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26
“하아.”
“……”
“지금 이 럴 때가 아닌데, 하아……”
“……”
“다들 친분을 쌓기에 여념이 없을텐데, 우리 주군께서는 하아아……”
문밖에서 한숨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
자신더러 들으라고.
아마 문에 찰싹 달라붙어서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탄신연 개회식이 있던 그날.
내내 교주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그 꿍꿍이를 추측하던 능운비는 곧바로 삭월각으로 돌아와 버렸다.
-몸이 아파서……
그 성의 없는 핑계에도 교주는 웬일로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왕천이 돌아오는 내내 각 세력과 친분을 다지라며 잔소리를 해 댔지만, 사람 귀가 왜 두 개겠는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라고 그런 거다.
친분? 그딴 게 왜 필요하단 말인가?
애초에 마교가 어찌 되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교주 역시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도주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번 계획을 세우고 백번 다 실패하더라도, 백한 번째는 성공하고 말리라.
니가 백날 경을 외워 봐라, 내가 듣나.
나는 사람 말은 일절 모르는 소다.
……라고 다짐했었다.
그랬더니 방법을 바꾸어 아침부터 저 지랄이다.
신경이 쓰여서 도무지 정신 집중이 안된다.
그렇다고 패서 막기에는 무공이 너무 고강하고, 설득 따위는 당해 주지 않을 게 뻔하다.
“하아…… 내 입신양명, 내 장밋빛 미래…….하아……”
이런 썅, 한숨에 무슨 음공을 섞어놨나?
뭔 놈의 한숨이 심금을 울리고 지랄이야?
참다못한 능운비가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겨우 일어났다.
가기 싫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저 망할 한숨을 계속 듣고 있다가는 정신 분열이 올 것만 같았다.
“왕천.”
“하아, 왜요? 밥 드려요? 아직 때가 되진 않았는데……”
내가 식충이냐? 방에 앉아서 주는밥이나 처먹고 있게?
“가자.”
“어딜요?”
“탄신연.”
“……예?”
“가자고.”
“정말요?”
짜증이 가득 스민 목소리였지만, 왕천은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대답하며 벌떡 일어났다.
아주 얼굴 곳곳에 기쁨이 납시었다.
그리 좋은가?
하지만 왕천의 생각대로 움직여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대신!”
“……?”
“술자린 안 간다.”
“그럼요?”
“비무 대회.”
“비무…… 대회요?”
“그래, 그것도 탄신연 행사 중 하나잖아.”
“……”
능운비의 말에 왕천이 멍하니 눈을 끔뻑이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풀썩 주저 앉았다.
“하아.”
“……”
“거길 뭐 하러 갑니까?”
“뭐?”
“그 비무 대회가 어떤 목적인지 모르세요?”
왜 모르겠는가?
마교인이 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하급 무인들을 위한 자리로, 귀빈석이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아무도 그곳에 앉아 참관하진 않는다.
비무 대회의 수준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탄신연의 분위기를 돋우고, 하급 무인들에게 입신양명의 기회를 주려는 교주의 은총 같은 것이었다.
하여 최후의 승자를 비롯해 순위에 든 몇몇에겐 제법 큰 보상도 주어진다.
바로 본성 무인대에 속할 수 있는 기회가.
비록 훈련 중에 물이나 떠 나르고 선배들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성외의 무인들에게는 천금과 같은 기회다.
본성 무인대가 가진 상승의 무공을 배울 수 있으니까.
뿐인가?
교주의 이름이 박힌 상패와 무기, 금전적 보상까지 뒤따른다.
물론 대리수여다.
결승전이 끝나면 장로 중 하나가 느지막이 나타나 성과를 치하하며 보상을 쥐여줄 테지.
그러니 당연히 그곳으로 간다.
교주는 물론이고 귀빈들의 관심 밖에 있는 장소니, 누군가 자신을 귀찮게 할 일은 없을 테니까.
다만, 왕천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곳에 능운비가 교주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테니까.
“주군.”
“응?”
“가기 싫으시면 그냥 가기 싫다고 하세요.”
“……”
“아무도 신경 안 쓰는 하급 무인들의 비무를 뭐 하러 구경하신다고…… 정작 가야 할 곳은 따로 있구만. 가세요, 가. 전 그냥 이렇게 한숨만 쉬다가 폐가 쪼그라들어서 죽어 버릴게요.”
왕천이 아예 고개를돌려 버린 채 손을 휘휘 저었다.
망할 놈이 주군 대하기를 개똥만도 못하게…….
하지만 어떻게든 설득해서 데려가야 한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두고두고 한숨 소리가 끊이지 않을 테니까.
왕천을 빤히 쳐다보던 능운비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낮은 목소리로 그를 나무랐다.
“못난 놈.”
“……?”
“너는 네 주군이 그런 교주가 되길 바란 것이냐?”
“……예?”
가볍기가 깃털 같았던 능운비의 태도가 갑자기 진중해지자 왕천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나더러 마음에도 없는 친분을 쌓기위해 고까운 눈빛들 앞에 굳이 얼굴을 디밀고 수모를 당하란 말이냐?”
“주, 주군? 그게 무슨?”
“닥쳐라.”
“……”
날카롭게 벼린 도끼날처럼 서슬 퍼런 목소리에, 왕천이 찔끔하며 입을 닫았다.
“너의 마교는 저 높은 자리에만 있더냐?”
“……”
“마교의 전신은 일월교다. 한때 위정자들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변방으로 도망친 뭇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던!”
“주, 주군,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 입 다물라!”
“……”
호통 소리가 높아지자 왕천이 목을 잔뜩 움츠리며 눈치를 살폈다.
“지금의 마교는 그 백성들의 믿음에서 출발하였고, 수많은 하급 무인들이 중원과 싸우며 흘린 피로 굳건해졌다.”
“……”
“그런데 너는 어째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 몇몇이 전부인 양 나더러 그곳으로 가라 한단 말이냐? 어찌하여 마교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서야 할 나에게, 그들 몇몇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아첨하라 하는 것이냐?”
“……”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가겠다. 저 몇몇 수뇌가 아닌, 내 백성이 모인 자리에 앉아 함께 웃고 함께 울 것이다. 그들의 선전을 치하하고, 그들의 마음에 다가설 것이다. 그것이 내가 되고자 하는 교주다.”
“주군.”
“따르지 않을 것이라면 말아라.”
“……”
능운비가 싸늘히 말하고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왕천에게 주승이 다가왔다.
“호위장께서 꾸지람을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대주님.”
“저런 분이시지요.”
“……”
“십 년을 넘게 모신 분이 어찌 저보다도 모르십니까? 불과 며칠 전의 일을 보시고도 모르시겠습니까?”
“예? 그게 무슨?”
“그날 객점에서, 주군께서는 제게 구분 지어 지키라 하셨지요.”
“……”
“그저 구분할 만큼 강해지면 된다 생각했는데…… 다음날 주군의 명으로 아이에게 공을 전해 주러 갔더랬지요.”
주승의 말에 왕천이 눈을 끔벅이며 며칠 전의 일을 회상했다.
“아이가 기뻐하더군요. 삼공자께선 참으로 멋진 분이라며, 앞으로 주군을 지키는 무인이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
“그 어미는 고맙다며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후환이 있을까 두려워 밤잠을 설쳤다더군요. 그러고는 치마 속에 감춘 전낭을 내밉디다. 형편이 변변치 못해 제대로 대접은 못 하지만 술이라도 한잔하라면서요. 철전 몇개가 고작이었으나, 그 눈에 담긴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충심이었습니다.”
“……”
“소문이 퍼진 겐지, 그 주변에 사는 이들이 삼공자님을 연호하더군요.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건“
“없지요. 그저 충성해야 한다고 교육받아서 그렇다고 여겼으니까.”
“……”
“그런 분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주군은……. 어쩌면, 과거 일월교의 이름아래 모인 백성들이 우러러보았던 초대처럼 말입니다. 그때는 마교도 지금같지 않았지요. 진심으로 모두의 존경을 받았으니까.”
“……”
“그날 이후로, 저는 주군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반박지 않습니다. 개회식 날 그분께서 주무셨어도, 다른 이들과 달리 멋들어진 등장을 하지 않으셨어도, 또한 후에 교주가 되지 못하실지라도.”
주승이 빙긋 웃으며 왕천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는 능운비의 뒤를 따랐다.
“그럼 오늘은 호위장을 대신하여 제가 주군을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혹 또 모르지요. 비무 대회에 나선 이들 중 주군께 힘이 될 만한 재목이 있을지.”
“……”
멀어지는 주승의 뒷모습을, 왕천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더럽게 말 많네…….
하지만 동시에, 왕천은 지난 십 년이란 세월을 한 번에 빼앗겨 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젠장…….
부끄러움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주구우우운!”
왕천은 더 고민치 않고 쏜살같이 내달렸다.
물론 그 목소리는 먼저 출발한 능운비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휴우, 다행이다.
어떻게 설득할까를 고민하다가 오래전 ‘그분’께서 해 주셨던 말을 시기적절하게 인용했더랬다.
당시엔 자신도 홀딱 넘어갔던 터라 목숨까지 걸었었다.
다만 지금은 대충 상황에 맞춰서 두서없이 늘어놓은 터라 욕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여겼는데…….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들어 보니 잘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흡족하게 웃던 능운비가 문득 하늘을 을려다보았다.
홀러가는 구름이 익숙한 모습으로 변한 것은 마음 한구석에 남은 그리움 때문이리라.
고맙습니다.
참으로 기똥차게 써먹었어요.
제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던 말씀은 마교에서도 통하는 모양이에요.
덕분에 어쩌면 당분간은 잔소리를 안 들어도 될 거 같구요.
능운비는 다시 한번 기억 속의 ‘그분’께 감사함을 느꼈고, 자연히 그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반드시 마교를 도망쳐 찾아가리라.
* * *
그날 이후, 능운비는 탄신연 축하 행사 중 하나인 비무 대회만 참관했다.
개과천선한(?) 왕천은 더 이상 한숨을 쉬지 않았고,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와중에 텅 빈 귀빈석을 홀로 채운 능운비의 모습에 비무장에선 매일매일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급 무인들의 비무 대회를 교주의 제자가 참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연호하는 이들에게 대충 손이나 흔들어 주니 어 찌나 좋아하는지.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좋아해 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귀찮게 하는 놈들도 없고…….
와중에 보다 보니 비무에 참가한 무인들의 수준이 나쁘지 않았다.
뭔가 원초적으로 치고받는 모습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날이 홀러, 어느덧 결승이 시작될 참이었다.
“오라버니, 오늘도 여기 계신 거예요? 매일같이 나오신다던데, 혹시 돈이라도 거신 겁니까?”
“……”
턱을 괴고 앉아 결승이 시작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능운비를 향해 소선화가 생긋 웃으며 말을 걸어 왔다.
하, 귀찮게시리.
얘는 또 왜 뜬금없이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와중에 어깨에는 시커먼 새 한 마리를 얹고 있다.
“그건…… 까마귀냐?”
“어허! 까마귀라니요?”
“……”
능운비의 감상에 소선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희 야수문이 자랑하는 독혈오조라구요.”
“……”
독혈 오조 (毒血烏鳥).
대충 영물이라는 뜻이다.
독혈이 붙은 걸 보니, 다른 새들이 벌레를 잡아 먹을 때 독물을 쪼아먹고 그 혈관에 피 대신 독이 흐를 게 틀림없는 검은 새.
“……까마귀 맞구만.”
능운비가 입을 몌죽거리자 옆자리에 털썩 앉은 소선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쯧, 재능 충만하신 사형께서 영물 지식엔 이리도 취약하실 줄이야.”
“그 재능 사라진 지 오래됐다.”
“에이, 누굴 속이려고? 차라리 귀신을 속이세요. 사형의 눈빛만 봐도 얼마나 자신감에 차 있는지가 훤히 드러나는데.”
“……”
능운비를 빤히 쳐다보던 소선화가 당치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또 그 눈빛이다.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짜증이 난 능운비는 비무대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런데 넌 웬일이냐? 지금쯤 세력들을 찾아다니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는 사형은요? 누구보다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친분을 쌓으셔야 할 분이, 탄신연 내내 비무 대회나 보고 계시네요?”
“……”
왕천 때문이었다.
첫날 이후 삭월각에 틀어박혀 있으려 했는데, 곁에서 내내 한숨을 쉬어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뭐라도 해야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여긴데, 소선화가 나타났으니 이 평화도 이제 끝이다.
뭐, 결승전이기도했고.
“어? 어디 가시게요?”
능운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선화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재미가 없어져서 그만 가 보려고. 넌 방금 왔으니 재미 있게 보다 가라.”
“응? 그게 무슨 소리예요?”
“……?”
“왕 호위장이 따로 보고하지 않았어요?”
“보고? 무슨 보고?”
능운비가 혹시나 귀찮게 할까 봐 멀리 귀빈석 밖으로 떨어뜨려 놓은 왕천을 힐끗거렸다.
눈이 마주친 왕천이 ‘아차”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저거, 저거…… 또 보고를 빼 먹은게 분명하다.
“스승님께서 오늘 결승은 전부 참관하라고 명하셨는데요?”
“으응?”
“제가 바쁜 와중에 여길 왜 왔겠어요? 아마 다들 곧 도착할걸요?”
“……”
이건 또 뭔 소리지?
비무 대회를 교주가 참관하기로 했다고?
엉거주춤 일어나 있던 능운비는 갑자기 조용해진 주변 분위기에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운비와 선화가 먼저 와 있었구나.”
“……”
교주가 나타났다.
……왜?
나한테 뭔 자철석 같은 거라도 붙여놓은 거야?
“녀석, 인사도 안 할 참이더냐?”
“……아! 교주님을 뵙습니다.”
“엎드려 절받기로구나.”
“……”
엎드리진 않으셨는……데가 아니라, 대체 웬일이지?
말 그대로 초유의 사태다.
하급 무인들끼리 경쟁하는 비무 대회를 교주가 참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심지어 담운천뿐만이 아니다.
능운비와 소선화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 각 가문의 가주, 원로원주를 비롯한 전대 고수에 장로들까지.
전부 몰려와 귀빈석의 빈자리를 가득 채웠다.
“와아아아!”
상상도 못 했던 방문이니,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환호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던 담운천이 능운비를 힐끗 쳐다보았다.
“뭘 보고 있는 게냐? 와서 앉거라.”
“예.”
담운천의 핀잔에 능운비가 재빨리 자신의 지정석을 찾아 앉았다.
“시작하라.”
“예! 교주님!”
교주가 나지막하게 명을 내리자 비무 대회를 주관하던 무인이 잔뜩 경직된 모습으로 결승에 오른 두 무인을 호명했다.
“겨, 결승에 오른 비무자들은 속히 나서라!”
“예!”
주관하는 무인뿐만이 아니다. 결승에 임한 무인들도 잔뜩 긴장한 듯 뻣뻣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래서야…….
“흠, 어째 이번 비무 대회의 결승에 오른 무인들 실력이 예년만 못한 듯싶구먼?”
“그러게나 말입니다. 몸이 많이 굳었군요.”
“쯧, 마교의 기초를 다질 자들의 수준이 이래서야.”
담운천을 시작으로 귀빈석의 인물들이 탐탁지 않음을 드러내자, 오장로 구자성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 그럴 만도 하다.
교내 무인대의 훈련에 관련된 직무를 맡은 자였고, 이번 비무 대회도 직접 주관했으니까.
그런데 니들, 정말 모르는 거야?
결승에 오른 자들의 수준이 갑자기 낮아 보이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어?
이건 건성으로 비무 대회를 기획한 구자성의 책임이 절대로 아니었다.
예상치 못했던 교주의 참관 때문이다.
마교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최말단이나 다름없는 하급 무인들이 긴장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지.
그런 것도 모르고 수준을 탓하고 앉았다니…….
하여간 높은 놈들은 저래서 안 된다.
스옥.
능운비가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그때, 구자성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장로, 막 시작되려 하는데 어딜가는가?”
“예? 아, 소피가……”
“원 사람 참. 어째 앞선 자리에서 술을 많이 하는 것 같더니…… 속히 다녀오게.”
“예, 교주님.”
교주의 허락을 얻은 구자성이 냉큼 귀빈석을 빠져 나갔다.
저놈의 소피.
왕천도 그렇고, 핑계 댈 말이 저것뿐인가?
딱 봐도 애들 조지러 가는 모양새다.
아마 자리를 벗어나는 대로 미친 듯이 전음을 날리겠지.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교주의 앞에서 제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 되면 알아서들 하라고…….
저 봐라, 구자성이 사라지기 무섭게 결승에 오른 무인들이 똑같이 움찔댄다. 비무를 주관하는 놈의 눈깔은 아예 튀어나올 정도다.
하아…… 젠장, 제법 재미있을 것 같았는데.
이젠 안 봐도 뻔하다.
몸이 굳어질 대로 굳어진 무인들이 어찌 제 실력을 발휘할수 있겠는가?
능운비가 마뜩잖은 눈으로 교주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대체 왜 계획에도 없는 참관을 하러 온 거지?
공사다망하신 분들까지 잔뜩 이끌고…….
“시, 시작!”
능운비가 교주의 속내를 궁금해하는 사이, 주관하는 무인의 신호로 결승 비무가 시작되었다.
“하압!”
“차앗!”
기합 소리는 우렁차지만, 힘이 너무 들어갔다. 사력을 다하는 모양이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관중들 또한 비슷하게 느꼈는지, 다들 실망한 표정이었다.
아마 교주가 없었다면 야유를 보내다 못해 들고 있던 각종 집기들을 던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전부 교주 때문이다.
물론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허어! 저래서야.”
“음…….”
“난잡하구만.”
그럴 수밖에.
비무가 극으로 치달을수록 점점 더 개싸움으로 변해 간다.
머리채 잡고 아주 뒹굴기까지…….
뭔가 보여 주고 싶었던 마음은 알겠지만, 영 볼씽사납기만 했다.
“이보게, 오장로.”
“……예, 교주님.”
막 소피를 가장한 위협을 끝내고 돌아온 구자성이 교주의 부름에 힘없이 대답했다.
“자네가 보기에도 좀…… 그렇지?”
“……예.”
“아무래도 교에 속한 모든 곳에 전언이라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잘 좀해 보게. 이래서야…… 원, 쯧쯧.”
“……”
교주가 혀를 찼다.
그걸로 마교라는 뿌리에서 자란 모든 곳에 속해 있는 무인들의 훈련량이 정해졌다.
아마 비무 대회가 끝나자마자 공문이 급편으로 하달될 것이다.
각지의 훈련 교관들은 소속 무인들의 성취를 높이기 위해 머리를 싸멜 터이고, 무인들은 두 배 이상의 훈련을 소화해 내야 할 것이다.
교주가 무심코 던진 돌에 애꿎은 개구리들만 죽어 나가게 생겼다.
능운비가 얼굴도 모르는 이들을 애도하는데 교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이리 싸늘해서야 어찌 축제라 하겠는가? 누군가 나서서 홍을 돋워야 하지 않겠나?”
담운천의 말에 눈치를 살피던 귀빈들이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교주님, 이번에 저희 가문에서 새로 기른 무인들이 있는데 시연을 보여볼까요?”
“아닙니다. 저희 가문이……”
교주의 눈에 들 기회를 포착한 이들이 곳곳에서 손을 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건 너무 뻔하지 않은가?”
“……”
그러나 교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뭐랄까, 좀…… 극적인 느낌이 있으면 좋지 않겠냐 말이지.”
“극적인…… 느낌이요?”
“그래. 가령 위기에 처했던 이가 극적으로 살아나는 듯한…… 그런 느낌이면 좋겠는데.”
“……”
“무공을 잃었는데 기적적으로다가 되찾았다든가.”
교주의 말이 더해질 때마다 시선이 하나둘씩 능운비 쪽으로 모인다.
돌이 별안간 이상한 곳으로 날아왔다.
그 돌에 맞는 개구리가…… 설마 나냐?
어느새 귀빈석의 모두가 그를 쳐다보고 있다.
뭘 봐, 이 새끼들아!
눈깔을 확 쑤셔 버릴까보다!
그리 외치며 난장판을 만들어 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귀빈석이다 아무리 귀하디귀한 교주의 제자라곤 해도, 능운비 따위가 어찌해 볼 위인은 한 명도 없었다.
“하하, 스, 스승님?”
“응?”
“혹시, 저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
능운비의 말에 그를 빤히 쳐다보던 담운천이 별안간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람처럼 손뼉을 쳤다.
짝 소리가 어찌나 영롱한지.
“오! 그래! 운비 네가 좋겠구나.”
“……”
“주화입마에 걸렸던 제자가 제 실력을 되찾았다. 아니, 이전보다 훨씬 더 나아졌다. 옳지, 옳지. 이보다 극적인 이야깃거리가 어디 있단 말이냐?”
담운천이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연신 손뼉을 쳐 댔다.
좋냐? 좋아?
딱 봐도 처음부터 자신을 콕 찍어서 말한 게 분명한데?
“오! 참으로 기똥찬 말씀이십니다. 흥을 돋우기에 제격일 듯합니다.”
“맞습니다. 안 그래도 진심을 다한 교주님의 삼격을 버틴 모습을 원로원주만 보았다기에 안타까웠는데, 드디어 저희도 볼 수 있겠군요?”
“암요! 소설옥수께서도 사석에서 어찌나 자랑을 하시 던지요.”
“맞습니다. 듣자 하니, 표기대 세 부대가 펼친 천라지망까지 뚫어 가며 수련을 하셨다면서요?”
“……”
귀빈석에 앉은 모두가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던지며 교주의 비위를 맞췄다.
……천라지망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능운비에게 쏠리자 원로원주의 표정은 티 나게 일그러지고, 소설옥수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하, 자랑질이 가문 내력인 모양이다.
모전자전이란 말이 거기서 나왔구나.
하지만 막아야 했다. 실력을 보여 자신의 경쟁자들에게 경계심을 심어 주고 싶은 마음 따윈 추호도 없었으니까.
“하하, 저기 스승님?”
“응?”
“농이시죠?”
“……”
“교주님의 깊은 뜻을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제자 아직 미령하여……. 어제 잠을 잘 못잔건지 담도 온듯하고……”
능운비는 비굴한 웃음을 머금고 약한 척까지 해 가며 어떻게든 담운천의 뜻을 사양하고자 했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담운천이 무심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졌다.
“농 같으냐?”
“……”
씨부럴…… 어찌나 살벌하신지. 눈이 절로 내리깔린다.
망할 교주, 대체 무슨 끙끙이란 말인가?
눈깔에 진심이 뚝뚝 흘러넘치는게…… 도무지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당신 장난감이야? 한 번씩 괴롭히지 않으면 어디 혓바늘이라도 돋아?
하지만 그 무심한 한마디에 소름이 오소소 돋은 능운비는 곧바로 해맑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분위기부터가 글러 먹었다. 전부 교주와 한통속이 되어서 자신만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제자는 처음부터 진심이신 줄 알았습니다. 암요! 제가 해야지요. 얼마나 극적이겠습니까? 핫핫핫!”
“그랬구나. 내 뜻을 이해해 주니 참으로 다행이다.”
“……”
고개를 주억거린 담운천이 이내 다시 고민에 빠졌다.
“그나저나, 상대는 누가 좋을까?”
데구루루 구르는 눈동자.
그런데 왜 방향이 제자들 쪽인 거지?
능운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굴러가던 담운천의 눈동자가 한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이어진 감정은 놀람과 경악이었다.
“네가 좋겠구나.”
“……”
담운천에게 지목된 사내가 찰나의 고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하신다면.”
“……”
능운비는 그저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왜 재야?
제자가 다섯이나 되는데, 왜 하필 그 중에서 제일 강하다는…… 대공자 위지혁인 건데?
“사제는 무얼 하는 거냐? 스승님께서 명하신 일이다. 속히 따라 나오거라.”
“……”
위지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비무대로 몸을 날렸다.
옷자락을 펄럭이며 날아가 비무대에 턱 하니 내려서는 모습에, 관중들이 묘한 기대감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운비야.”
“……”
“네 사형이 기다리지 않느냐?”
담운천의 채근에 모두의 눈동자가 능운비의 등을 떠밀었다.
망할 마교 놈들, 내 언젠가 떠나고나면 마교 방향으로 오줌도 싸지 않으리라.
어깨를 축 늘어뜨린 능운비가 비무대로 향했다.
그래, 해 주마.
그까짓 것 대충 장단이나 맞춰 주면 될 일이 아닌가?
“하아, 갑니다. 가요. 가면 될 것 아닙니까?”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툴툴거림이 고작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뭘 기대해서 시킨 것인지 몰라도 결과를 정하는 건 자신이다.
까짓거, 흥이나 좀 돋구다 대충 적당한 시점에서 쓰러지면 그만이지.
교주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능운비가 몰래 한숨을 쉬며 비무장을 향해 걸었다.
터벅, 터벅…….
아, 가기 싫다.
주인에게 고티를 잡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사형!”
“……”
소선화가 아련한 목소리로 능운비를 불러 세운다.
너도 내가 처량하지?
“크윽! 안타깝습니다. 제가 싸워 보고싶었는데……”
“……”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며 눈동자에 열의를 불태우는 모습을 보니, 진심으로 안타까운 모양이다.
물론, 능운비의 안타까움과는 전혀 다른 방향인 것 같지만.
“호오? 네가 대사형과 비무를 해?”
“……”
“네 꼬락서니가 어찌 될지 눈에 선하구나!”
그간 감춰 온 속마음을 제자들에게 모두 들켜 버렸기 때문일까?
여진강이 대놓고 비웃음을 던졌다.
저걸 확!
능운비가 매섭게 그를 째려보았다.
하마터면 솟구치는 마기를 참지 못하고 비웃음을 머금은 여진강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을 뻔했다.
뇌모의 위성이시어…… 급급여율령.
“후우……”
겨우 호흡을 가다듬으며 화를 참아낸 능운비가 여진강을 향해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 두고 보자.
다른 놈들은 몰라도 니놈은 나중에라도 반드시 조진다.
그러니까 오늘의 비웃음을 반드시 기억해 둬라.
나중에 니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되새겨 주기도 귀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