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ZE RAW novel - Chapter 951
00950 If You Change, One. =========================================================================
…온다고?
아스타로트의 말에 홀연 눈을 들고 말았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는 순간, 돌연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냐면 먼빛의 아래로, 정말로 수천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으니. 단순히 온다는 말만 들었을 때와 직접 눈으로 보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뛰어오는 것도, 달려오지도 않는다. 마침내 출현한 사천 명의 북 대륙 사용자는 그저 보통 행군하는 속도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내의 웅성거림은 가일층 심해지는 중이었다. 심지어 선두에 있는 적들은 주춤주춤 물러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렇게 단상을 기준으로 사오백 미터 앞까지 접근했을 즈음, 비로소 행군이 멈췄다. 조심스레 물러나던 적들은 어느새 학익진과 같은 형태로 북 대륙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북 대륙 진영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형이었다.
형은 차분히 주변을 돌아보다가, 갑자기 턱을 젖혀 내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올려다봤다. 형이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의 고동이 더욱 빨라졌다.
그때 에르윈이 단상의 끝자락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양팔을 살며시 펼치더니 조신한 숙녀와도 같이 정중하게 인사한다.
(우리는 북 대륙을 환영해요.)
(…환영?)
형도 증폭된 음성으로 인사를 받는다. 허나 어딘가 모르게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내 착각일까.
형은 한동안 날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품속으로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으나 그것이 제로 코드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왜냐면 대 악마들이 작게나마 탄성을 터뜨렸으니까.
(역시….)
에르윈은 지금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현명한 선택을 할 줄 알았어요. 뇌제.)
(…….)
(저희를 믿고 이렇게 친히 걸음 해주신 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에르윈은 긴장된 분위기를 풀고 대화의 장을 마련하려 애쓰는 듯했다. 그러나 형은 단칼에 말을 끊고 오른손을 느릿하게 움켜쥐었다.
(수현이를 보내라.)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없고, 이것저것 잴 것도 없다는 단호한 직구였다. 에르윈은 순간 멈칫했으나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살아 있어요. 그리고 돌아갈 준비도 끝났죠. 보시다시피.)
(그럼 보내.)
(물론 그럴 거예요. …하지만, 그전에 저희가 받을 게 하나 있지 않나요?)
(그전에 받는 게 아니라 그 후에 받는 거겠지. 보내는 게 우선이다.)
형의 말투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어조가 깔려 있었다. 에르윈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대표의 대화가 끊기자 적막하던 분위기가 한층 고조돼 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에르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요. 그러시겠죠. 후보다는 선을 먼저 차지하는 게 마음이 놓이니까. 그러니 불안해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해요.)
약간 비꼬는 어조로 뇌까리더니 살그머니 팔짱을 낀다.
(유세 떨 의도는 없지만…. 저희 쪽 조건은 검토해보셨나요?)
형은 담담히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 조건들은 저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였어요. 특히, 다섯 번째 항목은 더더욱.)
(마지막 조건은 양보의 의미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을 대비한 사항이기도 했죠.)
(그러니까 직접 말씀하세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에서 서로 만족할 수 있을지.)
(들어보고 타당하다 싶으면 저희 또한 뇌제의 말을 따르겠어요.)
길었던 에르윈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형이 침묵했다.
하지만 두 번째로 찾아온 정적 또한 오래가지 않았다.
(확실히…. 좋은 조건이기는 했어.)
에르윈의 말을 인정한 형이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 나왔다.
(처음 들었을 때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지.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자.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야.)
(후후. 그렇죠. 일종의 예우라고 생각하셔도 좋아요.)
어쨌든 대화의 장은 생성됐다고 여겼는지 에르윈은 기쁜 낯빛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말인데. 그 마지막 조건이라는 거….)
그때.
(어쩌지? 딱히 생각해온 게 없는데.)
갑자기 그렇게 말한 형은,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너흴 믿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네?)
(그러니 애초 협상 따위, 오히려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
씩 입꼬리를 올리더니 손에 쥔 제로 코드를 품속으로 도로 넣는다.
에르윈의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형의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극도로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얼음처럼 굳어 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방금 말은 빼도 박도 못하는 선전포고였다.
(그러니까 갖고 싶으면 뺏어봐. 우리도 똑같이 할 테니까.)
그 한 마디에 오르락내리락하던 일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이내 무기를 꺼내는 소음과 시위를 당기는 소리로 순간적으로 시끄러워지는 것도 당연지사.
“하.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 순간 탄식을 터뜨린 아스타로트가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스타로트. 가만히 있어라.”
에르윈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으나 아스타로트는 기어코 나를 끌고 가장자리로 걸었다. 그리고 억지로 꿇어 앉히더니,
“큭!”
갑작스레 머리칼을 세게 움켜잡는 감촉이 느껴졌다.
(어이, 뇌제.)
아스타로트의 분노한 음성이 사방을 왕왕 울렸다.
(도대체가 말이야…. 왜 그렇게 뻗대는 거지? 뭘 믿고?)
머리카락을 움켜쥔 힘은 시시각각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숫제 머리가 들리다 못해 목이 뽑혀나갈 것만 같았다.
(그냥 조용히 제로 코드 넘기고. 그냥 조용히 넘겨주는 포로들 받고. 그리고 조용히 꺼지면 될 거 아니냐고.)
(그 말은 애초 다른 조건은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는 건가?)
형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죽거리는 음성으로 답했다. 아스타로트는 싱겁게 입을 터뜨렸다.
(어휴…. 이래서 벌레 새끼들은 안 돼. 조금만 잘해주면 그냥, 응? 자기들이 아주 신이라도 된 줄 알아요.)
그렇게 말한 아스타로트는 킬킬 웃다가 갑작스레 정색했다.
(됐고, 마지막 기회다. 우리도 더 말 안 할 테니까. 교환할 거야, 말 거야? 뭐 동시 교환 정도면 수긍할 용의도 있으니까.)
그리고 살벌한 음성이 귓전을 흐르는 찰나,
“!”
문득, 예전의 기억이 뇌리를 번개처럼 스쳤다. 그와 동시에 아까 내려오면서 느꼈던 기시감이 갑작스럽게 강렬해졌다.
(참고로 말하자면 네가 여기 제로 코드를 갖고 왔을 때부터 게임은 끝난 거야. 왜냐고? 널 죽이고 빼앗으면 그만이거든.)
(닥치고 그 손부터 놓는 게 어때?)
그러는 동안에도 둘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경고하건대, 물어본 것에만 답하는 게 좋을 거다.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의 머리통이 터지는 게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머리카락이 잡힌 고통도, 형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 그럼 나도 경고하지. 아스타로트? 지금 당장 손 떼는 게 좋을 거다. 죽고 싶지 않으면.)
왜냐면, 왜냐면….
(뭐? 경고?)
…그래. 확실하게 있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방금 완전히 떠올랐다. 과거에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확실히 있다.
그러니까 이 회차가 아니라 일 회차에.
왜 이제껏 잊고 있었던 걸까.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걸.
(이게 진짜…!)
그때 머리를 쥐어짜 터뜨리려는 것처럼 손아귀의 힘이 부지불식간에 강해졌다.
쿵!
그 찰나의 순간, 무섭도록 짧은 침묵을 가르며 무언가가 단상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질척질척한 액체가 뺨을 철썩 때리고, 시야로 붉은 줄기가 물에 탄 물감처럼 번졌다. 액체가 핏물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뭐, 뭐야?”
아스타로트도 순간적으로 당황했는지 어느 순간 손아귀의 힘도 풀려 있었다. 이리저리 눈을 돌려봤으나 어떠한 이상 현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단, 인근에 서 있던 놈들이 바라보는 곳으로 웬 마족 시체 하나가 널브러져 있을 뿐.
“이거…. 아까 정찰 보냈던 놈 중 한 놈 아니야?”
리리스가 망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잠깐만.
정찰 보냈던 놈 중 하나라고?
설마….
그때였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불현듯 위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한껏 고양해 뜨거워진 목덜미를 식혔다.
끼르르르, 끼르르르…!
이제 곧 벌어질 일을 알고 있다는 듯, 시체를 갈구하는 까마귀의 불길한 울음도 아스라이 들리는 듯했다.
그 순간 돌연히 사위가 어둑해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먹구름이 낀 것 같다고 할까.
나는 퍼뜩 눈을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핏물이 눈앞을 어지럽혔으나 머리를 세게 털자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형은 그 누구보다 침착한 얼굴로 고요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뇌신은커녕, 일말의 마력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에는 멍한 기분으로 천천히 머리를 젖혀 형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펄럭, 펄럭!
그리고 이어지는 거대한 무언가의 날갯짓 소리.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펄럭!
가히 헤아릴 수 없는 날갯짓 소리와 나며 미세한 바람이 몸을 슬쩍슬쩍 스치기 시작한다.
“아…?”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아스타로트는 물론, 대 악마 전원이 화들짝 고개를 치켰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전부 하나같이 멍한 기색으로 입을 쩍 벌린다.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지금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걸까.
머릿속으로 온갖 복잡함이 휘몰아치는 속에서, 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윽고 일 초도 채 안 되는 순간,
“하늘! 하늘에…!”
구름을 푹 헤치며 무언가 거대한 형체가 드러났고,
끼루루루루루루룩!
인간의 목소리라 볼 수 없는, 괴물이 울부짖는 듯한 괴성이 하늘을 왕왕 울렸다.
“괴, 괴조 떼다! 괴조 떼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고래고래 지르는 비명에 언뜻 정신을 들었다.
맞다. 옛날에 본 기억이 있다. 괴조, 괴조가 맞다.
수십, 아니 수백? 모르겠다.
단 하나 확실한 건, 기천에 가까운 상앗빛 괴조들이 느닷없이 하늘을 빽빽하게 가릴 정도로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어마어마한 그림자가 단상을 무서운 속도로 덮어오고 있다는 것.
크르르르르르르르…!
그러더니 어떤 예고도 전조도 없이 끓는 듯한 부르짖음이 하늘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홀로 은은한 푸른빛을 띤, 유난히 커다란 몸집을 가진 괴조가 나타나 주둥이를 쩍 벌렸다. 그 순간이었다.
크롸롸롸롸롸롸롸!
사납기 짝이 없는 포효가 온 세상을 찢어발길 것 같은 기세로 장내를 무시무시하게 떨어 울렸다.
이윽고 선두의 괴조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몹시 자연스럽게 지면으로 활강하고, 뒤쪽의 괴조들도 있는 힘껏 날개를 펼쳐 동시다발적으로 푸른빛 괴조를 따르기 시작한다. 가속까지는 아니었지만,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으며 한 마리도 남김없이 땅으로 강하한다.
그 광경을, 무어라 형언해야 할까.
기천에 가까운 괴조 무리가 한꺼번에 허공을 미끄러지듯이 내려와 착지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다음 순간,
콰콰콰쾅!
단숨에 지면으로 착지한 찰나,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크으으으!”
“으, 으아아아아아!”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충격에 대비하지 못했는지 도처에서 비명이 터졌다. 대지가 벌떡 일어나고 폭풍과도 같은 강풍이 사방을 휩쓸었다. 어찌나 충격파가 강한지 심지어 굳건한 단상마저도 지진이라도 난 듯 덜덜거리며 흔들릴 지경이었다.
당장에라도 눈을 감고 싶었으나, 한껏 눈을 찡그리면서도 정면을 쏘아보듯이 응시했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파편을 동반한 폭풍에 쓸려 우르르 무너지는 적들.
대 전차 지뢰 수백 개를 일거에 터뜨린 듯, 곳곳에서 버섯구름처럼 일어나는 어마어마한 흙 연기.
그리고.
“……!”
그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홀로 우뚝 서서 나부끼는, 사자 모양이 그려진 눈부신 금빛을 반사하는 커다란 깃발 하나.
“말도….”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안 돼….”
그것은 틀림없이 황금 사자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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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얼마 전에 어떤 독자 분께서 코멘트로 말씀해주셨는데, 제가 항상 월요일마다 쉰다고 하셨습니다.
가만히 휴재 날짜를 헤아려보니 맞는 말씀이더군요.
그리고 내일은 8월 3일로 월요일입니다.
네. 월요일이네요. 하하.
그러므로 내일 8월 3일(월요일) 하루 안 쉬겠습니다.
부디 독자 분들의 너른 양해 부탁 드립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