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48
결국 왔다.
천주문이 자리 잡고 있다는 주천에.
차마 용천의 모가지를 딸 수는 없었다.
죽이고 신분을 위장해 버리면 그만이기는 하나, 죽을 정도의 잘못을 한것도 아닌데 어찌 잔학무도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겠는가.
그의 잘못이라 해 봤자 거만함과 거들먹거림, 혹은 객점에 술값을 안 내려했던 것 정도뿐이다.
그래도 그가 함께하고 있어서인지, 주천까지 오는 동안 귀찮게 하는 이는 없었다.
관병들도 검문 자체를 하지 않았다.
대놓고 천주라는 글귀를 옷에 새긴 무인들이 호위하듯 따르고 있으니 당연한일이다.
“아우, 저기가 본문일세.”
“……그렇군요.”
용천의 손가락질에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으로 이어진 주천 관도의 끝자락.
“웅장하지 않은가?”
“……예, 굉장하네요.”
놀라는 척을 해 주었지만, 사실 별 감흥은 없었다.
예전이라면 높디높은 담벼락에 탄성을 터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교에서 산 지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본성의 성곽에 비하면, 저런 건 기껏해야 밭고랑 수준이다. 설산장, 아니 하다못해 삭월각의 담벼락만해도 저것보다 훨씬 더 높다.
“보이는가? 이쪽 관도에 있는 대부분의 객점과 주루, 여곽이 전부 우리 천주문 소유일세.”
이번엔 거리 쪽을 가리키는 용천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하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누가 보면 지가 주인인 줄 알겠네.
끝이 없는 자랑질에 점점 표정 관리가 힘들어진다.
그러나 능운비는 관도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상가들을 바라보며, 열심히 탄성을 내질러 주었다.
“우와……”
그나저나 참으로 자랑할 것도 없다.
고작 상가 십수 개쯤 가지고…….
자랑을 하려면 마교처럼 일성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지.
속으로 혀를 차던 능운비가 정작 신경 쓰는 것은 사람들의 눈초리였다.
용천을 비롯해 천주문 외총관부 무인들의 호위를 받고 있는 표국이니 당연하다.
와중에 앞에 내건 깃발에 적힌 이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 저거 혹시 향읍에서 의행을 펼쳤다는 옥청표국이 아닌가?”
“맞구만! 맞아.”
“요즘 세상에 저런 의로운 자들이 있다니.”
“그러니 세상이 아직 살 만하다 하는게지.”
번져 가는 감탄에 더 많은 사람들이 표국 행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젠장,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은밀히 다닐 생각이었는데 대놓고 옥청표국이라는 이름을 만방에 떨치고 있지 않은가?
솜씨 좋은 마교 살수 놈들이라면 분명 흔적을 발견해 뒤쫓아 올 것이다.
표국으로 위장했다고는 하지만 서른둘이라는 숫자가 돌아다니는 일은 흔하지 않으니까.
생각해 보니 다음부턴 숫자도 좀 나눠야겠다.
“천주문이 괜히 정파는 아닌 게야.”
“암만, 의인을 저리 융숭하게 대접하지 않는가?”
“헛헛, 저 친구들 이름도 없는 표국이었다는데, 이참에 팔자 고치게 생겼구만.”
“젠장, 이런 줄 알았으면 나도 지난번에 불한당 놈들 몇 때려잡을걸 그랬어.”
“자네가? 콕큭, 그랬다간 제사상에서 만날 뻔했겠는데?”
“뭐야?”
구경꾼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어느새 옥청표국에 대한 칭찬이 천주문에게로 돌아가고 있다.
“어떤가? 주목받는 기분이 나쁘지않지?”
“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본문에 갈 때까지 맘껏 즐기도록 하시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는 무슨? 형이 되어서 아우에게 이 정도도 못 해 줄까?”
“……”
너 혹시 따돌림이라도 받는 거냐?
그놈의 형 소리를 뭐 그리도 좋아하는건지.
용천은 몰려든 인파가 길을 막아도 개의치 않았다.
옥청표국을 위한 배려랍시고 일부러 내버려둔 것이다.
주목 좀 받아 보라고. 너희 따위가 언제 이런 취급을 받겠냐면서.
하지만 능운비로선 관도를 가득 채울 정도로 몰려든 구경꾼들 틈에서 걷자니 재주 부리는 곰이 된 기분이었다.
의행은 자신이 하고, 평판은 천주문이 고스란히 챙겨 가고 있다.
아무래도 천주문주 아래에 제법 수완좋은 놈이 있는 모양이다.
아마 대우도 섭섭지 않을 것이다. 소문이 날 대로 난 터라 지들 체면을 신경 써야 하니, 사람들 말처럼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겠지.
하지만 오래 머물러 좋을 게 없다.
표국으로 위장하고 있긴 하나, 그 속은 마교가 아닌가?
항마주로 마기를 잠재우고 실력을 감추었다고는 해도, 눈썰미 좋은 고수를 만나게 되면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자신은 몰라도 일행들은 연기력이 현저히 떨어지니까.
그러니 대충 인사만 하고 떠나야겠다.
정파 냄새 물씬 나는 옥청이라는 이름부터 표국이라는 위장까지, 산적이나 수적들을 털기도 좋고 어디로 가도 의심하는 이가 없을 거라 여겨 제법 마음에 들었었지만 더 이상 써먹긴 글렀다.
이리 소문이 나서야 가는 곳마다 흔적이 남을 것이 아닌가? 주천을 벗어나자마자 새로운 신분으로 갈아탈 수밖에.
“서두르시지요? 문주께서 기다리시겠습니다.”
“괜찮네.”
“예?”
“문주님께서 어디 우리 같은 아랫것들과 같은 분이신가? 일성을 경영하시는 분일세. 낮에는 처리할 일과들이 많으신지라 우리를 맞아 주지도 못하실게야.”
“그래도……”
“어허, 아우. 이 형의 말을 듣게. 다 자네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
“자네는 아직 경험이 일천하여 모르겠지만, 자고로 방문함에도 시와 때가 있는 법이야.”
뭔 시? 뭔 때?
“객이 환대를 받는 것은 주인이 한가할 때라네. 잘 알아 두도록 하시게.”
“……예, 형님.”
“천천히 관도 구경이나 하며 가세. 내 자네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나,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 보겠는가? 안 그런가? 이게 다 이 형이 자네를 아껴서 베푸는 호의라네.”
빌어먹을 호의. 이쯤 되면 충성과 호의는 민폐와 동의어다.
왜 원하지도 않는 충성이며 호의를 허락도 없이 베풀고 지랄들인 건데?
이 시간에 천주문주가 바쁜 걸 누가 몰라?
가문의 수장이 벌건 대낮에 당연히 바쁘겠지!
안 바쁘면 가문이 잘 돌아가겠냐?
바를 거 알고 가는 거다. 바빠서 못만나 줄 테니 대충 인사만 하고 보상이나 좀 챙겨서 빠져나오려고.
망할 충성에 난처하고, 빌어먹을 호의에 산통이 깨진 능운비가 치미는 짜증을 속으로 삭였다.
그때였다.
두두두두!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가득 모였던 구경꾼들은 물론 능운비 일행도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성문.
“비켜라! 좌우로 길을 물려라!”
“……?”
먼지바람을 몰고 온 마상의 사내는 용천과 똑같은 천주문의 무인이었다.
다만 용천보다는 조금 더 고급스러워 보이는 무복에 교룡피까지 입힌 검을 찬 것이…….
“헛! 고주대의 삼 조장이 아니십니까?”
“……?”
고주대(高柱隊)?
여러 기둥 중 가장 높은 것을 지칭하는 고주를 쓰는 것을 보면 천주문 내에서도 제법 위치가 높다는 뜻이다.
역시, 복장이나 검만 봐도 알겠더라니.
“자넨 누군가?”
“……”
용천은 아는 척을 하는데, 고주대 삼조장이란 놈은 용천을 모르는 모양이다.
자랑은 있는 대로 하더니, 고작 무인대 조장급보다 못한 처지 였냐?
“외총관부 북관 소속 수석 조장, 용천입니다.”
“중급은 되는 놈이군.”
“……”
“한데 북관 소속이 주천엔 어쩐 일인가?”
“아, 외총관께서 근자에 향읍에서 의행을 펼친 옥청표국을 데려오라 하여……”
“옥청? 그건 어디 사는 잡스러운 놈들이냐?”
“그…… 삼 조장께서 아실 만큼 유명한자들은 아닙니다. 이들은……”
“설명은 됐다. 속히 물러나거라.”
“예?”
“대공자께서 돌아오셨다.”
“아! 알겠습니다.”
화들짝 놀란 용천이 황급히 물러나며 길 정리를 자처했다.
“휘! 휘! 속히 물렀거라! 어서! 아우, 자네도 어서 수레를 치우시게.”
“예? 예……”
능운비는 용천의 지시에 따라 삭월대에게 눈짓을 보냈다.
구경꾼들까지 우왕좌왕 길을 비키자, 고주대의 삼 조장이라는 놈이 흉흉한 눈빛으로 좌우를 살폈다.
다각, 다닥, 다각.
그리고 이내, 하얀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에 앉은 약관 언저리의 사내가 당당한 표정을 한채 한떼의 무리를 이끌고 관도의 중심으로 걸어왔다.
용천도 그렇고, 좀전의 삼 조장이란 새끼도 그렇고. 이젠 대공자라는 놈까지.
거만함이 가문 내력이냐?
마상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아주 고약하기 짝이 없다.
어째서 무인대 이름을 고주대라고 지은 건지도 알겠다.
대공자의 무인대니 고주(高柱)다.
이런 직관적인 놈들 같으니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냐? 창의성 떨어지는 것은 둘째 치고, 어감이 좀 그렇잖아?
남몰래 웃으며 행렬을 바라보던 능운비의 표정이 별안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
관도로 들어선 것은 무인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로, 수십이 넘는 이들이 오라에 굴비처럼 엮인 채 끌려오고 있었다.
노인? 여인에……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들까지?
몸은 물론이고 신도 신지 않은 맨발에 상처가 가득한 것이,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
또한 얼마나 걸어온 것인지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져 있었다.
그저 줄에 매달려 걷는, 아니 끌려오는 것.
휘익! 퍼억!
“……?”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구경꾼 중 누군가 돌을 던졌고, 그 돌에 맞은 아이가 풀썩 쓰러졌다.
“이 빌어먹을 마교 놈들! 죽어 버려!”
“……?”
마, 마교라고?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능운비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부릅뜨고 눈앞의 광경을 주시했다.
머리가 깨진 아이는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몸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똑같이 줄에 묶여있는 어미인 듯한 자가 아이를 끌어안았고, 이내 그 위로 돌 세례가 퍼부어졌다.
“저런 빌어먹을것들이 사람이라고 설치다니!”
“죽여 버려야 해!”
“……”
모멸에 찬 시선이다. 돌을 집어 드는 이들의 눈동자에는 시퍼런 귀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피지도 못한 아이가 머리에 돌을 맞고 쓰러졌어도, 그걸 막아선 어미가 피투성이가 되어 가도…….
심지어 무인들은 말리긴커녕 행렬을 멈추어 사람들이 분풀이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어휴, 숭한 것들…… 사람도 잡아먹는다지?”
“암만, 산 너머 갓난애들이 사라진 것이 다 저것들 때문이라지 않는가? 누가 마교 것들 아니 랄까봐 생육을 즐긴다지 뭔가?”
돌을 집지 않은 이들은 말로써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놀랐는가?”
“……”
능운비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자, 용천이 다가와 그를 진정시켰다.
“휴우, 처음 보았을 터이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자네가 저것들이 어떤 짐승인지 몰라서 그러네.”
“……연유가 있습니까?”
“암, 내좀 이따 말해 줌세.”
“……”
용천의 말에 능운비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대공자가 이끄는 고주대와 줄에 엮인 이들이 천주문 안으로 사라졌다.
꼭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다 거짓말처럼 그친 것 같았다.
행인들의 얼굴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화로워졌으나, 능운비의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아까 그것들은 중원에 암약하고 있는 마교들일세.”
“……그저 노인과 아이, 여인이었습니다.”
“겉으론 그렇지. 원체 남들 눈을 잘 속이는 것들이니.”
“……”
“나도 들은 말이네만, 저런 외양을 하고 악독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고 하더군.”
“악독한 짓이요?”
“그래. 남의 집에 들어가 살변을 일으키고 재물을 약탈해 가는 것은 여사요, 저리 선량한 척하며 납치해 생육한 아이가 지금까지 열도 넘는다고 하네.”
“……”
생육이라니?
헛소문이다. 능운비는 마교에 사는 내내 그런 말을들어 본적이 단한번도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만들어 낸 편견일 뿐이다.
“소문이 하도 흉흉하여 본문의 대공자께서 직접 고주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선 지도 벌써 석 달이 넘었다네.”
용천의 말에 능운비의 눈동자가 스산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교 토벌. 정파란 자들이 오랫동안 해 왔던 일 중 하나다.
그럼 끌려간 이들이 기련산 지부 소속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마교를 보지못했다면 모르되, 보았기에 안다.
끌려가던 이들은…… 그저 힘없는 백성일뿐이었다.
아무래도 당장은 떠날 수 없을 듯했다.
그분을 만날 시간이 좀 더 늦춰진다고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