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82
섬서 (陝西).
그에 대한 설명은 수도 없이 많지만, 무림인들에게 주로 기억되는 이름은 화산(華山)이다.
험준하기 이루 말할 데 없어 오악 중 하나인 서악이며,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그 험준한 산에 꽃 화(華)가 붙었다.
그 유래야 다양하지만, 한때의 능운비는 그것이 어쩌면 매화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화산에 터 잡은 도가 일맥, 화산파.
일명 오대 도맥이라 불리는 곳 중 하나인 그들은, 속세를 등지고 양생(養生)과 연단(鍊丹)을 통해 신선이 되고자했다.
그들이 내가기공에 조예가 깊은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검으로는 매화를 그리고, 그 독특한 내공으론 향을 발한다.
하여간 미친놈들이 아닌가. 검이 붓도 아닐진대…….
그렇게 무시했었다.
하지만 진짜를 알게 된 뒤로, 다시는 그런 생각을 품지 못했다.
화산의 진짜는 매화가 아니라 자하(紫霞)였다.
딱 한번 만난적이 있었다.
살수로 살아가던 때, 화산에 잠입했다가 만났던 노도사.
만나 본 놈 중, 가장 정파에 어울리는 놈이었다.
꽤 많은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는 하나, 해(害)함으로써는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자신은 가치관이 확고했기에 그에게 설득당하지 않았고, 결국 개소리하지 말라며 검을 겨누었다.
강기의 무인? 그게 무슨 상관일까?
오르지 못한 경지였으나,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삼무의 보법과 삼전의 검법을 믿었으니까.
하지만 허공에 뜬 그가 하늘을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순간, 그것이 오산이고 오만이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검은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반으로 갈라 놓았다. 아니, 그리 보였다.
자신했던 보법과 검공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막아 내기도 버거워 피해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다.
만약 그때 그가 자신에게 다시 한번 아량을 베풀지 않았다면, 절대로 도망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뒤로 웬만하면 화산에 가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도사, 청진을 만나게 될까봐.
혹 살아 있을까?
그때도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이미 삼십 년이 지났으니…….
하지만 만나서 무엇 할까?
그는 도사고, 자신은 마교다. 만나면 과거처럼 대화 같은 것 없이 검부터 꺼내들 게 분명하다.
상극이 괜히 상극일까?
전생에도 그랬지만, 현생에도 웬만하면 화산이 있는 섬서의 화음현 쪽으론 가지 말아야겠다.
“주군?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응?”
능운비가 오래된 기억을 되새기고 있던 사이, 왕천이 말을 걸어 왔다.
“별거 아냐, 그냥 옛 생각이……”
“옛 생각요?”
“……”
“흠…… 하긴, 교를 떠나온 지 꽤 오래되긴 했죠. 이해합니다. 저도 그러니까.”
왕천이 그리운 듯 마교가 있는 북쪽을 힐끗 쳐다봤다.
이해는 무슨……. 아마도 자신이 향수병 같은 것을 앓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나오는데, 왕천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참! 상단주가 오늘은 저기서 쉬어가자고 합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왕천의 손가락 끝에 작은 마을이 보였다.
“아, 연소(燕巢)구만?”
“예?”
“응?”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
“희한하네. 저도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은 오등 상단주의 말을 듣고서 처음 알았는데……”
왕천이 의아한 눈빛으로 능운비를 쳐다봤다.
젠장, 실수다. 원체 익숙해서 그만 아는 체를 하고 말았다.
이놈들은 자신이 마교에서만 살아온 삼공자인 줄로만 아는데.
“아, 그게 어릴 때……”
“어릴 때요?”
“그래. 내가 예전에 중원에서 살았던 거 알지? 스승님 손에 이끌려 마교에 오기 전에 말이야. 그때 보았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르지 뭐야.”
“아! 그렇군……요가 아니라, 그럴수가 있는 건가요?”
수긍하던 왕천이 불현듯 이상하다는투로 물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뭐가?”
“교로 오신 것이 세 살 때라고 들었는데요.”
“응?”
“설마 그때를 기억하신단 말이에요? 옹알이 막 떼셨을 때를요? 생생하게?”
“……”
왕천의 말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 자식, 가끔 놀라울 정도로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
“크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어릴 때 신동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잖냐.”
“시인동이요?”
“어. 하긴, 너 같은 범인(凡人)이 어찌 신동의 기억력이 이해되겠어?”
“……”
“자, 얼른 가자. 말을 오래 탔더니 엉덩이 배긴다.”
더 말을 못 하게 막으려는 듯, 능운비가 왕천의 어깨를 툭 하니 치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참 용하시네. 가끔 어제 있었던 일도 잊어버리시는 분이 세 살 때 일을 다 기억하시고.”
뭔가 얼버무리는 느낌이 강했지만, 왕천은 능운비의 등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그래 뭐, 신동이었던 적이 없던 자신이 어찌 그들의 기억 능력을 이해할까?
“같이 가요!”
“……”
왕천이 채찍까지 때리며 뒤쫓아 왔지만, 능운비는 더욱 속도를 올렸다.
괜히 또 옆에 와서 곤란한 질문을 할까봐.
어쨌든 능운비가 달리는 바람에, 상단도 덩달아 속도를 내서 연소에 진입했다.
제비 집을 일컫는 연소(燕巢)는 관도 중간중간에 위치한 휴게 객점이다.
먼 길을 가는 이들이 자주 들고 나는 모양이, 마치 종일 바삐 날아다니며 제 집을 휴게소처럼 여기는 제비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소규모 인원이라면 야숙을 해도 상관없지만, 상단의 경우에는 얘기가 달랐다.
특히나 지금의 능운비 일행처럼 대규모일 경우엔 야숙을 위해서 마차를 서너 대나 운용해야 하니, 그 운송비가 만만치 않다.
해서 대부분의 상단이 이런 연소를 이용한다.
관도가 뚫려 있다곤 하지만, 워낙 땅덩이가 큰 탓에 마을과 마을 간의 거리가 좀 멀어야지.
연소를 찾은 이들은 잠시 쉬면서 밥을 먹기도 하고, 배고픈 말에게 여물을 주기도 한다.
지금처럼 날이 저물면, 연소에 마련된 여곽에서 잠을 청하기도 한다.
머무는 비용이 적지 않았지만, 운송비와 다음 날 이동을 위한 체력 회복을 생각하면 그리 밑지는 것은 아니었다.
“허헉!”
능운비와 왕천이 일행보다 빠르게 접근하자, 연소 입구를 지키는 이들이 화들짝 놀라 달려 나왔다.
너무 빨리 다가와서?
그럴 리가. 깃발 때문이다.
낙명 상단의 깃발 옆에 걸려 있는 마도의 상징, 일월기(日月旗).
마교가 있는 지역과 딱 달라붙어 있는 감숙에 사는 이가 못 알아볼 리 없고, 놀라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연소란 본시 상단에 행인, 정파에 사파까지 따로 손님을 가려 받지 않는 곳이지만, 마도가 이리 대놓고 찾아온 것은 처음일 테니까.
그러게 깃발은 걸지 말자니까.
정무맹이 인정해서 이젠 괜찮다며 아득바득 우기더니…….
“머, 멈추시오!”
“……”
놀란 표정으로 잔뜩 경계하며 외치는 무인의 말에, 능운비가 말고삐를 잡아당겨 멈춰 섰다.
히이이잉!
앞발을 높이 쳐들던 말이 무인의 코앞에서 멈췄다.
“귀, 귀하는 누구요?”
이미 깃발을 보았지만 혹시나 해서 묻는 말에, 뒤따라온 왕천이 답했다.
“마교의 삼공자님이시다. 속히 길을 열어라!”
“마, 마교?!”
무인이 기겁하는 표정을 짓더니 대뜸 신호를 보냈고, 이내 칼을 든 이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뭐야? 이것들이 왜 갑자기 검을 겨눠?”
곧바로 검을 뽑아 겨누는 무인들의 모습에 왕천이 눈썹을 역팔자로 만들며 눈을 부라렸다.
…… 너 때문이잖아. 니가 깃발 걸자고 해서, 니가 마교라고 밝히는 바람에.
“왕천.”
“예, 주군.”
“왜 성질이야?”
“아니, 이놈들이 다짜고짜 검을 들이밀잖아요.”
“으이구…… 당연한 거잖아.”
“예?”
하여간에 이놈은 대체 머리를 왜 달고다니는 겐지.
능운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에서 내려 무인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놀람은 당연하다.
마교 지부의 창설에 대한 것은 가장 윗자리에 있는 이들끼리 주고받은 협약이고, 아직 중원 전역에 공표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상황에 대뜸 마교라고 하면 누가 놀라지 않을까?
와중에 마교 삼공자다. 비록 그 신분이 말뿐이라 확인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연소를 지키는 이들에겐 별안간 괴수가 떡하니 나타난 것과 다르지 않을터다.
마교가 이 중원에서 사람 취급받는것은 감숙 북방의 일부 지역일 뿐. 중원의 대다수는 여전히 자신들을 삼두육비의 괴물쯤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능운비는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앞서 소개한 대로 마교의 삼공자 능운비라 하오. 섬서로 가는 길에 잠시 들른 것이니, 진정들 하시고 그만 검을 거두시오.”
“……”
정중한 어투로 진정시켜 보지만, 무인들은 눈치만 볼 뿐 검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허, 이것 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능운비가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입을 뗐다.
“이곳의 주인을 불러 주시오.”
“주, 주인……이요?”
“그렇소. 이런 일은 윗사람이 처리하는 것이 빠르지 않겠소?”
“……”
웃으며 말을 건네자 무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안으로 사람을 보냈다.
잠시 후, 안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자가 허겁지겁 뛰어왔다.
“귀, 귀하가 마교의 삼공자십니까?”
“그렇소.”
“저는 임택 연소의 주인 되는 성일국입니다.”
“반갑소, 능운비요.”
“한데 마교가…… 어찌 이곳에?”
의심과 경계심, 두려움까지 알차게 담긴 눈초리다. 주인 역시 아직 들은바가 없는 듯했다.
아무래도 위에서 내려온 말은커녕, 지나는 이들이 소문조차 실어 나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 놀랄 것 없소. 이번에 정무맹과 협약을 맺은 터라, 중원과 왕래가 자유롭게 되었으니.”
“예? 저는 일절들은 것이……”
고개를 가로젓는 주인의 얼굴에 난감함이 역력하다.
그럴 만도 했다. 마교가 나타난 것만 해도 기절초풍할 일인데, 정사의 영역에 마교가 나타나면 반드시 싸움이 벌어지니까.
그리고 그 손해는 객점 주인이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이다.
“이보시오, 주인장.”
“예?”
“그럼 확인해 보시오.”
“확인요?”
“내 알기로, 연소에선 혹시나 모를 위협을 대비해 정사에 연락처를 두고 있을 텐데?”
“그, 그렇긴 합니다만…… 연락을 주고받자면 최소 반나절은 기다리셔야 하는데요?”
“반나절이나?”
“예.”
반나절이라니, 전서구가 오가는 데 뭔 놈의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린단 말인가?
“기, 기다리시겠습니까?”
“음……”
객점주의 표정이 울상이다.
겁이 나면서도 능운비 일행을 받고싶지 않은 것이다.
괜히 마교를 받았다가 싸움이라도나면 큰일이지 않은가?
가장 손해를 보는 건 결국 자신들일테니까.
“이놈! 그럼 지금 삼공자님이 이런 길바닥에서 반나절이나 기다리셔야 한단말이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도 입장이…….”
참다못해 나선 왕천의 호통에, 객점 주인과 무인들이 찔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에게 마교란 그런 취급이었다.
실력의 고하와 관계없이 두려운 존재, 함께하고 싶지 않은 존재.
그간에 마교가 만들어 온 편견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웬 소란인가?”
“어? 저건 마교의 깃발이 아닙니까!”
“마, 마교?”
밖의 소란에 연소에 머물던 이들이 하나둘 뛰어나왔고, 깃발을 보자마자 웅성거리더니 대뜸 합세하기 시작했다.
하아, 진짜…….
깃발 걸자는 것을 막지 못한 게 새삼 또 후회가 됐다.
괜한 민폐였고, 분란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아, 어쩔 수 없군. 이러다가 싸움이라도 나겠다.”
“……까짓거 싸우죠! 지들이 먼저 덤벼 온다는데야.”
“……”
이런 호전성만 가득한 놈.
싸우면? 정무맹에서 가만히 있고?
왕천의 말에 능운비가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오등을 쳐다보았다.
“상단주님. 그냥 근처에서 야숙을 하시지요?”
“예? 야숙이요?”
“이미 날이 저물고 있음인데 저들의 확인이 끝날 때까지 대기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자정이 훌쩍 넘을 터인데.”
능운비의 말에 상단주 오등이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연소를 두고……”
“왜요?”
“아니, 저희는 괜찮지만 삼공자님께서…… 야숙 준비도 변변치 않은데.”
“난 또 뭐라고. 괜찮소. 야숙에는 이골이 나 있으니까.”
“예? 삼공자님께서요?”
“그렇소. 그러니 괜한 분란 만들지말고 물러납시다.”
능운비가 오등을 설득하던 중에 멀리서 힘찬 외침이 들려왔다.
“거기! 무슨 일이요?”
“……?”
양측으로 대치하다시피 서 있던 이들의 고개가 한곳으로 돌아갔다.
능운비 일행이 왔던 길 쪽에서 뛰어오고 있는 자.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한걸음에 삼 장씩 가까워지고 있다.
누가 봐도 무인이고, 꽤 능력이 출중한 도사였다.
하필이면…….
일진이 사나워도 뭐 이리 사납단 말인가?
안 그래도 상황이 좋지 않은데, 마교와 상극인 도사가 나타날 건 뭐란 말인가?
와중에 저 소맷자락에 선명한 매화 문양을 보니, 그 소속이 화산인 모양이다.
이런 씨부랄…….
별안간 도포 자락조차 스치기 싫어하던 스승 담운천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