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25
그그긍.
문이 열렸다.
산을 등진 북쪽을 제외한 모든 방위의 문들이 활짝 열리고, 정갈하게 무복을 갖추어 입은 무인들이 줄지어 나와 전열을 이루었다.
각지에서 모여 오매불망 기다리고있던 이들이 무인들 앞으로 다가와 길게 늘어섰다.
사람은 사람대로, 수레는 수레대로.
각기 다른 곳을 향하지만, 그 목적은 하나였다.
바로 교주의 탄신연.
한 해를 걸렀던 터라 수레마다 짐이 가득하였고, 줄지어 선 사람들은 해가지기 전에 줄어들지 않겠다 싶을 만큼 많았다.
무인들의 검문을 통과한 이들은 각자의 세력을 나타내는 기(旗)를 세우고 본성 안으로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호랑이, 곰, 여우를 형상화한 것부터 글귀나 문양을 새긴 것까지, 그 모양이 각양각색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 또 누군가는 어떻게든 돋보여 윗사람의 눈에 들어보려, 혹은 누군가와 친분을 만들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려.
탄신연 참가라는 표면적 이유에 더해 각기 다른 의도를 품은 그들은 곧바로 성내 숙소에 여장을 풀고, 연회에 참가할 준비를 서두를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면, 비로소 다음날에야 본 행사가 시작된다.
이레에 걸쳐 벌어지는 탄신연 행사는 마교의 가장 큰 축제인 만큼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능운비는 그 첫날 행사에 참여하기위해 삭월대와 함께 내성에 있는 칠층탑, 광천탑(光天塔)으로 향했다. 교주의 주관하에 열리는 개회식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오랜 전통에 따른 의전(儀典)이라는데…… 그냥 각종 미사여구를 난발하며…… 교주한테 선물을 바치는 식전행…….
펄럭!
“……!”
걷던 중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스륵 잠들 뻔한 능운비가 깃발이 나부끼는 소리에 번쩍 눈을 뜨곤 고개를 휙휙 돌렸다.
행사장이…… 아직 멀었다.
젠장, 오늘따라 얼마 되지도 않은 길이 뭐 이리 멀게 느껴지는지.
“아하암.”
능운비는 입이 찢어지게 하품하며 머리를 흔들어 잠을 쫓았다.
천하제일의 고수도 눈꺼풀의 무게는 이길수 없다더니…….
이게 다 망할 대호법 때문에 잠을못자서 그렇다.
능운비가 깃발이 세차게 나부끼며 드러난 글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일월광천지(日月光天地). 해와 달이 천지를 비춘다.
일월은 당연히 교주를 뜻하는 말이고, 그 권세가 천하를 밝게 비춘다는 뭐 그딴 뜻이다.
정말이지…… 놀고들 있다.
마교의 전신이 일월교(日月敎)라는 종교 단체였다고는 하지만, 그게 언제적 일인데 아직도 저딴 문구를 쓴단 말인가?
지들도 이젠 그냥 마교라고 부르면 그나저나 마차를 타고 올 걸 그랬나?
그거 잠깐 걸었다고 벌써 피곤하다.
몸이 축축 처지는 게 가만히 있어도 졸음이 쏟아진다.
“주군, 대기 장소입니다.”
“어? 어! 빨리 가자.”
왕천의 말에 능운비가 잰걸음으로 대기 장소로 향했다.
삼공자인 자신을 위한 장소.
다섯 제자에게는 연회장 외곽 각기 다른 곳에 대기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대기하다가 각종 의전 행사를 주관하는 일장로가 자신을 호명하면 연회장으로 들어간다.
그냥 한꺼번에 모여서 시작하면 될것을 쓸데없는 절차를 만들어서는…….
뭐, 이해는 한다. 일종의 보여 주기랄까?
마교 예하에 모든 세력이 모이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들에게 어떤 인상을 심어 주느냐에 따라 향후 세력 다지기가 한결 수월해질 수 있다.
아마 다들 어찌하면 멋지게 등장할까생각을…….
스륵.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던 능운비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 그 뒷모습에 왕천이 주승에게 속삭였다.
“삭월대주님, 주군께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신 모양입니다. 우린 잠시 물러나 있도록 하시죠.”
“하긴. 고민되실 만도 하겠네요. 첫 등장에서 좌중을 얼마나 압도하느냐에따라 인식이 달라질 테니.”
“그러니까요.”
주승과 왕천이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뒷걸음질하는데.
“크어억, 커으으……”
“……”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두 사람이 우뚝 멈춰 서서 능운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옆으로 꺾은채…… 자고 있다.
“크어억, 컥, 커컥!”
숨넘어가게 코까지 골면서.
“……허허, 나라면 중압감에 심장이 떨릴 것인데.”
“……”
“주군께선 정말 여유가 넘치시는군요. 이 상황에서 잠을 청하실 줄이야.”
주승이 어색한 웃음을 머금고 어떻게든 포장하려 했지만, 왕천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저건 여유가 아니 라 그냥 자는 거다.
그것도 아주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졌다.
“하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모자랄 판에……. 내가 진짜 이런 꼴이나 보려고 호위장이 된 줄 아나!?”
참다못한 왕천이 팔까지 걷어붙인채 씩씩거리며 능운비를 깨우려 하자, 주승이 급히 소매를 잡아 만류했다.
“호위장, 잠시 내버려 두시죠.”
“내버려 두긴 뭘 내버려 둡니까? 이게 지금 얼마나 중요한 행산데! 다들 보고 있단 말입니다. 삼공자님이 처음으로 사람들의 앞에 나서는 행사라구요!”
“호위장.”
“……”
“오죽 피곤하셨으면 저러시겠습니까? 주군께 분명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잘 이겨 내 오신 분이 아닙니까? 분명 생각해 두신것이 있을 겁니다.”
주승의 거듭된 만류에 왕천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충성심도 주승 정도면 병이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분명 능운비는 지금까지 잘 이겨 냈다.
주화입마에 빠진 뒤 모두가 폐인이 될 거라 말했지만, 당당히 떨치고 일어났다.
교주의 삼 격을 버텼고, 곧장 의기를 깨달았다.
와중에 자신의 어머니이자 마교 십대고수 중 한 사람인 소설옥수가 대련 중 몸이 달아서 과격한 수를 쓸 정도로 몰아붙여 설산장의 지지를 얻었다.
누군가 기회를 만들어 주긴 했으나, 해낸 것은 능운비 자신이다. 그것도 홀로.
그 곁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왕천이기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하면 삭월대주께서 때맞춰 깨워 주십시오. 전 다른 제자분들이 어떤 준비를 했는지 좀 알아보고 올 테니.”
“알겠습니다.”
알겠다고는 하지만 팩하니 토라진 채 밖으로 나가 버린 왕천의 뒷모습에 주승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사이, 밖에서 막 개회식의 시작을 알리는 징 소리가 들려왔다.
* * *
지-잉!
“커어억, 허어억!”
골을 울리는 듯한 징 소리에 깊이 잠들었던 능운비가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
여긴?
주위를 둘러보던 능운비가 주승을 발견하고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괜찮으십니까?”
“……어? 아, 어.”
“꿈이라도 꾸신 모양입니다.”
빙긋이 웃는 주승의 모습에 능운비가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꿈을 꿨다.
함께 꿈꾸던 이상적인 세상을 이루고 부듯해하시는 ‘그분’을 다시 만나는 기분 좋은 꿈을.
“이공자가 교주님께 선물을 바치는 중입니다.”
“……”
“곧 일장로가 주군을 호명할 상황이라 막 깨우려던 참이었습니다. 이제 나가 보셔야 할 듯합니다.”
“음…… 그래.”
한참 자고 일어났더니 자신의 순서가 된 모양이다.
촤악!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설산장에서 받은 검 비연을 허리에 차는데, 왕천이 대기실의 휘장을 걷고 뛰어 들어왔다.
“주군! 일어……나셨네요.”
“방금”
“나가셔야 합니다.”
“알아.”
“생각은 있으시죠?”
“……뭔 생각?”
“뭔 생각이라니요? 당연히 어떤 모습으로 입장할지에 대한 거죠.”
“……?”
“대공자께선 검을 타고 등장하셨습니다.”
“으응?”
그게 말이 돼?
검이 말도 아닌데 타긴 뭘 타?
“이공자는 걸음마다 진법을 바꾸셨구요.”
“걸음마다?”
“예. 순서를 기다리고 계신 사공녀는 범이랑 곰을 한마리씩 준비하셨는데, 눈빛이 사나운 것이 영물이 분명합니다. 아마 용수공을 자랑하기 위함일것입니다.”
그 말에 능운비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검이나 진법은 그렇다 치고, 하다 하다 짐승까지 준비할줄이야.
다들 아주 지랄이 풍년이다.
“그리고 오공자께선……”
“됐어. 뭐 대단한 거라고 일일이 신경 쓰냐?”
“예?”
“고작 입장이야. 몇 걸음 되지도 않는다고.”
“……그 말씀은 설마 그냥 걸어가시겠다는 건 아니죠?”
왕천이 불안함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자, 능운비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됩니다!”
“뭐가 안돼?”
“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다들 지금 기대하고 있다구요. 교주님의 삼 격에 설산장의 지지, 그리고 이공자와의 마찰까지. 전부 소문이 났단 말입니다.”
“마지막은 자네가 멋대로 저지른 일이잖아.”
“그야 그렇……지가 아니라! 기대에 부응하셔야지요!”
“내가 왜?”
“왜, 왜라니요?”
능운비의 무덤덤한 반문에 왕천이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다.
근자에 믿을 수 없는 소문의 주인공이 된 삼공자의 모습을.
그런데 왜? 왜라니? 대체 왜?
“왕천.”
“예!”
“쓸데없이 호들갑 떨지 마라. 뭘 기대하든 내가 왜 그들의 입맛에 맞춰야해?”
“그야…… 당연히 이제부터 세력을 다져야 하니 호감을 주기 위해서죠?”
“풉, 그딴 걸로 호감을 얻어 봐야 뭐하겠어?”
“그럼요? 어쩌시게요? 무슨 다른 생각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왕천의 물음에 능운비는 히죽 웃기만했다.
생각? 당연히 없지.
꿈에 ‘그분’을 보았더니 중원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만 더 깊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교주?
될 생각도 없고, 마교인들에게 호감을 살 생각은 더더욱 없다. 차라리 이참에 다들 실망해서 관심을 안 가져 줬으면 좋겠다.
그러니 대충 걸어갈 생각이다. 모두가 기대하고 있다면, 그 기대감을 여실히 무너뜨려서 다시는 헛된 망상을 품지 않게 할 것이다.
“주군!”
왕천이 눈을 부릅뜨고 앞을 막아서는 순간, 다시 징이 울렸다.
“비켜, 나 부른다.”
“……”
왕천을 밀어 낸 능운비가 휘장 밖을 향해 걸었다.
“아…… 망할……”
그 뒷모습에 왕천이 허망한 표정으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중요한 순간에 고민도 안 하고 잘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허허, 호위장. 심려치 마십시오. 주군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니 저러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
여전히 능운비의 편을 드는 주승의 모습에 왕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삭월대주님.”
“예?”
“닥치고 교주님께 드릴 선물이나 준비하세요.”
“……예.”
그들을 뒤로한 능운비는 휘장을 걷어 내고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향했다.
“와아아아아!”
“……”
모습을 드러낸 능운비를 맞이한 것은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이었다.
시끄럽게…….
한순간 귀가 먹먹해진 능운비가 살짝 일그러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각자의 세력을 나타내는 각양각색의 깃발.
거대한 연무장을 빼곡하게 채운 채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정말 많기도 하다. 필경 각 세력의 대표들만 모인 것일 텐데도 어림잡아 수천은 되는 듯했다.
그리고 연회장의 중심엔 비무대가 있었다.
누가 마교 놈들 아니랄까 봐 생일잔치에 비무대라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능운비가 먼저 입장해 비무대 위에서 기다리는 두 사형을 쳐다보았다.
대사형 위지혁.
왕천의 말로는 칼을 타고 나타났다던가?
가장 먼저 교주의 제자가 되었기에 그 무공이 보통이 아닐 것이나, 어검비행(御劍飛行) 같은 고절한 경공을 해낼 수준은 아니다.
뭔가 꼼수를 부린 게 분명하다. 손모가지를 걸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어 그 옆에 서 있는 이공자 여진강이 보였다.
망할 새끼, 그 비열함을 알고 있으니 입에 담기도 싫다.
능운비의 시선이 이내 비무대의 북쪽에 마련된 계단 위로 향했다.
또 하나의 단.
연회장 전체를 내려다보듯 지어진 그곳의 중심에 교주가 보였다.
늘 그랬듯 커다란 의자에 대충 기대 앉은 나른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좌우로 탄신연을 빛내기 위해 모인 이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지만, 딱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삼공자님, 모두 기다립니다. 이만 오르시지요.”
옆에 있던 행사 지원 무인의 말에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첫발을 내디뎠다.
사위가 한순간에 고요해진다.
모두가 침 삼키는 소리마저 조심하며 능운비가 무엇을 보여 줄지 기대감에 찬 눈빛을 보내 왔다.
하지만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는것은 찰나였다.
자박, 자박.
능운비는 그냥 걸었다.
걸음에 무언가를 담지도, 표현하지도 않았다.
그냥 일상적으로 걷듯 휘적휘적 나아간다. 웃는 얼굴로, 간간이 이곳저곳에 손도 흔들어 주면서.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둘 똥 씹은 듯한 표정으로 변해 간다. 단 위에 있는 이들은 교주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능운비는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 걸었다.
똑똑히 봤냐? 이 쉐끼들아? 나 니들이 기대하는 그런 사람 아니 거든?
그러니까 그만 포기해라. 나 교주 안한다.
제자 자리도 웬만하면 때려치울 참인데 교주는 무슨.
능운비는 제발 자신을 놔 달라고 항의하듯 그냥 걸어서 두 사형이 기다리는 곳에 도착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대사형.”
“……그래.”
인사를 받은 위지혁이 무덤덤하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싸가지 없는 새끼…….
뭐, 그와는 평소에도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그 많은 암살 시도 중 절반은 그와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위지혁에게 인사를 건넨 능운비가 홱 하니 교주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자, 여진강의 얼굴이 티 나지 않게 일그러졌다.
무시당했으니 그 속이 오죽할까?
내심 통쾌해하던 능운비는 교주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생신축하드립니다, 교주님.”
“……”
담운천이 정중하게 인사하는 능운비를 가만히 바라보다 어울리지 않는 인자함을 머금은 채 웃었다.
“그래, 고맙구나. 너의 등장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흡족하구나, 셋째야.”
“……”
욕설, 최소 짜증 정도는 기대했던 능운비로선 적잖이 당황스러운 반응이었다.
뭐야? 웬 칭찬? 흡족하긴 뭐가 흡족해?
이상했다. 분위기를 망쳤으니 당연히 화를 내거나, 적어도 얼굴을 찌푸렸어야 하는데…….
능운비는 담운천의 의미심장한 웃음이 왠지 불안했다.
탄신연에 앞서 교주를 칭송하며 선물을 바치는 행사.
그 포문을 연 것은 다섯 제자다.
하나씩 등장하는 그들의 모습에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마교의 밝은 미래를 꿈꾸었다.
물론, 능운비 때는 아니었다.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똥 씹은 듯 일그러진 그들의 얼굴에는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했다.
능운비가 원하던 바였다. 기대감 대신 실망감을 심어 주고 싶었고, 열렬한 환호 대신 마음속으로 욕을 해 주길 바라마지 않았다.
그랬는데…….
오직 단 한 사람.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교주께서 너무나 흡족해하셨다.
와중에 설산장에서 준비한 설표의 가죽을 보곤 이건 좀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아니, 받자마자 자리에 깔고 앉아 연신 좋다는 말을 연발하며 내내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주변에 있던 이들이 교주의 비위를 맞추느라 저마다 한마디씩 맞장구를 쳤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염병할……. 이러면 곤란한데…….
하지만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교주가 보인 미소의 이유였다.
대체 왜!
도사복 입었다고 지랄하고, 실력을 입증해야 한다면서 쥐어팰 땐 언제고!
도대체 왜!
어째서! 저렇게 실실 쪼개면서 예뻐죽겠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단 말인가!?
분명 꿍꿍이가 있음이다.
나중에 …… 나중…… 그르릉.
“……헉!”
선 채로 대기하다 깜빡 졸고 말았다.
하마터면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놀라서 힐끗 주위를 보니, 위지혁은 무심했고 여진강은 조소를 머금은 채 쳐다보고 있었다.
저게 진짜?
능운비는 눈을 희번덕여 주고는 입가에 흐른 침을 쓱 닦아 냈다.
망할 졸음…….
마교의 중심부에서 벌어진 잔치다보니 위험 따위는 전혀 고려치 않고 너무 안일했다. 이제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
그때였다.
푸하학!
“……응?”
졸음을 쫓으려 끔벅거리던 능운비의 눈앞이 한순간 붉게 물들었다.
뭐, 뭐야 이건 또?
잠이 확 달아나는 것만 같았다.
“스승님! 제가 남쪽에서 잡은 녀석 입니다. 내단을 교주님께 바치기 위해 가장 싱싱한 상태로 가져왔습니다.”
“……”
가날픈 체구를 가진 넷째, 소선화가 피 칠갑을 한 채 웃으며 교주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옆에 쓰러져 있는 것은 그야말로 집채만한 호랑이.
저, 저 정도면 산군인데…….
그녀의 말대로 싱싱한 채로 와서 내단을 뽑히고 죽은 것이다.
정말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대사형.”
“음.”
“이사형도요.”
“여전하구나.”
교주에게 싱싱한 내단을 바치며 칭찬을 들은 소선화가 앞선 두 사형과 인사를 나눈 뒤 능운비의 옆에 섰다.
툭.
“큭!”
“오라버니, 잘 지냈어요?”
“……”
소선화가 눈을 찡긋하고는 생글생글웃는 얼굴로 인사해 왔다.
그냥 반갑다고 하면 될 걸 굳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쳐야겠냐?
“어, 그래…….넌 여전하구나.”
“칭찬……이죠?”
“아, 아무렴!”
새초롬하게 째려보는 눈빛에 능운비가 머쓱하게 웃고는 먼 산을 쳐다봤다.
피나 좀 닦고 쳐다봐라.
이건 뭐, 막 간을 빼먹은 구미호가 따로 없다.
“회복했다면서요?”
“……아직.”
“에이,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헛소문이야.”
“거짓말.”
“……”
“듣기로는 교주님의 삼격을……”
“버렸고, 설산장의 지지까지 얻었다고?”
“잘 아시네요.”
당연하지. 왕천이 낸 소문을 여기저기서 똑같이 전해 듣다 보니 이젠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 인데.
“어쨌든 다행이에요. 사형 같은 걸출한 상대가 빠진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니까.”
“회복못 했다니까?”
“또 거짓말. 남매처럼 지낸 제가 설마 모르겠어요?”
“……”
남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네가 날 죽이려고 달려든 게 스무 번도 넘는다고 기억이 말해 준다.
능운비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억에 따르면 소선화는 미월각(眉月閣)의 주인이자, 수왕(獸王) 소불괴의 손녀.
세가원에 속한 육대 가문 중 하나인 야수문이 배출한 최고의 기재로, 나이는 능운비 보다 한 살 아래다.
나이 차도 거의 안 나는 데다 비슷한 시기에 교주의 제자가 되었기에, 항시 비교를 받았고 은연중 경쟁 관계에 놓였다.
하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부적 재능을 가졌다 평가받던 능운비가 아닌가?
배움은 같았지만, 성취에서 엄청난 차이가 났다. 둘 사이엔 따라잡기 어려운 격차가 존재했다.
무학에 대한 능운비의 재능이 좀 뛰어 났어 야지.
하지만 그녀는 좌절하기는커 녕 오히려 쉼 없이 도전해 왔다.
남들이 암습할 때, 그녀는 대놓고 싸움을 걸어 왔다.
그 방법도 어마어마했다.
곰에 범도 모자라 난데없이 새 떼가 부리를 세우고 공격해 오질 않나, 난데없이 길가의 개와 고양이가 덤벼들질않나.
물론 그때마다 능운비의 완승이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싸우다 정들 법도 했지만, 능운비는 다른 제자들보다 유독 그녀를 멀리했다.
눈 때문이었다.
영물들까지 현혹하는 그녀의 눈등자.
능운비는 자신의 마음을 읽는 듯한 그녀의 눈빛이 싫었다. 가끔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 측은함이 어려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하지만 능운비가 아닌 척월린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녀를 싫어한 이유가 그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녀는 뭐랄까…….
그러니까, 세상에 둘도 없는 어마어마한 상또라이?
“그런데, 대체 소설옥수님은 어떻게 꼬드긴 거예요?”
“그게……”
사고뭉치 여동생 같은 소선화의 질문에 능운비가 난감해하던 그때.
“사매, 조용히 하거라.”
“……”
여진강이 둘을 째려보며 주의를 주었다.
언짢음이 역력한표정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예전이라면 몰라도, 그의 속내를 알게 된 지금의 능운비가 소선화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싫은 것이다.
그는 남몰래 그녀를 좋아해 왔으니까.
물론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왜 조용히 해야 하는데요?”
“뭐?”
“제가 이사형께 허락받고 입을 떼야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
역시나.
말 같잖은 소리로 치부하며 피식 웃어 버리는 소선화의 모습에 여진강의 얼굴이 단번에 시뻘게졌다.
“듣자 하니, 삼사형을 건드렸다가 한 방 먹었다면서요?”
“……호위장의 단독 행동이었다.”
“그런가요? 참 이상하네요. 제 눈엔 그렇게 안 보이는데.”
“……”
“그간에 삼사형을 살뜰히 아끼신 이사형이 수하의 단독 행동을 방치할 리가 없는데 말이죠. 이번일을 듣곤 도통 이해가 안 되더라구요.”
“사매, 말이 심하구나. 이미 조사가 끝난 일이다.”
“끝나긴 했죠. 늘 그랬듯이. 그런데 아시죠?”
“무얼 말이더나?”
여진강의 말투가 쌀쌀해지자 소선화가 차갑게 변한 눈으로 비웃었다.
“제 무공이 어떤 것인지 모르세요?”
“……!”
소선화의 말에 여진강이 흠칫 놀랐다.
순간 놓친 것이다.
그녀의 눈, 그 혈통에 따라 만수(萬獸)를 부리는 권능을 가진 눈의 존재를.
찰나에 드러낸 감정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눈에서 많은 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 대상엔 여 진강도 포함이었다.
자신을 향한 연모의 감정, 능운비를 향한 적대심.
예전이라면 몰라도, 한번 의심을 품은 이상 그녀의 눈은 여진강의 진심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모두가 그녀의 능력을 알기에, 무심하기만 했던 대사형 위지혁의 눈빛도 어느새 싸늘해져 있었다.
“이사형, 인간도 짐승과 다를 바가 없어요.”
“……”
소선화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자, 여진강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다. 그간에 그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만들어 놓았던 모습들이.
앞으론 모두가 그를 경계할 것이다.
그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모두 의심받게 될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덕분에 모두 여진강의 추악한 진면목을 알게 되었으니, 내심 귀찮은 일이 벌어질까 봐 걱정하던 능운비로선 한시름 놓게 되었다.
상황이 이리되면 왕천에게 고마워해야 하나?
그날 밤 왕천이 이공자의 호위들을 두들겨 패지 않았다면, 절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심 고소했다.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제 사형에게 바른말만 골라서 뱉어 대는 소선화에게도 칭찬을 퍼부어 주고 싶다.
“이사형, 계략으로 남을 이용하는 것도 능력이지만…… 너무 조잡하잖아요? 명색이 교주의 자리를 놓고 경쟁관계에 있는 우린데.”
“……”
“부디 앞으론 그 손에 직접 칼을 드시길 바랄게요.”
소선화의 싸늘한 비난에 여진강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참으로 재미있게 되었다.
최후의 승자를 기다렸다가 상처 입은 몸에 칼을 꽂고 손쉬운 승리를 쟁취하려 했던 여진강의 계획에 크나큰 제동이 걸리지 않았는가?
“이크! 이젠 조용히 해야겠다. 귀여운 우리 막등이가 나오네요.”
“……”
소선화가 고개를 휙 돌린 곳에는 또 다른 제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이내 연회장이 함성으로 가득 찼다.
옛된 얼굴의 사내.
올해 열다섯 살 먹은 교주의 막내 제자, 구양휘. 역시나 세가원에 속한 가문 중 하나인 천력탑(天力塔)의 후예다.
그런데…… 귀여워? 대체 어디가?
구양휘는 가히 역발산기개세를 타고난 용력의 소유자다.
고작 열다섯. 능운비보다 세 살이나 어리지만, 머리 하나는 큰 데다 온몸이 근육질 갑옷에 덮여 있는 듯했다.
저 봐라, 또 자랑질이다.
웃통까지 까고 미세 근육까지 불끈거리면서.
아주 근육 놈들이 서로 튀어나오려고 난리다, 난리.
쿠우웅!
“……”
한눈에도 힘이 좋아 보이는 역사 넷이 거대한 청동화로를 힘겹게 들고 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뭘 하려는지 알겠다.
“후아압!”
역시나…….
쿵. 쿵.
힘찬 기합과 함께 화로를 어깨에 둘러메고 뛰자 예까지 진동이 느껴진다.
힘자랑을 구경한 마교인들이 기뻐하며 박수를 보냈다.
대단하긴 하다.
넷이서도 들기 힘든 화로를 내공도 안 쓰고 들다니…….
“우리 막둥이 많이 컸죠? 그죠, 오라버니?”
“……”
소선화의 감탄에 능운비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다섯째는 원래 컸다. 한 번도 작았던 적이 없었다.
열 살 때도, 열한 살 때도. 그리고 지금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구양휘는 언제나 소선화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컸다.
애초에 막둥이라 부르는 것조차 소선화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교주도 참 대단하다.
제자들을 어찌나 각양각색으로 모아놨는지…….
뭐, 상관은 없었다.
지금 문제는 남들과 달리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은 자신에게 어째서 그리 호의적인가이다.
다들 똥 씹은 표정인데 교주는 대체 무슨 꿍꿍이길래?
그 순간, 힐끗 고개를 돌린 능운비가 교주와 눈이 마주쳤다.
또 웃는다.
염병, 확실히 뭐가 있는 게 분명하다.
인사가 끝난 제자들은 교주의 뒤로 이동했고, 각 세력이 선물을 바치는 행사가 이어졌다.
어떻게든 교주의 눈에 들어 보려는 그들의 노력이 가상했지만, 능운비는 내내 교주의 뒤통수만 쳐다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결국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첫째 날 행사가 끝났다.
그 뒤론 먹고, 마시고, 떠들고…… 여느 잔치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긴, 달리 뭘 할 게 있을까?
아니, 어찌 보면 원래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인지도 모른다.
연일 싸움이 벌어지는 마교.
수십 년, 수백 년 이어진 가문도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나고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는 곳.
탄신연은 교주의 생일을 축하하는 동시에 그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다.
다만, 잠시라도 싸움을 멈춘 채 술과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실없는 소리로 머리를 비우려는 자리가 아니라 또 다른 의미의 각축장이다.
두루두루 친분을 나누며 강자는 세를 넓히고, 약자는 그 세안에 포함되고자 노력한다.
그 이레의 잔치를 어찌 지내느냐에 따라 향후 세력권의 향방이 달라지는 것이다.
당연히 제자들도 바삐 움직인다. 각 세력과 이름난 명숙을 찾아 어떻게든 자신의 품에 안기 위해.
……능운비만 빼고.
“아오! 씨발,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수가 없네!”
음흉하기 짝이 없는 스승 놈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