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90
“크하하하! 이렇게나 많이?”
호피로 장식한 태사의에 앉아 있던 중년 거한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찢어졌다.
활짝 열린 궤짝.
그 안에 쌓인 금원보가 휘황찬란한 빛을 쁨어내고 있었다.
“소생의 작은 성의입니다.”
“작다니? 작다니?!”
고개를 조아려 오는 상인의 모습에, 거한이 단걸음에 뛰어 내려와 손을 잡고 일으켰다.
“자, 일어나시오. 어서.”
생각지도 못한 거한의 반응에 상인이 활짝 웃었다.
어찌 아니 웃을까?
우람한 체격으로 상인의 손을 감싸쥐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녹림왕 종리강이다.
사파의 맹주 중 한 사람이자, 중원의 모든산을 제 영역처럼 여기는자.
상인들에게 있어 그들은 절대적인 악(惡)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기에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악이다.
게다가 그 무공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
중원에서도 손에 꼽는 강기의 고수이자, 곤법에서만큼은 소림조차 한 수 접어 줄 최강자이다.
“총관!”
“예, 총타주님!”
“가져오라! 내 직접 전할 것이다!”
“예!”
종리강이 기세 좋게 외치자, 옆에 있던 이가 기다란 목함을 들고 왔다.
“열거라.”
“예!”
털컥.
활짝 열린 목함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수수하다 못해 볼품없기까지 한 깃발 하나와 목패였다.
“이건……?”
“핫핫, 내 그대의 성의를 받고 어찌 가만히 있을까?”
“예?”
“녹림왕의 징표일세.”
“녹림…… 예?”
“그 깃발을 꽂고 다니면 어떤 이도 그대와 그대의 상단을 해하지 않을 게야.”
“……!”
그 말에 상인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활짝 펴졌고, 그 눈빛 또한 감동으로 물들어 반짝거렸다.
“이, 이 귀한 것을……”
이 얼마나 원했던 물건인가?
녹림왕의 징표. 중원의 모든 산악을 무사통과할 수 있는 최고의 통행패인것이다.
남들은 차라리 관군에게 돈을 바치거나 대문파와 교류해 도움을 받으라했지만, 전부 헛소리다.
관군? 그들이 녹림을 제대로 토벌해 본적이나 있던가?
했어도 녹림이라는 이름에 발조차 걸치지 못한 잡졸들이나 겨우 토벌했다.
물건을 빼앗기고 수차례 하소연을 해 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바쁘니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명망 높은 대문파? 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조차도 녹림왕의 눈치를 보기 일쑤였다.
사람이 상하는 일은 없었으나 양보의 뜻으로 막대한 통행료가 협상 조건으로 내걸렸고, 그것은 오롯이 상단의 손해로 돌아왔다.
해서 직접 만나기로 했다.
무려 삼 년이나 노력한 끝에 겨우 연이 닿을 수 있었다.
이 산 저 산을 돌며 만나는 산적마다 기름칠을 해 주느라 상단 재정이 휘청거렸고, 녹림왕에게 바칠 돈을 마련하느라 전장에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 여겼으니까.
그리고 그간의 투자가 이제야 결실을 보았다.
상인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목함을 받아 들었다.
깃발과 목패. 이것만 있으면 앞으론 산적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이 터 잡은 산에서는 귀한 손님대접을 받아 짐승들마저 치워 주는 터라, 호위 병력도 대폭 줄일 수 있다.
즉, 이제 돈 벌 일만 남은 것이다.
이문 따윈 언제든지 남길 자신도 있었다.
아, 그간 얼마나 고초가 심했던가?
불현듯 힘들었던 세월이 떠오른 상인이 급기야 눈물까지 뚝뚝 흘려 대자, 종리강이 안쓰러운 듯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뭘 울기까지……”
“죄승흡니다. 크흐흡, 녹림왕님과 연을 맺게 된 것이 너무도 기뻐서……으흑흑.”
“거 사람 참.”
상인을 달래며 잠시 고민하던 종리강이 무언가 결심한 듯 총관을 불렀다.
“이보게, 총관.”
“예?”
“가서 지필묵을 가져오게.”
“지필묵을 뭐 하시게요?”
“가져오라면 가져올 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아?”
“……”
종리강이 언짢음을 드러내자 총관 탁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필묵을 왜? 글도 모르시면서 종리강은 문맹이다. 말만 할 줄 알지,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른다.
“어허! 빨리 가져오지 않고 뭘 하는게야!”
“……예.”
거듭된 짜증에 탁추는 의아해하면서도 지필묵을 대령했다.
“받아적게.”
“……아.”
역시, 직접 쓸 리가 없지.
“뭐라고 적을까요?”
“시작은…… ‘이보게, 청주’일세.”
“청……주요?”
“그래.”
“청주라면, 장강총채주가 아닙니까?”
“암만,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 청주가 또 있겠는가?”
종리강의 말에 탁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강수로채의 총채주, 막청주.
수적들의 우상이자, 종리강과 함께 중원 대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
원래 도둑놈들끼리 통하는 것이 있는 법 아니 겠는가?
영역만 다르지, 같은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지라 종리강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탁추는 종리강이 서신을 보내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말하는 바를 열심히 받아 적었다.
“내 이번에 천성 상단이라는 곳과 좋은 인연을 맺게 되어, 자네에게도 소개해 주고자 하네.”
“……!”
그 말에 상인이 눈물도 뚝 그친 채 눈을 부릅떴다.
“노, 녹림왕님! 설마?”
“핫핫, 계속 듣고 계시오. 서신의 내용은 그대도 알아야 하니.”
“……”
상인의 어깨를 두들긴 종리강이 계속해서 서신에 적힐 내용을 옮었다.
“자네가 머무는 곳에 그들이 지나가거든, 부디 나를 봐서라도 편의를 봐주길 바라네. 다만 자네에게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으니, 전부는 말고 반 정도만 감면해 주면 될 것이네. 그대의 벗, 종리강으로부터.”
“……!”
끝맺음까지 확실히 하는 종리강의 말에 상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지금 자신이 꿈이라도 꾸는 것일까?
녹림왕도 모자라 장강수로채라니?
반이라면 오 할이다.
말이 쉽지, 장강을 지나는 상선 중에 그만한 혜택을 받는 이들이 대체 어디있단 말인가?
지난 세월이 북받쳐 눈물 좀 흘렸을 뿐인데, 호박이 넝쿨…… 아니, 이건 그냥 만고에 길이 남을 은혜를 입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크허형! 녹림왕님! 제가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습니까요.”
상인이 감격스러움이 북받쳐 오른듯 바닥에 넘죽 엎드렸다.
“핫핫, 이 사람 참. 눈물이 어찌 이리도 많은가? 그만 일어나시게. 이 좋은 날 울고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으흑흑, 으흑흑흑.”
“자, 내 이런 기분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연회를 준비할 터이니 잠시 나가서 쉬고 있게나.”
“예, 예, 녹림왕님.”
감격에 겨워 다리까지 후들거리는 상인이 겨우 산적들에게 부축받아 대전을 나가는 모습에, 종리강은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허허, 사람 참.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저리 유난인가? 안 그런가, 총관?”
“……”
종리강의 말에 탁추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오, 형님?”
“응?”
상인이 나가서였을까?
이전까지만 해도 학자 같은 느낌을 풍기던 탁추가 대번에 태도를 달리하며 의자에 대충 걸터앉았다.
“이놈아, 그게 무슨 말이냐? 무슨 생각이냐니? 전부 보지 않았느냐?”
“아니, 보긴 봤지요. 그런데 이건 지금까지 녹림이 해 왔던 방식이 아니지않소?”
“녹림이 해 온 방식?”
“예.”
“알아듣게 설명해라.”
“우리 녹림이 무엇이오? 산중의 호걸을 자처하며, 제 터를 지나는 이들의 주머니를 털어 배 불리는 집단이오. 그것이 우리 녹림의 도란 말이오.”
“그런데?”
“지금 형님이 하고 계신 것은 녹림의 도가 아니라, 다른 문파들처럼 상단과 직접 연을 맺는 것이 아니오?”
“옳게 봤구나.”
“그러니까, 대체 무슨 생각이난 말이오.”
탁추의 말에 종리강이 실소를 머금었다.
“쯧쯧, 형제들 중에 글깨나 읽은 놈이라 총관에 앉혔더니만 세상 보는 눈은 형편없구나.”
“뭐요?”
“탁추야, 생각해 봐라.”
“……?”
“니 생각엔 우리 녹림이나 수적들이 부자인 것 같으냐?”
“그야…… 어느 정도는? 굶어 죽는놈은 없지 않소.”
“굶지 않아? 허, 이런 배포가 종지보다도 작은놈 같으니.”
“거, 말씀이 심하시오!”
“심하긴 뭐가 심해? 우리 형제 중에 니 성격이 밴댕이 소갈딱지인 것을 모르는 놈이 누가 있어?”
“……쳇”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돌리는 탁추의 모습에, 종리강이 피식 웃고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탁추야. 그래, 니 말대로 굶어 죽진않지. 하지만 우리 녹림이 다른 방파에 비해 수입이 적은 건 사실이 아니더냐.”
“그건 그렇지요.”
“내 총타주가 된 뒤로, 오랜 시간 고민했다. 왜 뻣어도 뻣어도 돈이 모자랄까?”
“……?”
“왜 그런 것 같으냐?”
“그야…… 공치는 날이 많으니까요.”
“맞다. 매번 영업을 나간다고 해도 허탕을 칠 때가 많지. 뿐이냐? 정파 놈들과 연을 맺은 놈들한테는 통행세도 할인해 줘야 하지. 사파는 또 한 형제니 할인해 줘야 하고.”
“……”
“관에 새로 부임한 놈이라도 있으면 치안 유지다 뭐다 하며 산적부터 토벌하지 않느냐. 정파의 애새끼들은 제 놈들 공적 쌓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산을 뒤지고. 그로 인해 애들은 얼마나 죽어 나갔으며, 발생한 영업 손실은 또 얼마나 많냐?”
“음…… 그렇긴 하지요.”
“해서 생각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미리 받자고.”
“미리요?”
“그래. 뺏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알아서 바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게 무슨?”
“좀 전에 천성 상단 놈 봤지?”
“……”
“아주 감격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하지 않더냐?”
“그, 그랬지요.”
“저기 궤짝에 든 돈을 봐라. 천성 상단이 아무리 열심히 상행을 다녀도, 그 횟수가 연에 고작 열 번을 넘지 못할게다.”
“음, 그런가요? 좀더 노력하면……”
“가정이잖아, 이 자식아. 좀 따지지말고 끝까지 들어.”
“예……”
“우리 녹림의 명성이 자자하니 상인들의 근심이 큰 상황에서, 저기 저 천성 상단 놈이 나가서 소문을 내 봐라.”
“어? 혹시……?”
“녀석, 이제야 이해가 되느냐?”
“예!”
탁추의 대답에 종리강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뺏지 않고 스스로 바친다.
천성 상단은 그 일의 초석이 될 터였다.
그렇기에 일부러 수채에 서신까지 보낸 참이다.
아마 소문이 나면, 상인들이 너도나도 돈을 싸 들고 녹림 총타로 몰려들 것이다.
녹림왕의 징표를 얻기 위해서.
산적과수적. 그들의 위협이 없으면 어찌 되겠는가?
상행의 안전을 위해 이곳저곳의 문파와 연을 맺으려 바치던 막대한 돈이 녹림과 수채로 몰려들 것이다.
역사가 바뀌는 것이다.
그렇게 모인 돈은 질 좋은 무기와 깊이 있는 비급으로 탈바꿈될 것이고,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도적질하던 녹림의 전력은 수년 안에 일취월장할 것이다.
정파의 애새끼들에게도 공적 쌓기의 수단쯤으로 여겨지던 녹림이 강성해지는 것이다. 누구도 함부로 넘보지 못할 정도로.
“크흐흐흐……”
종리강이 아무리 생각해도 기똥찬 계획이라 여기며 웃음을 흘렸다.
“형님! 과연 대단하십니다!”
탁주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무공도 무공이지만, 돈이 걸리면 물불 안 가리더니 그런 기똥찬 생각을 해낼 줄이야.
“오냐, 이놈아! 깃발과 목패를 서둘러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백 개! 아니 이백 개쯤 준비하겠습니다.”
“아무렴! 그리해야지! 그렇고말고! 서둘러 형제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라. 아니지, 지금 즉시 십팔 채의 형제들을 모두 불러들이거라. 내 앞으로의 계획을 직접 전할 것이다.”
장밋빛 미래가 찬란하게 펼쳐진 것만 같았다.
이제 녹림의 앞길은 탄탄대로일 것이다.
“크핫핫, 크핫핫핫핫!”
“우핫핫핫!”
종리강과 탁추, 두 형제가 경쟁이라도 하듯 웃어젖히던 그 순간
“총타주니임!”
“……?”
전령 하나가 그들의 웃음에 찬물을 끼얹을 소식을 들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청화산 패가 당했다는 급보입니다!”
“……?”
조금 전까지 밝은 미래를 상상하며 활짝 웃던 종리강의 얼굴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응? 누가 당해?
청화산이면 의동생 맺은 전일석이 있는…….
“이런 썅! 어떤 빌어먹을 개새끼가 내 동생을 건드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