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075
#1074.
움직이다 (4)
헛것을 보고 있나?
그게 아니면 악몽을 꾸고 있는 건가?
둘 중 하나다.
둘 중 하나여야 한다.
하지만 석동수는 알고 있었다.
비상한 그의 머리는 지금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외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헛것이라기에는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 너무나 확연하고, 악몽이라기에는 피부에 와닿는 이 차가움이 너무도 생생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기에는 그의 지성이 너무도 높았다.
‘그럼 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어둠이 방을 뒤덮는다. 그와 동시에 방이 싸늘한 한기로 뒤덮여 간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저 안광.
마치 붉게 타오르는 것 같은 핏빛 안광을 보는 순간, 전신이 미칠 듯이 비명을 질러 댔다.
달아나라고.
당장 이곳에서 달아나라고.
‘달아나?’
어디로?
이 좁은 방 안에서 어디로 달아나란 말인가.
멍청한 몸뚱아리.
석동수가 이를 꽉 깨물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가 지금의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라장을 겪었던가.
그 지옥들을 버텨낸 석동수가 이만한 일 하나를 버티지 못할 리 없다.
석동수가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움직였다.
“누, 누구…….”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다.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고 나자 입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석동수가 당황을 감추며 최대한 목소리를 억눌렀다.
“누구냐?”
해야만 하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 의미가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의 집은 꽤나 단단한 보안으로 둘러싸여 있다. 딱히 그가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가 사는 곳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촌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고, 이곳에 지어지는 집들은 기본적으로 보안을 완비한 채 판매된다.
어설픈 좀도둑은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마음먹은 강도들도 감히 이곳에는 얼씬대지 못한다.
하지만 이자는 그 모든 보안을 완벽하게 제거하고 이 방까지 들어왔다.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능력은 석동수라고 해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이가 제 입으로 자신이 누군지를 밝힐…….
“강진호.”
“…….”
석동수의 눈이 흔들렸다.
‘뭐지, 이놈?’
강진호?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다. 분명 보고서에…….
아니, 잠깐.
‘이름을 말한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게?
후환은 생각지도 않는 건가?
석동수의 머릿속이 제멋대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수많은 이들을 겪어왔다. 그중에서는 사람의 목숨을 길가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보다 못하게 여기는 악당도 있고, 차마 입에 담기도 끔찍한 변태적인 인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단 한 마디만으로 석동수의 뇌리를 이리 뒤집어놓지는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협상을 하러 왔나?
그게 아니면…….
석동수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있다.
한 가지 경우.
상대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도 아무런 후환을 만들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가, 강진호. 하, 한국 무도 총회의 회주.”
불꽃이 일렁인다.
스멀스멀 그쪽으로 영역을 넓혀오고 있는 암담한 어둠 속에서 핏빛의 안광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렁이고 있었다.
마른침이 절로 넘어간다.
‘빌어먹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들을 무뢰배라 부르고 있으면서도.
‘권력에 너무 취했어.’
권력자는 언제나 아래에서 올라오는 칼을 경계해야 한다.
권력이란 결국 휘두르는 힘.
폭력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폭력이 되지 못한다. 언제나 폭력을 가진 이의 손에 목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이들은 법의 통제를 받는 이들이 아니다.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언제라도 ‘폭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폭력으로 장관을 제거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겠지만, 애초에 이놈들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게 무엇인가.
그건 바로 순응하는 힘.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규칙과 규범에 적응하고 순응하는가다. 규범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사회에서 도태된다.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이들은 규범을 거부하고 사회에서 배척되었지만, 자신들만의 사회를 만들어낸 이들이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고, 인간이 아니되 인간인 이들.
그게 석동수가 정의한 ‘무인’이라는 족속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자는 지금 무엇으로 그의 앞에 섰을까?
인간으로서?
그게 아니면 인간이 아닌 자로서?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하나 확실한 것은, 지금 석동수는 그의 삶을 통틀어 가장 위험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석동수의 손이 심장 어림을 움켜잡는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적어도 말은 통할 테니, 호랑이보다는 나은 상대가 아닌가.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죽인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되레 사태만 악화시킬 뿐이지. 내가 죽는 순간, 너희가 나를 죽였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그럼 누구도 너희와 거래를 하려 들지 않겠지. 알겠나?”
석동수의 턱이 덜덜 떨렸다.
단호하게 말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지금 그의 목소리는 어딜 봐도 ‘단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공포에 짓눌려 목소리가 튀고, 발음이 뭉개진다.
하지만 그 의도만큼은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석동수가 자신의 손을 맞잡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보이고 싶지 않다. 어떤 상황, 어떤 자리든 떨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좋지 않다.
정신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석동수는 최소한의 이성을 놓지 않고 있었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석동수가 이를 악물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봐라. 아직 협상의 여지는 있으니까.”
천천히 페이스를 끌어온다.
아주 천천히, 상대를 격동시키지 않는 선에서.
그게 바로 화법이다.
일렁인다.
핏빛의 안광이 천천히 일렁거렸다.
그리고 안광이 일렁이는 것과 동시에 쇠를 긁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대답해 봐.”
석동수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저 소리는 그의 영혼을 직접적으로 긁어 댄다. 마치 부드러운 살에 대고 불규칙적으로 날이 나 있는 쇠톱을 그어 대는 것처럼 몸이, 영혼이 비명을 지른다.
석동수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상대에게 겁먹은 모습을 보이는 게 최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의 육체는 너무도 간단하게 그의 의지를 배반했다.
뭐라고 했지?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었지?
생각이 멈춘다. 그 간단한 단어조차도 지금 그의 머리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를 지탱하고 그를 자신만만하게 만들어주던 지성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지성을 잃어버린 석동수는 그저 동물일 뿐이다. 그것도 맨손으로는 토끼 한 마리 때려잡을 수 없는 나약한 동물.
석동수는 지금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대답해.”
쇠를 긁는 듯한 음성이 들려온다.
이번에는 그 익숙하지 않은 음성에서도 확실하게 의미를 파악해 낼 수 있었다.
‘뭘 대답하라는 거지?’
머리가 버벅이는 느낌이다. 항상 완전하고 깔끔하게 이행되던 사고에 노이즈가 낀다.
하지만 다행히 강진호는 자비로웠다.
“왜 그랬지?”
“…….”
핏빛의 안광이 일렁인다.
석동수가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호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석동수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내, 내게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이, 이 상태에서는 대답을 할 수가 없소. 정말 내……게 듣고 싶은 게 있다면, 그, 그 모습을 거둬주시오.”
핏빛의 안광이 일렁인다.
하지만 그 일렁임은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석동수가 본 게 맞다면, 저 일렁임은 ‘이채’라고 불러야 할 만한 것이었다.
“재미있군.”
어둠이 물러난다.
그와 동시에 석동수를 짓누르고 있던 압력과 한기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석동수가 커다란 펌프처럼 숨을 들이켰다.
“커, 커억!”
한참이나 숨을 들이쉬고 나자 그제야 머리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석동수가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달라졌다.
방을 물들이고 있던 어둠이 사라졌다.
꺼진 것 같던 무드등이 다시 빛을 발하며 방 안을 밝힌다.
그리고…….
‘사람.’
가장 어두운 곳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온다. 결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방 안 소파에 앉아서 나른하다는 듯 등을 기댔다.
“강진호다.”
“……석동수요.”
석동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빌어먹을.’
힘으로 압박하는 페이즈는 끝났다. 이제는 말로서 서로를 압박해야 하는 영역이다. 이건 석동수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일이지만, 시작부터 그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았다.
가벼운 통성명.
하지만 모든 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강진호에게 말을 높여 버린 순간부터 석동수는 자신이 지금 밀리고 있다는 것을 자인해 버린 것이다.
지금이라도?
아니.
여기서 말을 바꾸는 건 역효과일 뿐이다.
“……당신이 내가 아는 강진호가 맞소? 한국 무도 총회의 회주라는?”
“맞아.”
“여기에 온 이유는?”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부자연스러운 광경이다.
말은 의지를 담고, 표정은 감정을 담는다. 하지만 강진호의 표정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얼굴의 다른 부분은 정지된 채 입꼬리만 올라가는 저 미소는, 미소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기괴했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쇠를 긁는 듯한 그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목소리에 담긴 불길함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위기를 벗어났다?
천만에.
아무것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이곳은 여전히 호랑이 굴이고, 호랑이는 그의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신만 차리면…….’
그때였다.
강진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저 그 동작 하나만으로 석동수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아니야.’
저건 호랑이 같은 게 아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고, 칼에 찔리면 죽는, 그런 상식의 범위 안에 있는 ‘생물’이 아니다.
처음부터 완전히 잘못되어 있었다.
저벅.
저벅.
강진호가 느릿한 걸음으로 석동수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석동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지금 이 남자가 그의 앞에 서 있는 걸까?
사람들은 말한다.
인생에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온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인생에는 반드시 위기가 찾아온다는 걸.
더없는 기회는 더없는 위기와 함께하기 마련이다. 맑은 물에 홀려 물속으로 뛰어드는 이는 맑은 물일수록 얕아 보인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발이 수렁으로 빠져든다.
점점 더.
저벅저벅.
마침내 그의 앞까지 다가온 강진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섬뜩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본 순간, 석동수의 심장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강진호의 손이 천천히 석동수의 얼굴을 향해 뻗어졌다.