃은 표정을 짓고 있던 멜리너스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크으으으….”
“아, 아스타로트 님!”
아스타로트는 심각한 상처를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특히 가슴과 복부에 난 깊은 자상은 심지어 아직도 시커먼 연기를 올리며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공격에는 영향권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열화 검의 폭격에는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진즉 고꾸라진 덕분에 네 번째 공격 때는 벗어날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다행이라고 할만도 했다.
이윽고 아스타로트가 힘겹게 입을 뻐끔거리자, 멜리너스는 황급히 아스타로트를 들고 시신이 가장 많이 쌓인 곳으로 달렸다.
서둘러 주문을 외워 양분으로 만든 후 흡수하게 하니, 그제야 아스타로트의 숨통이 살짝 트였다.
“후우우우….”
“괜찮으십니까?”
“…….”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스타로트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아는 만큼 멜리너스의 어조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아스타로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기는커녕 한껏 터진 숨만 덜덜거리며 뱉을 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멜리너스는 오 분 전 무시무시했던 기운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저 김수현의 저항이 심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무언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양해를 구하고 다시 달리자, 오래지 않아 에르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르윈은 땅에 주저앉은 채 간신히 상반신만 일으킨 상태였다. 가슴 가운데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으나 심한 부상까지는 아니었다.
멜리너스의 기척을 느꼈는지 에르윈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아차 하더니 복부에 얼굴을 묻고 있는 김수현을 살짝 밀어냈다.
“멜리너스?”
“사…. 에르윈 님. 무사하십니까.”
에르윈은 힘겹게나마 자리에서 일어서며 끄덕거렸다. 아직 정신이 멍멍하기는 했으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관없다. 그나저나 그쪽은 어떻게 됐지?”
곧바로 물었으나 멜리너스는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광경에 잠깐 정신이 팔렸지만, 현실로 돌아오자 할 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방이 시체와 부상자의 신음으로 가득한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니 이상한 감을 느낀 걸까.
에르윈이 눈이 단박에 실쭉해졌다.
“어떻게 됐지?”
“사브나크가 신속히 움직여준 덕분에 도망치는 무리를 둘러싸는 건 성공했습니다.”
또 한 번 묻자, 멜리너스는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지금은 주변 시선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놈들의 저항이 만만치가 않았으며, 또 서른 명에 달하는 인원이 새로 나타나 불시에 후방을 들이쳐버리는 바람에….”
“그래 봤자 삼백 명도 안 되는 인원이지 않나. 설령 그림자나 정령이 있었다고 해도 육천 명에 달하는 서 대륙이 놓칠 리가 없을 텐데.”
“그게 실은…. 포탈로 한창 병력을 보내던 중에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았습니다.”
“습격?”
“예. 제가 정신없는 틈을 타 아군으로 가장해서 달려오더니, 가까이 오자마자 갑자기 공격하더군요. 처음에는 메모리아 스톤을 뺏으려는 듯했지만, 제가 겨우 지키는 데 성공하자 바로 포탈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그 수가 적지 않아서…. 서둘러 지원을 요청했는데….”
“…….”
멜리너스가 또 한 번 말을 흐리자, 에르윈이 입술을 짓씹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변수가 발생했다. 그나마 에워싸는 데는 성공했다지만 이상할 정도의 불안감이 뭉클뭉클 샘솟는다.
에르윈은 신속히 눈을 돌렸다. 완전히 난장판이 됐지만, 시간을 지체하더라도 한 시라도 빨리 병력을 수습해 넘어가야만 했다. 그때였다.
한쪽에서 돌연히 한 무리가 우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 생각 없이 눈을 돌리는 멜리너스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헉헉거리며 달려오는 무리는 서 대륙 사용자가 분명하다. 지금쯤 한창 싸우고 있어야 하건만, 이곳으로 왔다는 것 자체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외침을 듣자마자,
“놓쳤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뭐라고!”
고함의 근원은 멜리너스가 아니라 에르윈이었다. 막 숨을 고르려던 사내는 서슬 퍼런 호령에 순간적으로 딸꾹질을 뱉었다.
“놓. 쳤. 다. 고.”
차갑게 노려보는 에르윈의 두 눈과 마주하자 사내는 온몸이 얼어붙는 감각을 느꼈다. 차디찬 서리 속으로 맨몸으로 뛰어들면 이럴까. 흡사 뱀을 앞에 둔 쥐의 기분이었다.
“그, 그게! 추격은 하고 있는데!”
사내의 횡설수설에 에르윈이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똑바로. 말하라.”
아름답던 목소리가 갑작스레 낮아지고 사악한 어조가 물씬 풍겼다. 이는 사탄이 극도로 분노했다는 방증이었다.
결국, 기세를 견디지 못한 사내가 느닷없이 황급히 누군가를 앞으로 끌어냈다.
“이, 이년 때문입니다!”
이어서 앞으로 내던져진 여인은 다름 아닌 한소영이었다.
항상 단정하던 긴 생머리는 몹시 헝클어졌고, 군데군데 깊은 상처도 여럿 보였지만, 분명히 한소영이 맞았다.
끝내 붙잡혔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감정하다. 마치 너희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년이 갑자기 워프 게이트로 넘어와서는…!”
사내는 한소영을 삿대질한 채 계속 떠들었으나, 에르윈은 더는 듣고 있지 않았다.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다리 풀려 주저앉는 등의 추태는 보이지 않았지만, 좀 전까지 꼿꼿하던 어깨가 살짝 늘어졌다. 그리고 워프 게이트가 있는 방향을 하염없이 응시할 뿐.
이윽고 조용히 생각에 잠기기라도 하듯 지그시 눈을 감는다.
하기야 힘이 빠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타나토스를 깨우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 한순간만을 바라보고 온갖 모험을 감수하고 노력을 기울였는데, 모조리 수포로 돌아가 버렸으니까.
이래서야 전쟁은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냉정하게 봐서 이번 전쟁도 악마 진영의 패배였다.
결국에는 대계의 예언이 맞았다.
잠시 후.
멜리너스의 고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한소영은 침착히 주변을 돌아봤다. 죽지 않은 이상 어떻게 틈이라도 엿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땅에 누워 있는 김수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표정 일색이던 한소영의 두 눈이 놀라 치떠졌다.
“머셔….”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순간 닫는다. 무언가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한소영은 자기도 모르게 양팔을 움직여 김수현을 향해 몸을 끌었다.
“머셔너리….”
잔뜩 쉰 목소리로 불렀으나 회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답은커녕, 미동조차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소영은 손을 뻗어 뺨에 찰싹 달라붙은 핏물에 절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었다. 그러자 비로소 편안히 감겨 있는 두 눈이 드러났다.
“머셔너리…. 로드…?”
한소영은 그제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아직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한소영의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김수현의 얼굴이 느릿하게 가까워진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흑 수정 같은 눈동자가 상대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저렇게 땅에 누워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지금 당장에라도 나보라는 듯이 일어설 것만 같다.
그러나 한소영의 초감각은 아까부터 대상의 정보를 낱낱이 전해주고 있었다.
숨은 이미 끊겼다. 그나마 남아 있는 생명의 불꽃도 빠르게 사그라져가고 있다.
한참 동안 망연히 바라보더니 김수현의 얼굴에 자신의 뺨을 살며시 붙인다. 살은 아직 미지근했으나 빠르게 식어가는 중이었다.
“당신….”
그 순간 한소영은 스스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김수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살짝 열렸던 입이 서서히 이지러지다가 “흑.” 소리와 함께 아랫입술이 꽉 짓씹어졌다. 동시에 소리 없이 터진 투명한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턱을 흘러 뚝 떨어졌다.
그때 갑자기 날아온 발차기가 한소영의 등을 퍽 소리가 날 만큼 강타했다.
“이년 때문입니다! 이년이 모두 망쳤어요! 이년! 이 개 같은 년!”
사내는 험한 욕설을 뱉으며 있는 힘껏 발길질한 것이다. 게다가 한 번에서 끝나지 않고, 머리, 얼굴, 등, 다리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후려갈겼지만, 한소영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저 김수현을 힘껏 감싸 안으며 소리 죽여 오열할 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던 발길질이 불현듯 뚝 멎었다.
찡그린 눈을 든 한소영의 낯에 의아한 빛이 서렸다. 자기를 걷어차던 사내와 흰 수염의 노인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한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어느새 눈을 뜬 요정이 한소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 시선이 얽힌 찰나, 한소영은 까닭 모를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에르윈은 겉보기에는 극도로 절제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초감각이 알려주는 상대의 감정은, 미쳐 날뛴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이윽고 에르윈이 흘끗 눈을 돌리자,
“예, 예!”
아직 부르지도 않았는데 사내는 자동으로 차려 자세를 했다.
“포로가 이 한 명만은 아니겠지.”
“그, 그게….”
“지금부터 한 명도 죽이지 말고 전부 데려오도록. 지금 당장.”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자리를 뜨고 싶었던 터라, 사내는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에르윈이 말을 이었다.
“멜리너스.”
“예.”
“사용자든 요정이든, 치료 능력이 가장 좋은 이를 데려와라.”
“…알겠습니다.”
멜리너스 또한 군말 않고 신속하게 걸음을 옮겼다. 물론 왜 이런 명령을 내리는지 전혀 모르고 있지만, 분명히 모종의 뜻이 있으리라 여겼다.
왜냐면 사탄이니까. 포기 직전에서 성공 직전까지 끌고 왔으니까.
그래. 사탄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사위를 천천히 돌아보던 에르윈의 시선이 오른쪽에서 정지했다. 언제 다시 돌아왔는지 약간 맥 빠진 얼굴을 한 타나토스가 땅에 주저앉아 있었다.
“타나토스 님.”
“안 돼.”
이름을 부르자마자 타나토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마치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에르윈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담담히 말을 잇는다.
“엘도라 때처럼은 안 됩니까?”
“안 되는 게 아니라 불가능한 거야. 설령 육신이 죽었어도 영혼만 살아 있으면 살려내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저 경우는 완전히 달라. 육신과 영혼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뿌리까지 깡그리 불살랐어.”
“정녕 방법이 없습니까?”
“그렇다니까? 저놈은 이제 그냥 존재가 사라지고 무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거라고.”
타나토스는 드물게도 평소보다 길게 말하더니 김수현을 보며 쯧 혀를 찼다.
“애초 인간이 화정 정도의 신격을 통제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걸 모르니 시시각각 목숨이 파먹히는 것도 모르지. 멍청한 놈.”
그렇게 말한 타나토스는 숫제 고개를 돌렸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러려는 찰나, 갑자기 낯을 찌푸렸다. 에르윈이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흡사 방법이 없어도 찾아내라는 것 같은 무언의 눈초리였다.
타나토스는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내 힘이 온전하면 가능하기는 해. 강제로라도 생명력을 채워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저번 계획 실패로 조각도 세 개밖에 회수 못 했고, 그조차도 하나는 엘도라를 되살리는 데 썼는데. 이제 와서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심히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성큼성큼 걸어가 김수현의 가슴에 손을 얹는다.
한소영은 이미 본능에 따라 물러나 있었다. 무슨 말을 오고 가는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분위기상 김수현이 소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처 희망이 생기기도 전에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한동안 손을 대고 있던 타나토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안 돼. 이건 지금 내 상태로는 무리….”
그때였다.
“…어라?”
손을 떼려던 타나토스가 문득 눈을 반짝 떴다.
“이거…. 잠깐, 잠깐만….”
귀찮음이 역력하던 얼굴빛에 순식간에 흥미가 동한다.
이윽고 심장이 있는 곳으로 손을 옮겨 지그시 짓누르더니,
“하? 이것 봐라?”
재밌다는 탄성과 함께 입가로 오묘한 미소가 걸렸다.
“통제가…. 아니었어?”
============================ 작품 후기 ============================
이번 후기는 에피소드 2에서 있었던 의문을 제가 어떤 구상으로 내용을 전개했는지 답변을 드리려고 합니다. Q&A에 들어가기 앞서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건, 굳이 제 생각을 맞는다고 여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상황이든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고, 굳이 어느 하나가 정답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 이 후기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제가 맞다.’ 가 아니라, ‘저는 이렇게 생각해서 적었습니다.’ 로 초점을 맞춰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단, 질문 중 내용을 건너서 읽으신 경우는 제외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아래는 최근 10회에 달린 코멘트를 읽고 나름대로 선발한 것들입니다.)
Q 1. 그냥 제로 코드만 얻으면 다 끝나는 거 아니었나요?
Sol ) 아닙니다. 제로 코드는 획득이 끝이 아닌, 소환의 방으로 돌아가 천사를 통해서만 발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김수현이 법역 주변에 워프 게이트를 설치한 겁니다. 나오자마자 바로 도시로 돌아갈 수 있게요.
Q 2. 어째서 악마가 단 시간에 북 대륙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Sol ) 현재 진행 내용의 배경은 북 대륙이 아닌 중앙 대륙입니다. 그리고 중앙 대륙 중 약속의 신전이 있는 곳이지요. 혹시 제가 질문을 잘못 이해한 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도망친 김유현 무리를 봉쇄하는 내용에 달린 코멘트라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마가 첫 기습 때 안솔을 저격했지만, 제갈 해솔의 기지로 도망에는 성공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악마 14 군주 중 하나인 사브나크에게 추적 지시를 내리지요. 그래서 사브나크가 전장을 벗어나 외곽에 있을 수 있었던 겁니다.
Q 3. 김수현이 애초 악마를 먼저 처리하는 게 맞지 않았나요?
Sol ) 김수현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정확히는 약속의 신전을 공략하면서 악마의 동태를 살피려 했지요. 그 당시 악마에게 그나마 유리했던 상황은 주력이 빠진 곳을 기습하거나(물론 이건 김수현도 똑같이 워프 게이트로 대응했지요.), 아니면 북 대륙이 제로 코드를 획득한 직후를 노리는 것이었으니까요. 한데, 여기서 김수현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합니다. 일 회차 때는 어떤 짓을 해도 뚫리지 않던 법역이 김수현과 네 여인이 제단에 들어서자마자 반응한 겁니다. 그걸 알고 있었다면 김수현도 함부로 제단에 가까이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Q 4. 김수현이 혼자서 전쟁터로 돌아가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요.
Sol ) 아마 메모라이즈 초기부터 읽으신 독자 분이시라면, 초창기의 김수현과 현재의 김수현이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느끼고 계실 겁니다. 처음에는 고연주, 유현아를 보자마자 ‘죽여야 한다.’ 는 강박증에 시달렸다면, 지금은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실제로 900회가 넘는 동안 김수현이라는 캐릭터는 스스로 알게 모르게 심경이 변화됐고, 근래 제로 코드를 얻는 장면과, 법역에서 나온 후 형과의 만남 전후로도 심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하나 분명한 건, 이번 전쟁에서 김수현에게 기회는 있었습니다. 형과 한소영을 억지로라도 데리고 탈출할 기회가요. 즉 형과 한소영을 데리고 이탈한다는 선택지와, 형과 한소영과 힘을 합쳐 전장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가 있었는데, 여기서 김수현은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형을 전장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으면서도, 동료들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리하여 갈등 끝에 결국 각 선택지를 절반씩만 선택하게 됩니다. 이는 처음 수단으로만 취급하던 클랜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김유현, 한소영과 비슷한 선으로 올라온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문득 다른 코멘트 하나가 더 떠올랐는데(초점이 다른 질문이기는 하지만요.), 현 상황을 게헨나 전과 비교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당시 김수현은 수많은 동료와 함께 했거니와, 실제로 엘릭서나 여러 주문으로 치료받는 원호가 있었고, 무엇보다 상대는 게헨나 단 혼자였습니다. 하지만 김수현이 등장하자 사탄은 모든걸 포기하고 김수현만 잡는데 전 병력을 집중합니다. 그 결과 일만이 넘는 적에 홀로 에워싸였으며, 그때처럼 누군가를 지키는 게 아니라 지원군이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단, 김수현이 변화한 건 맞습니다. 그 부분이 안타까우셨다면, 그건 어느 독자님이든 개인이 으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Q 5. 북 대륙이 이렇게 쉽게 무너진 게 이해가 가지 않아요. 마무리에 너무 극적 상황을 연출하려고 억지성 짙게 전개하는 건 아닌지?
Sol ) 현재 북 대륙의 전력을 정확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총 병력은 약 이만 명에 가까우며, 그중 최고 정예는 약 오천 정도이고, 베테랑이라 볼 수 있는 사용자는 약 일만, 그리고 나머지 오천은 2~3년차 사용자로 구성돼 있습니다.(작중에 중앙 대륙 원정의 참가 조건을 대폭 확대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후 김수현과 네 여인이 빠지게 되지요. 그에 반해 적의 전력은 타나토스, 대 악마 넷, 마족 전사 약 일만 이천, 동 대륙 전투 직후 남 대륙 생존자와 서 대륙 사용자를 합해서 약 일만 오천, 그리고 요정+정령으로 약 삼만에 가까운 전력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저격으로 안솔을 상태 불능에 빠트리고, 안개를 틈탄 기습 공격으로 우세를 점합니다. 그러니 김수현이 없어진 여덟 시간 동안, 쉽사리 무너졌다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우세한 전력에 있는 적을 맞아 버티다가 붕괴됐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Q 6. 염화 능력까지 발동했으면서 왜 지휘관을 안 잡고 부하만 잡은 거죠?
Sol ) 김수현이 법역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접한 후, 사탄은 두 가지 행동을 취합니다. 하나는 서 대륙을 보내 김수현이 도망시킨 뇌제 무리를 봉쇄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적의 잔존 병력을 포기하고 나머지 병력을 김수현 하나를 잡는데 깡그리 투입합니다. 왜냐면 제로 코드가 가장 중요했으니까요. 물론 이건 김수현 또한 마찬가지지만, 동시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김수현은 제로 코드를 빼앗기지 않는 한편, 형과 한소영(당시 김수현은 한소영의 이탈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간 클랜원들의 안위도 생각해야 했지요. 만에 하나 사탄이 지원군 파견에 성공한다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을 테니까요. 그러니 어떤 수를 써서라도 지원군 파견을 막아야 했고, 거기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바로 염화 발동이었습니다. 말인즉 김수현은 대 악마만 신경 쓸 수는 없었던 겁니다. 이미 몸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염화가 허용하는 시간은 단 300초. 물론 대 악마를 처리하면 휘하 마족의 소멸이라는 부가 이득을 얻을 수 있지만, 대 악마 넷을 각각 쫓으며 처리하는 동안, 남 대륙 사용자나 요정 중 하나라도 놓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곳에도 역시나 지휘관 급의 캐릭터가 있으며, 게다가 사방으로 도망치는 적들이 지원군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염두에 둬야 했지요. 그래서 커다란 기술을 연달아 사용해 상대 진영을 고루고루 타격했습니다. 도망치는 적들을 일부러 붙잡고, 최대한으로 타격을 입혔습니다. 악마를 소멸시킨다는 목적에서 살짝 빗겨난, 어느 누구도 못 가게 하겠다는 목적하에,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혼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지요.
…이렇게 생각하고 적었지만, 이 부분은 독자님들의 말씀대로 확실히 석연치 않는 구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코멘트를 읽으면서 끄덕여지는 말씀들이 있었거든요. 결과적으로 독자 분들께서 납득하실 수 있는 만큼의 상황을 설정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는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완결 이후 필히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현재 수정안은 총 두 개가 나온 상태입니다. 그냥 바로 수정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러려면 여러 부분 손봐야 할 것 같아, 완결 이후에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한테 현재 제일 중요한 게 연재이며, 완결 전까지 부분이라도 리메이크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아 내린 결정이오니, 부디 너른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후기가 생각보다 길어졌네요.
충분한 답변이 되었기를 바라며, 독자분들 모두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