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27
능운비가 비무장으로 내려와 위지혁과 마주 서자, 장내가 싸늘한 긴장감으로 고요해졌다.
뒷짐까지 지고 고고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위지혁의 모습에 능운비가 속으로 픽 웃었다.
이 새끼…… 벌써 이겼네, 이겼어.
싸움도 하기 전에 머릿속에서 승리해 버린 게 틀림없다.
하긴, 진다고 상상이나 하시 겠어?
그 이름도 쟁쟁한 대공자신데.
사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예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떠버리 왕천이 입술 마를 틈도 없이 칭찬해 대지 않았던가.
삼공자님과는 달리 대공자께선 이랬습니다, 저랬습니다.
하여간 그놈의 비교질은…….
자라나는 새싹에게 그게 어디 할 소린가?
옆집 잘난 형과 내 자식을 비교하는 것만큼 나쁜 교육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금단에 손을 댄 것 아닌가.
어찌 보면 능운비가 주화입마에 빠진 책임에서 왕천은 절대로 자유로울수 없을것이다.
기억을 읽어 내 보니 능운비의 처지가 어찌나 불쌍하던지.
하지만 전적으로 왕천 책임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기억 속의 능운비는 항상 위지혁에게 위축되었던 것 같았다.
그의 모습에서 자괴감을 느꼈고, 뛰어넘어 보려 발악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해 왔다.
멍청한 자식, 자신이 보기엔 기존의 능운비가 가졌던 것도 엄청난데…….
그들은 속칭 천재(天才)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지혁도 능운비도…… 아니,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교주의 제자라는 신분이 어디 아무에게나 주어 지겠는가?
애초에 될성부른 떡잎을 고르고 골라 교주라는 그늘에서 키우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뛰어날 수밖에.
물론 세심한 관리는 필수다.
그들 중 하나가 권좌를 이어받아 마교의 미래를 밝힐 참인데 허투루 키울수 있겠는가?
영약에 영단에, 고절한 무공까지 두루 익히게 해서 숫제 괴물을 만들어 놓는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자들이 주는 떡만 받아먹진 않는다.
말 그대로 티를 깎는 노력을 한다.
아니, 그 정도의 노력으로는 턱도 없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선 정말 숨이 깔딱깔딱 넘어갈 정도로 수련에 매진해야 한다.
왜냐고?
언젠가 권좌에 도전한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다섯 중 하나가 후계로 정해지면, 나머지는 그간의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한순간에 버려진다.
한마디로 폐기 처분이 되는 것이다.
설사 피로 맺어진 가족의 연이라도, 충성의 대상이 정해지는 순간 깨끗이 잘라버린다.
차기 교주에게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누군가는 자신에게 닥친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하고, 반항했다.
당장에 뒈지게 생겼는데 사람이라면 당연하지 않은가.
그 때문에 교주의 교체기마다 마교에는 늘 피바람이 불었다. 역대 교주들 모두가 그런 길을 걸어왔고, 그 길가에는 함께 노력했던 제자들의 시신과 피가 가득했다.
권좌란 그런 것이다. 도전한 자의 핏물이 스민 곳에 세워진 자리다.
물론, 제자들 모두가 그러한 운명을 걷는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해 미리 굴종한 자들도 있다.
권좌에 대한 경합이 시작되기 전에 머리를 조아리고 중성을 맹세하면 목숨은 보전할 수 있으니까.
그 한 번의 결정으로, 제 능력에 걸맞는 자리에서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도 있다.
하나 그것이 쉽겠는가?
이미 권력이라는 단꿈에 젖었던 이들은 절대 그것을 쉬이 놓을 수 없다.
정상의 목전까지 가 본 놈이 목숨인들 아깝겠는가?
죽음보다 굴종이 더 어려운 것이다.
해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목표를 향해 달린다.
권력이라는, 최정점이라는 모닥불을 향해 미친 듯이 날갯짓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눈앞에 있는 위지혁은 그런 놈들 중 최상위라 할 수 있다.
천재성도 모자라,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백가 가루가 되고도 남을 정도로 노력을 아끼지 않고 달려온 그런 놈.
와중에 그 휘하에 있는 이들의 충성까지 얻어 내는 놈이다. 대제자의 세력이 괜히 최대 규모인 게 아닌 것이다.
하지만 난 아니지.
교주의 위?
그따위 걸 자신이 뭐 하러 차지한단 말인가?
애초에 관심도 없다.
즉, 위지혁과 자신은 목표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차라리 잘됐다.
교주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위지혁과 붙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참에 완벽하게 기대감을 부숴 버려야겠다.
설산장도, 왕천도, 주승도.
아니 그 누구라도! 앞으로는 자신에게 조금의 기대도 품지 못하게 할 것이다.
무릎 꿇는 데 뭐 돈이라도 드나?
고개 한 번 숙이는 것이 뭐 그리 대수라고?
“저, 저기……두분?”
“……어?”
침묵 속에서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둘에게 비무 대회의 사회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귀빈석에 인사하셔야 제가 이후의 진행을……”
“아!”
사회자의 말에 능운비가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탄성을 터트리고는 홱 하니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셋째 능운비가 교주님 이하 교의 모든 어른 분들께 인사 드립니다. 평소 흠모하던 대사형과 이리 손속을 겨뤄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신 교주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첫째 위지혁입니다. 뜻깊은 자리를 만들어 주셨으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우렁찬 인사에 고요했던 비무대 주변이 떠나갈듯한 함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시작하라.”
인사를 받은 담운천의 승낙과 동시에 시작된 비무.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리고 자세를 잡는 능운비와 달리, 위지혁은 처음 그대로 뒷짐을 진 채 한 손을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
그 시작부터가 고까웠다. 실력만큼이나 어찌나 거만한지…….
“몸은 회복되었다고 들었다.”
“근거 없는 낭설입니다. 이곳저곳 쑤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하냐?”
“암요! 그러니 부디 살살 부탁드리겠습니다.”
“흠…… 그럴 수야 있겠느냐? 스승님께서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으니, 가진바 최선을 다해야지.”
“굳이요?”
“……”
“제깟 게 뭐라고 대사형께서 최선까지 다하신단 말입니까? 헛된 낭설에 속지 마시고…… 최대한 봐주면서 하셔도 됩니다.”
능운비의 능글맞은 말에 위지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말은 그리하면서도 매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살피고 있는 능운비.
완벽한 언행의 불일치다.
“말로는 봐주라고 하는데, 네 눈빛은 그렇지 않구나.”
“아, 이건……”
그냥 습관이다.
오래전부터 상대를 살펴 왔던, 그런 습관적인 눈빛.
“최선을 다하거라. 나도 그리할 테니.”
“……”
위지혁이 자세를 풀었다.
자연스럽게 굽힌 다리와 함께 두 발이 비무대 위를 무겁게 짓누른다.
스멀스멀 피어난 마기가 그의 전신을 감싸고, 앞으로 내민 양손과 함께 그 존재감이 사방을 가득 채운다.
살갗이 따가워지는 느낌에 능운비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이 새끼 진심이네. 진짜로 최선을 다할생각이네.
그럼 나도 최선을 다해야지 어쩌겠어. 최선을 다해…… 처맞아 주마!
파앗!
능운비가 먼저 움직였다.
대사형께서 기다리시는데 후공을 할수야 있나. 맞아 드리기로 한 이상 체면까지 세워 드려야지.
그게 장유유서 아니겠어?
일 보에 간격이 좁혀지고, 힘차게 뻗어 나간 주먹이 빛살처럼 허공을 가른다.
그 순간.
목표가 되었던 위지혁의 자세가 덜컥 낮아지며 주먹이 허공을 때렸다.
팡!
공기가 터지며 일대의 공간이 짜르르하게 울린다.
슈아악!
자세를 낮추었던 위지혁의 주먹이 송곳처럼 솟구친다.
곧장 몸을 젖힌 덕에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능운비의 가슴 위를 스친다.
하지만 주먹이 극점에 오르기도 전에 방향을 틀었고, 활짝 펼쳐 세운 손가락이 세차게 가슴을 찍어 왔다.
……빠, 빠른데?
그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대경한 능운비가 몸을 뒤로 넘기며 발을 차올렸다.
따악!
발과 손이 부딪히는 소리.
하지만 소리가 약했다.
부딪힌 순간, 당겨졌다 다시 뻗어 나온 위지혁의 손이 변화를 만들어 냈다.
무려 여덟 개의 잔영이 생겨났다.
이, 이건 팔마장(八魔掌)?
여덟 마귀의 손짓이라 불리며, 때리는 순간 끊임없는 변화를 일으킨다는 마교의 고절한 장법이다.
와중에 무지막지한 공력이 가득히 담겨 있다.
능운비가 재빨리 뒤로 물러나자 위지혁이 곧바로 뒤쫓아 거리를 좁히며 공격을 이어 갔다.
이 자식이…… 처음부터 이럴 거야?
기승전결 몰라?
비무에도 순서가 있어야지, 순서가! 어?!
오가는 주먹 속에 흥취를 돋우고, 기대감이 폭발적으로 끓어오른 그 순간에 결론이 지어져야 할 거 아냐!
처음부터 이렇게 죽으라고 달려들면 어쩌자는 거냐고!
능운비는 위지혁의 귀때기를 잡고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너무 위급했다.
막아야…… 아니, 피해야 하나?
아니지. 처참하게 패해서 실력의 차이를 보여 주려면 여기서 맞고 쓰러지는게…….
그 짧은 순간 머 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쳤고, 이내 결론이 내려졌다.
……맞자.
다만 정타로 맞았다가는 골로 갈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비껴서.
“흐읍!”
순간적으로 능운비의 동공이 흰자위를 집어삼킬듯 확장되었다.
스으으으.
눈에 보이는 세상이 느려진다.
코앞으로 다가온 위지혁이 만들어 낸 여덟 개의 잔영이 한꺼번에 시야에 담긴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오랫동안 몸에 익혀 온 파훼(破毁), 그 첫 번째는 상대의 움직임을 살피는 관시(觀視)였다.
아무리 강해 봐야 아직은 완전히 여물지 않은 제자다. 마교의 초고수인 소설옥수의 일장도 피해 낸 능운비가 파악해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충분히 피할수 있다.
다만, 그 흐름이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는 것이 문제였다.
제기랄, 고민이 길었다.
일단은 최대한 덜 아프게 맞을 수밖에.
급박해진 능운비의 발이 비무대 위를 가볍게 밟는다.
무음(無音), 소리가 없고.
무형(無形), 형체를 볼수 없으며.
무영(無影),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찰나의 순간, 이 세상에 오직 능운비만이 아는 삼무(三無)의 보법이 펼쳐졌다.
파파파파팡!
여덟 개의 장법이 작렬하며 능운비를 집어삼켰다.
“와아아!”
누군가의 함성.
불끈.
누군가의 자부심.
“아아……”
그리고 기대감에 차 있었던 누군가에겐 탄식 어린 광경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교주만은 다른것을 보고 있었다.
‘저, 저놈!’
귀빈석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교주의 눈동자에 경악이 스쳤다.
자신에게도 흐릿했던 일순간의 흐름.
하나 담운천은 분명히 보았다. 위지혁의 장력이 폭발하기 직전 능운비가 보여 준 두 가지 행동이.
……보았고, 움직였다.
모든 장력을 모조리 때려 맞는 것처럼 보였으나, 정타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위지혁이 모자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장법은 실로 일절을 논할 만했지만, 능운비의 실력이 조금 더 앞섰던 것뿐이다.
즉, 녀석은 위지혁의 공격을 일부러 맞아준 것이다.
놀라움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마터면 탄성을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은 담운천이 빨라진 호흡을 겨우 가라앉히며 주변을 힐끗 살폈다.
다행히 자신의 반응을 살핀 이는 아무도 없었다.
팔마장이 쓸고 지나간 곳.
능운비가 처참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위지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잘 버렸다.
중간에 한 방 제대로 맞은 바람에 화가 치밀어 마기가 들끓었지만, 도가의 항마주로 겨우 가라앉혔다.
이제 장렬하게 산화해 줄 때다.
“크으옥……. 사형, 과연…… 강하십니……”
“……”
힘겹게 말을 뱉은 능운비가 스르륵 눈을 감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바닥에 코가 부딪히지 않도록 고개는 슬며시 옆으로 꺾은 채.
“와아아아!”
함성이 거세진다.
하지만 정작 승리를 거머쥔 위지혁은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뭐지? 이느낌은…… 설마?
하지만 능운비는 쓰러져 정신을 잃은채였다.
……자신이 너무 과민한 탓인가?
“무, 물러나주십시오, 대공자님.”
사회자가 승부를 종결 지으려 능운비의 몸을 살폈다.
비무대 아래에선 대기 중이던 칠장로부의 의원들이 들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우……”
위지혁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귀빈석의 교주를 바라보았다.
“흥을 제대로 돋우지 못해 죄송합니다, 스승님.”
“……”
공손한 말투, 하나 자부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담운천이 턱을 된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죄송할 게 무어냐?”
“예?”
“흥이 돋자면 아직 먼 듯하다만?”
“……?”
담운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어? 어어?”
놀란 듯 물러나는 사회자의 목소리.
곧바로 몸을 돌린 위지혁의 눈동자에,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능운비가 벌떡 서 있는 광경이 담겼다.
“캬악! 퉤!”
“……”
핏물 섞인 침까지 한껏 불량스럽게 뱉어 내면서.
그리고 그는 위지혁이 아닌 교주를 진지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실로 진지한 전음이 오가고, 이내 능운비의 시선이 위지혁을 향했다.
“이런, 안타깝네. 그냥 이대로 끝났으면 좋았을텐데.”
“뭐?”
“뭐긴 뭐야? 다시 싸우잔소리지.”
“……?”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위지혁을 향해, 능운비가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웃었다.
쓰러져 있던, 아니 쓰러진 척하고 있던 그때 교주의 전음이 귓가를 때렸었다.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벌떡 일어나야지!
위지혁, 너에겐 미안하게 되었지만.
조건이 조건인 만큼…….
“네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
위지혁이 성을 내듯 버럭 소리를 질렸다.
뭐 하는 짓이냐니?
방금 기(起)부분이 끝났고, 이제 승(承) 아니 곧장 전결(轉結)이란 거지.
이 비무, 내가 이겨야겠다.
최선을 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