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47
“니가뭐라고?”
“표사입니다.”
“거기 무공 수위가 뭐라고 적혀 있었냐?”
“음…… 막 충기에 오른.”
“그래. 근데 이건 뭐냐?”
“……”
능운비가 부서진 담벼락을 쳐다보며 묻자 왕천이 못 본 척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누가! 기를 함부로 막 발출하래! 탄기급 무인도 이렇게는 못 하겠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하아, 그냥 돌아갈래?”
“요, 용서해 주십시오! 앞으론 어느모로 보나 충기를 막 깨우친 무인처럼 약하디약해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능운비의 담담한 엄포에 왕천이 냅다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
왕천이 거듭 다짐하자 능운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 그는 교육 중이다.
이름 없는 표국에 속한 표사에 걸맞은 실력을 보이도록 하는 집증 세뇌 교육.
“니들도 앞으로 명령 없이는 절대나서지 마. 쟁자수라고! 쟁자수! 어?!”
“알겠습니다!”
삭월대가 한목소리로 힘차게 외쳤다.
제대로 알아들었는진 모르겠지만 대답은 참 잘한다.
“음, 한데 대표두님.”
“왜?”
“실력 이상을 가진 상대와 싸우게 되면 어찌합니까?”
주승의 물음에 능운비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단언했다.
“맞아야지.”
“예?”
“그럼? 팰 거야? 너도 돌아갈래?”
“……최선을 다해 맞아 보겠습니다. 제가 원래 맷집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기대할게.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하나!”
“……?”
“대표두님의 일신상에 문제가 생기면…… 그땐 부득불 손을 쓸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건 뭐……”
그 부분에서만큼은 능운비가 한발 물러섰다. 주승과 삭월대의 정체성과도 같은 부분인데, 그것마저 억압했다가는 반발만 커질 테니까.
“좋게 좋게 가자. 응?”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됐어.”
“한데 대표두님.”
“왜?”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더는 무뢰배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음……”
주승의 말에 능운비가 주위를 둘러 보았다.
“끄으으……”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는 십수 명의 인물들.
그간 주인 없는 향읍 뒷골목을 주름잡으며 사람들을 괴롭히던 놈들이다.
지역적 특성상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곳이라 사파도 정파도 눈독을 들이지 않은 덕에 고작 이런 놈들이 전부였다.
왕천, 아니 삭월대 무인 하나만으로도 한 식경 안에 찰지게 밟아 놓을 수 있을 만큼 약한 놈들.
“일단 죄 묶어다가 향리에게 넘겨.”
“예.”
주승이 군말 없이 답하고는 삭월대 무인들을 시켜 쓰러진 이들을 줄줄이 엮어 놓았다.
“그나저나, 이쯤 되면 천주문이 움직여 줄 때가 됐는데……”
소문을 낸 지 이틀째.
무뢰배들을 소탕하겠다며 열심히 떠벌려 댔고,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서 소란스럽게 일을 벌였다.
와중에 관무불침 어쩌고 하면서 관이 나서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관에 무뢰배들을 넘겼다.
마치 들으라는 듯 천주문이 인근 치안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투로 투덜거리면서.
그러니 이쯤 되면 발 없는 소문이 천주문주의 귀에까지 닿고도 남는다.
평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들이니 지금쯤 부랴부랴 움직였어야 했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자신이 떠난 뒤에, 객점 주인은 물론이고 향읍 사람들이 후환 걱정 없이 발 뻗고 자려면.
“젠장, 사파 영역까지 건드리면 사태가 커지는데……”
능운비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던 그때.
“대표두님! 저기……”
“……?”
귀를 쫑긋 세운 주승이 누군가의 접근을 발견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대표두님! 대표두님!”
헐레벌떡 뛰어오며 능운비를 부르는 것은 일행이 묵고 있는 객점 주인이었고,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한눈에도 기세 좋아 보이는 한 떼의 무인들이었다.
그리고 능운비는, 길게 늘어뜨린 장포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그들의 신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천주(天柱), 하늘을 받치는 기둥.
새끼들, 변두리 정파 주제에 거창하기는…….
어쨌든 딱 좋을 때 왔다.
“그대가 어쩐 일인가? 일이 있으면 점소이 장삼이를 보내지 않고?”
“핵핵, 하도 급해 직접 왔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뉘를 모시고 왔는지.”
“……?”
모른 척 묻자 객점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뒤따르는 이들을 소개했다.
뒷짐을 진 채 턱을 치켜들고 다가오는 중년인.
한눈에도 ‘너와 나의 눈높이가 이리 다르다’라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처럼 거만한표정이다.
왕천과 주승, 삭월대 무인들의 표정이 한순간 싸늘해졌지만, 미리 언질을 두고 다짐을 받아 놓은 터라 별다른 행동을 보이 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음엔 표정도 교육해야겠다.
높은 놈이 왔는데, 은은한 미소 정돈 지어야지 않겠나.
혹시나 기분 나빠하면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하여간 마교 놈들, 자존심만 세서는…….
“그대가 근자에 소문이 자자한 옥청표국 대표두인가?”
“……그렇소만?”
정말 생긴 대로 논다. 거만한 표정도 모자라 거들먹거리는 말투라니.
그리고 근자에 소문이 자자해?
고작 이틀밖에 안 됐는데 과장하기는.
“아이고, 대표두님. 예를 갖추십시오. 이분께선 천주문의 외총관부 북관수석 조장이십니다.”
“크홈!”
“예에?”
능운비가 과하게 놀라는 표정으로 급히 고개를 숙였다.
직함도 더럽게 길다.
외총관부 북관 수석 조장.
그러니까…… 대충 따까리라는 소리 맞지?
“처, 천주문의…… 수석 조장이셨습니까? 제가 견식이 짧아 몰라뵈었음을 용서하십시오.”
“크흠, 용천이라 하네. 미령한 나이니 이해하겠네.”
제대로 대접해 주니 따까리 용천이라는 놈이 수염까지 쓸며 만족스러워했다.
“한데 높으신 분께서 여기는 어쩐일로?”
“이곳은 우리 천주문 외총관부 북관이 관리하는 곳이라네.”
“아! 그랬군요. 그런줄도 모르고…… 거듭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원 사람, 죄송은 무슨? 한데 나이에 비해 예의를 제대로 배운 모양일세.”
“감사합니다.”
“헛헛! 뭘 또 감사까지. 어느 문하에서 배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자네의 춘부장이나 스승 되시는 분께서 무척이나 흡족해하시겠군.”
“……”
미친놈아, 잘도 그러시겠다.
돌아가신 지 오래되어 기억도 안 나는 아버진 모르겠지만, 스승 되시는 분이 보셨으면 니들 시체도 못 찾을걸?
“자자, 이리 서서 말을 나눌 게 아니라 술이라도 걸치며 환담하도록 하세.”
“예, 어르신.”
“헛헛, 사람 참. 공손키도 하지. 이보게 노상.”
“예, 조장님.”
“이런 의인을 두고 어찌 가만히 있을까? 자네가 술상 한번 거나하게 차려 내 보게.”
“예? 예……”
객점 주인 노상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근데 뭔가 멈칫하는 게…… 딱 봐도 알겠다.
저 수석 조장이라는 놈이 ‘자네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말인즉 돈을 안 주겠다는 뜻이다.
뜻, 대체 어떤 놈이 무뢰밴지.
속으로 혀를 차던 능운비가 공손한투로 입을 열었다.
“조장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으응?”
“이리 직접 찾아오시기까지 하셨는데, 조장님께 얻어먹을 수야 없지요. 가십시다. 제가 거나하게 대접하겠습니다.”
“자네가?”
“암요. 이보게, 객점주.”
“예?”
“내 값은 두둑이 치를 테니, 조장님 말씀대로 거하게 한 상 차려 주시게.”
“예! 대표두님!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객점 주인이 본 중에 가장 밝은 표정으로 힘차게 답한것은 어쩔수없는 장사꾼의 본성이었다.
* * *
“크핫핫핫! 이러니 소문이 났지.”
“……별말씀을.”
예의를 처발라 주었더니 아주 만면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자네 같은 의인이 있어 다행일세.”
“……”
“설마하니 내 잠시 다른 곳에 신경쓰는 새 그 무도한 족속들이 민생을 어지럽힐 것이라고는 생각이야 했겠는가?”
“옳은 말씀이십니다. 조장님 말씀을 듣기 전에는 천주문이 관리하는 북관이 그리 넓을 줄 몰랐습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네. 말이야 바른말이지, 이 북관이라는 곳을 관리하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자네는 생각도 못할것이네.”
“암요. 소규모 표행을 다니며 산적 걱정이나 하는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조장님께서 그리 큰일을 하시는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암! 대단하지. 저 산 너머엔 구산패라는 산도적 놈이 설치고, 저 아래쪽에선 흑사방이 지부를 노리고 걸핏하면 사고를 쳐 댄다네.”
“저런……”
“그런데 고작 무인 스물둘이라니…… 지금껏 지켜 온 것만으로도 대단타 할 일이란 말일세.”
왠지 울분이 쌓인 듯한 그 말에 능운비가 열심히 맞장구를 쳐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 보니 알겠다. 말인즉, 너무 바빠서 이런 작은 마을의 무뢰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긴, 천주문이 신경을 쓸 리가 없지.
별 이문도 안 남는 작은 동네가 아닌가?
푼돈 좀 벌자고 무인대를 움직이기에는 손해가 막심할 터다.
“내, 앞서 산도적 놈들과 싸웠던 이야길 했었나?”
“……”
했다. 이젠 아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술이나 처먹어라.
하지만 노리는 것이 있었던 능운비는 눈을 반짝거리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입담이 어찌나 좋으신지, 들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이 사람 참, 사람이 좋네그려.”
“거듭 칭찬하시니 듣기 민망합니다, 조장님.”
“어허! 형이라 부르게.”
“예?”
“사해가 동도라지 않던가? 이리 좋은 인연을 이루고 술까지 한잔했으니, 호형호제함이 당연하지!”
“……”
아주 호인 납셨다.
사해가 동도? 조금이라도 제 이득에 어긋나면 칼부터 드는 습성은 정사가 따로 없는 것이 무림 일진대.
하지만 ‘형’이라 부르는 게 뭐 어려울까? 마교 교주에게도 스승이라 부르는 판에.
“그리하겠습니다, 형님.”
능운비가 멋쩍은 듯 볼을 긁으며 수줍게 대답했다.
“헛헛! 그래, 그래. 음, 생각해 보니 다섯 달 전인가?”
“……”
또 시작했다.
지루하고 지루해 죽을 것 같은 제 과거사 얘기를.
제발 그만하고 상부에서 들은 말 좀 꺼내 봐. 니가 쓸데없이 찾아왔을리 없다는 것쯤은 아까부터 눈치채고 있다고.
아마 천주문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소문과 평판을 의식했을 것이고, 그 소문 속에 있는 자신의 공을 가로채려 할 것이 뻔하다.
지부 혹은 순찰 무인의 배치 같은 걸로.
“……핫핫핫! 내 그놈들 꽁무니를 빼는 꼴이 얼마나 통쾌하던지.”
“듣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음…… 그나저나 이곳이 걱정입니다.”
“응?”
내내 맞장구를 쳐 대던 능운비의 눈가에 한 줄기 수심이 어리자 용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님께서 그리 공사다망하시고 산적 떼와 같은 큰 문제가 산재하니 이곳 향읍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잠시 머문 저희야 떠나면 그만이나, 또다시 이전의 무뢰배들이 민생을 어지럽힐 터인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걱정에 용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우, 내 그리 생각이 없을까?”
“예?”
“실은 아우의 이야기를 듣고, 내 상부에 구구절절 사연을 올려 흔쾌히 후속책을 받아 온 참일세.”
“후속책이요?”
“당연하지. 어찌 우리의 영역을 의인에게 맡겨 둘 수 있겠는가? 이미 지부를 만들라는 승낙을 받았네.”
“오! 정파의 큰 맥(脈)이 될 만하다고 세간이 평하더니, 과연 천주문입니다. 형님께서 노고가 크셨습니다.”
“노고는 무슨 나는 그저 자네가 차린 밥상에 숟갈 하나 얹은 것뿐일세.”
“아닙니다. 어찌 그리 펌하하십니까? 본시 거인은 한 걸음을 내딛는 것에도 심사숙고한다고 하였습니다. 형님께선 그런 거인의 첫걸음을 이끄는 큰 업적을 세우신 게지요.”
“그, 그런가?”
“암요! 암요!”
용천의 입이 아주 찢어질 것처럼 벌어 졌다.
이걸로 됐다. 지부를 만든다고 하니, 향읍 사람들은 걱 정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만큼 노력했으면 자신이 할 건 다했다.
이 망할 따까리 놈 비위를 맞추며 억지로 웃느라 입 주위에 경련이 날 것 같았는데, 이제 술이나 한잔 나눈 뒤 표행을 핑계로 떠나면 그만이다.
“이거, 형님 덕에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암만, 하나 그전에 잠시 들렀다 가게.”
“들러…… 예?”
용천의 말에 능운비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끔벅였다.
들르다니? 어딜?
“문주께서 자넬 보고자 하시네.”
“……”
“자네를 본문으로 데려오라 하시더군.”
“구, 굳이요?”
“굳이라니? 자네 같은 의인에게 어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하, 마음만은 감사하나…… 제가 표행이 많이 지체된 지라.”
“알지. 하나, 문주께서 꼭 만나고 가라 하셨네.”
“……아, 예.”
이런 씨앙!
그럼 처음부터 지가올 것이지 왜 바쁜 사람 오라 가라야!
“자, 그럼 출발할까? 어서 일어나게.”
“……”
용천을 따라 일어난 능운비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살수를 피해 정파의 영역에 숨을 생각이었지, 정파에 속한 문파에 숨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더욱이 재들을 데리고?
능운비가 언제 들킬지 불안하기만한 제 일행들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용천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목을 베어 버리고 될까?
명령만 내리면 되는데…… 위장 신분도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